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야율


야율(耶律)의 본래 성(姓)은 고(高)씨이다
요(遼) 진국공주(陳國公主) 묘(墓)에서 발굴된 묘지명(墓志銘)에는, 다음의 글이 있다.

公主姓耶律氏 ........
本其姓高之裔 乃六葉
帝王之族矣 

진국공주의 성(姓)은 야율(耶律)씨인데 본래 야율(耶律) 성(姓)이  고(高)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왕족이라 하였다.

야율아보기 관련 사항을 정리해 보면,

1. 야율(耶律)의 본래 성(姓)은 고(高)씨이다.
2.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아보기(阿保機)의 한어(漢語), 

    즉 중국어 발음이 한국어 <아버지>이다. 이는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참고로 <아버지> 발음은 순수 조선말이다.

3. 야율아보기의 <아보기>는 자(字)이다. 그런데 이후 <안파견 (安巴堅)>으로 고쳤는데, 
    이 안파견(安巴堅)은 바로 한단고기에 나오는 초대 환인의 이름이다.
    요 태조 성명은 야율 억(耶律 億), 아보기(阿保機)는 자(字)이다. 


4. 고(高) 씨가 왕족이라 하였다.
5. 소손녕이 서희와 담판시 거란은 고구려 계승국이라 주장하였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요(遼)나라 황실은 고구려(高句麗) 계통으로 판단된다.

 

 

................

김운회의 신고대사 1-3. 흉노의 한 제후가,

 

흉노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는 낮에 길을 가다 천둥 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개가 입에 들어와 삼켜 임신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크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자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내 기르게 했다.

아이는 자라며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해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됐다.
 
이 사람은 한국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동호의 후예인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텡스퀘이)다.

단석괴는 2세기 중엽 동북 초원의 부족을 통합해 현재의 허베이에서 둔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후대의 칭기스칸쯤 되는 인물이다.

 

그가 죽고 제국은 약화돼 225년 모용부, 우문부, 단부 등으로 분리됐다.

조선공 모용외는 모용부에 속한다. 단석괴의 후손인 모용외가 조선의 왕이므로 단석괴는

조선의 시조급 인물이란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 단석괴의 신화부여의 건국자 동명과 고구려의

건국자 고주몽의 설화와 아주 흡사하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옛날 고리 왕의 시녀가 임신했다.

왕이 죽이려 하자 시녀가 닭 알 크기의 기운이 내려와 아이를 갖게 됐다고 했다.

시녀가 아이를 낳자 왕이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렸는데도 죽지 않았다. 왕은 그 아이가

하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그시녀에게 기르게 하였다. 그가 부여를 세워 다스렸다고 한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부여의 신화에 윤색을 가해 탄생되는데,

삼국사기에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인데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하백의 따님은 부여 왕에 의해 방안에 갇혔는데 햇빛이 그의 몸을 비추어 이를 피하였지만

그 빛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곧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 알을 하나 낳았는데(중략) 부여왕은 이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는데

먹지 않았고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거리에 내다 버렸으나 마소가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자 새들이 보호해 주었다. 마침내 왕을 알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이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를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그곳 풍속에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었다, 라고 한다.
 
동호의 후예이자 실존 인물인 선비족 영웅 단석괴의 탄생 설화가

동명이나 고주몽의 출생 설화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부여나 고구려가 동호, 선비의 일파이거나, 단석괴의 출생 신화를 시조 신화로 차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시조 신화를 차용하지는 않으므로

결국 동호와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 밖에 없다.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 BC 3세기경 사마천의 사기에는

연나라의 장수 진개동호를 1000리 밖으로 격퇴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한대의 정책 서적인 염철론에선 이 사건이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1000리를 물러나게 했으며,

요동을 지나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 라고 표현된다.

 

같은 사건이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위략을 인용해 고조선과 연나라의 갈등이 극심하여

결국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이 매우 약화되었다고 한다.

즉 고조선은 동호다. 이 동호는 어떤 존재일까.
 
사기 흉노열전에는 동호는 오환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가 되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즉 흉노 동쪽의 광대한 부족을 통칭하는 단어다.

 

송호정(교원대)은 동호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BC 5~3세기에 요령성 서쪽 지역의 각

소수민족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분석한다. 동호와 한민족을 일컫는 동이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요나라로 돌아가 보자. 요나라는 전체 동이족의 맹주로서 동이 풍속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고려사에 고려가 요나라에 대해 조공을 바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요 황제는 동이 풍속을 따라 거듭 고시를 바치던 의식을 올린다니 정성이 갸륵하여

진실로 애대하는 바가 되었도다, 라고 감격한다.

 

고려가 동이족 전통을 고수하는 데 대한 요 황제의 찬사로,

요 역시 동이족이며 고려와 한 민족임을 의식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국인의 직계 조상으로 인식되는

예맥과 동호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1960년대 북한의 사가 이지린이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동호=맥으로 보고 맥과 예는 고대 조선 종족으로 예족은  BC8~7세기 이전에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그보다 늦게 부여와 고구려을 세웠다고 한다. 이 부분은 오랫동안 남한의 사가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동호와 동이가 다르지 않고 동쪽 오랑캐라는 의미에 불과한 말을 민족명으로 세분해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역사 연구의 혼란을 초래했다.
 
결론을 맺어보자.
진서오사당서등의 기록들은 고조선이 동호이며, 후일 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고조선과 삼국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는 데 반해

요와 고조선의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민족 선조는 좁은 한반도에서 머물지 않고

넓은 북방 벌판에서 역사를 썼다는 의미다. 후대가 잊고 있을 뿐이다.
 
원문 및 기사출처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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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p of The east barbarian 2.png

337~351년 동안의 오호 십육국 시대(304~439)의 동북아시아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의 동북쪽 천여리에 있었으며, 동쪽은 큰 바닷가이다.

남쪽에는 북옥저와 접하고 있으며, 그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그 땅은 산이 많고 험했다.

주민들은 부여와 비슷했으나 언어는 부여와 같지 않았다

 

 後漢書/卷85
挹婁,古肅慎之國也。 在夫余東北千餘里,東濱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北所極。 土地多山險。

人形似夫余,而言語各異

 

 

파일:Map of The east barbarian 4.png

 

말갈(靺鞨; 중국어 정체: 靺鞨, 간체: 靺鞨, 병음: Mòhé, 모허)은

6~7세기만주 북동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으로,

 

주나라 때에는 숙신,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

본래 쑹화강 (松花江) 유역의 물길(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른다.

 

물길(勿吉)은 쑹화강 유역에 거주하였던 부족이다.

 

주나라 때에는 숙신,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 읍루의 세력이 약화되자

쑹화강 (松花江) 유역의 물길(勿吉)이 이 지역을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

또한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른다.

 

종족은 퉁구스 민족에 가까웠던 것으로 여겨지며,

언어 또한 퉁구스어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한 것을 추정된다. 풍속은 중국 삼국시대에는

모계 사회였지만 남북조시대에는 부계 사회로 접어들었으며, 일정한 거주지가 없어 동굴에서 살았다.

 

494년 부여물길의 압박으로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물길은 북위, 동위에 빈번히 조공하고 주로 말을 헌상하였다.

수나라 이후에는 출현하지 않았다.

 

이후 고구려, 발해에 복속했었으며,

발해 멸망 이후 요나라 때부터 여진(女眞)이라 불렸다가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1세기 무렵부터 말갈신라, 백제와 교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 시기 등장한 "말갈"을 예족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말갈족은 후에 여진족으로 불렸으며,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만

 아구다가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확장해 금나라를 세우고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하였다.

 

후에 후금(淸)의 누루하치는 만(주)족 이라 함

 

[편집] 말갈의 7부족

 

 

  • 백산말갈 (중국어 정체: 白山靺鞨, 병음: Báishān Mòhé)
    • 흑수말갈 (중국어 정체: 黑水靺鞨, 병음: Hēishuǐ Mòhé)
      • 이외에도 백돌부(伯咄部)[1], 안거골부(安車骨部)[2], 불열부(拂涅靺鞨)[3], 호실부(号室部)[4]등이 있었다.
      • 불열부, 호실부, 흑수부는 퉁구스계 부족이며,
      • 속말부, 백돌부, 안거골부부여 계통이거나 점차 고구려화한 부족으로 여겨진다.
      • 이외에 사모말갈 (思慕靺鞨), 군리말갈 (郡利靺鞨), 굴열말갈 (窟說靺鞨),
      • 막예개말갈 (莫曳皆靺鞨) 등도 있었다.
      • [편집] 함께 보기

        • 숙신
        • 읍루
        • 물길
        • 여진
        •  .......................................

          <거란: 요나라 916년 - 1125년  210년간>

          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은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일찍이 고구려의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복속되었다.

          이후 거란은 중국과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에 복속되었다.

          907년 야율아보기는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요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대체로 한족과

          몽골족에 동화되었고,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서요는 중앙아시아쪽으로 옮겨갔다.

          [편집] 어원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러시아어로 중국을 의미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 또는 한족을 나타내는 햐타드 (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3세기 이전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인(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편집] 거란의 군주

          • 대하돌라
          • 대하마회
          • 대하굴가
          • 대하아복고
          • 이굴가(李窟哥, 590년대 ~ 669년)
          • 이진충(李盡忠)
          • 이해고(재위 696~698)
          • 이실활(재위 698~718)
          • 이돌간
          • 엄화군왕 이소고
          • 와가한 요련굴렬
          • 북평군왕 이과절
          • 조오가한 요련조리(이부수
          • 호랄가한 요련해락
          • 소가한
          • 선질가한 요습련지
          • 소고가한
          • 야란가한 요련굴술
          • 파랄가한
          • 흔덕근가한 요련흠덕
          • 요 태조 추숭 황제
              • 요 숙조(遼肅祖) 소열황제(昭烈皇帝) 야율누리사(耶律耨里思)
              • 요 의조(遼懿祖) 장경황제(莊敬皇帝) 야율살랄덕(耶律薩剌德)
              • 요 현조(遼玄祖) 간헌황제(簡獻皇帝)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
              • 요 덕조(遼德祖) 선간황제(宣簡皇帝) 야율적노(耶律的魯)
              •  

                요(遼, 916년 - 1125년), 거란국(契丹國) 또는 카라 키탄(Kara Khitan)은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요'는 중국식 국호이고 '카라 키탄'은 대거란이라는 의미로,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킨 명칭이다. '키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요나라는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연경(燕京)과 이전의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와 상경 임황부, 개봉 등의 수도가 있었다.

                [편집] 역사

                거란의 8부족은 9세기말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916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동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2대 황제인 태종 때에는 주로 중국 경략에 국력을 쏟아부었다.

                936년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946년 후진을 멸망시켜 대량일대 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현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중국의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철수하였다.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에 들어서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宋)을 공격하여 1004년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고,

                송에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했으며,

                 

                송과 무역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고려와 북만주의 여진을 침략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인 흥종(興宗)·도종(道宗) 때 황실의 내분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요나라는 동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세운 금나라(金)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송의 협공을 받아

                1125년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당했다.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망해가던 이때 요나라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

                (하지만 120년 만에(금나라와 비슷하게) 징기즈칸에 의해 멸망한다.)

                [편집] 통치 구조

                요나라는 점령지의 중국인과 발해인 등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北面官)·

                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중 지배 체제를 만들어냈다.

                 

                중국인과 발해인 지역을 통치하는 남면관에서는 당(唐)식의 군현제도를 그대로 모방했고,

                북면관에서는 내륙 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을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렸다.

                 

                거란족 지배자들은 중국인 고문을 두고 중국식 행정기술을 본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족적 주체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 부족 고유의 의식·음식·복제 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한자를 쓰지 않고 거란 문자를 고안해냈다.

                 

                 

                [편집] 역대 황제

                 

                요 태조(遼太祖, 872년 - 926년, 재위 : 907년 - 926년)는 요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이름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시호는 대성대명신열천황제(大聖大明神烈天皇帝)이다.

                '옐뤼 아바오지'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야율아보기의 중국어 발음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거란어로 발음이 무엇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1]

                [편집] 생애

                그는 872년 태어났으며 불안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조부는 종족간의 갈등으로

                피살되었고,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달아났다. 야율아보기그의 할머니가 숨겨 키웠다.

                 

                야올리안 족750년대에서부터 거란족을 이끄는 부족이었다. 그들은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지녔으나 9세기말까지는 일라족의 지도자가 야올리안 칸에 불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야율아보기의 부친 야율적노일라족의 부족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성은 중국문화의 표시를 보였고 그들은 야올리안 부족외의 거란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야율아보기901년903년 일라족의 부족장이 되었다.

                전거란 군 사령관인 유웨라 불렸다. 이것은 그가 거란의 2인자임을 의미한다.

                 

                당나라의 쇠퇴(조광윤송나라를 건설할 시기)를 계기로 요태조인 야율아보기

                거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다. 907년 그는 거란의 대가한(요태조)이 되었다.

                그는 중국 북부에서 7개 부족장의 지지를 받았고, 야올리안 대가한의 승인을 받었다.

                 

                916년 황제라 칭하였다. 요하 상류인 임황에 도읍하여 국호를 대요라 하였다.

                922년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는 주위의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한자를 본따 거란 문자를 창제하였고, 농업을 발달시켰으며,

                그 동안 단임제인 황제를 종신제로 하여, 요나라 황실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먼저 동돌궐과 몽골족을 정벌하기 위해 서방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서방 정책이 마무리가 되었을 때인 925년 12월에 당시 쇠퇴하고 있었던

                발해를 정복하는 사업을 계획하여, 926년 1월발해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발해가 멸망된 이후에도 정안국 등 발해의 계승국들이 생겨났다.)

                 

                야율아보기발해를 멸망시키고, 거란으로 돌아갔을 때 사망하였다.

                 

                요나라 태조가 죽자 그의 부인 술율평(述律平, 요사(遼史)에서는 소 황후로 기록됨)

                이 잠시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의 둘째아들인 요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3세기 초 세계판도>

                파일:Premongol.png

                 

                서요(중국어 간체: 西辽, 정체: 西遼, 병음: Xī Liaó) 혹은 카라 키탄(Kara Khitan)은

                의 일족인 야율대석(西遼의 德宗)이 요가 멸망한 후 중앙아시아에 세운 나라이다.

                 

                 '서요'는 중국식 국호이고 '카라 키탄'은 대거란이라는 의미로,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킨 명칭이다. 이슬람 교도는 카라 키타이

                (검은 거란 혹은 위대한 거란이란 뜻)라 부르고 있는데, '키타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1132년 건국되고 수도는 발라사군(지금의 토크마크 부근). 동서 투르키스탄을 영유(領有)하고

                1211년 나이만의 왕자 쿠츨루크에게 멸망되었다.

                 

                소수의 거란인으로 지배한 정복 왕조로서 주민 대다수가 이슬람 교도였다.

                 

                재정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로부터 공납(貢納)과 위구르 상인이나

                이슬람 상인 등의 동서 무역에 의한 수입에 의존했다. 또한 동서 교류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방의 이슬람 세계와 동방의 중국 세계의 문화 교류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서요에 대신한 쿠치루크의 지배는 칭기즈 칸 군대에 곧 무너졌다.

                 

                <애신각라(愛新覺羅)의 비밀>

                 

                조용한 재판장 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주목하고 있다.

                판사가 젊은이에게 묻는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 젊은이는 대답한다. "아이신지료 푸이(愛新覺羅 傅儀)."

                판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참 이상한 성이구나."

                 

                이것은 유명한 영화 '마지막 황제'의 한 장면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의 성은 아이신지료(愛新覺羅),

                한글로 읽으면 애신각라이다. 애신각라라..과연 애신각라란 성은 무슨 뜻일까?

                바로 애각신라(愛覺新羅)..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신라? 신라라면 삼국시대의 그 신라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럴지도 모르겠다'이다.

                바로 청나라의 황실이 신라황실의 먼 후손이라는 기록이 여럿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淸)나라의 원래 이름은 후금(後金)이다.

                 

                당초 청의 시조 누르하치가 나라를 건국했을때의 이름은 후금으로,

                이는 예전에 번성했던 금(金)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다.

                 

                금나라라? 이는 다르게 읽으면 김나라라고 읽을수도 있다.

                왜 나라 이름을 김이라고 했을까?

                 

                김(金)은 바로 신라 왕족의 성씨이다. 바로 금나라의 건국자였던

                아골타가 신라 왕족 김씨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 금사 ]" 금의 시조는 함보이며, 본래 고려에서 나왔고, 그 때 나이 60세였다 "

                 

                [ 송막기문 ]"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

                 

                 

                [ 만주원류고 ] "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

                 

                [ 고려사 ] "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김극수가 금나라의 조상이다 "

                 이런 역사서의 증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 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즉, 금나라의 시조가 부안 김씨의 다른 일파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금나라와 그 뒤를 이은 청나라는 신라의 일파가 세운 나라고,

                이는 그들이 곧 우리민족과 같은 민족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사대사상에 사로잡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만 치부했던 조선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지만 청나라는 그들이 조선과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어느

                정도는 있었던듯 하다.

                 

                 누르하치는 조선을 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 한수이북은 자신의 선조가 태어난 땅 " 이라 말하였고

                삼전도 항복 때는 " 본래 우리는 고려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거늘

                어찌하여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 " 하였으며

                 

                우리 나라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누루하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조선왕에게 보내기도 한다. 

                 "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같은 왜구들을 ...수장시키겠습니다 " 

                 

                물론 이러한 근거들만으로 애신각라가 '신라를 생각하라'라는 의미이고

                청나라가 신라의 후예라고 단정짓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만주어로 아이신은 '금'이라는 뜻이고, 줴러는 '성 姓'이라는 뜻으로

                애신각라 즉 아이신줴러는 단순히 금씨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는 김씨의 후예라는 뜻으로 해석될수도 있지만,

                그냥 금나라의 후예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이 틀렸다는 주장도 있다.

                 

                청나라 황실의 성은 원래 金이라는 뜻의 애신(愛新)인데,

                이는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타커스의 직계 후손들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다른 방계후손들은 따로 각라(覺羅)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래서 후에 이 둘을 붙여 성을 애신각라라고 하였고

                각라는 신라를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타커스 직계외의 '종실'을

                의미하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자료 출처 : http://blog.daum.net/kjs4311/8516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