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성도가 여쭈기를 “전해 오는 비결(秘訣)에
모악산 아래에 있는 금부처가 능히 말을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세간에 금부처의 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사옵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표는 나와 큰 인연(大緣)이 있느니라.
육장금불(六丈金佛)이 화위전녀(化爲全女)라.’ 하였나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


내가 미륵이니라.
금산사 삼층전 미륵은 손바닥에 불(火)을 받았으나 나는 입에다 물었노라.


옛날에 주대명(朱大明)이

금산사 미륵에게 기도하고 소원을 이루었으되


민중전(閔中殿)은 각처의 사찰에 빠짐없이 기도하였으나
오직 금산사에는 들지 못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2:66)


주대명은 주원장을 말한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고려인인가?

경상도 웅천에서 태어났다는 주원장의 어린 시절
 
백린박사 기고문
(본 글은 장문이라 2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이 제목은 필자가 만든 말이 아니고, 주원장의 탄생설화가 전한 말이다.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사실일까 많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필자가 10여 년 전 서울의 단국대학교에 있을 때이다. 인사동의 골동상가를 둘러 보다가
한고서점에 들려서 1894년에 간행된 조선기문(朝鮮紀聞)이라는 책 한권을 사가지고 왔다.
이 책 중에 중국의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탄생설화가 실려있었다. 일본은 갑신정변(1884년)이후
조선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조선의 역사와 언어 그리고 사회사정에 대하여 면밀히 조사 연구해왔다.
 
그 조사목적이 한국침략을 전제로 한 일이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기문>도 아마 그러한 목적에서 편찬된 하나일 것이라고 본다. 어째든 중국에서도 전하지 않은
주원장의 탄생일화가 어떻게 조선에서 전해지고 있었을까, 재삼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놀랄 일은 명태조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설화라는 것이 사실과는 거리가 좀 먼 황당무계한 전설이기 쉽기에
큰 기대 없이 몇 번 읽어 보았을 따름이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국의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하면서, 역사적 침략을 앞세워
한국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과거 정복왕조이었던 여진(女眞) 청나라의 계승인지,
아니면 당, 송, 명의 한족의 역사적 정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아는지 의심이 앞서게 된다. 이 점
한. 중의 역사관(歷史觀)을 확실히 정립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에 이에 관한 자료를 다시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조선기문>을 다시 꺼내어 주원장에 대한 설화를 읽어보니 거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 같이 보여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주원장의 탄생설화는 신화가 아니다.
그것은 먼 옛날 조선의 농촌에서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말해오던 전설이 분명하다.

그 전설을 <조선기문>의 편찬자가 채집하여
일본어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널리 읽혀지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이제 필자는 일본어로 기록된 주원장의 탄생설화를 우리말로 전문을 번역하여
일반인들이 알게 하는 동시에 그것의 사실여부를 밝혀 보려는 것이다.


주원장.jpg
▲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주원장의 탄생과 성장>

고려 말 경상도 웅천(熊川)의 내웅산(熊內山) 밑에
주씨집(朱家) 노부부가 오막살이 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학식과 도가 높은
스님 한 분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보니 그 집에서 서기(瑞紀)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 찾아 들어가 본즉 8순 노부부가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살고 있었다.
스님은 노인에게 말하기를 머지않아 이 집에 귀동자가 태어날 것입니다. 라고 일러 주고 그 집을 떠났다.
 
얼마 후 할머니는 회임하여 10개월 후에 아들을 출산하였다.
그래서 어린아이 이름을 주언장(朱彦長)이라고 하였다. 친척과 마을 사람들은
노부부의 사정을 가엽게 여기고 먹을 것과 의복을 갖다 주어 노부부와 어린아이는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가 5살 되던 때 고승이 다시 찾아와 말하기를 이렇게 가난한 집에서
이 아이를 키울 수가 없으니 산중의 절로 데려가 양육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언장(彦長)은 매우 총명하고 민첩하여 학문과 기예가 뛰어났으며 감히 따를 자가 없었다.
언장(彦長)은 15세 때에 절에서 내려와 여러 도를 돌아다니다가 종래 환속하여 장군이 되었다.
조선사람들이 말하는 주원장은 뒷날 명나라를 세워 태조가 된
바로 주원장(朱元璋)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과연 사실을 전하는 실화인지 아니면 어떤 새로운 동기에서
호사가들이 만들어 낸 말인지는 지금에 단정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전설이 역사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한중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문제이므로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안이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까지 발표를 주저해왔다.
 
주원장(1328-1398)은 정복왕조(征服王朝)인 원나라를 축출하고 명나라를 세운 태조 홍무황제이다.
그런데 그의 탄생설화가 어떻게 조선에서 전해져 왔으며 더욱이 놀라운 일은 주원장이 고려출생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 중의 역사는 크게 바꾸어져야 할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중대한 문제를 한 두줄의 글로써 결론을 짓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해를 두고 이 설화의 문제를 생각해 왔다.
설화나 전설은 사실과 거리가 먼 옛말이기 때문에 자칫 무시되기 쉽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역사적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역사의 초창기나, 새로 나라를 세운 창업의 주, 제왕에 대한 탄생설화는 흔히
신화 또는 전설로 세속에 전하여 오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정사라고 하는 사마천사기(史記)의 초장에 1.)
삼황본기(三皇本紀) 2.) 오제본기(五帝本紀) 3.) 하본기(夏本紀)등이 있지만
그것들은 신화 또는 전설에 불과하다. 필자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고대에 있어서 신화나 전설은 국사(國事)와 밀접한 관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말하자면 건국시조의 탄생설화 혹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말하는 예언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신화 전설은 세속이 서로 전하고 전하여 실사(實事)가 되고 있다.
까마득한 옛날 암울한 실정들은 그 전하는 바의 자료의 빈약으로 결국 신화 전설에 의거하여
역사를 작성할 경우가 많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논(論)에서
말하기를 "신라의 박혁거세와 석탈해는 알에서 나왔다고 하고 김알지왕은 하늘에서
금궤에 넣어 내려 보내졌다고 하니 괴이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신화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서 나라의 정사(正史)에 그대로 올려져 있다.
수  백 년 전에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지금에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을 유적과 유물에 의하여
판단하거나 아니면 전하는 설화 전설들이 자료에 의거하여 판단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이 설화가 지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결코 그대로 보고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설화의 사실여부를 극명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조사와 분석이 있어야 하겠다.
첫째 이 설화가 언제 발생하였느냐는 연대측정이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조선기문>이
간행된 1894년 이전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청일전쟁(1894년)을 앞에 두고 날조된 유언비언이
아니냐고 의심하겠지만 그것은 설화의 내용과 격이 맞지 않는다.
 
둘째 설화가 발생한 지역문제이다.
설화의 주인공인 주원장의 출생지를 분명히 경상도 웅천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숙권의 고사촬요(攷事撮要)의 경상도 편에 보면 웅천(熊川),별호(別號) 웅구,
웅산(熊口, 熊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숙종 이후에 작성된 지방지나 지도에는 웅천이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국의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냈던 1592년의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가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런데 설화 자체가 전하는 그 동기와 주제가 너무나 확실하다.
사실 먼 옛날의 설화나 전설은 그 시대에 따라 특수한 패턴을 보여준다.
셋째 설화의 형식이다. 시대에 따라 신화 전설이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여 주고
있으므로 형식에 따른 년대 측정을 가늠하게 된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한국의 신화 전설은 그 형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대분할 수 있다.
1.) 단군신화와 같이 동물과 짝을 맺는 선사시대의 신화.
2.)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탄생을 말해주는 고대의 난생설화.
3.) 고려왕건 태조의 탄생설화 또는 중국의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옥루몽(玉樓夢)의 주인공 양창곡의 탄생을 말해주는 불교적인 예언 설화.
4.)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이라고 그의 꿈을 해몽한 석왕사의 주지 무학대사가 말한
조선시대의 꿈 해몽 설화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설화의 시대적 특징으로 볼 때 그것은 분명히 고려의 불교적 예언 설화의 형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주인공을 명태조 주원장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어릴 때 주원장>

주원장의 탄생설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는 아직 많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설화자체만을 가지고 분석하여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본격적으로 주원장의 전기를
작성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탄생설화의 진위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대하여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관련된 서적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과문한 탓인지 그의 출생과 소년시절을
자세히 말해주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 7월 어느 날 체스트낱 몰 근처에 있는
반센노블 서점에 들렀다가 「imperial china: 900-1800. by, e,w.mote. (harvard press. 2003) 책 한권을 샀다.

이 책 중에 명태조 주원장의 전기가 실려있는 것을 보고
탄생설화의 진위를 감정하는데 참고가 될 것으로 알고 크게 기뻤다. 주원장의 전기는 "zhu yuanzhang: boy to young man." chepter 1; the young budhist novice. chepter 2; the wandering monk. chepter 3; the red turban uprising.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주원장의 전기는 1949년판과 1965년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1949년판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갓 설립되었을 때의 것으로 재래의 한자로 씌어져 있으며,
 1965년판은 중국에서 홍위병의문화대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지금 중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소위 간자(簡字)로써 출판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원장의 전기가 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을 기해서
출판되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 있어서 타민족에 의한 최후의 정복왕조인
청나라가 망한 것은 1911년이다. 그리고 그 후 서구열강의 침투와 일본제국에 의한 1932년의 만주건국,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후 국공합작에 실패한 중국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사실 중국은 아편전쟁(1840년)이후 1945년까지 100년간은 열강의 반 식민지적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이 외세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으로 한족정통의 정권을 수립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1949년이다. 그렇다면 모택동의 신정부는 청조(淸朝)이전의 명나라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러한 뜻에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전기를 급히 출판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제 가장 최근판이며 역작이라고 하는 주원장의 전기와 탄생설화를 대조하여 거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찾아보자. 그런데 필자는 1965년에 출판된 원본을 찾지 못해서 그 영역본을 참고하였다.
영역자의 말에 의하면 "아래의 발췌문은 1965년 판에서 주원장의 biograpy의 처음 3 chapter를 번역해 온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주원장의 전기를 읽어 본즉 그가 원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과업에
나선 1348년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반하여 그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에 대하여는 그 기술이 허술하기가 짝이 없다. 어떤 대목을 보면 그것을 마치 어느 고전에서
얻은 문구를 그대로 부합시킨 것 같은 의심마저 가지게 된다.
 
전기의 부피가 적지 않아 여기에 그 원문을 다 옮길 수 없어 "소년기에서 청년기"에서 요점만을 추려
그의 소년기의 사정을 살펴 보기로 한다. 전기 작가는 "어린 불교 수련자" 라는 소제목하에서 1340년경
중국의 안휘성 지방을 휩쓴 재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4년 (1344년)에 huai river (淮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홍수와 가뭄 그리고 메뚜기의 내습, 거기에 더하여 전염병(페스트)이 돌아 큰 재난을 당했다.
"여러 해 동안 비는 오지 않았고 심은 곡식들은 타고 말라 노랗게 되고 밭은 거북이등 같이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가뭄에 따른 기우제와 메뚜기 떼가 날아와 곡식을 다 먹어버린 곤충에 의한 재해를 설명하고 있다.
 
이 대목은 마치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에서 그 설명을 듣는 것 같다.
그런데 가뭄이 있자 다음에는 염병이 돌았다. "haozhou 지방의 taiping의 zhonghi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떼거지로 염병에 걸렸다. 여러 나물과 나무껍질로 생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자 곧 죽어 나갔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주원장의 아버지는 이 지방에 농토가 많았고 살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이곳으로 이사왔다. 주원장의 아버지의 이름은 주우시(zhu wusi)이며, 어머니는 천 엘밍(chon erning)이라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맏형이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작가는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guzhuang 지방에 zhu wusi(우시는 양자강 하구의 지명이다.) 집에서도 반달이채 못되어 3명이 죽었다. 아버지 zhu wusi는 64세에 죽었고 9일째 되던 날에는 장남인 zhu chongsi가 죽었고 22일에는 zhu wusi의 아내인 chen erning이 죽었다. 둘째 아들 chongliu와 막내 아들 yuan, zhang은 부모와 형이 죽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주원장은 너무나 가난하여 아버지의 장사를 치를 돈도 시신을 묻을 손바닥만한 땅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원장이 몇살 때 부모와 형이 전염병으로 죽는 비참한 일을 당했는지,
전지작가가 밝혀주지 않았고 또 작은형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 후로 부모와 형에 대한 말이 일체 없으니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주원장의 전기에서 그 어릴 때의 사정을 요약하면 주원장은 갓 나서부터 줄곧 앓아왔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를 절에 데려다가 중이 되게 하려고 결심하였다는 것. 안휘 지방에 전염병이 돌아 늙은 부모와
형이 전염병으로 죽는 참변을 당했다는 것. 그 후로 의지할 곳이 없어서 걸식하며 거지 행각에 나섰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그렇다면 전기작가가 말해 주는 주원장 어릴 때의 형편과 탄생설화가
전해주는 내용이 골자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황주사의 중이 된 주원장>

이 장에서는 주원장이 어떠한 동기에서 중이 되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전기작가의 말에 의하면 주원장은 갓 날 때부터 줄곧 앓았기 때문에 살 가망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는 꿈을 꾸었는데 아들아이는 오직 부처님만이 살릴 수 있다는 현몽이었다. 아버지는
주원장을 중이 되게 하려고 절로 찾아 갔으나 절에는 한 명의 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들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때마침 아이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 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아기는 정말 울고 있었고, 아내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이때부터 아기는 젖을 먹기 시작하였고 몇 일이 지나자 불렀던 배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아기는 자라면서도 계속 병을 앓았기 때문에 부모를 이만저만 걱정시킨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꿈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아들 주원장을 절에 데려다가 부처님께 바치겠노라고 약속했다. 주원장의 아버지는 아들을 황주사(huangju temple)의 고빈(gao bin)스님에게 보내서 중이 되게 하면 몇 년 전 꿈에 있었던 일로 하여 아들을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도 지키게 되고 또한 세끼 밥을 먹을 수 있게 됨으로 그대로 죽는 것보다 낳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의 아버지는 아들을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이행치 못하고 그만 1344년에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가족이 전염병으로 죽은 후 의지할 곳이 없어 거지 행각에 나섰던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탄생설화에서 고승이 주원장은 절에서 키워야 한다는 전설로 변한다.
 
탄생설화 주원장전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의 꿈은 주원장은 부처님만이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섭리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어째든 주원장을 절로 데리고 간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같은 동네에 사는 왕씨 부부였다. 주원장에게 자주 밥을 주었던 왕씨 부인은 주원장의 딱한 사정을 보고, 절에 들어가서 중이 되면 우선 의식주는 해결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전기의 작가는 「떠돌아 다니는 중」 (wandering monk) 이라는 소제목하에서 주원장이 황주사의 중이 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왕씨 부부와 주원장은 향과 초 그리고 약간의 제물을 가지고 황주사의 고빈스님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머리를 깍고 남이 입던 헌 법복을 받아 입고 합장 배례하는 법과 불공 드리는 절차를 배우며 중이 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전기작가는 주원장이 중이 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consequently, in the nineth month the huangju temple gained a new young novice."

주원장이 황주사에 들어가 중이 된 것은 전후사를 감안하여 볼 때 16세로 추정된다.
중이 된 그는 절간의 마루바닥을 닦고 불을 피우고 종을 치고 밥을 짓고 상좌승들이 입던 옷을 빨고 절의 모든 잡일을 도맡아 해야했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볼공 드리는 예식을 배워나갔다.
 
주원장이 중국의 황주사 중이 되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에 있어서 승려는 이조시대의 중과 같은 신분이라 천하게 보였다.
남송의 유신이었던 사방득(謝枋得)은 원나라 때의 인간 존비(尊卑)의 사정을 10으로 구분하여 말하기를......
7장(匠)8창(娼)9유(儒)10개라고 하였다.
 
유목민족인 몽고족 원나라는 유교와 불교 같은 종교에 대해서는 큰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장의 라마교와 천진교(天眞敎), 백운종(白雲宗)은 보호를 받았지만 정토교(淨土敎)의 일파인 백련교(白蓮敎)는 탄압을 면치 못했다. 그러니 시주로 나선 탁발승은 거지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

황주사의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황주사는 집세를 받아 꾸려 나갔다. 그 해에도 재앙이 너무 심했던 것으로 집세를 제때에 받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절의 모든 중은 밖으로 나아가 시주를 받아와야 했다. 절에 들어온지 50일 밖에 안 되는 풋내기 중 주원장도 밀짚모자를 쓰고 시주그릇을 들고 중옷으로 차리고 나왔다. 말로는 시주라고 하지만 그것은 구걸이었다.
 
걸승이 된 주원장은 남, 서쪽이 형편이 조금 낳다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향해 하염없이 걸었다. 일정한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세끼 먹을 것을 찾아 발길 닿는 데로 떠돌아 다녔다. 전기작가는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so because his only objective was to get enough food survive........ he leaned all the tricks of begging how to sleep in the mountains and in the wilds and to bear all the discomforts of wind and cold."

이후의 전기작가의 말은 믿어도 될 것 같다. 그러면 주원장은 왜 그렇게 호된 고생을 사서 해야 했는가이다. 16세이면 세상물정을 어느 정도 알만한데 왜 거지승으로 구걸하면 산과 들판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고생고생 했는가 하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위대한 대업을 성취하기 위하여는 원나라의 시조 칭키스칸과 같이 고생고생하여 위대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언어가 잘 통하지 못했고 그 지방의 지리에 어두었고 중국의 문화에 익숙치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앞서게 된다. 창업의 꿈은 처음부터 가지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타계하면서 위대한 꿈은 자라게 마련이다. 주원장에게는 불운한 운명을 당하여 7전 8기하면서 그것을 딛고 일어설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장은 3,4년 동안(안휘의) 서쪽지방을 돌아다니며 그 지방의 천민들과 같이 지내면서 백련교의 신앙을 받아드리고 비밀결사의 일원이 되었다.이렇게 볼 때 주원장이 15세 하산하여 각도를 돌아다녔고 하는 설화의 말과 주원장이 중국의 안휘성에 있는 황주사의 중이 되었다는 그 시기가 거의 같은 때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역사적 사실을 설명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biography of zhu yuanzhang (주원장전)는 최근의 역작으로 가장 믿을 만한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칭찬하고 있지만,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설명에는 여러 곳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고향산천인 안휘성 지방에서 걸승으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3,4년간 방황하였으며, 둘째는 걸식하는 거지중으로 누구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학문과 무예를 익힐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원장은 불법을 공부하기 위하여 중국의 강남지방으로 들어가 절을 찾아 중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라의 최치원 선생도 12세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중국의 당나라로 건너가 학문에 대성하였던 것이 아닌가.
 

(2부)에 이어집니다.
자료제공 :
http://cafe.daum.net/dobulwo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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