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북적, 서융, 남만 spc.gif한족,  역사는 또다른 동이의 역사이다. spc.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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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자기 나라의 동방에 거주하던 종족을 일컫던 호칭.

 

중국인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여 주변의 종족을 방위별로 나누어 지칭했는데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이 그것이다.

이같은 호칭은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과도

관계가 있다. '이'(夷)라는 명칭은 은(殷)의 갑골문자에 이미 등장하고 있는데

 

은대의 '이'는 황허 강[黃河] 중류 이동의 지역인 반도 및 화이수이 강[淮水], 쓰수이 강[泗水] 일대의

동방종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서주(西周) 때에는 이 일대의 종족을 동이·남이·회이로 나누어 지칭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동방의 '이'를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

풍이(風夷)·양이(陽夷) 등 아홉으로 분류하여 파악하기도 했다.

 

중국인의 동이에 대한 인식은 다른 주변 민족에 비해 뚜렷하여 선진(先秦)문헌에서부터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라는 글자의 어원에 대하여 〈설문해자 說文解字〉는 대궁(大弓),

즉 활을 잘 쏘는 것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역사에서 9개의 해를 떨어뜨려 중국을 구했다는 전설상의 인물인 예(羿)나,

한때 동방의 30국을 아우르고 서주를 위협했던 활의 명인(名人) 서언왕(徐偃王)이

동이족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중국인의 동이족에 대한 활과 관련한 인식은 매우 뚜렷했던 것 같다.

 

고구려의 주몽(朱蒙)도 그 이름이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선진문헌 중에는 동이를 '동방군자의 나라'로 표현하기도 하여,

중국인의 동방에 대한 외경을 전하기도 한다

(→ 색인 : 중화사상)

 

아시아 Asia 는 어원으로 해가 떠오르는 곳을 뜻한다.

반면 유럽 Europe은 해가 지는 곳을 의미한다.

아시아 중에서도 제일 동쪽에 위치한 한국 .

해가 동東에서 떠서 서西로 지듯이 문명의 태양도  동쪽에서 먼저 떠올랐고

그 주인공이 바로 우리의 선조인 동이족이다.

인류문명의 뿌리 동이 東夷는 인류문명에 동이족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밝혀준다.

 

먼저 동이의 어원을 살펴보자 .

동이의 동東은 생명, 탄생, 시작 , 광명을 의미한다.

동이의 이夷는 활을 사용하는 동쪽사람, 신을 대신하는 사람, 어진 사람이란 뜻이다.

예로부터    대大 (큰)  +  궁弓 (활, 임금, 근원) = 夷는 큰 활을 쏘는 사람

큰 임금(천자) , 커다란 뿌리 등으로 쓰였다.

그래서 동이는 태양과 광명을 숭상하고 모시는 어진 사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보편적의미)

 

 

동이족의 의미 변화를 살펴보면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중국 동부의 산둥성, 쟝수성, 안휘성 등지와 만주인 한반도 등지에 퍼져살던 민족을 부르던 호칭이,

중국의 진나라 통일 이후 산동반도에 거주하던 동이족 일부가 중국 역사에 흡수되면서

 

동이는 만주와 한반도에 분포한 한족, 예맥족으로 범위가 축소되고

한나라 이후부터는 동이, 남만, 북적, 서융등의 호칭처럼

동이족이 '동쪽 오랑캐'란 뜻으로  비하되었다 .

 

그러나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전에는 동방민족의 호칭을 그냥 이夷라고 하였다.

화하족은  동이를 대인으로 우러러보면서도 계속되는 동이족의 정복정책에 시달려

나중에는 동이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자연히 동이족에 대한 적개심이 쌓여 동이의 뜻을 오랑캐로 바꾸어 해석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이 동이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근본이유는  동이족이 시원문명의 뿌리요 천자국이었는데

그 지위를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야망 때문이다.

 

동이족이 남긴 찬란한 문화를 보면

중국 요녕성의 적봉, 우하량 등지에서 황하문명보다 최고 3천년이 빠른 문화유적이 나오기도 하는데,

국가단계에 진입한 유물을 보여줄 뿐 아니라 가장 오래된 용과 봉황의 유물,

세련된 옥기등이 나와 중국을 긴장시켰다.

 

이 지역은 화하족과는 거리가 먼 동이족의 중심 생활무대였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에서는  동이족의 생활문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빗살무늬 토기와 비파형동검,

석묘등이 많이 출토되어 역사에 문외한이라도 홍산문화가  동이족의 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

 http://www.usimin.co.kr/m/cafe/bbs/board_view.php?num=173078&page=1

1379A71E4BA421B666D54B

 

한족

동이     

북적

서융

남만

B.C 200년경

고조선,삼한

흉노

백목

200년경

<,,>

고구려,백제,신라,가야

흉노,선비

,

남만

4~5세기

고구려,백제,신라,가야

16

16

남만

 

북적<선비,흉노> 서융<,>

한족의 주거지였던 황하강북쪽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다.

한족은 이를 시작으로 오랑캐라 불렀던 민족들로부터 지배당하기 시작한다.

 

선비족은 전연,남연,후연,서연,서진,서량,북위등을 세워 가장 세력을 떨쳤으며

흉노는 ,전조,후량등을 세웠고 갈은 후조 강은 후진 저는 전진,후량등을 세웠다.

한족은 북연과 전량,서량을 세웠을 뿐이었다.

 

이렇게 한족이 지배권을 상실하자 고구려는 가장강성했던 북위를 누르고

백제는 요서와 산둥반둥등 중국동해안지방을 장악했다.

 

6~7세기

수  

고구려 발해,백제,신라

돌궐의 지배를 받음

토번

남조

 

한족은 황화강지역을 수왕조에 의해 수복한다. 하지만 동이족인 고구려에 100만대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결국 패해 나라가 없어지고 그뒤를 이은 당도 고구려를 이간계로 겨우 공략하고 투르크족

<돌궐> 공략하기 이른다.

 

10~11세기

510

고려,여진

<거란:몽고계통>

토번

대리

12~13세기

고려,

서요,몽골부족시대

토번

대리

 

동이족의 말갈<여진> 금나라를 세워 북쪽지역의 한족을 지배한다.

(설에서는 금 태조 아골타의 선조인 김준 또는 김행이 그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또한 금나라는 발해를 계승한다고 했으나 후에

중국의 흡수중화사상 때문에 동이족에서 한족에 흡수당한다.

 

13세기 후반

원나라의지배시대

고려

원나라

원나라의

지배시대

원나라의

지배시대

북적인 몽골족이 모든 민족을 지배했다. 이중 한족은 최하의 계층이었다.

15세기

명나라

조선

북원<타타르>

티베트

명나라지배시대

한족의 마지막 반격으로 명나라가 세워진다. 남만<대리> 이후 독립을 유지하지 못한다.

17세기

청나라지배시대

조선,<후금>

청과러시아의지배

청나라지배시대

청나라지배시대

 

한족의 마지막지배세력이던 명은 꺼지고 동이족의 청이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할 것은 청은 중국<한족> 역사다라는 시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렇지 않다이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금, 청, 

고려, 조선 

고조선은 고구려가 명맥을 이었고

고구려는 발해와 고려가 발해는 금이 금은 청이 고려는 조선이 명맥을 잇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청나라의 역사 여진의 역사는 우리와 같이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이고 중국<한족> 역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에 흡수당해 누가 여진족인지 현재는 알아볼 방법이 없겠지만

여진은 동이족의 하위부족<피지배층>으로 우리민족의 역사이다.

 

주)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므로 어느 민족의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것은 의미 없는 논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중국의 가장 많은 민족의 분포는 한족이다.

 

 

20세기초

일본의점령과군벌시대

일본점령시대

몽고

티베트

장족 인구감소

21세기

중국

남한,북한,간도:조선족자치주<한족지배>

몽고,내몽고<한족지배>

티베트자치주<한족지배>

인도에 임시정부

광시장족자치주<한족지배>

 

 

남만

한족의 그들의 특기인 엄청난 번식력과

오만한 중화흡수주의로 주변민족을 한족으로 만들기를 자연스럽게 진행했고 남만인

광시좡족의 자치주에는 주민의 3/1만 순수남만족만 있고 혼혈한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것은 그냥 보아서는 안된다.

 

무슨말인가 하면 일제시대때 우리가 겪은 창씨개명 우리말과 글을 없애고 일본인 만들기 또한

이스라엘인이 땅의 정당성을 확도하려고

지역에 더많은 자국민족을 살게하는 정책과 같은 것으로 지극히 오만하고 이기적인 것 인다. 

 

이로서 광시좡족<남만>은 명나라<한족>의 지배를 받고난뒤 독립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민족자결주의는 찾아볼수 없게 말이다. 

서융

티베트는 13세기 이후 중국의 통치와 영국의 영향을 번갈아 가며 받아 왔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티베트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 1950년까지 티베트는 한족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중국은 한국전쟁 개입과 유사한 시점인 1950년 10월 인민해방군을 동원,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당시 티베트인들은 유엔, 인도, 영국 등에 지지를 호소하며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후 티베트는 1951년 5월 서장자치구(※ 중국에는 5개 자치구가 있음)로

통합되었고, 1954년 중국·인도간 협정에서 인도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통치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1959년 3월 티베트에서는

중국의 티베트 점령을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달라이 라마는 자치정부 관리 및 추종자

약 1,000명과 함께 인도로 망명하여 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동 폭동으로 인해 약 4만명의 티베트인이

사망하고, 동년 티베트 중부지역에서만 8만 7천명이 추가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9년은 티베트와 관련된 많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동년 1월 중국정부에 우호적이고

달라이 라마에 이어 서열 2위인 판천 라마가 사망하게 되어 중국으로서는 티베트에 대한 주요
통제수단을 잃게 되었다. 또한, 동년 3월은 1959년 티베트 폭동의 30주기로서 이로
인해 대규모 소요가 발생하는데 1989년 3월(천안문사태 3개월전)부터

1990년 4월까지 티베트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동 기간중 소요로 인해 중국의 군병력 및 치안인력

600여명이 사망하였으나, 티베트인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00년 1월에는 달라이

라마, 판천 라마에 이어 서열 3위인 카마파 라마(14세)가 인도로 월경하여, 달라이 라마의 환영을 받았는데,

카마파 라마에 대해 인도정부가 망명을 허용할 경우, 양국관계의 악화를 경고하였다.

 

티베트의 자치/독립운동은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망명정부의 대유엔, 미국, 유럽 활동 등

국제적인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미국은 티베트 문제를 중국의 민주주의, 인권문제에 포함시켜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티베트(서장)지역 에 대한 영토 주권 및 중국내 기타 지역(신강, 내몽고 등) 소수민족에의 영향을 고려,

기존의 강경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달라이 라마와 대만간의 접촉은

중국을 분열·와해시키려는 음모로 규정, 무력사용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2000년 1월 티베트 불교계 서열 3위인 카마파 라마(14세)가 인도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중국과 인도간의 외교적 마찰로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

중국정부는 이 망명사건으로 티베트-네팔 국경 통제를 강화해왔다.
중국정부에 대한 티베트의

저항운동은 중국내에서 폭탄테러 등의 유형으로 간헐적이지만 끈질기게 지속되고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그 저항 강도는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다만 인도에 위치한 망명정부를 중심으로 국제적인 노력은 활발한 편이다. 

 

 

북적

외몽골로 불리는 몽고는 러시아의 지원으로 독립을 했으나 내몽골지역은 한족에 빼앗겼고

한족의 이주정책으로 내몽골자치주의 주민비율도 한족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결국 한족의 의도대로 독립운동과 민족의식은 소멸되어 가고있다.

 

동이

남한과 북한은 알다시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으로 분단된게 아니라
그주원인은 그당시 지역적 대립구도 때문에 일본이 아닌
한국이 분단되게 된다.

간도지역은 본래가 조선의 땅으로 넓은 의미의 만주는 영토분쟁이 힘들지만 간도는 조선족이 살고 있고
일본이 청에 넘긴 간도의

권리는 일본합방이 국제법상 무효이기 때문에 우리가 통일된다면 그다음으로 마무리져야할 일이다.
이것은 영토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성지이자 일본때 빼앗긴 권리를 찾는것이다.

하지만 조선족은 한족의 동화정책에 조국을 중국이라고 생각하고있으며 동북공정에도
조선족 사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으니
뛰어난 번식력과 오만한 중화사상에 조선족의
한족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것이다.

 

대만

장개석의 한족세력이 공산세력에 패해 타이완에서 정부를 세운다
하지만 원주민인 고산족이 85%로 15%인한족보다 많다 그래서

독립움직임에 중국이 긴장하고 있다.
대만이 독립하면 도미노처럼 수많은 한족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의 독립운동을 우려해서다.

만주족은 중국에 거대한 제국(淸)을 형성했다.
1759년에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를 침략했고 1826년까지 지배했다. 이 기간 동안

위구르는 그들의 독립을 얻기 위해 만주의 통치에 대항해 42회의 탈환운동을 일으켰다.

1863년의 마지막 운동에서 위구르인들은

그들의 조국으로부터 청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864년에 독립 왕국을 다시 세웠다.
이 왕국은 오토만 제국, 러시아

그리고 대영제국에 의해 인정되었다. 그러나 동투르키스탄을 향한 재정 러시아의 팽창을 우려하던
대영제국은 동 투르키스탄을

지배하려던 청을 설득했고 청이 동 투르키스탄을 침략하도록 영국은행이 자금을 댔다.

1876년 동투르키스탄을 침공한 청은 그 땅을 새로운 영토 또는
새 영지라는 의미의 신강(新疆)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884년 11월 18일에 만주 청의 영토로 합병되었다.

1911년 국가주의자 한족들은 여진 세력을 점복하였다. 그리고 공화국을 세웠다.

위구르인들은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고
이 기간 동안에 중국 국가주의자들의 통치에 대항하여 몇 몇의

독립운들들을 계획했다. 1933년에 두 번째 운동이 있었다.

1944년 위구르인들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으로 새로이

독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독립된 공화국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적인 중재와 정치적인 음모에 의해
점복되었다.
이 기간동안 소비에트 연방이 위구르의 독립운동을 방해한 것은 이미 증명된 것이다.

1949년에 국가주의 한족들이 한족 공산당에게 패배했다.
후에 위구르는 중국 공산당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

 

위구르

여진족은 중국에 거대한 제국(淸)을 형성했다.

1759년에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를 침략했고 1826년까지 지배했다.

이 기간 동안 위구르는 그들의 독립을 얻기 위해 만주의 통치에 대항해 42회의 탈환운동을 일으켰다.

1863년의 마지막

운동에서 위구르인들은 그들의 조국으로부터 청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864년에 독립 왕국을 다시 세웠다.

이 왕국은 오토만 제국, 러시아 그리고 대영제국에 의해 인정되었다.

그러나 동투르키스탄을 향한 재정 러시아의 팽창을

우려하던 대영제국은 동 투르키스탄을 지배하려던 청을 설득했고

청이 동 투르키스탄을 침략하도록 영국은행이 자금을 댔다.


1876년 동투르키스탄을 침공한 청은 그 땅을 새로운 영토 또는

새 영지라는 의미의 신강(新疆)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884년 11월 18일에 만주 청의 영토로 합병되었다.


1911년 국가주의자 한족들은 여진 세력을 점복하였다. 그리고 공화국을 세웠다.


위구르인들은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고 이 기간 동안에

중국 국가주의자들의 통치에 대항하여 몇 몇의

독립운들들을 계획했다. 1933년에 두 번째 운동이 있었다.

 

1944년 위구르인들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으로 새로이 독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독립된 공화국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적인 중재와 정치적인 음모에 의해 점복되었다.

이 기간동안 소비에트 연방이 위구르의 독립운동을 방해한 것은 이미 증명된 것이다.

1949년에 국가주의 한족들이 한족 공산당에게 패배했다. 후에 위구르는 한족 공산당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rtc100005&logNo=90116610996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jnara&logNo=120119954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