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客家族하카족) 이  중국의 진정한 한족이다.



 원래 중국 한족이라는것은 역사적으로 없다.

이들은 모두 동이족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하카족도 오랜 세월과정에서 혈통이 섞이어 알수가 없게되었다.

 

타이완에 살고 있는 한족의 한 갈래.
북부의 구릉지대와 핀텅(Pintung)구역 남쪽에서 살며 주로 농사를 짓는다.
객가족이라고도 하며 타이완 인구의 약 13%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출처] 하카족 | 두산백과

 

약 700~1,000년 전 중국 북부와 중부에서 푸젠성[福建省],

광둥성[廣東省] 등의 동남부로 내려온 한족 일부분이 1700년대 초 타이완으로 이주하여 형성되었다.

 

한족으로서의 일체감과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고유한 문화를 잘 보존해왔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전족을 하지 않았으며, 언어는 광둥어와 비슷한 하카중국어와 중국 표준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대부분 불교, 유교, 도교와 조상 숭배가 혼합된 형태를 신봉한다.
중국의 전통 예술을 즐기기도 한다.


[출처] 하카족 | 두산백과

 

푸젠성(福建省) 토루(土樓)는 15세기~20세기에 걸쳐 지은 46채의 가옥으로,

타이완 해협 내륙에 있는 푸젠성 남서쪽에서 120㎞ 떨어진 지역에 있다.

쌀, 차, 담배 경작지 사이에 흙으로 지은 토루는 방어 목적의 집단 주택이다.

 

여러 층으로 된 토루는 안쪽에 개방형 마당이 있고,

마당을 중심으로 원형이나 사각형 모양으로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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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루의 출입구는 단 하나이며, 1층 이상에만 바깥으로 난 창문을 만들었다.

요새화된 높은 진흙 외벽에 기와지붕을 얹었고 널찍한 처마가 있다.

한 채의 토루에 최대 8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왜 그들을 중국의 유태인이라 부를까? (客家族:하카족)

 

하카족은 중국 안에서도 아주 독특한 민족이다.

주거 형태와 생활 방식, 교육방법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
하카족은  또 중국의 역사를 이끌어온 수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주자학의 대부 주희, 중국 근대학의 아버지 손문, 등소평, 이붕 같은 사람이 하카족의 출신이다.


중국의 복건성을 근거지로 하는 하카족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그들의 주거공간 토루(土樓)이다.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외형에, 대도시도 아닌 산악지대에, 그것도 전투시 방어용 건물이며,
몇 백년 전에 흙으로 지은 건축물에 아직도 수십, 수백 명씩 생활하고 있다.

 
하카족은 황하강 유역 중원 땅에 살던 한족의 한 부류라고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외래 이민족으로 보기도 한다.

하카족은 오랫 세월을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한 사람들 이였다.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면서도 교육열, 생존력, 혈족 중심의 단결력이 강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전투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이들이 생존해온 모습은 유태인과 흡사했다.


1971년 홍콩에서 1차 세계객속총회 대표대회 즉
세계 하카 지도자들의 모임이 시작된 이래로 대반, 싱가폴, 중국 등에서 49개국으로부터
2천여명의 대표가 격년으로 모여 정보교환, 자금협력을 논의하고 조직의 단결을 과시하고 있다.


중국대륙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카인들은 약 6천만명이 되고,
주자학의 주희, 손문, 등소평, 염검영, 이붕, 타이완의 리등휘, 싱가포르의 리광요, 고척동 같은
사람들이 모두 하카인이다.

 

특히 80년대에는 중국인이 만는 세 나라 즉 중국, 타이완, 싱가포르의 지도자가 모두 하카인이었다.
경제계 또한 하카인들의 역할이 대단하다.

 

인도네시아의 아시아 중앙은행 그룹의 임소광, 타이완 플라스틱 그룹의 왕영경,
태국의 방콕은행 그룹의 진유한, 싱가포르 화교은행 그룹의 진진진,
홍콩성도일보 그룹의 호선 등이 하카계 재벌이다.

이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적인 네트워크는 유태인과 비교할 만하다.
싱가포르는 하카인들이 세운 나라이다.

 

1959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자치구로 편입되었으나
리광요는 1965년 하카인 조직의 힘을 바탕으로 분리 독립에 성공한다.

 

그는 하카인을 중심으로 치안을 확보하고 정보를 독점, 경찰국가를 형성한다.
싱가포르 국민의 75%가 중국계이다. 그러나 그 중에 하카인은 5% 남짓에 불과한 소수파이다.

그런데도 2대에 걸쳐 수상을 배출하며 나라를 경영하고 있다.

 

유태인들이 나라를 잃고 유량하면서도 그들의 언어와 종교 그리고 문화를 지키고,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했듯이 하카인들도 자신들이 살던 중원 땅을 떠나 남으로 남으로 이동,
방랑하면서도 그들 고유의 언어와 관습, 문화를 유지하다 싱가포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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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의 집 토루는

천원지방 사상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우주관이 표현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원래 천원지방의 천제문화는 동이족의 문화이며 천지인 삼신사상이 밑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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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본적으로 원형모양이나 사각의 모양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물이 있고, 바람이 불어 습하지 않은 곳을 택했다.
인간 뿐만아니라 동식물이 자라기 좋은 조건을 지닌 땅을 골랐다.

 

하카족의 토루는 생활공간이나 주거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외적의 침입을 막는 성벽 역할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표적인 토루인 승계루는 1709년에 짓기 시작하여 3년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외벽의 직경이 73미터, 원주위가 230미터 정도 높이 12미터,
대지 면적이 5,376평방미터에 이르는 대표적인 원형 토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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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루는 커다란 원형 안에 네 채의 건물이 동심원을 그리며 들어서 있다.
건물 사이사이에는 몇개의 공동우물이 있고 돼지와 오리의 가축우리가 있다.


제일 안쪽의 1층짜리 작은 원형 집은 관음보살과 조상을 모신 사당으로 쓰인다.
최대 600명이 살았었고, 현재는 360명이 살고 있다.

 
이들의 특별한 주거형태만큼 독특한 것이 교육비를 공동 부담하는 교육제도이다.
이들이 얼마나 교육과 학문을 중요시 했는가는
영정현 호씨 사당에 돌로 만든 붓모양의 석필림을 보면 알 수 있다.
과거에 합격하면 세우는 석필은 본인의 영광은 물론 후손들의 명예와 자존심의 상징이다.

 


2002년 2월 Morning Calm [대한항공 소식지-세계의 마을] 요약

 

자료출처 : http://blog.naver.com/nare7733?Redirect=Log&logNo=120061448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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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젠성 토루는 중국 남동부 산악 지대에 세워진 가장 대표적이며 가장 잘 보존된 토루이다.

흙으로 만든 방어용 주택인 토루는 상당히 큰 규모에 기술은 정교하다.

 

13세기~20세기에 걸쳐 비옥한 산간 계곡에 지어졌으며, 오랫동안 유지된

공동 정착지라는 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토루와 관련된 방대한 기록은 7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의

흙 건축 예술의 탄생과 혁신, 발전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정교하게 구획된 내부 구조,

매우 잘 꾸민 외벽은 공동사회의 정신적·물질적 요구를 잘 수용하고 있으며,

외진 곳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도의 사회로 발전해 가는 훌륭한 방법을 잘 나타낸다.

거대한 건물들과 주변 경관의 관계에는 풍수지리와 경관미와 조화에 대한 개념이 구현되어 있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신석기 시대(약 6,000년 전) 이래로

중국, 중앙아시아, 동아시아에 흙을 이겨서 만든 공동주택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남동부에서의 사회적·경제적·문화적 발전의 오랜 과정에는 북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서진(西晉) 왕조(265~317) 시기에

계속되는 전쟁과 가뭄으로 중원에서 남쪽으로 사람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푸젠에 도착했으며,

푸젠은 이들이 가져온 중원의 선진 문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후기(7세기~8세기)에 중원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시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들 대부분은 북쪽에 있는 푸젠과 장저우(漳洲)의 해변을 따라서 취안저우(泉州)와 푸저우(福州)로 갔다.

 

푸젠의 남동쪽(장저우와 광저우)에 정착한 사람들은 푸라오(福老, 푸젠 성 사람)라 불렸고,

이들은 토착민들과 어울리면서 민난(푸젠 남부) 사투리를 썼다.

푸라오의 후손들 중 일부는 더 먼 외국으로 나갔다.

송나라 말기와 특히 남송 시대(1127~1279)에

북방 민족인 금나라 사람들이 중국 북부를 장악하면서 한 번 더 중원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왔다.

이들은 하카족(客家族)으로, 중원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왔다.

 

지금 하카족은 장시성(江西省), 푸젠성, 광둥성(廣東省), 하이난성(海南省), 타이완으로 퍼졌으며,

또한 세계 각국에 사는 수백만 명의 화교가 되었다.

푸젠성 토루는 송원 시대(11세기~13세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14세기~15세기(명나라 초기와 중기)에 발전했고, 17세기~20세기 전반기(명나라 후반과 청나라.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가 절정기였다.

 

최초의 토루 건물은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에 장방형이나 정방형이었으며,

장식은 수수하고, 돌로 된 기초 부분이 없었다. 14세기 후반~17세기 초반(명나라)까지 훨씬

큰 토루를 세웠는데, 이는 푸젠성에서 농업이 발달하면서 지역이 부유해져 도적의 약탈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17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기에는 담배와 차 생산이 증가하면서 토루의 규모가 더 커지고,

넉넉한 살림을 보여 주듯 장식이 많아졌다. 대부분의 토루에 대해서는 기록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13세기부터 토루를 만든 가문의 이름과 건축가 이름도 알려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 지역에서 같은 가문이 20세기까지 토루를 소유하고 있었다.

비록 토루는 공동 거주지이며 씨족 조직을 강조하고 있으나 20세기까지 대부분은 부를

가진 개인이 축조하거나 소유했다. 사람들은 초기에는 땅과 농업, 오리나 소를 길러 부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무역과 산업으로 부를 쌓았다. 17세기에는 선박업과 차, 후에는 담배 가공으로 돈을 벌었다.

예를 들면, 홍컹(Hongkeng) 중심지에 있는 초기 토루는 린융쑹(Lin Yongsong)이라는 사람의 건물인데,

그는 1290년경에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온 두 형제의 후손이다.

 

린의 21대 후손인 두 형제는 1912년에 전청루(Zhencheng Lou)를 지었다.

선라이즈 담배 절단기 공장을 운영하여 큰돈을 번 그들은 토루를 짓는 데 은화 8만 달러를 썼다.

20세기에 지은 토루는 화교들이 자금을 지원했다.

 

예를 들면, 가오베이(高倍) 토루군에 있는 토루 가운데 하나는 화교 친척이 보내 준 돈을 보태서

현지에 살고 있는 씨족 구성원이 지었으며, 후에 그 건물에 가족 이름을 붙었다.

 

자료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389&docId=1391956&mobile&categoryId=3389

 

 

한(漢)나라 시대(BC 255~AD 220)에 한족들은

중국의 중원에서 이 지역으로 옮겨와 월족(越族)들과 섞이기 시작했다.

 

월족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활했으며, 풍수 원리에 따라 씨족 집단끼리 거주했고,

진흙 벽돌이나 구운 벽돌과 나무로 집을 지었다.

 

16세기에 북쪽의 강을 통해서 오는 도적들의 약탈이 늘어나고 홍수가 잦아지면서

이에 대비하기 위해 요새화된 망루를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댜오러우’로 알려졌다.

 

싼먼리촌에 있는 잉룽 망루(迎龙楼)도 한 가지 예이다. 1649년에 카이핑현에 망루가 계속 생기면서

점점 더 훌륭한 안전지대가 되어 갔고, 청나라 때도 적은 수의 댜오러우가 세워졌다.

‘카이핑’은 ‘평화의 시작’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 사람들은 16세기 중반부터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다니면서 동남아시아 근처에서

해상 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1839년에 가난한 농부들은 마을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탄광이나 철도 선로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쪽에서 내려온 하카족(客家族)과 전쟁을 하면서 어려운 상황이 시작되었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대단위 이민이 시작되었다.

수천 명의 카이핑 마을 사람들은 마카오, 홍콩, 미국, 캐나다, 호주로 떠나게 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고된 육체노동을 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 중국의 화교 사회는 엄청난 부를 쌓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여러 나라에서 급속한 경제 성장이 일어나면서

중국 화교들의 재산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화교들은 부를 이뤘지만,

살고 있는 나라의 발전에 대해 자신들의 피와 땀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화교들의 꿈은 고향으로 돌아가 살면서 고향의 부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화교들은 카이핑에 처음으로 두드러지게 높은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부자들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북쪽의 도적들은 카이핑 마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을에 들어와 약탈과 납치를 자행하였다. 1921년~1930년에 71건의 약탈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로 인해 마을에서는 방호 목적의 망루와 같은 새로운 건축물을 세울 필요가 생겨났다.

해외 화교들 역시 대부분 마을에서 공공 망루 건설에 기여했다.

카이핑에 있는 전체 1,833개의 댜오러우 중에서 90%가량인 1,648개가 1900년~1931년에 세워졌고,

같은 시기에 대부분의 마을들이 건설되거나 재건되었다.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카이핑의 시골 마을은 화교들이 제공하는 자금으로 완전히 변모하게 되었다.

1930년대의 공황기와 일본의 침략, 그리고 1940년대의 태평양 전쟁으로 개발은 멈췄으며,

1943년~1947년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이민 통제가 폐지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북아메리카로 돌아가게 되었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서 도적들은 없어지고,

홍수 방지 측정 기술이 도입되면서 댜오러우의 역할은 미미해졌다.

중국이 개방된 1980년대에 많은 카이핑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으며,

대부분의 댜오러우는 지금 비어 있는 상태로 관리자에 의해 관리만 되고 있다.

 

그러나 화교들은 가족 행사로 마을에 돌아오기도 하고,

조상의 제사를 위해 돈을 기부하기도 하며 이곳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몇몇 주택에는 원래의 가구와 가재도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 마을과 농장은 아직도 지역 경제의 일부로 활동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마을 주택과 논, 대나무 숲, 주변의 멋진 언덕배기들은 여전히 시골 풍경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자료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389&docId=1391955&mobile&categoryId=3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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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의 도를 깨우쳐 광명 민족이 되기 위해

수행에 들어간 두 부족 가운데, 웅족만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무사히 수도생활을 마치고 환족이 되었다.

 

고고학 현장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문헌이 기록한 역사를 종합하면, 홍산문화는 환단의 문화로 귀결된다.

 

유적과 유물 대부분이 ‘사상 처음’이고 ‘최고最古’인 홍산문화를

중국 학계와 정부는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고 있다.

 

오랑캐 땅이라 치부하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발견된 문명을 황하문명의 원형으로 자리매기게

난처함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은 다민족 역사관을 내세웠다.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 땅에서 발견되는 소수민족 문화는 모두 중국문화라는 것이다. 황하문명보다 훨씬 일찍 태동하여

동북아문명의 기초가 된 환단의 문화가 중국 문화로 둔갑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우하량 유적의 원형, 방형 제단

우하량 전체 유적지의 한 가운데 위치한 제2지점에서 원형과 방형의 적석총이 발굴되었다.

조사 결과 원형 적석총은 최하단의 직경이 22m에 달하는 3단 높이의 구조물로 파악되었다.

일반적인 돌무덤의 양식과 다르게 지어졌다는 것은 이 돌 건축물의 용도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산인들은 왜 3단의 돌무덤을 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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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학자들은 그 실마리를 명, 청의 황제들이 천제를 지내던 북경 천단공원에서 찾았다.

 

그곳 환구단이 우하량 적석총과 동일한 형태의 원형 3단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하량 적석총은 다름 아닌 홍산인들이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제단이다.

 

각 층의 둘레를 따라 늘여 세워진 원통형 토기 또한 이 적석총이 제단이었음을 말해준다.

요령성 조양시의 덕보박물관 왕동리王冬力 관장은 “토기의 위쪽에 덮개가 없고 아래쪽에 바닥이 없는 것은

천지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사장은 제단의 주변에 원통형 토기를 둘러 세워 하늘과 통하는 소통로를 만들었다”고

이 독특한 토기의 의미를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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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지점의 방형 적석총는 ‘중심대묘에 해당하는 적석총’과

그것을 에워싼 ‘27기의 석관묘(돌널무덤)’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볼 때,

홍산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선 계급이 분화된 국가 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천제를 올리던 제단과 최고 통치자의 무덤이 나란히 놓여있는

우하량 제2지점 유적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표현이다.

 

천원지방 구조는 동북아 제천단의 전형적인 형태다.

고조선의 유적인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 조선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세운 원구단,

북경 천단의 환구단, 이들 모두가 이 구조를 취하고 있다.

 

5천5백 년 전 환단의 동이족이 세운 우하량 제단은 동북아 천제문화의 원형인 것이다.

 

불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