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의한 한민족사의 역사 왜곡

 

춘추필법의 악폐

공자가 노나라 24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여 <춘추春秋>로 이름 지었는데,

이 책은 주나라 왕실을 종주로 삼는 대일통大一統 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그 후 중국 사서들은 이 <춘추>를 역사 서술의 표준으로 삼게 되었는데,

중국 사서의 편찬 원칙은 다음 세 가지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요약된다.

 

첫째, 중국에 영광스런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런 일은 감추고(爲國諱恥)①,

둘째,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尊華攘夷)②,

셋째,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祥內略外).③

 

춘추필법은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자신들의 역사가 동이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 콤플렉스를 이 춘추필법으로 덮으려 한 것이다.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이 춘추필법에 의거하여 역사를 기록한 결과,

동북아 문명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는 중국 변방 오랑캐 족속의 하잘 것 없는 역사로 왜곡되고 말았다.④

 

각주)

① 위국휘치 : 위국휘치는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성공成公 9년 종에 나오는 “존귀한 사람을 위해 부끄러운 행위를 기록하지 않고,

현자를 위해 잘못을 기록하지 않으며, 어버이를 위해 질병을 기록하지 않는다.

 

(爲尊者諱恥, 爲賢者諱過, 爲親者諱疾.)”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이 말의 ‘존자尊者’ 대신에 ‘나라 국國’ 자가 들어간 것이다.

 

② 존화양이 : 존화양이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등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에 근원을 두고 있다.

<춘추공양전> 희공 9년 조에서, 제나라 환공이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尊周室, 攘夷狄)” 라고 한 것이 이 말의 시초이다.

 

③ 상내약외 : 상내약외는 후한 말기 서간徐幹이

그의 저작 <중론中論>에서, “공자가 <춘추>를 지으면서, 안(중국)을 상세히 하고

밖(이적夷狄)을 간략히 하며 자신에게는 엄하게 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게 하였기 때문에,

 

노나라에 대해서는 작은 악행도 반드시 기록하였고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큰 악행이라야 비로소 기록하였다.

(孔子之制 <春秋>也, 祥內而略外, 急己而寬人, 故於魯也小惡必書, 於衆國也大惡始筆)”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다.

 

④ 위국휘치, 존화양이, 상내약외라는 말로써

중국 사가들이 잘못된 춘추필법을 지적한 것은 단재 신채호이다. 그는 [조선사연구초]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서 중국 역사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사마천을 “공자 춘추의 존화양이,

상내약외, 위국휘치 등의 주의를 견수하던 완유頑儒”라고 혹평하였다.

 

 

 

탁록대전의 진실

한중 고대사를 날조한 기록상의 첫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때의 사관인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동북아의 한민족 강토로 쳐들어간 한무제가 전쟁에 참패하고 돌아온 시기에, <사기>를 저술하였다.

 

[사기史記]는 <오제본기五帝本紀>로 시작한다.

⑤ 즉 헌원의 역사가 <사기>의 첫머리요, 중국 역사의 첫머리가 된다.

마천은 <오제본기>에서 헌원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간략히 적은 다음,

곧바로 헌원과 치우 사이에 벌어진 탁록대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치우가 난을 일으키며 황제의 명을 듣지 않자,

이에 황제는 제후들로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⑥ 이 기록의 핵심은 ‘금살치우禽殺蚩尤(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 네 글자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지을 때 <상서>, <춘추>, <국어> 등의 고문헌들에감 의존하지 않았다.

“서쪽으로는 공동空桐까지, 북쪽으로는 탁록까지,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남쪽으로는 장강과 회수를

건너서까지”라는 그 자신의 말처럼, 현장 답사를 통해 과거 문헌에 대한 사실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서술은 신뢰도가 높을 것이다.

 

그런데 <사기>의 삼가三家⑦ 주석에는 치우에 대해 이와 다른 기술이 보인다.

먼저 <사기집해>에는 “응소應劭가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라고 말했다” 고 되어 있다.천하의 지배자는 헌원이 아니라 치우천황이었다는 말이다.

 

치우에 관해 보다 많은 내용을 제공하는 <사기정의>는 ‘치우 군대가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太弩)와 같은 병장기⑧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하였다.⑨

 

그렇다면 치우천황과 헌원의 관계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앞서 배달의 역사서 이야기하였듯이, 한족漢族의 우두머리였던 헌원이 치우천황을 꺾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군사를 일으키자, 치우천황이 10년 탁록대전 끝에 그의 무릎을 꿇리고

제후로 삼은 것이 사건의 진실이다.

⑩ 사마천이 서술한 ‘금살치우’는 역사적 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한 것이다.

 

사마천은 왜 굳이 역사의 진실을 뒤집어 기술해야 했을까?

그것은 중국 역사의 시조인 헌원을 천자, 즉 동북아의 주도권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헌원이 천자가 되면, 중국은 그 출발부터 천자의 나라가 된다.

중국을 처음부터 내내 동북아의 중심 나라였던 것으로 못 박기 위해 금살치우가 필요했던 것이다.⑪

 

각주)

⑤ [사기] <삼황본기三皇本紀>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사마천이 지은 것이 아니라

당나라 때 사마정司馬貞이 추가한 것이다.

⑥ 蚩尤作亂, 不用帝命, 于是皇帝乃征師諸候, 與蚩尤戰于涿鹿之野, 遂禽殺蚩尤.

 

⑦ 삼가三家 주석: 중국 25사史의 첫 번째로 꼽힐 만큼 절대적 권위를 누리는 <사기>는

판본도 다양하고 그에 관한 주석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기> 주석들 중 오늘날까지 인정받는 3대 주석을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라 한다.

 

남조 송의 배인이 쓴 <사기집해>, 당나라 사마정이 쓴 <사기색은>,

당나라 장수절의 <사기정의>가 그에 해당된다.

 

⑧ 병장기 : 치우천황의 군대의 무기에 대해 <관자>는

 “갈로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물에는 철이 섞여 있다. 치우가 이를 받아 제련하여 칼, 갑옷, 창 등을 만들었다.

(葛盧之山發而出水, 金從之, 送尤受而制之以爲劍鎧矛戟.)”라고 서술한다.

 

중국 사서가 이렇게 치우천황의 무기를 세밀히 묘사한 것은,

헌원의 군대는 그만한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음을 은연중에 고백하는 것이다.

당시 치우천황은 동북아에서 가장 먼저 청동 무기를 썼으며 동북아 금속 문명의 선진 주자였다.

 

⑨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214~231쪽.

⑩ 사건의 진실 : 치우천황에 대한 진실은 <환단고기> 외에 <규원사화>에서도 파악된다.

 

<규원사화>는 “당시 치우비蚩尤飛가 서둘러 공을 세우려하다가 전사하였는데,

<사기>에서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았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

치우비는 ‘치우비라는 장수’ 또는 ‘치우천황의 부장’ 등으로 해석된다.

 

⑪ 금살치우 : ‘금살치우’라는 역사 조작이 만들어진 데에는

당시 위만정권을 부수고 북부여를 넘보았던 한무제의 패배도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동방 한민족을 예로부터 중국의 제후국 백성이었던 것으로 만들어 패배의 치욕을

앙갚음하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조작된 기자조선

중국 역사서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예濊, 맥貊, 발發, 숙신肅愼, 우이嵎夷, 내이箂夷, 견이畎夷, 서이徐夷, 고죽孤竹, 고이高夷 등과

같은 고조선의 제후국 이름들이 등장한다.

다른 호칭을 써서 조선이라는 국가 이름 자체를 철저하게 제거한 것이다.

 

사마천도 [사기]<본기本紀>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제후국의 역사를 다룬 <세가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 이라 하여

갑자기 조선이란 이름을 썼다.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 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 전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것으로 정의한다.

 

<상서대전>, <사기> 등에서 전하는 기자조선의 내력은 이러하다.

주나라의 건국자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⑫를 풀어 주었다.

이때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이 그를 조선 왕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제후로 봉해진 이후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상서대전>은 기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 대해 설명하였다고 한다. 반면 <사기>는 기자가 책봉을 받았지만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하였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그와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기자가 무왕의 신하였던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사마천이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진실을 고백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자라는 인물이 조선 왕으로 봉해진 역사적 사실은 전혀 없었다.

 

중국 산동성 조현에 있는 기자묘

산동성 조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정도 가면 왕성두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들판 한가운데에 작고 초라한 모습의 기자묘가 있다.

만일 기자가 정말로 기자조선을 세웠다면 군주의 묘가 어찌 이리 초라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자가 조선으로 떠나버렸다(走之朝鮮)’는 구절이다.

이것은 동방 땅에 그전부터 조선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천명하는 내용이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 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단군조선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기자조선⑬은

한민족사를 그 출발부터 중국사에 예속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각주)

⑫ 기자 : 기자는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더불어 당시 상나라의 삼현三賢이었다.

비간은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에게 정치를 간하다가 사형되었고,

미자는 비간의 죽음을 보고 멀리 도망쳤다.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 감금되었다.

 

⑬ 기자조선 :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중국이 날조한 기자조선을 한민족사의 뿌리로 여기고 기자를 은인恩人으로 받들었다.

기자는 고조선 서쪽 변두리를 맴돌았을 뿐 한반도 지역으로 넘어 온 적이 없건만,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그대 나라에 기자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황급히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와 기자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북한 역사학계에서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 조각만 나왔다.

 

기자에 관한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太原으로 이주하였다. 망명지 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가

고향 서화(지금의 하남성 서화현)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

 

 

 

삼조당의 치우천왕

탁록에는 중국의 위대한 세 조상을 모신 삼조당三朝堂이 있다.

한민족의 조상인 염제 신농씨와 치우천황이 중국 역사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 헌원과 함께 모셔져 있다.

높이가 무려 5.5m나 되는 거대한 세 상像으로 황제 헌원이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좌우에 두 분이 배치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우리 배달겨례의 조상인 태호 복희와 염제 신농씨를

자기네 조상으로 모셔왔는데, 삼조당을 지으면서 마침내 치우천황까지 자기네 조상으로 모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곳 내부 벽화는 치우천황을 중국 역사의 시조라고 하는

헌원과 맞서 싸우는 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의도에서 억지로 치우를 중국인의 조상으로 만들어 삼조당에 앉혔지만,

그들 마음속의 치우는 결코 중국인의 조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중국은 원래 치우를 남방 묘족의 지도자로 간주하였다.

⑮ 그러던 중국이 왜 치우를 자기네 조상으로 끌고 간 것인가?

기에는 무서운 음모가 숨어 있다.

치우를 중국의 조상으로 만들어야 그 옛날 치우의 강역을 중국 땅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에게 치우의 강역이란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되어버린 산동반도, 요동반도, 만주 그 이상을 가리킨다.

 

삼조당을 지어 황제, 염제, 치우를 ‘중국 민족의 근본을 다진 인물’로 자리매김한

중국은 치우천황 후반기의 주 활동 무대였던 탁록을 ‘중국 5천 년 문명사의 요람’이자

‘중화민족의 주요 발상지의 하나’로 치켜세웠다.

 

한민족의 조상을 삼조당에 모셔 그들의 조상으로 만들더니,

이제 한민족의 고토인 탁록까지 그들의 시원 역사 무대로 만들었다.

 

중국학자 쑤빙치蘇秉琦는 “백 년 전 중국의 모습을 보려면 상해로, 천 년 전 중국의 모습을 보려면

북경으로, 2천 년 전 중국의 모습을 보려면 서안(장안)으로,

5천 년 전 중국의 모습을 보려면 탁록으로 가라”고 주장한다.

 

한민족의 조상을 가져다 모신 삼조당

1992년에 착공하여 1997년에 완공된 중국 하북성

탁록현의 삼조당에 모셔진 '세 조상' 중 좌우의 두분은 중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왼쪽의 치우는 배달의 14세 자오지환웅(치우천황)이며,

오른쪽의 신농은 배달의 8세 안부련 환웅 사람으로 서토에 신농국을 세운 염제 신농씨다.

분 모두 한민족의 성황聖皇이다.

 

각주)

⑮ 국내 사학계도 중국의 주장을 추종하여 치우천황을 우리 동이족과 무관한 인물로 보고 있다.

하지만 1940년대에 중국 쉬수성徐旭生 교수가 여러 근거를 들어 ‘치우는 동이족의 영수’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쉬쉬성 교수가 내세운 근거는 이러하다.

 

첫째, <사기정의>에 나오는 “孔安國이 말하길 ‘구려의 임금 칭호가 치우이다’라 하였다”는 구절이다.

구려족은 동이족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치우는 한민족의 조상이다.

 

둘째, 치우가 제나라에서 팔신八神 중의 하나로 존숭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치우천황이 팔신 중 병주兵主임을 밝히는 <환단고기>와 상통한다).

산동지역의 제나라 역시 동이족의 무대이다.

 

셋째, <염철론鹽鐵論> 결화結和편의 “황제가 탁록 전투에서 양택을 죽였다”는 구절이다.

양택은 양호의 오류로 양호兩昊는 대호大昊와 소호小昊를 뜻하는데,

모두 동이족의 우두머리를 일컫는다.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238쪽).

 

인문시조人文始祖 태호 복희

치우천황과 더불어 배달시대의

또 다른 성인 제왕인 태호 복희씨에 대해서는 중국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가?

 

복희씨는 5천여 년 전 배달시대에 인간의 생활 문명을 크게 진작시켰던 문명의 창시자이다.

또한 팔괘의 창시자로서 대한민국의 태극기의 시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복희씨를 모신 사당이 중국 내 도처에 있다.

 

그 가운데 최근에 크게 증축된 하남성 회양현의 복희묘가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하여

그곳에는 수많은 방문객이 늘 장사진을 치고 있다.⑯

 

그런데 중국이 이곳을 유독 부각시키는 데에는 목적이 있다.

복희씨가 대륙 서쪽 깊숙한 곳(현 감숙성 천수시의 구지산仇地山 근처)에서 태어나

중국의 중앙부인 하남성에 도읍을 정하고 그곳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한마디로 복희씨가 대륙의 서쪽에서 동진하였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배달의 신시(지금의 백두산)에서 태어나

지금의 산동성 미산현에 묻혔다.

 

 

즉 대륙의 북쪽에서 아래로 남하하면서 동방 신교문명을 일으켰다.

결론적으로 중국이 회양현의 복희 사당을 내세우는 것은,

복희씨의 이동 경로를 변조하여 그를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다 간

 완벽한 중국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중국 하남성 회양현의 복희사당

<궁궐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사당 정면에 인문시조라고 쓴 현판이 있다.

사당 안 복희상에 팔괘가 들려져 있다. 천하제일묘라 불리는 이곳에서 열리는 복희 추모행사에는

백만 명의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왜 복희씨가 완벽한 중국인이 되어야 했는지,

그에 대한 답을 우리는 고풍스럽게 장식한 회양현 사당의 정면에 걸린 현판,

‘인문시조人文始祖(인류문명의 첫 조상)’에서 찾을 수 있다.

 

복희씨를 온 인류의 큰 조상으로 내세워, 복희씨의 후손인 현

중국을 전 세계 사람들의 어버이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중국정부는 동이족 조상인 복희씨, 신농씨, 치우천황을 자기네 조상으로 모시는 것에 대해

‘한족과 55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소수민족의 조상들은 모두 중국의 조상이다’라는 억지 논리로 정당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남의 조상을 자기네 조상으로 삼는 환부역조換父易祖의 죄를 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각주)

⑯ 현재 중국에는 ‘천하제일묘’라 불리는 하남성 회양현 복희묘,

가장 최초로 세워진 신락시 인조묘人祖墓, 산동성 미산현 복희묘,

하남성 맹진현의 용마부도사龍馬負圖寺(“용마가 그림을 지고나온 절”), 감숙성 천수시의 복희묘,

괘태산 복희대, 서화현 구지애 등의 복희묘가 있다.

<환단고기>가 밝히는 산동성 미산현의 복희묘 규모가 가장 작으며, 관리 또한 아주 허술하다.

 

⑰ 천수시를 복희씨의 탄생지로 말하는 최초의 문헌은 서진西晉 때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이다.

이 책에서 복희씨가 자란 곳이라 말하는 성기成紀가 곧 지금의 천수시 지역이다.

1991년 쟝쩌민江澤民 주석이 천수를 시찰할 때 ‘희왕고리羲皇故里’라는 글을 써준 이후

천수가 복희씨의 고향이란 것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굳어졌다.

(상생방송STB, 역사 다큐멘타리<태호복희>)

 

⑱ 산동성에는 복희에 관한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또한 중국 사서 <춘추좌씨전>에서도, 복희씨의 후손이 산동성 지역에 널리 퍼져서

활동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 왜곡, ‘동북공정’

20세기 들어서서 유물의 과학적 연대 측정이 가능해진 가운데,

뜻밖에도 중국의 동북방 변방인 요하 지역에서

황하 문명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문명인 홍산문화가 발견되었다.

 

난처해진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민족 역사관’이

라는 절묘한 방안을 내놓았다. 이때 가장 문제가 된 중국의 시원을 더 오랜 옛날로 끌어올리기 위해

먼저 하상대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시작하여 중국 고대사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3대 왕조 하, 상, 주의 연대를 확정하였다.⑲

 

그리고 나서 신화의 시대로 알려진

삼황오제 시절을 실재한 왕조로 만드는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中華古代文明探源工程’을 2003년부터 진행하였다.

이 공정은 하상주단대공정보다 한 술 더 떠서,

중국 역사를 1만 년 전으로 끌어 올려 중화문명을 ‘세계 최고最古 문명’으로 만들기 위한 계책이다.

 

이 탐원공정의 일환으로 동방 문명의 주인공인 한민족의 북방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정치 공작을 벌렸으니, 그것이 바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다.

동북공정은 과거 2천여 년 동안 행한 동북아 역사 왜곡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만주와 요동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데 있다.

 

동북공정에 깔린 중국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인가?

남북한의 통일에 대비하여 동북 3성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근거를

미리 만들어두겠다는 것이다.

 

한국이 통일되더라도

한국의 역사 무대를 한반도 안으로 한정시키고,

 

대신 중국이 동북아 전체의 맹주가 되고 더 나아가 미국을 앞지르는

초강대국으로 비상하겠다는 의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21세기의 세계를 중국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2002년부터 7년 동안 우리 한국의 상고 역사를 훔쳐가고 있을 때,

이 땅의 정치가와 역사가는 대부분 수수방관한 채 ‘한민족과는 무관하다’는 망발을 하였을 뿐이다.

 

현지를 찾은 몇몇 민족사학자들만이 한민족의 옛 터전을 찾아 중국의 파렴치한 행동을 고발하고 있으나,

그 외침은 광야의 빈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

 

 

중국역사지도집](1996년)에 나오는 한나라 때의 동북아 지도

한나라의 국경선이 만리장성을 훨씬 넘어 한반도의 북부 지역까지 뻗어 있다.

중국이 주장하는 잘못된 이 지도가 서양의 역사책에 그대로 실리고 있다.

 

각주)

⑲ 2000년 9월에 하상주단대공정 사업을 완성한 중국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연대를

각각 BCE2070~1600, BCE1600~1046, BCE1046~771년으로 확정하였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156~1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