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역을 휩쓸엇던 마자르의 맹위 - 1편

  

훈족_00000.jpg
▲ 헝가리인 집단 이주도

9세기 말 마쟈르족이 유럽에 등장하다

 

 

 

9세기 말 마쟈르족이 유럽에 등장하다

 

유럽대륙을 통일한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은 역사가들이 말하는 ‘암흑기(Dark Ages)’로 접어들었다.

 

흔히 유럽문명의 정체기라고 규정되나

[살육과 문명]의 저자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Victor Davis Hanson)의 경우

이 시기를 제대로 조명하여주는 사료가 없어 당시의 역사상을 잘 알 수가 없는 미스터리한 시기이기

때문에 ‘암흑기’로 불린다고 강변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럽을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둘 수 있는 정치문화적 세력이 붕괴한 후

군소세력이 난립과 외부문화와 교류차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치사회문화적인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투르에서의 승리를 이끈 샤를-마르텔의 손자인 샤를마뉴(카를 대제)는

재위 기간 약 40년에 걸쳐 서유럽 대부분을 석권하는 제국을 세웠고

로마의 교황은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후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샤를마뉴 사후 손자대에 이르러 그의 제국은 서부 중부 동부 프랑크 왕국으로 삼분되었다.

 

샤를-마뉴의 제국이 분열되고 그 영주들이 자치를 요구하며

유럽 전역에 봉건제가 퍼져나가기 시작할 무렵, 유럽은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에서 약 100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여러 민족의 대대적인 침공을 맞게 된다.

 

우선 북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나온 바이킹들이 9세기부터 잉글랜드와

북부 유럽 각 지역 해안과 내륙을 가리지 않고 침탈하면서 서유럽을 공포에 빠뜨렸다.

 

남쪽에서는 이슬람이 팽창하면서 지중해의 동쪽(팔레스타인과 근동)과 남쪽을 석권하고

그리스와 이베리아 방면으로 쳐들어왔다.

 

이들을 717년에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732년에 투르에서 패하면서

일시적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온존하고 있었다. 이처럼 남과 북에서

강력한 침략자들에게 시달리고 있던 서유럽인들에게 또 하나의 우환거리가 등장하였으니

 

바로 9세기 말기에 카르파티아 분지(지금의 헝가리 전부와 체코, 오스트리아,

세르비아를 포함하는 지역)로 쳐들어온 마쟈르족이었다.

 

 

‘유럽화된 아시아인’ 마쟈르

 

마쟈르인들은 지금의 헝가리 공화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헝가리’는 외국에서 부르는 국명이고 헝가리인들은 스스로를 마쟈르(정확하게는 마-ㄷ-쨔르)라고 부른다.

 ‘헝가리’라는 국명과 함께 마쟈르인들의 종족적 기원은 학자와 학파에 따라 분분하다.

 

헝가리에는 유럽에서 밀려난 훈족이 시베리아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 전설이 있고

이에 근거하여 ‘헝가리’라는 국명이 “훈(Hun)족의 땅에서 온 자들”이라는 말이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헝가리의 어원으로서 현재 가장 유력한 것은 ‘열 개의 족속(Ten Tribes)’를 뜻하는

투르크어인 ‘오노-구르’ 또는 ‘옹-구르’라는 단어이다.

마쟈르가 흑해 북부 초원지대에서 생활하고 있을 당시 여러 부족이 모인 연맹체였기 때문이다.


 

훈족.jpg

 

현재의 통설에 의하면 헝가리인들은 시베리아와 러시아 남부 흑해 북쪽에서 생활하던

유목민의 후손이며 언어학적으로는 핀-우랄어계(Finno-Ugric)로서 핀란드, 에스토니아,

북극해 연안에 사는 랩(사미)인들과 친연관계에 있다.

 

핀-우랄어계 집단은 우랄 산맥 남동쪽의 시베리아에서 기원하여

한 갈래는 북쪽을 따라 북극해와 발트해, 핀란드 등지에 정착하였으며 다른 갈래는 유목생활을 하며

이동하다가 흑해 북부의 초원지대(Pontic Steppe)에서

다른 유목민들과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어울리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약 8-9세기정도에 이 지역을 장악하였던 카자르 왕국에 종속되었다.

이후 카자르 왕국 내에 내전이 발생하면서 카자르의 일부 파벌과 연합하였고,

이들과 서쪽 드네프르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새로이 이주한 곳에는 투르크 계통인

페체네크가 이미 거주하고 있었고 마쟈르는 이들과 싸웠으나 페체네크족은 의외로 강력하여 오히려

마쟈르가 패하고 지금의 우크라이나 서부 변경지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800년대 초반에 우크라이나 서부 흑해연안에 일시적으로 정착한 마쟈르족은

한 때 불가르족과 연합하여 동로마군과 싸우는가 하면 동쪽의 슬라브족을 공격하여 잡아와

노예시장에 팔기도 하고 서쪽의 동프랑크 왕국을 기습하여 그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892년에 동프랑크 왕국의 아르눌프왕이 모라비아를 공격할 때에 동프랑크군과 함께 싸웠다.

그런가 하면 수년 후에는 모라비아의 왕과 동맹을 맺고

남쪽의 판노니아(지금의 오스트리아 동부/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를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헝가리를 구성하는 카르파티아 분지로 들어왔지만 완전히 정착할 마음은 없었고

단지 약탈기습을 수행할 임시기지 개념으로 거주하고 있을 뿐이었고

 

마쟈르는 여전히 동부 유럽에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안정적인 정착지를 찾지 못한 마쟈르족이 생존을 위하여 택한 생활방식은 동맹과 파기를 반복하면서

이쪽저쪽에 붙어 싸우는 것 이었다.

 

894년에는 동로마 황제인 레오 6세와 동맹을 맺어 이듬해에 불가르족을 공격하였고

불가르왕인 시므온 1세는 동로마-마쟈르 동맹군에 세 번이나 패하고 도나우강 하류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 와중에 마쟈르도 지금의 헝가리 남부 변경지방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여러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동맹과 배신을 반복하면서 약탈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므온 1세는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절치부심하였고

896년에 마쟈르의 숙적인 페체네크나크와 손을 잡았다. 마쟈르는 대패하였고

파치나크족은 우크라이나 서부에 남아있던 마쟈르족을 철저히 약탈 유린하였다.

그러나 불가르와 파치나크의 동맹에서 보이듯이 결국에는 자신들도 같은 방법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마쟈르는 우크라이나 서부를 파치나크에게 완전히 내어주고 유럽방면으로 쫓기듯이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으로 들어온 마쟈르의 대군장인 아르파드는 우크라이나에서 쫓겨난 부족들을

카르파티아 분지로 옮기는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카르파티아 분지는 여러 개의 큰 산맥이 거대한 평원과 초원을 둘러싸고 가운데로는

유럽 최대의 강인 도나우강이 흐르고 있는 천혜의 요지였다.

이곳에는 과거부터 이곳에 거주하였던 게르만 계통의 종족들과 슬라브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소수여서 마쟈르 집단의 대이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카르파티아 분지의 대초원(헝가리말로 ‘푸츠타’)와 비옥한 평야지대는

마쟈르족의 정착에 필요한 이상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카르파티아 분지에 진입한 마쟈르의 대집단은 본격적인 정복전을 개시하였는데

이 과정을 헝가리의 역사에서는 ‘혼포그라라스(Honfoglalás, 땅뺏기)’라고 한다.

 

이 ‘땅뺏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마쟈르 집단을 구성하던 10개 부족의 군장들은

지금의 헝가리 남부인 세게드에서 대군장 아르파드를 전체 마쟈르 집단의 대공(大公, Grand Prince)으로

추대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세게드에 모인 군장들은 서로의 피를 컵에 담아

이를 나누어 마시는 ‘피의 맹세’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헝가리의 역사에서는 아르파드가

대공으로 추대된 소위 ‘세게드의 맹약’을 헝가리가 건국된 순간으로 간주한다.

 

카르파티아의 슬라브족과 게르만인들을 복속시킨 마쟈르는 카르파티아를 확보하였고

마침내 정착할 곳을 얻은 마쟈르는 카르파티아 분지를 기지 삼아 서유럽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향후 50년간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등의 서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서유럽의 분열과 마쟈르의 맹위

 

마쟈르가 카르파티아 분지에 들어왔을 때 서유럽은 정치적인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아들인 로타르가 아버지의 제국을 독차지하려다 형제인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왕 루트비히에게 패하면서 843년의 베르됭의 조약이 맺어졌고

 

수십 년간 서유럽을 통일하여 지배한 샤를마뉴의 제국은 세 갈래로 나뉘어졌다.

카를은 지금의 프랑스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부 영역을 받았고 이는 서 프랑크 왕국이 되었다.

 

루트비히는 오늘의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체코 일부, 그리고 크로아티아 지역까지

길게 걸쳐있는 동부 영역을 받았고 이는 동 프랑크 왕국이 되었다.

 

그리고 패한 로타르는 네덜란드 지역에서 이탈리아까지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중부 영역을 받아 로타르 1세가 되었다. 이는 장자계승권이 확립되기 전 프랑크

사회의 관습인 분할계승권의 반영이다. 이렇게 갈린 제국은 다시 통일되지 못하였다.

 

경건왕의 아들들은 샤를-마뉴의 제국을 세 갈래로 가른 것도 모자라 보다 잘게 갈라놓았다.

중간 영역을 받은 로타르는 855년에 병으로 몸져누웠고 결국 자신의 영역을 세 아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는데 장남인 루트비히(루이) 1세에게 이탈리아,

 

차남 로타르 2세에게 지금의 베네룩스와 라인란드 지역,

그리고 삼남 카를(샤를)에게는 지금의 프로방스와 부르고뉴를 내려주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독일왕 루트비히 (재위 843-876) 역시

그 아들들에게 각각 영지를 나누어주면서 다시 왕국을 삼등분하였다.

 

맏이인 카를로만에게 바이에른, 둘째인 소(小)루트비히에게 프랑코니아와 튀링겐,

셋째인 뚱보왕 카를에게 슈바벤과 라에티아를 각각 내려주었다.

 

이후 869년에 로타르 1세가 숨을 거두자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왕 루트비히가 서로 합작하여

조카인 로타르 2세의 땅(로타링기아)을 빼앗았다.

 

이탈리아왕이자 샤를마뉴의 황위(皇位)계승자로 인정받은 루트비히(루이) 2세 역시

로타르의 땅을 얻고자 하였으나 두 숙부들의 힘에 밀려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870년에 메르센 협약이

체결되어 동부와 서부 프랑크가 로타링기아를 사이 좋게 나누어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이란 절대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 이후 독일왕 루트비히 사망 후

그의 아들인 소 루트비히는 서부 프랑크 왕국에서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로타링기아 전체를 차지하였다.

 

서부 프랑크가 이후 찾으려고 하였지만 동부 프랑크에게 패하고 로타링기아 회복에 실패하였다.

880년에 동프랑크왕 소루트비히와 서부 프랑크왕 카를로만/루이 3세 사이에 리브몽트(Ribemont) 협약이

맺어져 루트비히가 점령한 데로 국경이 확정되었다.

 

결국 로타링기아 전체가 동부 프랑크에게 속하게 되었고 정작 샤를마뉴의 적통자손은 이탈리아,

그것도 북부로 만족해야 했다. 이후로도 샤를마뉴의 자손들은 가진 영토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형제의 손에 있는 조각을 차지하지 못하여 안달이었다.
 

 

▲ 리브몽트 협약 후의 서유럽
 
마침 샤를마뉴의 자손들이 골육상쟁을 벌이고 있을 때 마쟈르족이 들이닥쳤고

분열된 프랑크의 세력은 거친 유목생활과 파치나크와의 전투, 그리고 용병생활로 단련된

마쟈르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대공아래 체제를 정비하여 느슨한 국가체제를 이룬 마쟈르는

899년에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유럽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과 침탈을 개시하였다.

 

일설에는 이 침공이 이전에 협력하였던 동프랑크왕 아르눌프(바이에른왕 카를로만의 아들)와의 협약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 설에 따르면 아르눌프는 당시 교황에게 왕위를 승인받은 베렌가리오(Berengar)와

이탈리아를 다스릴 권한을 놓고 경쟁 중이었고 베렌가리오를 제거하기 위하여 마쟈르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그 경위가 어찌되었건 이탈리아에 들어온 마쟈르군 5000명은

여러 분대로 나뉘어 지금의 포(Po) 강 유역을 약탈하였고 이후 파비아에 재집결한 후 베네치아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에 베렌가리오는 1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마쟈르족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마쟈르가 북부 이탈리아에 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마쟈르군과 베렌가르의 군사들은

이탈리아 북부 브렌타 강 지역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마쟈르는 병력의 일부만을 보내 베렌가리오의 군과 싸우게 하면서 일부러 후퇴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의 브렌타 강가까지 몰린 후 베렌가리오에게 군을 물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베렌가리오는 자신의 군이 마쟈르군을 거의 무찔렀다고 생각하면서 얕잡아보기 시작하였고

자신들이 조금만 더 공격하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병사들에게 숙영지를 만들고 편히 쉬라고 명령하였고

기사들은 경계를 풀고 갑주까지 벗은 다음 여유롭게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이미 마쟈르의 본대가 숙영지의 외곽을 포위하고 있었고

이탈리아군의 경계가 완전히 풀어진 것을 확인한 후 무방비 상태의 이탈리아군을 급습하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이탈리아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마쟈르군의 화살과 칼에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워낙 철저하게 기습을 당하여 일부 병사들은 음식을 삼키지도 못하고 입에 문 체 죽었다고 한다.

이탈리아군을 전멸시킨 마쟈르군은 앞서 말한 판노니아를 완전히 점령하게 되었다.
 
 
  훈족_00001.jpg
▲ 마쟈르에게 끌려가는 여인들

(Lajos Gubsci, [Hungary in the Carpathian Basin], MoD Zrinyi Media. Budapest, Hungary, 2011)
 
 

마쟈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동서남북 가릴 것 없어 유럽 전역에서 종횡무진 하였다.

901년에는 지금의 오스트리아 동부인 카린티아로 쳐들어갔고

 

902년에는 모라비아(지금의 슬로바키아)를 들이쳐 모라비아 왕국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고

904년에는 다시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901년에 일단의 마쟈르 부대가 바이에른에서 패하기는 하였으나

수많은 마쟈르의 부대 중 하나여서 마쟈르의 전체적인 활동에 대한 영향은 별로 없었다.

 

이 와중에도 거의 매년 연례행사 하듯이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를 공격하였고

그럴 때마다 많은 노획물과 전리품을 가지고 카르파티아로 귀환하였다.

 

견디다 못한 동프랑크의 소년왕 루트비히와 고위 귀족들은 마쟈르의 정신적 지주이자

아르파드에 이어 제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군장 쿠르잔을 바이에른으로 ‘초청’하였다.

겉으로는 초청이었지만 사실은 음모였으며 쿠르잔과 그의 사절단은 지금의 오스트리아 동부인 피샤 강가에서

동프랑크인들에게 모두 살해당하였다. 이후 아르파드는 마쟈르에서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동 프랑크의 과욕과 프레스부르크 전투

 

마쟈르는 이전에 무찔렀던 베렌가리오와 905년에 우호 협약을 맺으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약탈을 중단하였고

이후의 공격은 대부분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 집중되었다.

 

사실 마쟈르에 의한 일방적인 약탈은 아니었으며 동프랑크 역시 마쟈르의 땅으로 역습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약탈과 기습이 생활방식으로 된 마쟈르의 기습은 동프랑크의 간헐적인 공격과는

그 규모와 속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마쟈르의 계속되는 약탈과 공격도 큰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동프랑크 왕국의 관점에서는 마쟈르족이 과거 프랑크의 영토인 카르파티아와 판노니아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적인 개념의 영토는 아니지만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에 복속된 땅이었기에

마쟈르족이 이를 점령하자 자신들의 속지(屬地)가 이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윽고 907년에 마쟈르

정벌을 명분으로 대군을 일으켜 마쟈르를 몰아내고 카르파티아 분지의 넓은 영역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훈족_00002.jpg
  
 
이 때 동프랑크의 왕은 예전에 마쟈르와 손을 잡았던 아르눌프의 아들이었던

소년왕 루트비히(Ludwig das Kind, Louis the Child)였는데

부왕(父王)인 아르눌프의 사망후 왕위를 계승할 당시 불과 6세였다.

 

나이가 어린데다가 병약하여 거의 실권이 없었고 정권은 인척들과 고위 귀족들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었다.

동프랑크의 귀족들과 왕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영지와 권력을 극대화하려고 이전투구 하였으나

제국의 속지를 회복한다는 명분하에 하나로 뭉쳤다

(물론 주된 동기는 자신들의 영지를 늘릴 수 있다는 욕심이었다.)

 

907년 ‘속지회복’은 동프랑크 왕국 바이에른의 후작 레오폴트가 주도하였으며

일설에는 동프랑크 전역에서 10만의 대군을 모았다고 하지만 이는 후세의 과장임이 거의 확실하다.

이 전투에서 참여한 마쟈르(헝가리)군의 규모는 3만에서 3만 5천정도이며 프랑크군은 마쟈르군보다

약간 많은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레오폴트와 함께 동프랑크 궁정성당의 집전사제인

살츠부르크 대주교 데오트마르(Theotmar, 또는 Dietmar), 브릭센-자벤의 주교 자카리아스(Zacharias),

프라이징 주교 우도(Udo)등 영향력 있는 종교지도자들도 참전하고 있었다.

 

동프랑크(바이에른)군은 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도나우강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였고

강에는 보급선단을 띄워 보급을 용이하게 하였다. 레오폴트 후작은 900년에 마쟈르 부대가 바이에른으로

약탈하러 왔을 때 이를 맞아 싸워 이긴 적이 있기에 마쟈르군을 수월하게 무찌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바이에른군은 마상창(Lance)과 양날 검, 큰 도끼, 방패등으로 무장하였고 사슬갑옷(chainmail)또는

찰갑(Scale armor)과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는 전형적인 프랑크 기병의 모습이다.
 
 

프랑크군의 장기는 기병에 의한 충격과 도끼와 검을 든 보병의 난전이었는데

원래 유목민족이었던 마쟈르는 접전에 말려들기를 거부하였다.

 

프랑크군은 세 개의 부대로 나뉘어 싸우고자 하였으나 마쟈르족은 계속 화살을 날리면서

프랑크군의 대오가 어지러워지기를 기다렸다.

 

비록 역사적인 기록이 부실하여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으나

유목민의 일반적인 전투방식에 비추어보면 마쟈르 기병들은 프랑크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기마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적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화살을 날린 다음 본격적인 공격을 시도하였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바이에른군은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였다.

전쟁을 주도한 레오폴트 역시 전사하였고 참전한 주교들과 사제들 거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슈바벤의 기록인 아날레스 알라마니키(Annales Alammannici)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907년, 바이에른인들이 헝가리인과 벌인 처절한 싸움에서 레오폴트 공(公)이 죽고

그 병사들의 드높은 자만심이 꺾였다. 싸움에 참가한 교인(기독교인)중에서 탈출한 자는 거의 없었다.

주교들과 대작(大爵)들 거의 모두가 살해당하였다.”

 

아날레스 알라마니키의 다른 판본의 기록은 보다 직접적이다.

“907년, 바이에른인들의 군대는 헝가리인들에게 전멸당하였다”

 

소년왕 루트비히는 목숨만 건져 겨우 달아났고 마쟈르인들을 얕잡아 보고 전쟁을 일으켰던

동프랑크군은 모두 시체가 되었다.

 

바이에른 대군의 전멸은 동부 프랑크의 최일선에서 마쟈르를 막을 군대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비록 마쟈르는 이전에도 서유럽을 기습하기는 하였지만 이제는 문이 훤히 열려버리면서

서유럽은 마쟈르 기마병들에게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자료출처 :

 http://cafe.naver.com/coreaspirits/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