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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를 물리친 북부여의 구국 영웅, 고두막한

 

한무제의 위만조선 침략

북부여는 4세 단군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BCE 109년, 한무제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스리던 위만조선으로 쳐들어왔다.

 

한나라는 초기에 연신 패하였으나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우거를 죽이고

왕검성을 점령하였다(BCE 108).

 

이때 한무제는 새로운 점령지에 ‘한나라의 군현(漢四郡)’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그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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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의 북부여 침략과 고두막한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한무제는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해 왔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세 고우루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이를 지켜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였다. 그러고는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열어

(BCE108)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였다.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자칫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한민족 상고사 최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동명왕은 구국영웅으로 추앙받아

북부여의 5세 단군으로 즉위하였다(BCE 86).

 

원래 북부여의 4세 단군을 계승하여

잠시 보위에 있었던 해부루는 동쪽의 차릉(가섭원)으로 이주하여 동부여웠다.

이로써 부여는 동서로 나뉘게 되고 후기 북부여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두막한의 등장으로 전기 북부여 시대가 끝나고 새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북부여는 고두막한의 다음 대에 이르러 180년(BCE 230~ BCE 58)의 짧은 역사끝내게 된다.

 

 

고조선의 계승자, 북부여

‘북부여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핵심 요체이다.

그런데 강단 사학자들은 위만정권을 고조선의 계승자로 앉혀 놓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근거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를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로 설정하였다.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라 하여,

해모수와 주몽을 거의 동시대 인물로 만들었다.

206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왜 북부여사는 이렇게 난도질되었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한무제가 동명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사를 누락시킨 것에서 비롯된다.

그 후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졌으며,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 사서들이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강단사학자들이 다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결과이다.

 

<후한서>, <삼국지> 등의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사는 모두 서부여의 역사이다.

서부여는 동부여가 망한 후 [삼국지] <동이전>에 나와 있는 울구태, 간위거, 마여, 으려 등은

모두 서부여의 왕이다.

 

이러하건만 강단사학계에서 나오는 책과 논문들은 서부여를 부여의 원래 모습인 양 그리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부여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는 중국 사서의 기록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부여의 원형이 처참히 파괴도면서 한국사의 허리가 잘려 버렸다.

한국사의 국통 맥이 어지러워지고 뿌리 역사가 소멸되었다.

북부여라는 잃어버린 고리가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에 제대로 연결되는 그 날이 바로 동방 배달민족사의

9천 년 국통 맥이 온전하게 똑 바로 서는 역사 광복의 날이 될 것이다.

 

 

각주)

 동명왕 : 고두막한은 고조선의 47세 고열가 단군의 직계 후손이라 한다.

동명왕이란 칭호는 '동방東의 광명明을 부활시킨다'를 뜻한다.

한무제를 물리쳐 고조선의 위엄과 영광을 되찾고자한 그의 구국 의지가 나타나 있다.

 

졸본부여를 동명부여라고도 한다.

북부여사의 전모믈 모르는 현 역사학계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동명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김천령金千齡(연산군 때의 문관)은 자신이 지은 부賦에 서 "동명이 창업하고 주몽이 계승하였다

<東明創其緖業, 朱夢承其餘波>"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전하였다.)

 

 북부여사 전체를 역사 교과서에서 찾을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동명왕 고두막한에 관련된 내용이 한민족사

통이 끊어진 핵심으로 지금의 역사 교과서에서 가장 잘못된 내용 중의 하나이다.

 

 동부여 : 제후로 강등된 해부루는 국상 아란불과 함께 가섭원(지금의 러시아 오소리강 지역)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을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 라고 한다.

 

동부여는 2대 금와를 거쳐 3대 대소 때에 고구려에 망하여 갈사부여와 연나부부여로 나우어졌다.

갈사부여는 대소왕의 아우가 갈사수葛思水(지금의 두만강 유역)에서 세운 부여이다.

 

연나부부여는 대소왕의 종제가 연나부(지금의 요령성 개원)에 세운 부여로,

모국인 동부여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부여'라고도 부른다.

 

 환단고기 역주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