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공 정신이 깨져야
오늘은 우리 일꾼들에게 도공道功에 대해 정리해 주겠다.


도공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도공을 해야 하는가?
도공을 하면서 의문을 품는 것은 도공의 정신에 대해 자신 있게 깨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공 체험이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도공 체험이라는 게 진짜 있는 건가?”
 
이렇게 묻는 사람은 상제님 진리의 본질, 즉 상제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
또 선천 세상을 문닫고 신천지를 창조하신 상제님 9년 천지공사의 기본 틀에 대해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마음 속에 의혹이 많아서 상씨름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글쎄, 상씨름이 그렇게 빨리 터질까?” 이렇게 의문을 품기도 한다.
 
진리에 대한 무지와 불신, 불충스런 생각이 불끈불끈 솟아올라,
일꾼의 도심道心을 체험하는 데 치명적인 의혹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 쇠사슬을 끊지 못하면 일꾼은 그만두고 개인 신앙인의 자리에도 설 수가 없다.
 
 
도공 체험의 중요성
그러면 도공의 문제를 한번 들여다보자.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최종 마무리짓고 실제 개벽 상황의 현장에 들어가
지구촌 창생의 생명을 추수하는 일꾼 조직이 의통구호대다.
 
그런데 사오미巳午未 개명開明의 마무리 시간대인 계미년,

곧 상씨름이 나온다고 야단들을 칠 때, 홍보 포교로 대세몰이를 하여
도운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핵심 열쇠가 곧 태을주의 신권 체득과 도공 체험이다.
 
도공 체험을 통해서 태을주 조화에 더욱 강력하게 눈뜨게 된다.
또 상대적으로 태을주 수행을 할 때 도공에서 얻어지는 순간적인 강렬한 체험이 소중한 바탕이 된다.
 
수행의 원리에서 볼 때 이 둘은 동공動功과 정공靜功으로 서로 보완 작용을 하며 또한 상승 효과를 일으킨다.
 
도공은 마치 춤사위처럼 어떤 리듬, 박자, 강약을 넣어서 온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기도 속으로 몰입하여 신도에서 내려주는 기운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 도공에 대한 인식이 약한 사람들은, 대개 형식에 매여있고 고정 관념에 뿌리깊은 자들이다.
 
그들은 기존 수행법에서 “가만히 앉아서 호흡이나 의식을 조절해서 깊은
고요 속에서 평안을 얻고 광명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수행의 전형이다.
그것만이 수행의 정법이다.” 이렇게 가르쳐 온 것으로 착각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수행법을 살펴보면, 동공과 정공 두 가지 행법을 다 써왔다.
 
유가에도 보면 육례六藝, 곧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두루 익혀야 한다고 했다.
예禮란 몸과 마음의 놀림을 말한다. 몸을 어떻게 갖느냐? 마음가짐을 어떻게 갖느냐?
 
자연과 조화되게, 가정과 사회에서 세상 사람들과 조화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그게 예다. 그걸 쉬운 말로 “질서다, 조화다, 하나됨이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게 다 도공이다.
 
불가에서도 “왜 앉아서 참선만 하느냐?”고 한다.
진정한 수행은 자면서 꿈속에서도, 걸어다니면서도, 밥 먹으면서도, 김 매면서도, 설거지하면서도,
도심을 떠나지 않는 거란 말이다.
 
선가仙家의 수행법도 똑같이 동공動功 정공靜功을 바탕으로 한다.
무도武道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활 당기고 칼춤 추면서 무예만 단련하는가?
다 정공과 동공을 병행하는 것이다.
 
 
 
많은 신도들이 도공 체험을 하고 있다
그러면 상제님 도법에서 행법行法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동공으로 도공을 해야 하는가?
처음에는 그 자체가 이해 안 될 수도 있다.
몸을 움직여서 수행한다는 것이 낯설고, 또 점잖지 않은 행위로 비쳐지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는 의혹을 넘어 불쾌감을 갖는 이도 있다.
 
그런데 전혀 그런 게 아니다.
도공은 내면적인 강한 체험이다. 때문에 자기 스스로만이 안다.
도공은 교법敎法에서 상제님 가르침의 체계를 잡는 것하고는 다르다.
교법은 이해를 해야 하고 책을 봐야 하며 도훈을 들어야 한다. 시간이 걸린다.
 
도공도 시간이 걸리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건 지식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순수한 마음을 갖고 해야 한다. 정성을 들여서 해야 한다.
 
도공은 한순간의 강력한 체험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공은 도공 신장道功神將이 상제님의 친명을 받들어 내려주는 것이다.
실제 도공을 받은 신도들 대부분이 이구동성으로 도공 신장에 대해 얘기한다.
 
 “도공을 하다 보니까 신장들이 말을 타고 내려오더라.”
 
 “신장들이 하늘에서 오기도 하고, 수평적으로 달려오기도 하더라.”
 
한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또 한 지역 도장에서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고, 체험을 한 전국 도장 신도들 대부분이 도공신장을 얘기한다.
 
그리고 “도장 안이 광명으로 채워지더라. 어떤 맑은 기운이 있더라.
참 아름다운 물 기운이 꽉 채워지더라.” 이렇게 그 주변 공간이 새로운 기운으로 변화한다고 한다.
도공을 통해서 신령스러운 영성 체험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공이 강렬할 때는 실신할 정도로 강한 하늘 기운을 받는다고 한다.
도공을 받는 건 순간적인데, 도공이 오는 과정을 아는 사람이 많다.
 
“아, 하늘에서 어떤 기운이 내려오는구나. 아, 이것이 도공이라는 거구나.”
이렇게 알면서 도공을 받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기운이 머리로 내려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기운이 몸을 싸안고
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기운이 항문 쪽에서 위로 치올라오는 사람도 있다.
 
지난 10년 세월을 돌아보면 세속적으로 정신이 때묻어서,
또는 도의 본성을 몰라서 도공을 순수하게 정말로 자랑스럽고 확신 있게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신도들이 도공을 이해한다. 그리고 도 체조를 하는 데 무엇이 선행돼야 하는가를 절감하고 있다.
 
 
기도의 내용, 상제님 태모님을 먼저 찾아야
도공을 받아 내릴 때는, 기도의 형식을 빌어서 기운을 내 몸에 이입시킨다.
그러면 기도는 왜 해야 하며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또 그 기도 내용은 상제님 도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태사부님이 도공을 내려주실 때도 기도를 통해 받도록 해주셨다.
 
 “지기至氣를 크게 내려주옵소서.”
 “도력道力을 크게 내려주옵소서.”
 “도공道功을 크게 내려주옵소서.”
 
지기와 도력과 도공은 사실 그 근본 정신이 같다.
그런데 이 앞에 들어가는 기도 내용이 있다.
“상제님이시여 태모님이시여” 이것이다.
 
진리의 대의에 입각해서 볼 때,
우리가 태모님을 찾지 않고 상제님만 찾는다 해도 크게 부족한 건 없다.
그러나 상제님 진리 세계의 특성으로 보면 상제님만 찾으면 안 된다. 왜 그런가?
 
상제님의 도는 천지의 이법인 건곤乾坤 일체 합덕合德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제님은 “내 일은 수부首婦가 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어떤 기도나 교법敎法에만이 아니라 수행법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수부가 들어야 한다!
 
사실 또 상제님의 도는 수부 즉, 태모님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곧 상제님의 가르침과 크고 작은 모든 영적 공력과 은혜가 태모님의 첫 개척사의 손길, 태모님의 숨결, 삶,
그 수고로움과 공력을 통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도운道運 공사의

기초만 바르게 이해해도, 기도할 때 “상제님” 하면 “태모님”이 따라 나오게 돼 있다.
상제님 태모님은 살아 계신 아버지 어머니이시다.
천지 만물의 삶과 죽음,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상제님 태모님이 전제되지 않은,
상제님 태모님을 모시지 않은 기도, 수행, 도통, 도의 성취란 있을 수가 없다.
 
“상제님이시여.”와 동시에 “태모님이시여.”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천 정음정양正陰正陽의 도심道心, 가을개벽의 정신 구조에 들어가질 못한다.

상제님 도업을 인사로 실현하는 지도자를 찾아야
그리고 그 다음, 상제님 도업을 현실에서 인사人事로 실현하는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
 
증산도에는 인사人事 문제가 있다.
인사란 다른 말로 이 세상사, 즉 인간 역사를 말한다.


상제님 일은 인간 역사를 본질적으로 바로잡는 개벽사업이다.
때문에 상제님께서 “모사謀事는 재천在天하고 성사成事는 재인在人이라.”고 하신 것이다.
“상제님 태모님은 틀을 짜시고 우리는 인사의 뿌리를 내린다.”, 이것이 성사재인이다.


곧 “내가 신천지 개벽세계의 설계도 그려놓은 것을 너희들이 현실 역사에 그대로 실현하여 완성한다.”는 말씀이다.
“너희들이 이 세상에 나의 세계를 건설한다, 후천 오만 년 지상선경을 건설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상제님 태모님이 역사 속에 뿌리내려 주신 도의 맥을 길러서,
생명력을 틔워 줄기를 뻗게 하고 꽃을 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꾼 지도자가 있다.
진정 상제님 태모님의 희생과 눈물,
모든 정력을 꽃피워 후천 오만 년 선경 낙원, 세계통일의 과업을 역사에 실현하는 지도자가.
 
상제님과 태모님과 지도자 두 사람은 창업 역사의 음양 일체 관계가 있다.
“두 사람이 더 나와야 한다.”(道典 10:26:3), “내 일을 해줄 사람은 뒤에 또 있다.
”(道典 11:16:8) 등등의 상제님 태모님의 말씀이 있잖은가.
 
사실 이 성사재인의 과업이 얼마나 어려운가. 모사재천도 절대적이지만,
성사재인도 그에 못지 않게 참으로 어려운 과업이다. 또 인사는 더 복잡하다. 시간도 더 걸리고 더 지난至難하다.
 
상제님 태모님은 도통문을 열어놓으시고 몇 년 동안 틀을 짜놓고 가셨다.
하지만 인사는 한 세대에 끝나는 것도 아니다. 백 년의 세월이 걸려 이루어진다.
상제님도 3변 성도를 말씀하셨다. 즉 삼 세대의 세월이 흘러야 이루어진다.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의 관계
이 천지 이법의 바탕은 음양론陰陽論이다. 이것이 동양문화의 근원이다.
모든 건 음과 양의 일체, 결합과 조화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만물이 태어나고 살아있고 소멸하는 모든 게 음양의 원리다.
 
우리 증산도는 우주원리가 인격화되는 진리라고 한다.
 
선천의 철학자들이 우주원리, 천지 이치에 궁극적으로 도통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인사와 연결을 못 시켜서 그렇다.
 
그러나 상제님 진리는 천간지지天干地支가 다 인사와 연결돼 있다.
상제님 태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상제님 도업을 인사로 실현하는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천지의 이치를 이 세상 인간 역사에 뿌리내림으로써 인간 역사 질서를 본질적으로 바로잡고
진정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상제님 천지공사의 도 세계다.
 
상제님과 태모님은 건곤乾坤 무극無極이다. 도의 근원을 무극이라 하고,
무극을 음양적으로 표현할 때 건곤이라고 한다.
 
또 건곤 무극이 용用하는 자리가 태극太極이다.
이 태극을 음양으로 얘기하면 물과 불이다. 태극의 바탕이 물, 수태극이고
태극의 용用, 곧 태극의 움직임이 끊어지지 않도록 운동의 본체에서 영원히 끌고 나가는 것이 불이다.
그것을 수태극과 분리해서 황극皇極이라고 한다.
 
황극은 운동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이므로 우주는 현실적으로 물이면서 불인 것이다.
우주의 바탕은 무극 건곤이지만, 현실적인 생명 작용은 물과 불로 한다.
물로 보면 다 물이고 불로 보면 다 불이다. 그래서 정역正易에서도 “원천原天은 화火다.”라고 한다.
도의 바탕, 하늘의 바탕, 하늘의 현실 바탕은 화다. 하늘의 생명력이 불이다.
 
사람도 생명의 바탕이 물이면서, 물이라고 하면 다 물이고 불이라고 하면 다 불이다.
숨 떨어지면 생명력인 불기운이 없어지면서 몸이 차진다. 결국 따뜻한 체온이 유지되는 때까지만 사는 것이다.
이 물 속의 불을 진양眞陽이라 하고, 불 속의 물을 진음眞陰이라 한다.
그것을 상징하는 게 감괘坎卦(5) 이괘離卦(4)다.
 
감괘를 보면 물은 겉으로는 음인데 본성은 양, 불이다.
또 이괘를 보면 불은 타오르는 양의 성질인데 본성은 음이다. 고요히 쉬게 하고 수렴하고 열매 맺게 하는 것.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
이런 현상을 현대과학에서 말하는 프랙탈(fractal)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좌뇌 속에 우뇌가 있고, 우뇌 속에 좌뇌가 있다. 남자 속에 여성성이 있고, 여성 속에 남성성이 있다.
 
이렇듯 건곤 무극으로 음양 일체의 주재자이신 상제님 태모님의 도 세계에는
상제님 태모님의 대업을 현실 인간 역사에 실현하는
지도자도 태극[水], 황극[火]으로 음양 일체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도道의 사체四體 주재자 인식이 제대로 잡혀야
따라서 도공을 할 땐, “상제님이시여! 태모님이시여! 태사부님이시여! 사부님이시여!”

이렇게 부르며 기도해야 한다.
 
“상제님이시여, 태모님이시여, 태사부님이시여, 사부님이시여!”
 
도공이 진정한 도공이 되려면 이 상제님 도의 사체四體 주재자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잡혀야 한다.
 
그런데 처음 들어온 신도들은 기도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교육을 해서 체계적으로 틀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상제님 진리의 노른자요
눈인 도통사道統史의 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다.
 
우주원리를 공부하고 상제님 진리의 팔관법八觀法을 통해서,
‘왜 선천의 도가道家 계열의 자연의 도가 아닌 도신道神, 도의 주재자를 인식해야만
도의 열매를 맺는 건가?’ 하는 걸 깰 수 있다.
이 사상적 깨달음이 정리돼야 도공을 자연스럽게 잘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단순한 개인 신앙이나 이기적인 기복 신앙이 아니라,
이 세상 역사를 상제님 도법으로 바로잡겠다는 개척자 신앙,
천하사 신앙 의식을 가질 때 도공이 제대로 되는 것이다
 
 
우주원리적으로 도공을 해석해야
수행의 정신에도 음양 일체의 본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유불선 기독교 이전의 신교문화 시대부터,
수행법은 음양인 정공靜功과 동공動功으로 구성돼 있었다.
 
정공은 가만히 앉아서 잡념을 거두고 고요의 극치에까지 밀고 들어가 거기서 진정한 생명의 모습,
곧 음 속의 양을 체험하는 것이다.
태을주 읽을 때 몸을 움직이면 되는가?
자꾸 마음을 일으키면 되는가? 잡념을 가지면 되는가?
 
마음과 몸이 고요히 쉬면서 주문을 읽으면, 지극한 고요함 속에서 하늘땅, 만물이 살아 있는 진정한 모습을 본다.
반면에 동공은 거꾸로 동 속에서 정[動中靜]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도가에서 하는 기공氣功이 있다.
옛날 율곡栗谷 같은 유학자도 생활 동공을 해서 자기 나름대로 체조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 하품하는 것도 사실 도공이다. 입을 찌그리고 눈을 이상하게 뜨고 졸립다고 해도
그게 몸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도공이다.
 
그러면 태을주 수행을 할 때, 태을주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건 그 동안 얘기를 많이 해서 알지 않는가?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잡념을 버리고 오직 태을주만 집중해서 읽는다.
 
자꾸 잡념이 생겨서 사념에 끌려가는, 자꾸 무언가를 분별하려는 마음,
그 생각의 파도를 가라앉히기 위한 수단으로도 주문을 읽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주문의 도력道力이 발동되어 잡념을 버리고
순수한 정공의 의식 경계, 도의 경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주문의 도력을 빌려서 몸과 영이 자꾸 맑아지면서,
주문의 조화를 타고 도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이다.
 
동공의 경우는 가만히 앉거나 누워서 하는 정공과는 달리, 몸을 움직이면서 한다.
그런데 물과 불, 음과 양, 속과 겉이 합쳐져 있듯이,
몸을 움직이지만 역설적으로 마음은 고요히 가라앉아야 한다. 그게 진정한 동적 도공이다.
 
도공을 하면서 옆 사람을 의식하지 말라. 도공하는 걸 보면 참, 세상의 별의 별 인간 동작이 다 나온다.
현장에 참여하여 도공을 받아들이려면, 도공에 대한 이론적 해석이 정연해야 한다.
우주원리로 철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
이게 깨지지 않으면 의혹의 찌꺼기가 남아서 그 분위기에 적응 못 하고 도공을 못하게 된다.
 
이게 소위 체용體用의 문제, 몸과 몸짓의 문제다.

상제님이 도공신장을 내려보내신다
태고로부터 철학에서 이 세상의 의혹을 풀기 위해 여러 문제를 제기해 왔다.
‘인간이란 뭐냐? 우주란 뭐냐? 진리란 뭐냐? 나는 누구냐?’ 하고.
 
그들은 그것이 어떤 하나인 것에서 나왔다고 한다. 하늘과 땅,
저 허공의 무수한 별들도 어떤 궁극의 근원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마다 그 근원인 하나의 이름이 다르다.
 
“하나님이다.”, “도다.”, “다르마다.”, “내 마음이다.”, “일심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걸 동양에서는 체(體, substance)라고 한다. 문자적으로는 몸 체 자다.
그런데 우리 동양에서 말하는 몸은 육체(physical body)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마음과 영을 담고 있는 몸을 말한다. 이 체 자 속에 진리의 바탕, 근본, 뿌리라는 뜻이 들어있는 것이다.
 
또 거기서 일어나는 작용과 무수한 움직임을 용用이라고 한다.
이 체와 용을 내 몸에 적용하면, 천지기운인 오운육기五運六氣가 작용하는 오장육부가 체다.
그리고 사지四肢가 용이다.
 
나무로 말하면 나무의 본 줄기가 체이고, 그 다음 옆줄기가 사지, 팔다리다. 그리고 팔다리 놀리는 걸 몸짓이라고 한다.
 
체와 용은 바로 우리 몸에서 몸과 몸짓의 문제다.
그런데 하루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인간이 놀리는 몸짓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의 결정 구조가 다 다르듯이, 누가 몸짓을 해도 같을 수가 없다.
이게 일자一者와 다자多者의 문제다. 하나인 것과 여럿인 것.
 
그러니까 동적인 도공을 통해, 즉 몸을 움직이면서 내 마음이 고요함 속에 가라앉아 강력한 영적 체험을 한다.
그런데 상제님 도수에서는 이 때 상제님이 도공신장을 보내어 체험을 하게 하신다.
 
이것이 딴 도판에는 없다.
 
개벽을 앞두고 우리 증산도에서는 개벽을 집행하는 신장들이 도공신장이 되어 내려와 옹호해 준다.
도공 수련은 육임구호대 짜는 준비 과정에서 도적 체험을 하게 해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새울 도수 보실 때의 동공
이 육임구호대 짜는 상제님 도수도 음양적으로 두 도수가 있다.
숙구지 도수와 새울 도수다.
새울 도수를 보면, 몸을 움직이면서 밤새도록 새벽까지 주문을 읽는다.
수저 마흔아홉 개를 가지고 방바닥을 치면서 읽는 것이다. 그것도 동공이다.
 
『도전』 6편 74장을 보면 상제님은 천지의 일꾼들에게 녹 붙이는 도공을 하면서 육임구호대를 짜게 하신다.
그리고 철야수행으로 몰고 가면서 조직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신다.
조직이 강력해지면 일꾼들이 모든 걸 다 바쳐 신앙한다.
현실적으로 신도들이 한마음으로 정성껏 녹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건 이론 교육만 갖고 안 된다.
상제님 말씀대로 글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지식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도전』 6편 74장을 한번 읽어보자.
 
 
 1월 14일 밤에 덕두리 최덕겸(崔德兼)의 집에 계실 때 새울이라 써서 불사르시고
이튿날 덕겸을 명하시어 “새울 최창조(崔昌祚)에게 가서 전도하라.” 하시므로 덕겸이 그 방법을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창조의 집 조용한 방을 치우고 청수 한 동이를 길어다 놓고 수도자들을 모아서
수저 49개를 동이 앞에 놓고 시천주주(侍天主呪)를 일곱 번 읽은 뒤에
다시 수저를 모아잡아 쇳소리를 내며 닭 울기까지 행하라. 만일 닭 울기 전에 잠든 자는 죽으리라.” 하시니
 
덕겸이 명을 받고 창조의 집에 가서 명하신 대로 낱낱이 행하니라.
보름날 상제님께서 원일을 데리고 백암리로부터 새올에 이르시어 원일에게 명하시어 백암리에서
가져온 당성냥과 두루마리를 덕겸에게 전하시니
 
두루마리는 태을주(太乙呪)와
天文地理 風雲造化 八門遁甲 六丁六甲 智慧勇力
이라 쓴 것이더라.
 
또 창조에게 명하시어 “밖에 나가서 살피라.” 하시니 창조가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아뢰기를 “태인 순검이 선생님을 체포하려고 백암리로 나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일어나시며 창조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너도 피하라.” 하시고
또 덕겸에게 이르시기를 “일 분 동안 일이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하시고
 
창조에게 “돈 두 냥을 가져 오라.” 하시어 새울 이공삼(李公三)에게 간직하게 하시고,
통머릿골로 향하여 비틀걸음으로 가시며 말씀하시기를 “도망하려면 이렇게 걸어야 하리라.” 하시고
그 길로 구릿골로 가시니라. (道典 6:74:1∼13)
 
상제님은 9년 천지공사 마지막 해, 음력 정월 보름날에 공사를 보신다.
세시 풍속으로 정월 보름이 어떤 날이라는 것을 그대들은 잘 알 것이다.
 
이 날은 보름달 기운을 받으면서, 일 년 농사가 잘 지어지기를 하늘과 땅에 기도하는 날이다.
모든 부정을 버리고, 한 해의 풍년과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날이다.
 
지금 칠보산 아래, 윗마을 새울에는 최창조崔昌祚 성도가 살고 있고
그 아랫마을에 최덕겸崔德兼성도가 살고 있다. 위아래 마을이 전부 최가 마을이다. 최는 산 높을 최 자다.
 
최창조崔昌祚 성도가 사는 윗동네가 새울이다.
성이 최가이고, 창조는 창성할 창昌 자에 하늘 복 조祚 자다. ‘하늘의 복이 크게 내려와서
가을철 오만 년 신천지의 무궁한 생명을 받는다.’는 의미가 그의 이름자에 들어 있다.
 
또 최덕겸 성도가 사는 덕두리德斗里 마을 이름도 큰 덕德 자에 말 두斗 자이고,
덕겸德兼은 덕을 겸했다는 뜻이다.
상제님이 그 기운을 취하여 공사에 쓰시는 것이다.
 
 
도공의 궁극은 의통과 도통

앞으로 실제 개벽 상황에서, 가을철 숙살 기운에 의해 이름을 알 수 없는
괴병이 들어와 인류를 심판하고 인간 종자를 추린다.
그 때 죽어 넘어가는 창생을 건지는 데 필요한 구호대가 여섯 명으로 구성되는데, 책임자까지 일곱 명이다.
 
상제님은 최창조 성도의 집을 중심으로 새울 도수를 보고 계신다.
의통구호대가 단시일 내에 신천지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잘 짜지도록 기운을 붙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상제님은 최창조 성도에게 “천금도통千金道通 최창조다.”라는 말씀도 하시고,
“삼신 도수 최창조다.”라고도 하셨다. 삼신 도수란 뭔가?
인간을 낳는 것, 이게 삼신의 역할이다.
후천 오만 년 신천지에 태어나는 인간 종자를 건지는 게 삼신 도수다.
그게 새울 도수 속에 들어있다.
 
이 성구를 보라. 최덕겸 성도가 최창조 성도의 집에 가서 성도들을 모아놓고 밤새도록 주문을 읽는다.
그런데 상제님이 어디서 오시는가? 바로 그 윗동네 백암리에서 오신다.
최창조 성도의 집 옆 칠보산 아래자락에 있는 백암리 김경학 성도의 집에서 공사를 보고 오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새울 도수는 대학교 도수와 연결돼 있는 것이다.
새울 도수가 대학교 도수로 완성이 되고, 대학교 도수 속에 의통구호대를 완성하는 육임 조직의 사명이 있다.
 
이런 내용이 이 공사 말씀에 다 나온다.
그런데 밤새 공사를 보시고 나서 이튿날 보름날이 됐다.
그 때 상제님이 두루마기를 하나 주신다. 그걸 펴 보니 태을주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육임구호대 조직이 태을주 읽는 일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뭐가 나오는가?
“천문지리天文地理 풍운조화風雲造化 팔문둔갑八門遁甲 육정육갑六丁六甲 지혜용력智慧勇力”
이게 바로 도공의 내용이다. 도공을 하면 궁극적으로 이게 터진다.
 
어느 정도 도공이 성숙했다,

도공 체험이 한 경지를 넘어섰다고 얘기할 때,
그 경지란 도통 경지다. “천문지리를 통하고 풍운조화를 쓰고,
팔문 둔갑을 하고 육정 육갑을 하고 지혜 용력을 한다.” 이것이 궁극의 도통 경계다.


상제님이 보여주신 도공
지금 그대들이 도공을 하고 기운을 받았다고 하는 건 초보 수준도 안 된다. 걸음마 단계다.
이 성구를 다시 보라. 지금 도공을 해야 하는데, 상제님이 밖에 나가 살피고 오라고 하신다. 그런데 순검이 잡으러 왔다.
이것은 상제님 일이 이렇게 힘들다는 말씀이다.
 
성도들은 지금 수저를 마흔아홉 개 쥐고서 밤새 도공을 해야 하는데 밖에 잡으러 왔다는 것이다.
이게 현실적으로 천하사 하는 사람들의 불안감, 쫓김, 위기 의식이다.
 
그런데 상제님이 도공의 마지막 묘미를 한번 보여 주신다.
맨 마지막에 보면 “순검들이 선생님을 잡으러 다닙니다.” 하니까 상제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지도를 보면 칠보산 아래에 통머릿골이 있다. 여기 지형이 봉황새 둥지처럼 생겼다고 해서 새울이다.
그리고 도로가 있고 그 아랫마을이 최덕겸 성도가 살던 덕두리이고,
그 윗마을이 원백암리라고, 김경학 성도가 살고 있는 곳이다.
지금도 가보면 김경학 성도가 살던 집도 있고 최덕겸 성도가 살던 집도 있다.
 
상제님이 통머릿골로 가시면서 뭐라고 하시는가?
비틀걸음으로 가시면서 “도망하려면 이렇게 걸어야 하리라.” 하신다.
이게 상제님의 도공이다. 하하, 굉장히 재미있다.
 
 
태을주는 천지의 율려 조화를 받는 주문
그런데 상제님 진리는 태을주太乙呪를 읽음으로써 그 뿌리를 밝힐 수 있다.
왜냐하면 태을주에는 율려律呂 도수가 들어있기 때문
이다.
 
율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천지 자연의 율려와 자연 속의 순수 음양의 조화로서 율려가 있다.
어떻게 천지 속의 순수 음양의 율려가 나에게 전달되는가?
 
쉽게 말하면, 그 기운을 현상 세계에 있는 인간을 비롯한 만물에게 전달해 주는 율려의 중개탑이 있다.
율려를 만물에게 매개해 주는 신도神道, 그분이 태을천 상원군太乙天上元君님이시다.
 
모든 것은 신이 들어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천지조화의 율려도 그 율려를 다스리는 주재신이며
도신道神의 뿌리, 도의 생명의 근원인 태을신의 은혜를 통해,
태을신의 도권을 통해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태을주를 많이 읽으면 천지조화 율려와 하나가 된다.
그럼으로써만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회복되고 불멸의 선체仙體가 되어, 영원히 생명을 지속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주론 공부에서 ‘인간은 왜 죽는가?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인간은 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미몽 속에서 헤매는가?’ 모든 게 율려 문제란 말이다.
 
우주론 정신론의 결론도 율려 문제다.

우주 정신의 본체, 우주 정신의 조화의 핵, 천지 음양의 순수 핵이 율려다.
그런데 암만 그걸 이치적으로 알아봤자 율려를 받는 데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율려를 다스리는 율려의 주재신을 통해 율려를 받아야 한다. 율려를 받는 주문이 태을주다.
 
그래서 태을주 수행을 하면 못 이룰 게 없는 것이다. 태을주는 여의주如意珠다.
이 여의주란 뜻이 뭔가를 생각해 보라. 세세한 건 시간이 없으니 생략한다.

동공의 장점
우리는 태을주의 정공법과 도공을 통한 동공법 등 양 수행법을 통해 도를 체험하게 된다.
몸을 흔든다고 하는 것은, 아까 말한 거와 같이 몸과 몸짓의 문제다. 몸과 몸짓은 둘이 아니다.
우리가 일심세계에서 바다와 파도는 둘이 아니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 이치다.
 
문제는 뭐냐 하면, 왜 몸을 움직여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도공의 장점이 어디에 있는가?
 
정공할 때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허리를 펴고 앉은 채 몸을 움직이면 안 된다.
만약에 몸을 움직이거나 흔들면 허령이 들렸다고 한다.


주문을 소화 못 시키고 기운이 얽혀서 신명이 누른다든지, 죄지은 게 많다든지 하면 몸을 막 떤다.
풍 걸린 사람처럼 손을 떨기도 한다. 운장주 읽다가 그 기운을 감당 못 하고 손가락을 떠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정공할 때는 바른 자세로 자리잡고 앉아 마음이 착 가라앉은 채 주문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동공할 때는 그런 조심스러움이라든지 격식 같은 게 완전 파괴되는 것이다. 이게 장점이다.
그냥 흔들어만 주면 된다. 아주 단순하다.
 
흔들 때도 어떻게 흔드는가? 몸에서 요구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흔든다.
몸의 오장육부가 원하는 대로 흔들어라. 만약에 마음 속에서 뛰고 싶다 하면 뛰어라.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소리를 질러라. 눕고 싶으면 누워라.

 
저 인도에 가 보면 오쇼(Osho)의 수행 도장인 아쉬람(Ashram)에서 하는 수행법이 있다.
역동적 명상(dynamic meditation)이다. 대학교 교수, 심리학자, 의사, 변호사 등
전세계에서 지식인들 또는 일반 사람들이 와서 수행을 한다.
 
그들의 수행 테이프를 보면 일어나서 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간질병 환자처럼 뒹굴며 울기도 하고 막 소리도 지른다.
오쇼의 말로는 그렇게 되면 모든 걸 다 쏟아낸다는 것이다. 허위의식 같은 것, 잠재돼 있는 어둠 같은 것을.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태고로부터 내려온 신교의 맥이다.
현대적 샤머니즘! 사람과 신명을 매개하여 어떤 원한, 슬픔 같은 걸 다 쏟아내게 해서 치유해 주는 것 있잖은가.
정화해 주는 것이다.
 
아, 일요일날이면 “야, 아빠하고 오늘 산에 가자.” 하고
산에 올라가 모자 돌려쓰고 “야호!” 하고 소리 지르는 것, 그런 것도 도공이다.
그게 몸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도공은 그런 게 아니다. 기도를 통해서 받는 것이다.
새 우주를 창조하기 위해, 도맥이 계승되어 나가는 주재자를 바탕으로 해서 천지 도공신장과 나를 연계시키는 것이다.
 
그럼 기도를 하면서 몸을 흔드는 것은 어떤 점이 유리한가?
 
첫째로는 몸 속에 굳어 있는 것, 막혀 있는 것을 뚫어 주는 데 좋다.
동서 의학의 총 결론으로서 모든 병의 원인은 하나다. 체증! 울체鬱滯
된 것이 그것이다.
현대와 같은 환경에서는 누구도 마음과 몸과 영과 기운이 다 울결된다.
도공은 바로 그걸 풀어주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다. 기혈도 풀린다.
 
기도하면서 도공을 자연스럽게 잘 하면, 땀이 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시원해진다.
그것을 금방은 못 느낀다. 그런데 밤에 잘 때 느낄 수 있다.
또 도공을 하면 잠도 잘 오고, 짧은 잠을 잤는데도 몸이 개운하고 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
 
 
성경신을 갖고 도공을 하라
하지만 도공을 형식적으로 하거나 잡념을 갖고 하면 그걸 못 느낀다.
정말로 내면적으로 정성스럽게, 자연스럽게 예술적으로 해야 느끼는 것이다.
 
도공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또 신앙하는 흉내만 낸다고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도공은 천지와 더불어 하는 것이다.


천지와 더불어 자면서, 걸어다니면서,산책하면서, 마음 속으로 하기도 한다.
앉아서 몸 좀 흔들면서 소리지르며 기도한다고 내려오는 게 아니다.
 
결국 동공이나 정공이나 그 근본은 마음이다. 얼마나 순수하게 믿고 기도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여간 어떤 인위적인 생각, 허위의식을 갖고 하면 정공도 동공도 다 주저앉는다. 실패로 끝난다.
 
복록福祿도 성경신誠敬信이요 수명壽命도 성경신誠敬信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도공을 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복록이 아닌 수명의 문제다. 도통하는 것, 그건 수명의 문제다.
그런데 그게 성경신이다.
 
성誠, 정성이 뭔가?
시작과 끝이 순수함으로 일관된 것, 이게 정성이다.
조금 하다가 변태로 끝난다? 조금 하다가 불평줄을 품는다?
조금 하다가 중단한다? 그건 정성이 아니다.
 
또 경敬이 뭔가?
경은 집중이며 겸손이다. 나를 낮춤으로써 상대를 높이는 것이다.
교만한 건 끝이다.


교만함은 경의 반역이기 때문에 열매를 못 맺는다.
상제님 도를 받고 ‘나는 지식이 많다.’‘ 나는 일류 대학 나왔다.’, ‘나는 키가 크다.’,
‘나는 그럴 듯하게 생겼다.’ 이렇게 교만하면 죽는 것이다.
그에 대한 모델 인물이 어린 호연이다.
 
결국 “호연이의 마음으로 가라, 어린 소녀의 마음으로 가라.”는 말씀이다.
그 다음 신信이라는 건 무엇인가?
하나됨이다! 그게 믿음이다. 믿는다, 신앙한다 할 때 그것은 일체가 됐다는 것이다.
 “상제님 도道와 하나가 됐다.”, “상제님 태모님 말씀과 하나가 됐다.”, “진리와 하나가 됐다.”는 것이다.
 
이 성경신 셋은 나눠질 수도 없고, 어느 하나도 떨어져 나갈 수가 없다.

도공의 기도줄을 찾으라


그러면 도공할 때 왜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서 신이 내려오는가? 처음 들어온 신도들은 기도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교육을 해서 체계적으로 틀을 잡아주어야 한다.
 
또 도공은 일요일이나 한 달에 몇 번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생활 속에서 늘 해야 한다. 자면서도 상제님 태모님을 찾고, 걸으면서도 상제님 태모님 찾고.
 
내가 그러잖는가.
 
잠 잘 때 잠이 안 오면 ‘상제님 태모님, 상제님 태모님!’을 찾는다.
꿈속에서도 ‘상제님 태모님, 상제님 태모님!’을 찾는다. 그게 도공이다.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
 
이렇게 도공의 기도줄을 찾으면, 순수하게 도공 기운이 내려서 잠을 잘 드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도체 잡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우주론에서 음양론의 결론 문제다.
 
자연에는 자연의 생명[氣]과 그 기를 다스리는 신神이 있다.
기는 이법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그것을 다스리는 신도 문제는 알기가 어렵다.
 
상제님 태모님은 우주의 주재신이다.
건곤 무극의 자리에 계신, 건곤 무극을 다스리시는 아버지 신 어머니 신이다.
 
이 신도에 대한 원리적 사상적 깨달음이 있어야 도를 잘 닦을 수 있다.
그래야 기도도 잘 되고 도공도 잘 된다.
 
화이트헤드에게서 이런 신도 문제가 제기된다.

화이트헤드의 깨달음
화이트헤드(A.N. Whitehead)는 인류사에서 신에 대해 가장 경이로운 깨달음을 연 사람이다.
 
그 사람이 얘기한 게 있다.
 
그는 영국의 체험주의 문화 속에서 산 사람이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적으로 보건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생각하는 것,
또 문화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학, 예술, 연극, 철학, 종교, 과학 등
모든 것은 인간이 풀고 싶어하는 궁극적인 형이상학의 진리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한 편의 시에도 궁극의 진리 문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인간들은 편협해서 자기 전공이나 취향에 맞추어 일부만 취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문학에서도 시, 시에서도 현대시, 어떤 사람은 조각,
어떤 사람은 동양철학, 동양철학에서도 노자니 장자 철학 등만을.
인류 문화에는 무한한 진리 구성의 총체적 자산이 있는데, 편협한 인간들이
그 가운데 몇 개만 뽑아서 생각하고 사상 체계를 세우고 진리를 운운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얼마나 야심적이냐 하면,
인류문화에 있는 모든 요소들, 예컨대 철학, 종교, 과학, 그리고 예술에서 문학, 연극, 음악 등
모든 영역을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공부한 인물이다.
 
그렇게 해서 그 속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간의 기본 생각을 체계 세워서,
종합적이고 일목요연한 합리적인 도식과 체계를 세워서 이 우주의 진리의 궁극 문제를 해석하려는 것이다.
그는 ‘바로 이것이 철학의 목적이다!’라고 말한다.
 
이 사람의 철학은 과거에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사고의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원래 유능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다.
은퇴하고 하버드대에 가서 철학을 공부했다.
서양철학의 원 뿌리부터 추적하면서, 철학자들이 무엇을 잘못 생각했는가를 연구했다.
그것을 바로잡으면서 새로운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다.
 
그걸 ‘과정 철학’이라고 한다. 모든 건 생성의 과정에 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것은 자신을 형성하기 위해 데이터(data)를 흡수한다.
공기도, 먹는 물도, 지식도, 우리가 얘기 듣는 것도 데이터다.
 
이 세상에서 나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를 데이터라고 한다.
그러다 생성을 마치고 나면 자신은 데이터를 던져주고 자연 속으로 사라진다.
 
우주를 구성하는 형성 요소: 첫째, 영원 객체
그러면 이 우주를 구성하는 게 무엇인가? 그걸 그는 형성적 요소(formative elements)라고 한다.
천지 만물의 이 형성 요소란 무엇인가?
 
그는 하늘과 땅, 만물과 인간을 만드는 데 기반이 되는 몇 가지 기본 요소가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다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화이트헤드 철학의 위대한 통찰력과 재미가 있다.
 
그는 형성 요소를 세 가지로 말한다.
재미있는 게, 엊그제 내가 그리스 사모스 섬에 가서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동상을 보고 왔다.
터키 바로 옆에 있는 이 사모스 섬 끝에 동상이 서 있는데, 짙푸른 녹빛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가서 그 동상의 모습을 실제 보니 참 기가 막힌다.
거기에 “3이라는 수는 이 우주의 질서를 구성하는 근본 수다.”라고 쓰여 있다.
 
우주를 만드는 데 세 가지 큰 기본 요소가 들어간다.
 
첫째, 대자연의 가슴속에는 객체,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만물을 만드는 어떤 객관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사물의 바탕을 만드는 객관적 요소로 영원히 존재한다.
그걸 그는 ‘이터널 아브젝트(eternal objects), 영원 객체’라고 부른다.
이것을 ‘영원 대상’으로도 번역하고 철학자에 따라 ‘영원 객체’라고도 번역한다.
이 사람이 얘기하는 것은 언어의 차원과 맛이 다르다.
 
이것을 학자들이 “이건 동양의 리理와 유사하다.”고 한다.
이 대자연의 깊은 조화의 바탕에는 영원한 객관으로서의 무엇이 있는데,
그게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기본 질서, 이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질서를 동양의 이理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동양적인 리理는 이미 질서로 구성된 어떤 큰 틀을 얘기하지만,
그는 우주 만유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자, 소립자 단위 이하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그는 현대 양자물리학의 의식을 갖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현실 존재(actual entity),
현실 계기(actual occasion)라는 용어를 쓴다. 좀 알아듣기 어렵다.
 
색을 예로 들어 보면, ‘빨강’, ‘노랑’, ‘파랑’이 있다. 이것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순수한 추상으로 있는 잠재적 요소다. 이게 영원적 객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하면 ‘빨강’, ‘노랑’, ‘파랑’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추상이 현실이 됐단 말이다. 이렇게 현실로 드러난 걸 현실태(actuality)라고 한다.
액추얼리티(actuality)는 ‘실재하는, 정말로 있는’ 이런 뜻이다. ‘빨간색, 빨간 사과’는 유형화되어 드러난 것 아닌가.
 
그러니까 영원적 객체는 잠재태潛在態, 추상으로 ‘빨강’이 ‘빨간색, 빨간 사과’로 드러나는 것처럼,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다.
 
 
구도자가 눈떠야 할 미美의식의 3대 요소, 색기영
이 자연 속에는 영원 객체와 같은 추상적 요소들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색의 세계만 해도 그렇잖은가.
우리 상제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선배는 색기영色氣靈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새 도전에 나오는 말씀이다.
 
색이 무엇인가?
칼라(color)다. 이 색기영을 잘 볼 줄 알아야 한다.
색을 잘 보는 사람은 예술적인 안목, 심미안審美眼이 깊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 사회도, 사람도 잘 볼 수 있다.
 
남자들 넥타이 고르는 거나 여자들 머플러라든지 옷 입는 것을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그 사람 몸에 잘 맞는 색이 있다.
 
그런데 상제님은 “천문유색天文有色이다.”라고 하신다.
천문에 색이 있다는 말씀이다. 원 색의 본성,
색의 정신은 천문, 하늘의 별에서 온다.
 
그러므로 진짜 색의 정신을 제대로 사무치게 통해서 보려면,
영이 열려서 천상의 무수한 별의 본래 모습을 봐야 한다.
 
색유기色有氣하고 기유영氣有靈이라,
색에는 기가 있고 기 속에 영(spirit)이 있다. 우리 몸의 신명도 기에서 생성돼 나오는 것이다.
 
정신론으로 들어가 보면, 정신이 기혈氣血 속에서 생성되지 않는가.
“천문 속에 색이 있고, 색에는 기가 있고, 기에는 영이 있다.”
이 색기영의 문제가 우리 현실 구성의 핵심 요소로서 아주 중요하다.
 
 
둘째 창조성, 셋째 신神
그 다음 그는 이런 질서의 바탕인 영원 객체와 짝이 되어
실질적인 만물 생명의 근원과 힘의 근원으로 작용하는 기본 요소가 또 하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게 바로 두 번째, 창조성 創造性(creativity)이다.
 
창조성은 만물의 생성의 근원이며 힘의 근원, 생명의 근원이다.
이것은 유형적이며 동양의 기氣와 같은 의미다. 그러나 창조성은 기와는 언어의 색조가 다르다.
 
이 우주 안에는 영원히 살아있는, 질서의 바탕과 같은 이런 추상들과 창조성이 음양 관계로 꽉 차 있다.
그런데 이것을 음양 합덕으로 발동케 해서 현실 세계를 구성하게 하려면,
먼저 이 영원 대상의 이법적 잠재태들을 하나하나 파악해서


창조의 기본 질서로 구성해 주는 손길인 신(God, 神)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신의 역할을 신의 원초적 본성이라고 한다.
그가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증산도에서 말하는 이신사理神事의 만물 생성 법칙과 같다.
 
우리가 인식의 주체 입장에서 보면, 영원히 살아 있는 질서의 바탕 같은 추상[理]들이
이 우주 안에 꽉 차 있고, 동시에 기氣가 있다. 여기에 신神이 들어와야 현실 세계의 무슨 일이 성사된다.
이 셋이 결합을 해야 하늘땅도 태어나고 사람도 신명도,
자연의 모든 크고 작은 생명들이 태어나고 현상들이 돌아간다.
 
그래서 그는 이 세 가지를 이 세계의 형성 요소라고 한다. 천지 만물을 만드는 생성 요소!
 
신의 원초적 본성
여기서 신의 역할을 좀더 살펴보자.
그가 말한 신의 일차적, 본원적 역할이 무엇인가?
 
천지의 이법이란 백 퍼센트 완전한 추상抽象이다.
헌데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이 무변 광대한 대자연 속에 추상으로 잠재돼 있는 영원 대상들을
하나의 질서로 얽어서 꿰는 파악의 역할을 바로 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신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말한 신의 일차적 본성, 원초적 본성이다.
 
그 다음 신과 현실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만물이란 무엇인가?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나 땅이나 인간이나 신이나, 서양에서 말한 하나님도 모두 사실적 존재다.”라고.
실제로 이 우주 내에 존재하고 있는 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서양에서 말하는 창조주도 인간이 경험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게 전혀 아니다. 그런 신은 사실 존재가 아니다.
그런 신은 존재할 수도 없다.
신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 세계 안에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과 별과 만물처럼 실제로 살아 있는 현실 존재다.
여기서 기독교의 초월적 창조 신관의 뿌리가 흔들린다.
 
그런데 신도 사람도 자연도 크게 보면 사실 존재이지만, 신과 만물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신은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공간의 벽에 갇혀 있질 않다.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오직 신만은 유일한 비시간적 존재다.
 
반면에 만물은 시공간 속에 갇혀서 산다. 시간의 물결에 따라 태어나고 자라고 죽고 없어진다.
그래서 현실적 존재이면서 ‘사실적 계기(actual occasion)’라고 한다.
끊임없는 생사 변화의 부침을 한다는 것이다. 살다 죽고 다시 태어나고. 만물이 태어났다
죽어 없어지고 한다는 의미에서, 조금 뉘앙스가 다른 ‘사실적 계기’라고 한다.
 
 
신의 결과적 본성
그럼 신과 현실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신이 천지 만물 생성의 바탕인 이법과 관계를 맺을 때는 질서를 구성하는 원초적 본성이 있다.
 
그러면서 또한 신은 인간 현실 역사 구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다 관여한다. 그리고 인간처럼 현실을 체험한다.
무수한 창조의 잠재적 추상들 가운데 질서로 파악한 것을 우리의 현실 세계에 쏟아 부어
사건을 구성하는 신의 이차적 역할을, 신의 결과적 본성이라고 한다.
 
그럼 이 신은 어떤 신인가?
우주 속에 만유 존재의 근거로 있는 비인격의 신, 자연 속의 순수 조화신이다.
동양적으로 말하면 삼신三神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이 우주의 자연 질서와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재신, 주신이 있다.
동양적으로 말하면 상제님을 중심으로 각각의 부서를 맡은 인격신들이다.
 
이것을 이신사로 보면 이理(이법)는 추상, 무형이다. 또 사事는 기氣와 연계돼 있다.
이사理事의 관계는 이법 곧 천지의 바탕과 현실과의 관계다.
 
그런데 신은 이법과 현실 양쪽에서 다 매개 작용을 한다.
화이트헤드는 신의 이쪽 저쪽 두 기능을 체계적으로 말한 것이다.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이 신의 창조적 손길이라고.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도공은 천지신도의 조화의 바다에 들어서는 것
도공은 바로 원초적 본성을 바탕으로, 신神의 매개 작용을 통해,
신령스런 이 우주의 내면의 느낌의 벽을 허물고 들어가,
천지 신도의 조화의 바다에 들어서는 것이다. 신도가 중간에서 바탕을 구성하여,
그것을 현실로 드러내 준단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체험할 수 있다.
 
“전날 밤에 집안에 시커먼 기운이 들어오더니 이튿날 도적을 맞았다.”
이것을 내가 일찍이 몇 번 경험한 바 있다.
집에서 대낮에 이층 윗방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아, 어떤 놈이 확 들어온다.
그 때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내가 거의 동시에 일어나면서 “뭐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냥 나갔는데, 그게 적신賊神이다.
 
그런데 다음 날엔가 우리집 앞 골목길에서 동네 여자가 강도를 만나서 핸드백을 뺏겼다.
또 서울 회기도장에 있을 때다.
 
여름철에 내가 창문을 열어놓고 1층 입구에 있는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 때 라디오 큰 것하고 학생 가방하고 금고 조그마한 게 있었는데
아, 저쪽 창문에서 뭔가 시커먼 게 들어온다. 그런데 내가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잤다.
그랬더니 이튿날 도적이 와서 싹 가져가 버렸다.
 
그 때 내가 소리를 질러서 내쫓았으면 적신이 범하질 못했을 텐데. 그러면 도적은 안 맞는다.
그렇게 적신이 와서 스치기만 해도 도적 기운이 범한 것이다.
그러면 그 기운을 받은 도둑이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도둑질을 한다.
 
“심야자心也者는 귀신지추기야鬼神之樞機也요 문호야門戶也요 도로야道路也니”
신도의 문지도리가 무엇인가?
그 문을 여는 게 무엇인가?
그 도로를 여는 게 무엇인가?
 
우리 마음이다.
우리 마음이 바로 신도가 다니는 도로이면서 문이면서
그것을 여는 지도리 역할을 한다는 말씀이다.
 
지금 내가 얘기하는 도공 문제도 곧 도신道神의 문제다.
왜 도공신장이 내려오는가?
 

신도가 중간에서 변화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도공을 하면 도공신장이 내려와서 우리가 그 기운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 도공할 때 ‘왜 기도문에서 도의 주신을 읽는 것이 중요한가?’,
‘왜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면서 도공하는가?’에 대한 기본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
그것이 사상적으로 깨져야 강력하게 확신을 갖고 기도문을 읽게 된다.
그러면 도공이 아주 잘 된다.
 
 
내면으로 몰입해서 해야 자발도공이 된다
또 내면적인 의식도 바로잡아 줘야 한다.
우리 수행법은 정공을 통해서 살아 있는 생명의 진정한 모습,
곧 동動의 경계를 보는 것이다. 정 속에서 동을 보는 것.
 
또 동공을 통해서, 내 몸의 여러 가지 몸짓을 통해서 만물 생명의 고요한 내면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공과 동공 공부의 근본은 잡념을 가지면 안 된다.
의심한다든지, 불평줄을 품는다든지, 어떤 대상을 보고 마음을 끄달린다든지,
생각을 던진다든지 하면 공부가 안 되는 것이다.
 
처음 몸짓을 낼 때 북소리를 듣는다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상제님이시여, 태모님이시여!” 하고 소리내어 기도한다든지 하면서,
어깨짓만 하든지, 아니면 팔놀림만 한다든지,
주먹으로 살살 리듬을 만든다든지 하여 자꾸 내면으로 몰입해 들어가야 한다.
도공할 때는 모든 잡념을 버리고 몰입하면서 정성껏 해야 한다.
몰입하지 않고 하는 도공은 도공이 아니다.
 
초기에 본부 성전에서 도공할 때, 15년 동안 척추 앓은 사람이
그 날 도공하고 나가면서 나았다고 한다. 내가 현장에서 직접 보았다.
 
도공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치유의 효과가 일어난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몸의 아픈 곳을 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치유도공을 한다. 어디가 아프면 자기도 모르게 손이
그 곳으로 가지 않는가. 눈에 무엇이 들어갔다 하면 눈을 만지고, 배가 아프면 손으로 배를 주무르고.
 
자기 몸에서 몸짓을 자동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흔히 자발도공自發道功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
이건 일반적으로 정리된 술어다. 조작된 의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정성을 가지고 하는 걸 말한다.
 
 
유위에서 무위로 간다
그러면 도공이 된다, 안 된다는 게 뭔가?
도공이란 내가 일심으로 기도하면서 어떤 몸짓의 리듬을 타고 내면적으로 도공신道功神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동작을 하는 건 처음에는 대개 인위적이다.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를 보면 여동빈呂洞賓이 이런 얘길 한다.
“모든 수행은 유위법에서 무위법으로 들어간다.”고.
 
유위有爲란 있을 유 자, 이룰 위 자,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하는 걸 말한다.
반면에 무위이화無爲以化라고 할 때 무위無爲는 아무 사념이 없이 자연 그대로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수행할 때는 정공이 됐든 동공이 됐든, 허리를 딱 펴고 의지를 갖고 잡념을 끊으면서
집중하려고 하는 유위법으로 하면서 무위법으로 들어간다.
정공의 수행 원리가 동공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단 말이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냥 인위적으로 분위기에 따라가면 된다.
도장에서 북을 치더라, 또는 흥겹게 음악을 틀어 놓고 하더라,
아 그런데 그냥 어깨춤이 나오더라 하면, 거기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하면 된다.
 
처음에는 유위적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런 몸짓으로 화해간다.
그러면서 자발도공으로 가는 것이다.
도공이 된다고 하는 건 바로 이렇게 자발도공으로 가는 걸 말한다.
 
자발도공하는 걸 보면, 도공을 하다 말고 슬픔이 터져서 우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이 시대에 자발도공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도공을 하다가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난다,
죽은 동생이 생각난다 해서 운다. 심정 속에서 뭔가 폭발한 것이다.
그럴 땐 실컷 울게 내버려둬야 한다. 그래야 정화가 된다.

 
 
심법이 바르고 도심으로 충만한 법사가 있어야
문제는, 상제님 말씀대로 도공할 때 그 전체 분위기나 환경을 주재하는 법사法師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제님이 문공신 성도를 49일 동안 방에다 앉혀놓고 수도를 시키셨다.
상제님은 건넌방에 계시고, 49일 동안 전혀 잠을 재우지 않으셨다.
졸면 “공신아!” 하시면서 불벼락을 내리고 호령하셨다.
진주 도수 공사에서 상제님이 법사 노릇을 해 주신 것이다.
 
이렇듯 도공할 땐 반드시 법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부를 주장하는 사람의 정신이 껄이 덜 벗어지고 사심 있고 기운이 더러우면,
거기서 마魔가 들고 부작용이 난다.
정공, 동공을 막론하고 도공을 하다가 도장에서 불상사가 생겼다 하면, 그건 도장 책임자의 문제다.
 
하지만 법사 노릇 하는 사람의 심법이 바르고 도심으로 충만하면 마가 전혀 안 든다.
 
태사부님과 내가 있는 데서 도공하다가 잘못된 것 있는가?
간혹 금방 죽을 것같이, 간질병 환자 이상으로 발광을 하다가도 털고 일어나면 아무렇지도 않다.
 
 
진리적 충동을 바탕으로 도공을 하라
또한 도공이라는 건 도박식으로 한 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생활 속에서 늘 해야 한다. 상제님 태모님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도심道心과 하나 되어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걸어가다가도 오른발을 디디면서 “아, 내 몸에 도공 기운이 내려온다.” 한순간에 문득 그걸 안다.
팔짓을 하다가도 “아, 내 몸에서 기운이 돌아간다.” 이걸 스스로 안다.
 
그러니 앉아서 흔드는 것만이 도공이 아니다. 평소에 몸짓하는 것 하나하나가 도공이다.
 
또 상제님 도를 받아 느끼고 의식이 터져서 “나는 상제님 도의 화신이다!”
이런 기개, 의지, 확신, 믿음, 진리적 충동이 생길 때, 진정으로 도공신을 받는 것이다.
 
진리적 충동이 전혀 없는 사람이, 사상적 체험이 전혀 안 된 사람이 도공을 해서 힘을 좀 받았다,
도공신을 받았다고 해서 다 끝나는 건가?
상제님 새울 도수의 궁극이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 육정육갑 지혜용력’ 아닌가.
 
‘지혜용력’ 하면 사물을 바르게 잘 보고 처사도 잘 해서 안 될 일 되게 하고,
될 일을 안 되게도 하는 무량한 지혜의 힘을 쓰는 것이다. 때로는 역발산 기개세力拔山氣蓋世로 말이다.
 
따라서 진리적 충동이 바탕이 되는 도공이라야 살아 있는 도공이다.
항상 진리 공부를 바탕으로 사상무장을 해야 개벽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도공도 잘 한다.
 
이것이 도공 얘기의 결론이다.
오늘 도공 말씀은 이것으로 마친다.


<증산도 종도사님 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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