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의 낙랑, 고조선의 낙랑홀, 번조선의 낙랑, 최숭의 낙랑국

 

배달의 낙랑, 고조선의 낙랑

낙랑은 이미 배달의 태호 복희씨 때부터 있었던 지명①으로 지금의 하북성, 요령성 일대이다.

 

13세 흘달단군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 桀을 정벌할 때 빈邠과 기岐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때 고조선의 군사낙랑 군사가 합세하였다고 하는데,

 

이 낙랑은 과연 무엇인가? 고조선의 낙랑은 23세 아흘단군 때 낙랑홀樂浪忽 성으로

<단군세기>에 다시 나타난다. 한편 낙랑은 하북성 인근에 있었던 고조선의 제후국 이름이었다.

 

 

번조선의 낙랑, 최숭의 낙랑국

낙랑은 위만이 번조선을 찬탈해 다스렸던

왕험성王儉城(번조선 말기의 수도로 지금의 하북성 창려昌黎) 지역이다.

 

본래 평양 일대에 있었던 낙랑은 고조선 삼한 중 번한番韓의 유민 최숭이 세운 ‘최씨 낙랑국’이며

낙랑군이 아니다.

 

현재의 평양지역을 낙랑군으로 보는 인식은 당나라 이후에 생겼으며,

그 전에는 요동에 있었다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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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지역의 변천

<배달국 낙랑 - 13세 흘달단군 때 낙랑 - 23세 아흘단군 때 낙랑홀 - 번조선 왕험성(하북성 창려) 일대는 '낙

랑' 지역 - 위만이 낙랑지역에 위만 정권 세움(BCE194) - 낙랑지역 부호 최숭이 왕검성(지금의 평양)으로 이

주하여 낙랑국樂浪國을 세움(BCE195) -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함락하나(BCE108), 북부여 고두막한과의 싸

에 져서 패퇴. 한무제는 위만조선 에 한사군,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려고 밑그림을 그렸으나 실천에 옮

지 못함 -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가 낙랑 지역의 지배자가 됨...>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설은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정인보의 <한사군정무론>, 이유립의 <역사로 본 우리 국토>, 문정창의 <한국고대사>,

임승국의 <한국정사韓國正史>, 박시인의 <알타이 인문연구>,

윤내현의 <한국고대사 신론>, 이덕일의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등이다.

 

현재 우리 주류사학계에서는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을 구별하지 못하고

낙랑군이 한반도 대동강 일대에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즉 BCE108년, 한나라 무제가 위만정권을 멸하고 설치한 네 개의 군 중 평안도 일대에

낙랑과 대방 두 군을 두었는데, 고구려 미천왕 14년(313)에 낙랑군을 축출하면서 모두 회복했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출토된 유적의 문제

주류사학계에서 대동강 일대를 낙랑군으로 보는 유력한 근거는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이다.

이 지역 무덤들은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세 가지로 다른 지역 무덤과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학자들에 의하면 광복 이후 평양 일대의 무덤 3,000여기를 발굴 조사해본 결과,

나무곽무덤은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한漢나라가 출현하기 훨씬 전인 BCE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 형태였으며,

귀틀무덤을 거쳐 벽돌무덤으로 발전하고 3세기 중엽부터 고구려 무덤형식인 돌칸흙무덤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은 한나라 것과 다른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인 좁은 놋단검(세형동검)을 비롯해

조립식 쇠단검, 조립식 쇠장검, 질그릇과 마구 등이다.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 사회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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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낙랑시대 봉니(封泥). 문서를 봉할

때 진흙에 찍은 인장이다...>

 

평양에서 출토된 봉니封泥의 문제

또한 낙랑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 중에서 봉니封泥는 일제가 위조한 대표적 유물로 본다.

봉니는 문서를 운송하는 도중에 남이 보거나 위조하지 못하도록 죽간을 묶은 노끈 매듭에

진흙을 발라 도장을 찍은 것으로 그 서체나 모양도 다양하다.

 

그리고 봉니는 보내는 곳이 아닌 받는 곳에서 발견돼야 하며,

문서를 보려면 봉니를 깨트려야 내용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은 드물다.

 

그런데 낙랑 봉니라는 것들은 대부분 형체도 온전하고 서체나 형태도 거의 흡사하다.

더구나 낙랑군 치소였다는 토성 터에서 받는 곳인 관할 현체 있어야 할 봉니가

200여개나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수가 발견된 예는 없다.

 

그러한 봉니가 광복 후 북한이 발굴하는 과정에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아 일제의 봉니 위조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군으로부터 받은 봉니가 하나도 없고 함께 발견되는 죽간도 없는 등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환도성에서 낙랑으로 도읍을 옮긴 미천왕? 

또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247) 조를 보면, “왕은 환도성丸都城이 난리를 겪어

다시 수도로 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聖, 移民及廟社.”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미천왕이 낙랑군을 축출하기 66년 전 일이므로 지금의 평양이 낙랑군 영역이었다면

남의 땅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

 

이밖에도 기존학설에 오류가 많으나 주류사학계는 북한학계의 최근 연구결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자들의 학설과 맞지 않는 기존 기록도 잘못된 것이라며

여전히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있다는 전제하에 끊임없이 모순되는 글만 되풀이 하고 있다.

 

각주)

① "복희는 후에 청구, 낙랑을 지나 진陳 땅에 이주하여... 서쪽 땅에 나라를 세우셨다."

([태백일사]<신시본기>)

 

요서지역(번조선)에 살던 대부호 최숭이 백성과 함께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발해 바다를 건너 막조선으로 넘어왔다.

 

그는 오가의 부족장들에게 거금의 재물을 주고 왕검성(지금의 평양)을 넘겨받아 낙랑국을 세웠다.

(BCE195).

강력한 진한제국의 출현으로 요서지역에 위기감이 팽배한데다 위만을 비롯한 수많은 한족이 망명하여 오자,

어수선한 정국을 피해 최숭이 한반도 지역으로 넘어와 나라를 세운 것이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1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