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명칭의 유래


박찬화 기자

승인 2017.11.09 19:32


조선 왕궁의 청기와 경복궁이 처음 지어졌을 때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근정전은 청색기와가 반짝이는 화려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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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전해올 뿐이었으나

그 청기와가 1992년 경복궁 편터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 "근정전 취두(鷲頭)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으니 마땅히 고쳐 덮게 하여야겠는데, 청기와[靑瓦]를 구워 만들자면

그 비용이 매우 많으므로 아련와(牙鍊瓦)를 구워서 덮을까 한다"

(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7월 12일)


청기와는 항상 비용이 문제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광해군이 인경궁을 중건할 때 청기와로 덮은 것 이외에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널리 사용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교태전도

청기와를 얹을 계획이었으나 안료가 비싸고 굽기 어려워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궁궐 지붕에 청기와를 올린 것은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하다.

창덕궁 선정전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인정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보천교 본전의 청기와 보천교는

일제강점기 600만이 신앙했던 민족종교 단체로서

독립운동자금원으로 막후 영향력이 컸던 단체다.


실제로 조선일보에서 발간한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1920∼1940->에 나타난 항일기사 건수의 통계를 통해

시 언론에 나타난 보천교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면 보천교 계열은 총 147 건으로 타종교를

모두 합한 항일운동 기사껀수보다 많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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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항일기사 껀수 비교 (1920년 ~ 1940년)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은 일본에 넘어간 한양 대신 정읍을 조선의 바탕으로

삼고 대규모 본전인 십일전을 공사했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 4년의 역사 끝에

2만평의 부지에 보천교 본전이 세워졌는데 건축물이 45채, 부속 건물이 10여 채였다.

정문은 보화문으로 광화문을 본떴다.


중앙에는 경복궁의 근정전을 모방한 십일전을 지었는데

근정전보다도 크며, 지금까지의 목조 건축으로는 가장 큰 규모이다.

십일전은 경복궁의 근정전을 중건한 최원식이 건립을 지휘했다.


정읍 보천교의 본전인 십일전 이 십일전의 기와는 청색으로 올렸다.

이를 위해 차경석은 중국 최고의 기와공을 불렀다. 청기와뿐만 아니라 중국 황제만이

쓸 수 있다는 황기와까지 제조해 십일전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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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명칭의 유래는 십일전 청기와

그러나 1937년 일제에 의해 보천교는 해산되고 십일전은 강제 해체되었다.

이때 본전은 조계사 대웅전으로, 건물 일부는 동대문으로,

십일전의 청기와는 일제 경무대 건물 기와로 쓰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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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景武臺는 원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뒤

그 뒤편 언덕 위의 평지를 ‘무예를 구경하는 대’라 부르는 명칭이었다.


원래는 지명이었으나 이후 관저명으로 인식이 굳어졌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이곳에 있던

경무대의 이름을 따서 "경무대"로 명명하여 집무실 겸 관사로 사용하였다.


4.19혁명후 윤보선 대통령은

60년 12월 30일 “경무대가 전(前) 정권 때에 폭정을 자행한 곳으로

국민들에게 원부(怨府)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청와대로 개칭한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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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건물에 청기와[靑瓦]를 덮은 데서 청와대’란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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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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