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요하문명의 유적 발굴

130년에 걸친 이라크 지역의 유적 발굴을 통해

서양문명의 뿌리인 수메르문명이 세상에 드러난 것에 필적하는, 20세기 동북아 최대의 발굴 사건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요서지역(발해연안 지역)의 신석기, 청동기 문화 발굴이다.

1919년 프랑스인 에밀 리쌍이 내몽골의 적봉을 1차 방문하고, 1922년부터 그곳에서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한 이후 요서에서는 현재도 대규모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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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BCE 6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하서문화이다.

현지인조차 길을 헤매는 오지에 위치한 소하서 유적은 당국의 문화재 신고 정책에 의한

주민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학계에서 단지 ‘인류 최고最古의 신석기문화’라고만 규정하는

이 문명의 주인공들은 발해연안 빗살무늬토기의 주인공들과 생존 시기가 일치한다.

 

발견된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인, 요서의 여러 신석기문화 가운데

세간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은 곳이 바로 홍산문화이다.

 

적봉시에 위치한 철광석으로 뒤덮인 붉은 산 ‘홍산紅山’에서 이름이 유래된 이 문화는

 ‘석기와 청동기를 섞어 사용한 BCE 4500~3000년경의 문명’으로 판명되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홍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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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문화는 1979년 객좌현 동산취촌 발굴과 1983년 그

 인근의 우하량촌 발굴을 계기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

 게 되었다.

 

 동산취에서는 엄청난 제사 유적이 발견되었고, 우하량

 에서는 ‘돌무덤(塚), 신전(廟), 제단(壇)’이 동시에 발굴

 되다.② 이는 다른 신석기 문화에서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하량의 16개 유적지 가운데 13곳은 적석총(돌

 무지무덤) 유적지이다. 동이족이 사용한대표적 묘제墓

 制대규모로 확인된 것이다. 적석총은 삼국시대③ 때

 까지 계속 나타나는 무덤 형식으로 황하문명권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

 

 충적층지대인 황하유역은 흙으로 만든 토광묘를 지었고,

 산악과 평지가 공존하는 요서지역은 주로 돌무덤을 지

 었다. 그렇다면 BCE 4천 년대에 돌무덤 묘제를 쓴 요서

 지역의 동이족은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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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 여신과 여신전, 그리고 복원한 우하량 여신의 수행 모습...>

 

홍산문화가 환단의 동이족이 일군 문화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우하량의 여신전④이다.

이형구 박사는 당시 홍산인들이 여신전을 지어 지모신地母神에게 제사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을 기원했다고 말한다.

 

여신전이 상당히 좁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특권층,

심지어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여기에 혼자 들어가 여신에게 제를 지낸 이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제정일치 사회의 수장이었을 것이다.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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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 새 소조상, 곰 소조상, 옥웅룡...>

 

이 여신전 터에서 여신상과 함께, 홍산인의 토템신앙을 보여주는 곰 소조상과 새 소조상이 발굴되었다.

그들의 곰 토템은 우하량만이 아니라 인근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옥으로 만든 곰 형상물(玉熊龍)에서도 보인다.

 

홍산문화 옥기 가운데 가장 비율이 높은 웅룡은 주로 죽은 자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가슴팍에는 가장 등급이 높은 옥기가 놓인다는 점에서 그들이 곰을 얼마나 신성시하였는지 알 수 있다.

홍산인의 새 토템신앙은 여러 무덤에서 출토되는 새 모양의 옥기에서도 확인된다.

 

여신을 모시고 곰과 새를 신성시한 홍산인들은 환단시대와 연관 지을 수밖에 없는,

<환단고기>가 전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배달시대 초기, 호족과 웅족이 환웅천황을 찾아와 환족으로 교화되기를 청하였다.

호족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남권 중심의 사나운 부족이었고,

웅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여권 중심의 우매한 부족이었다.

 

삼신의 도를 깨우쳐 광명 민족이 되기 위해 수행에 들어간 두 부족 가운데,

웅족만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무사히 수도생활을 마치고 환족이 되었다.

고고학 현장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문헌이 기록한 역사를 종합하면, 홍산문화는 환단의 문화로 귀결된다.

 

유적과 유물 대부분이 ‘사상 처음’이고

‘최고最古’인 홍산문화를 중국 학계와 정부는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고 있다.

 

오랑캐 땅이라 치부하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발견된 문명을 황하문명의 원형으로 자리매기게 된

난처함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은 다민족 역사관을 내세웠다.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 땅에서 발견되는 소수민족 문화는 모두 중국문화라는 것이다.

⑥ 황하문명보다 훨씬 일찍 태동하여 동북아문명의 기초가 된 환단의 문화가 중국 문화로 둔갑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우하량 유적의 원형, 방형 제단

우하량 전체 유적지의 한 가운데 위치한 제2지점에서 원형과 방형의 적석총이 발굴되었다.

조사 결과 원형 적석총은 최하단의 직경이 22m에 달하는 3단 높이의 구조물로 파악되었다.

일반적인 돌무덤의 양식과 다르게 지어졌다는 것은 이 돌 건축물의 용도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산인들은 왜 3단의 돌무덤을 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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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 3단 원형 제단...>                                          <북경 천단공원 환구단 3단 원형 제단...>

 

 

중국학자들은 그 실마리를 명, 청의 황제들이 천제를 지내던 북경 천단공원⑦에서 찾았다.

그곳 환구단이 우하량 적석총과 동일한 형태의 원형 3단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하량 적석총은 다름 아닌 홍산인들이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제단이다.

 

각 층의 둘레를 따라 늘여 세워진 원통형 토기 또한 이 적석총이 제단이었음을 말해준다.

요령성 조양시의 덕보박물관 왕동리王冬力 관장은 “토기의 위쪽에 덮개가 없고 아래쪽에 바닥이 없는 것은

천지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사장은 제단의 주변에 원통형 토기를 둘러 세워

하늘과 통하는 소통로를 만들었다”고 이 독특한 토기의 의미를 해석한다.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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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 제2지점 원형 제단과 방형 적석총...>                 <원통형 토기...>

 

 

제2지점의 방형 적석총는 ‘중심대묘에 해당하는 적석총’과

그것을 에워싼 ‘27기의 석관묘(돌널무덤)’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볼 때,

홍산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선 계급이 분화된 국가 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천제를 올리던 제단과 최고 통치자의 무덤이

나란히 놓여있는 우하량 제2지점 유적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⑨의 표현이다.

 

천원지방 구조는 동북아 제천단의 전형적인 형태다.

고조선의 유적인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 조선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세운 원구단,

북경 천단의 환구단, 이들 모두가 이 구조를 취하고 있다.

 

5천5백 년 전 환단의 동이족이 세운 우하량 제단은 동북아 천제문화의 원형인 것이다.

 

 

우하량의 놀라운 옥기 유물들

그리고 우하량 유적의 무덤들은 공통적으로 많은 옥기 부장품을 소장하고 있다.

⑩ 부장품을 가진 31기의 묘 가운데, 신석기시대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토기와 석기는 단 한 점도 없이

옥기만 들어있는 묘가 26기나 된다.

 

특히 제2지점 21호 묘의 남성 인골은 옥으로 옷을 해 입은 듯하다.

옥거북, 옥베개, 옥패玉牌, 옥벽玉壁 등 무려 20점의 옥기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신신을 치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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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 제2지점 21호 묘...>                                          <우하량 제5지점 중심대묘...>

 

 

제5지점의 중심대묘에 누워있는 남성 인골은 양 귀 밑의 옥벽, 가슴팍의 옥장식, 오른팔의 옥팔찌,

그리고 양손의 옥거북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신령한 거북이를 손에 쥐고 죽어서도 신과 소통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은

제정일치시대의 제사장이자 정치적 수장이었던 인물로 간주된다.

 

옥은 변하지 않는 보석으로 영생불멸을 뜻한다.

⑪ [주역]<설괘전>에서 건乾괘의 성격을 옥이라고 하듯이, 옥은 하늘의 빛깔과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한다.

때문에 홍산인들은 옥을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 신과 소통하는 신물, 천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흔히 고대시대는 석기-청동기-철기 3단계로 구분한다.

하지만 발해연안 영역에서 옥기로 뒤덮인 수천 년의 유적지

대량 발굴됨에 따라 중국학자들은 청동기 이전에 옥기시대를 설정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⑫

 

홍산문화의 놀라운 문화 수준에 세계가 경탄하는 속에

한민족의 상고시대인 환단시대의 문화 실체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각주)

① 2006년 6월에도 거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의 초모산草帽山 유적지에서 5500년 전 적석총군이 발견되었다.

(2006.6.10. 중국 CCTV 보도내용).

 

② 총, 묘, 단이 다 갖춰진 우하량은 홍산인들의 성지였으며 제정일치시대 왕이 하늘과 소통하는 곳이었다.

(이형구, 이기환,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172쪽)

 

③ 신라의 도읍지 경주에서 발견되는 고분들도 돌무덤이다.

속에 목곽을 설치하고 그 위에 적석을 한 후 흙으로 덮은 적석목곽분이다.

가야의 무덤도 전부 돌무덤이다(상생방송STB 역사특강,

<발해연안문명, 한국고대문화의 기원).

 

④ 여신전 : 신전에 모셔진 여신은 한 명이 아니었다.

여신상에서 떨어져 나온 진흙 조각편을 분류한 결과, 세명 이상의 여신으로 크기도

사람의 등배, 2배, 3배로 서로 달랐다.

홍산문화 관련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옥구슬 눈동자의 여신은 사람 크기 여신상 일부이다.

 

⑤ 고고학자들은 대개 여신 신앙이 BCE 7천년 경 신석기 시대 공동체들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구석기 후기의 그라베트 오리냐크 문화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여자들의 상은

무려 기원전 2만5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베누스 상이라 불리는 이 작은 여성상들은

돌과 뼈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여신 신앙은 신석기시대부터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되어 확인되고 있다.

(멀린 스톤 저, <하느님이 여자였던 시절>, 51~56쪽)

⑥ 이형구, 이기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08~210쪽

 

⑦ 홍산문화를 황하문명의 뿌리라 하여 자기네 문화로 둔갑시켰지만,

심정적으로는 동방 한민족문화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중국정부는 2000년대 후반,

우하량을 관통하는 4차선 도로를 놓아 유적지를 은폐하였다.

 

홍산문화가 밝혀질수록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이 불리해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유적을 파괴한 것이다.

 

⑧ 원통형 토기 : 아래위가 뚫린 원통형 토기들은 3,500년 뒤에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광주 명화동 고분을 둘러싼 백제 중기의 원통형 토기가 대표적이다.

 

⑨ 천원지방은 ‘하늘 아버지의 정신은 둥글고, 땅 어머니의 정신은 방정하다’로도 해석된다.

천원지방 사상이 일본으로 전해져 정착된 문화가 일본의 전방후원형(앞쪽은 네모나고 뒤쪽은 원형) 무덤이다.

⑩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에 ‘옥玉’ 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신령 령靈’ 자는 밑의 무巫가 옥(가운데 구口 자

 

3개)으로써 신과 소통한다는 뜻이라 했다.

인간과 신 사이의 연결자인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 바로 옥인 것이다.

중국의 고증학자 왕국유의 해석에 의하면 예禮 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 자 위에

두 개의 옥(曲)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즉 예라는 것은 ‘옥을 바쳐 신을 섬기는 것’이다.

요컨대 선사시대의 석기와 토기는 생활용품이었지만,

옥기는 신을 섬기는 예기로 제작되었다.

(이형구, 이기환,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156~157쪽)

 

⑪ <설문해자>는

“옥은 오덕을 갖춘 아름다운 돌”이라 하였고, 공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다”(예기) 고 하였다.

 

⑫ 석기-옥기-청동기-철기의 4단계 시대 설정은

2천 년 전 <월절서越絶書>(한나라 때 쓰여 진 춘추전국시대 월국 역사서)에서도 보인다.

 

“신농, 혁서의 시대에는 돌을 병기로 삼았고,

황제의 시대에는 옥으로 병기와 神主를 삼았고,

우임금 때는 청동기를 사용했고, 그 이후에는 철기를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60~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