증산도 왜곡의 실상 그리고 국내의 각종 사이비단체의 정체
판밖의 남모르는 법
내가 하는 일은 도통한 사람도 모르게 하느니라.
나의 일은 판밖에 있느니라.
무릇 판안에 드는 법으로
일을 꾸미려면 세상에 들켜서 저해를 받나니
그러므로 판밖에 남 모르는 법으로 일을 꾸미는 것이 완전하니라.
(증산도 道典 2:134)
문명은 뒷날에 나리라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실 때는
항상 글이나 물형을 써서 불사르시는데
성도들은 물형의 뜻을 알 수 없고 다만 글을 알아볼 뿐이므로
성도들이 그 글이라도 기록해 두려 하면
상제님께서 금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들을 때에 명심하였다가
구전심수(口傳心授)하라. 문명(文明)은 뒷날에 나리라.” 하시니라.
어천하실 무렵에 하루는 형렬의 집 마당에
글 쓰신 것과 책을 쌓아 놓으시고 형렬에게 명하시기를
이것을 모두 태우라. 그래야 난법 기운을 일찍 거두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427)
통사동 재실에 들러 난법자를 꾸짖으심
무오년에 조철제(趙哲濟)가 도통할 욕심으로
김형렬의 교단에 들어가 추종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니
기미년에 심복 여러 명을 데리고
통사동 영모재에 찾아가 ‘도통 공부’를 시작하니라.
철제는 일찍이 경석이 태모님을 모시고 포교하여
그 교세가 날로 커지는 것을 보고 자신도 태모님을 모시면 도통을 하고
신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것이라 생각하여 조종리로 사람을 보내 시봉하기를 소원하더니
하루는 태모님께서
연지평 박노일의 집에 가시는 길에
영모재에 들러 철제를 보시고 크게 노하여 꾸짖으시기를
저 개만도 못한 놈!
내가 개 죽은 자리에 앉을지언정 저놈이 저기 앉았는데
여기서 하룻밤인들 쉬어갈 수 있나.” 하시며 담뱃대로 이마를 때리시니
철제가 이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며
차경석 같은 사람이나 감당할까, 우리 같은 사람은 감당하지 못하겠다.
하고 모시기를 포기하더라.
그 뒤 신유(辛酉 : 道紀 51, 1921)년 삼월 삼짇날에
조철제가 다시 도통할 욕심으로 심복 여덟 사람을 시켜 상제님 성골을 도굴해 가니라.
(증산도 道典 11:52)
조철제의 상제님 성골 도굴 만행
신유(辛酉 : 道紀 51, 1921)년 삼월 삼짇날에 이르러
조철제가 ‘상제님의 성골(聖骨)을 모시고 수도하면 큰 기운이 붙어
도통하고 교단이 크게 번창한다.’는 소문에 현혹되어
그의 심복 권태로(權泰魯), 손진방(孫進邦) 등 장정
여덟 사람을 시켜 밤을 타서 구릿골 장탯날에 모신 상제님 성골을 도굴하니라.
이 때 형렬은 서울에 가고 그 아내
김호연이 딸을 출산한 지 갓 사흘이 되어 사랑방에 누워 있는데
고요한 밤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번갯불이 방안으로 들어오며 몸을 휘감는지라
호연이 놀라 일어나 정신을 차리니
내 몸을 도둑질해 가고 있는데 뭣들 하고 자빠졌느냐!” 하는
상제님 성령의 불호령이 떨어지거늘
방문을 열고 형렬의 큰아들 찬문을 불러 이르기를
불칼이 방안으로 들어와 대니 어쩐 일인지 선생님의 묘소에 좀 가 보고 오소.” 하므로
찬문이 서둘러 장탯날에 가 보니 과연 묘소가 다 파헤쳐져 있고
도굴범들은 횃불을 들고 멀리 도망하는 중이라 쫓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니라.
이는 조철제의 짓이라
이 때 서울에 있는 형렬에게도
내 몸이 이렇게 흔들리는데 너희들은 잠만 자고 있느냐!” 하시는
상제님의 호령이 들리거늘 형렬이 즉시 김덕찬(金德燦)과 몇 명을 데리고
출발하여 이튿날 동이 틀 무렵에 집에 당도하니라.
형렬이 대문에 들어서며 다급한 목소리로 어젯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니
호연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말하매 형렬이
곧장 묘소로 달려가 구덩이를 보더니 “이는 조철제의 짓이라.” 하니라.
(증산도 道典 10:138)
조철제의 사기 행각과 영모재 점거
김형렬이 조철제의 성골 도굴 만행을 김제 경찰서에 고발하니
경찰은 전라북도 각 경찰서에 통지하여 수사를 진행하되 이 사건을 계기로
증산계(甑山系) 교단이 와해되기를 바라며 소극적으로 수사를 진행할 뿐이더라.
한편 철제는 기미년 여름에 대흥리 도장에서 훔쳐 온
궤(櫃)를 숨겨 두고 상제님의 친동생 선돌부인을 이용하여
상제님의 의자(義子)로 유명(遺命)을 얻어 교통(敎統)을 받았다.’며 교단 창립을 꾀하더니
이어 성골을 도굴하여 통사동 영모재 골방에 감춰 두고
모월 모일에 상제님의 뼈에 살이 붙어 나와 상제님이 다시 출세하신다.’
고 하며 신도들의 금전을 갈취하니라.
그러나 약속한 날이 되어도 상제님께서 오시지 않으매
다시 상제님 성탄절인 9월 19일로 연기하였으나 역시 허사가 되니라.
(증산도 道典 10:139)
성골을 찾기 위한 공신의 노력
조철제의 허무맹랑한 만행을 탐지한 문공신은 김정우(金定雨)로
하여금 철제를 거짓 추종하여 신임을 받게 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니라.
하루는 철제를 따르던 경상도 사람 둘이 공신에게
와서 공부를 청하매 공신이 흔쾌히 받아들여 공부를 시키거늘
그중 한 명이 느닷없이 피를 쏟더니 혼수상태에 이른지라
공신이 정신을 차리게 하고 그 연유를 물으니 거짓으로 남의 집에서
돈을 가져와 신벌을 받은 것이더라.
공신이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니 그들이 그 동안 베풀어 준
공신의 은혜에 감복하여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조철제에게 돌아가니라.
임술(壬戌 : 道紀 52, 1922)년 정월 23일에 그 두 사람이
다시 공신을 찾아와 “조철제가 상제님의 성골을 도굴하여 영모재에 숨겨 두었는데
내일 새벽에 북간도로 모셔 간다.” 하거늘 일찍이 공신이 고부경찰서에 갇혀 있을 때
공신아, 내 몸이 조선을 떠나면 안 되느니라.’ 하신 상제님 말씀이 불현듯 되살아나는지라
법적 절차를 밟아 성체를 모셔오려고 하니,
공신의 제자 양주선, 민영두, 박노규, 이기선 등이 서둘러
영모재를 습격하자고 강력히 주장하매
20여 명을 거느리고 석 자가 넘는 각목을 챙겨 통사동으로 찾아가니라.
영모재에 도착하여 문지기 넷을 때려눕히고 방으로
들어가니 조철제는 이미 도망하고 피우던 담뱃불이 채 꺼지지 않았거늘
공신이 이중벽 속에 숨겨 둔 성골을 찾아 집으로
모시고 와 보니 뜻하지 않게 현금 만여 원이 들어 있더라.
공신이 현금은 경찰서에 가져다 주고 찾아온 성골을
천장 위에 은밀히 모시다가 운산리 신경수의 집으로 옮겨 용마루 속에 모시거늘
이 과정에서 성골 가운데 왼팔 뼈가 없음을 확인한 공신이
정우 등으로 하여금 다시 철제를 추격하게 하여 서대전역에서 그 일행을 붙잡으니
철제가 왼팔 뼈를 심복 김윤진에게 주어
도망치게 하매 정우 등은 철제가 가진 현금을 빼앗으니라.
이에 철제가 대전 경찰서에 정우 일행을 강도로 고소하매
경찰이 철제와 정우 일행을 취조하니 성골 도굴 사실이 모두 드러나는지라
공신과 장남 광옥(光玉)을 비롯한 정우와 철제 등
20여 명이 검거되어 공신은 7년 징역에 처해지고 철제는 되찾은
돈으로 뇌물을 주어 곧 풀려나니라.
이 때 수산도 독립 자금 후원의 죄로
공신과 함께 대전 형무소에서 7년을 복역하니라.
(증산도 道典 10:140)
자작자배하는 자는 살아남기 어렵다
태모님께서 하루는 여러 성도들에게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차경석, 조철제와 각 교단이 저토록 집을 화려하게 지어 놓은 것을 부러워 말라.
그러한 일들은 다 허황하며 기만에 불과하니라.” 하시고
추수를 해서 오곡을 종류별로 갊아 두는 이치와 같다.”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천지공사에 없는 법으로 행동하고
자작자배(自作自輩)하는 놈은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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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증산도왜곡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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