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⑥

신채호 "2200년전 세계를 뒤흔든 유라시아 대초원의 흉노는 조선의 속민이었다"

<흉노 제국 이야기(상)

 

흉노는 어떤 나라인가

흉노는 스키타이를 잇는 기마유목민의 국가로 BC 4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BC 3세기말 몽골고원을 통일, 최초의 스텝제국을 건설하였다. 기마유목 국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흉노제국은 그들만의 기마군단의 가공할 전투력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런 흉노의 세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오늘날 국력을 말할 때 국민소득(GDP) 개념을 흔히 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2012년 GDP는 15조7천억달러다. 중국 8조 2천억달러,

일본 6조달러, 독일 3조 4천억달러 등이다.

 

그리고 프랑스·영국·브라질·러시아·이탈리아가 2조 달러대,

인도·캐나다·호주·스페인·멕시코·한국이 1조 달러대 국가다. 한국은 지난 60년간 경제개발을 통해

세계 240개 국가 중 15위의 대형 국가를 건설했다.

 

우리 앞의 14개국 중 우리보다 면적이 작은 나라는 없다.

우리 땅의 최소 2.4배(영국)에서 최대 170배(러시아)까지다. 인구가 우리보다 적은 나라도 호주 정도이며

중국은 우리의 27배, 인도는 25배다. 여하튼 한마디로 말해 한국은 세계 경제의 기적을 일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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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면 과거 강대국들은 우선 면적에서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땅이 넓어야 강대국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제국의 최대 영토가

600㎢ 안팎이며, 로마제국의 최대영토는 기원후 2세기 초 스페인·터키·북아프리카를 포함해 650만㎢에 달했다.

 

중국이 가장 융성했던 한나라 한무제 시대 최대영토는 720만㎢였다.

흉노제국의 지배면적이 620만㎢에 달했다하니 어느 정도 강대국이었는지 능히 가늠해볼 수 있다.

흉노는 면적뿐 아니라 영향력면에서도 그에 걸맞게 막강해 유라시아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겼다.

흉노는 진시황, 한고조, 한무제 등 최강의 중국 왕조와 당당히 맞섰고,

 

이러한 흉노의 기마군단에 대한 공포는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더 나아가 흉노의 서진은 유라시아 역사를 바꿔 놓았고, 서진 과정에서 새로이 형성된 흉노의 후예 훈족 또한

그랬다. 이처럼 흉노는 기마유목국가의 전형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국가들이 유목민에 의해 탄생하게 됐다.

터키 교과서의 흉노 세력지도
터키 교과서의 흉노 세력지도

2. 흉노에 대한 역사 기록

기마유목민은 정착민들과 달리 그 삶의 특성상 역사기록이 취약하다.

흉노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들 자신이 기록한 역사기록은 거의 없다. 따라서 사마천의 ‘사기’에 의해

그들의 삶을 추측해 볼 정도다. 사기의 흉노열전(권110)이 흉노에 관한 최초의 역사기록이다.

“흉노는 하후씨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불렀고, 산융·험윤·훈육 등 여러 종족을 포함한다.

그들은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세력범위는 경계가 분명했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목축·사냥을 직업으로 삼고 긴급한 상황에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싸움이 유리할 때에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에는 후퇴했는데 도주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이는 스키타이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기록들을 연상시킨다.

흉노의 王은 선우라 불렸는데 최전성기는 ‘두만’과 그의 아들 ‘묵특’시대이다.

두만은 태자 묵특을 폐하고 이복동생을 태자로 세우려고 묵특을 알타이지역 동서교역로의 강국 월지에

볼모로 보낸 후 묵특을 제거하기 위해 월지를 공격하지만 묵특은 흉노를 탈출하여 만 명을 거느리는 기병장군이

된다. 묵특은 소리나는 화살(명적)을 만들어 자기가 먼저 명적을 쏘면 군사들이 그곳을 따라 쏘도록 명령했다.

 

묵특은 부하들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사냥터에서 자신의 명령을 따라 쏘지 않은 자를 잡아 죽였다.

다음은 자신의 애마, 그리고 애첩에게 차례로 명적을 쏘았고, 차마 따르지 못한 자는 죽였다.

그런 후 두만이 타고 있는 말에 명적을 쏘았을 때 부하들은 다 따라 쏘았고, 마지막으로 아버지 두만 선우에

명적을 날려 그의 부하들이 두만을 죽이게 하고 묵특은 흉노의 왕이 됐다(BC 209).

당시 흉노와 더불어 세력을 떨치던 동호가 묵특에게

흉노의 보배 천리마를 달라고 청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묵특은 천리마를 보냈다.

동호는 다시 선우의 연지(후비) 중 한 사람을 보내라 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묵특은 연지를 보냈다.

 

그러자 동호는 흉노와의 사이에 있는 이천여리의 버려진 황무지를 차지하겠다고 했다.

신하들은 주어도 좋고 안주어도 좋다는 식으로 간언했으나 묵특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그들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은 모조리 참수한 후 동호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이어 월지·연 등을 차례로 공격하여 흉노의 빼앗겼던 땅을 모두 회복했다.

BC 202년 황제로 즉위한 한고조 유방도 바로 이 흉노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통일을 이룬 유방은 흉노를 정복하기 위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때는 겨울이라

몽골지역에는 매서운 추위와 눈이 엄습했다. 영특한 묵특은 패배를 가장해 한나라군을 계속 유인했고,

 

한나라 보병 32만은 전군이 모두 추격에 가담했다.

이때 묵특의 정예부대 40만 기병이 평성에서 유방을 포위했다. 보급과 구원병이 끊긴 절대절명의 순간,

유방은 몰래 묵특의 연지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 구명운동을 했다.

 

이에 연지가 묵특에게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해도 선우께서 가서 살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설득하여

흉노군이 포위를 풀게 되었고, 유방은 장안으로 도망쳤다.

 

이후 흉노와 한 사이에는 ①한 황실 여인을 선우의 연지로 바친다

②매년 한이 비단·솜·식량 등을 바친다 ③형제의 맹약을 맺고 화친한다는 내용의 한나라로서는

굴욕적인 조약이 맺어졌다. 그만큼 흉노의 세력은 막강했다.

흉노는 우리와도 연계관계가 있다.

흉노는 진나라·한나라/선비/고조선·고구려와 시차를 두고 직간접 관계를 가졌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흉노·선비·몽골은 아(我)에서 분리…여진·선비·몽고·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이었다.

흉노는 조선의 속민이었다.”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 돌궐·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다”라고 썼다.

 

윤치도의 「민족정사」는 “3대 가륵단군시절에 요동태수 삭정을 징계하여 약수변에 유배하였는데

그들이 후에 흉노족이 되었다”고 했다. 또 가야는 1970년대 이후 발견된 수많은 유물로 미루어 보아 흉노계가

건국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앞으로 우리 고대사의 올바른 복원을 위해 중국을 비롯한 스텝지역 일대의 고대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급하다. 무엇보다 중국 25사를 비롯한 고대문헌에 대한 전문적인

번역작업이 조속히 이루어져 한민족 고대사 연구에 하나의 의미있는 전기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비로소 세계무대에 등장해 기적을 일구어 낸 오늘날의 우리 한민족,

그 기개와 DNA는 어디서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동아시아 최강국 고조선, 이어지는 기마유목국가의 건설과 세계 제패 등과는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