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역사의 근원(자유발언 1990년 2월호) 


올린이 송호수 올린날짜  2003-03-28 


문화동방 기원설


1.동방역사의 근원

지금으로부터  약 5만년 이전에서 비롯하여 1만 5천년 전까지 계속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제 4빙하기시대의 지층에서 우리들 현존 인류의 직계 조선이라 추정되는 사람이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1926년에서 1928년 사이에 북경 주구점(北京周口店)에 대하여
프랑스의 와이덴 러이히 교수는 "북경인이 불(火)과 기계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분명하니
인류문화의 기원도 역시 같은 시대에서 구할 수 있다" 고 발표하였다.
(日本民族論, PP.17,18)

 

그런데 또 삼성기(三聖紀)에서는
동녀동남(童女童男) 8백인이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에 내렸다.

 

이에 한임(몄?은 감군(監群)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서 불을 일으켜 먹는 법을 처음 가르쳤다.

 

이를 '한국(桓國)리라 하고

를 천제한임(天弟桓因)이라고 하며 한 아버지'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와이덴 러이히 교수의 발표나 삼성기의 기록들은
동방인이 먼저 불을 사용하였다는 내용에서 그 문화의 선진성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와다나베교수(渡邊)는 "有色人種의 대불평" 이라는 제하에서
동방에서는 치우(蚩尤)천왕 시대(약 4,700년 전)에 이미 청동기(靑銅器)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인 문화의 선진설이 터무니없음을 강력히 시사하였다.

 

치우(蚩尤)천왕의 동두철액(銅頭鐵額)과 치우가 동과 철을 채굴하여
산업을 일으키고 병기(兵器)를 만들어 썼다는 고기(古紀)들이 산견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또 황제(皇帝)와 치우(蚩尤)가 교전(交戰)을 할 적에
치우의 운무(雲霧)전술에 방향감지를 위한 무기로써 지남차를 황제가 만들어 대승하였다는 것인데
지남차(指南車)란 쇠붙이가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치우, 황제시대에 동(銅), 철(鐵)로 만들어진 기기(機器)가 이미 있었음이 확실하다.
 
최근 중국 인민일보(86.7.25)의 발표에 의하면

5천년 전의 여신묘(女神廟)가 발굴 되었다고 하여
전설적인 신화로만 취급되어 오던 삼황오제(三皇五帝)설이 역사적 사실(史實)로 확인되었다는 것,


더욱이나 여신묘가 발견된 곳은 요령성인데 요령성은 당시 고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되어 있다.

5천년 전 요령성 문화는 동이(東夷) 것임이 확인된 이상 문화 동방발상설이 더욱 뚜렷해 지고 있음의 시사이다.

 

또 1977년 2월 광명일보(중공)가 밝힌 것을 보면
당시 동이족이 살던 절강성(折江省) 부근에서는 7천년 전의 벼농사지를 발굴했다고 발표하였으며


중공의 "사회 과학적 고척추동물연구소"와 서북대학의 "발해연안 발굴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직계 조상이 신석기 시대부터 5천년 이후의 사람들과도 인류의 발달과정에서 혈연적인 관계가

있었을것"이라고 말하면서


발해 연안이란 "광의로 발해 남쪽의 산동반도, 서쪽의 하북성, 북쪽의 요서,
동쪽의 요동반도를 위시하여 길림성, 한반도 일부를 포함한다고 지칭한다"고 하였다.

 

1981년 8월 18일자 북한의 중앙통신은 "평양 부근의 남경 유적지에서 4천년 이전의 집터와 곡식, 종자,

생활도구 및 청전의 집터와 곡식, 종자, 생활도구 및 청동기를 발굴했다."고 발표하였다.

 

중공학자 당란(唐蘭)이 발표한

대문구문명권(大汶口文明圈)의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산동반도의 한강 이남만한 광역에서 5천 7백 85년전의 유물이 대량 발굴되었는데
이 중에는 그곳의 통치자였던 소호(少昊·東夷族)라는 이름이 나왔고
또 문자생활의 일면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의 앙소(仰昭)문화와
용산(龍山)문화라는 중국문화의 지금까지의 상한선이 깨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최근에 발굴된 요령성의 3황 5제 유물발굴과 더불어 동이족문화의 상향에 결정타를 가한 셈이다.

 

소련의 소련과학원 역사 언어 철학 연구소에서
간행한 "고조선"이란 책자에서 저자인 U.M ·푸진은

"일본 사관이 중국계의 기자(箕子)가 고대 한국을 지배했다고 날조했으며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이 왕궁유적지, 또 중앙  행정기관의 유적지도 발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소련의 여류 민족학자 R.S.H 자리가시노바의 발표에 의하면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고 신석기 시대인 약1만 년에서  1만 2천 년에는

곧 고도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한의학(韓醫學)의 가장 오래된 동방의학의 기본경서인 황제내경 소문(皇帝內經 素問)에서
"동방 지역은 천지가 비롯된 곳이다(東方之域 天地之 所始生也).…

 

침술도 역시 동방으로부터 전해왔다(亦石 역從東方來) 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황제의 물음에 대한 기백이 응답한 내용이다.

여기서도 동방 문화의 시생(始生)성을 읽어 볼 수 있다.

 

한방 의학의 최고 원전인 황제내경은
천지의 모든 인간 문화가 시발(始發)한 곳을 동방지역이라고 했다.

 

그런데 1984년에 우리나라를 다년간 바 있는 스웨덴의 고고학자 부부가
우리나라에 와서 남기고 간 중요한 말이 있다.

 

"나는 한국에 와서 학계의 이상한 현상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내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한국까지 6개월 걸려  고고학적인 조사를 해가면서

면밀한 답사를 했는데 그 결과를 종합해 보면
모든 문화가 내가 지금 도착한 종착점인 이 동방한국으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차츰 옮아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국 학자들은
왜 "모든 문화의 흐름의 방향을 서방으로부터 동으로 옮아왔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라고 하여
지금까지의 문화발상 향방에 대한 시정을 역설한 바 있다.

 

역사는 아무리 바뀌더라도

밝혀지는 유적을 찾음으로 해서  흘러간 흔적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사적의 실증인 것이다.

 


2.동방사사의 진원지

 

신라의 석학 고운 최치원은 우리나라에 있는 현묘지도(玄妙之道)인 배달도(風流道)가

3교의 진리를 원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유고적인 충효사상과 도교적 무위불언(無爲不言)사상과
그리고 불교적 권선징악(勸善懲惡)사상이 모두 본래적으로 우리의 고유사상 속에
함유되어 있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3대 사상인 유, 불, 도 사상을 후래적으로 취합 조립한 것이 아니고
원천 발상적으로 그 요소들이 우리의 한민족 사상 속에 내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3교사상이 홍익사상과는 관계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어진 것인지 아니면
홍익사상에서부터 분화유출(分化流出)된 것인지 그 상호의 상관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가. 도교사상의 산출
 
소위 도교라는 노장(老莊) 사상은

그 시원이 황제(皇帝)로부터 계승되었다고 하여  일명 황노지학(黃老之學)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중국 고전(古典)인 초사에 보면 황제는
생어백민(生於白民)이라 하였고 또 그는 동이족에 속했다고 하였다.

 

또 포박자(包朴子)에서는

황제가 백두산에 있는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부터 사사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황제가 동이족임이 분명하고 그 사상 역시 동이족 사상인 것이 확실하다고 할 것이다.

 

이 도교적 신선사상은 중국이 우리 동방을 향해
신선불사지국(神仙不死之國)이라고 일컫던 것과 연관지어 지는 것이 되겠다.

 

그런데 황제가 사사(師事) 받은 스승인 자부 선생은 발귀리(發貴理)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발귀리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발귀리는 신시한웅(神市桓雄)시대의 선인(仙人)이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장자의 사상은 노자로부터 노자의 사상은 황제로부터였다고 하였는데
황제는 동이족이었고 황제가 수학했던 자부선인도 한밝산(白頭山)에 살던 동이족의 신선이었으며
그의 선조되는 발귀리 역시 한웅시대의 신선인 동이족이었으니
도교(道敎)사상의 뿌리는 동방의 동이문화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나. 유교사상의 원류

낙동강의 하류는 김해 들녘의 곡창을 비옥하게 하였고
부산 시민의 상수도의 수원이 되었지만 그 발원지는 강원도의 태백산이다.

 

이처럼 유교가 중국지방에서 공자, 맹자란 대철인에 의해 그 꽃을 피웠지만,
그 발원지는 동방의 동이족에서 시원되었다는 사실이 규명되었다.

 

유교의 연원을 제시한 책은 중용인데 그 서문에서
"중용 한권이 유교의 연원을 밝힌 것이다(中庸一書 聖學之淵源)" 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중용의 저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이다.
자사는 말하기를 "중니(공자)는 요와 순의 사상을 계승하여 서술했다(仲尼 祖述堯舜)"고 하였으니
자사의 조부되는 공자가 유교를 지어 낸 것이 아니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수수(受授)하여 서술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사상은 요와 순으로부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그리고 주공(周公)으로
이어져 비로소 공자 자신이 계수(繼受)했다는 것이다.

 

맹자는 요와 순을 성인(聖人)이라고 단정하고 있다(膝文公上·孟子) 공자도 순(舜)을 성인이라고 확언하였다.
(舜其大孝也與. 德爲聖仁 : 中庸第十七章)

 

그런데 사기(史記 第十三)에서는

요가 황제의 직계5세손이 (帝堯起皇帝 至佶子五世 號日唐堯)라고 하였는데
또 고사변(古史辨)에서는 요는 황제의 5세손이고 순은 황제의 8세손이라고 하였다.

(古史辨七冊上編 쪽 208, 쪽191; 舜爲黃帝之八世孫)

 

이렇듯 요와 순의 선대(先代)를 황제라고 단정하여 밝혔으니 황제가 동이족인 이상

그의 직손인 요순이 동이족이 안 될 수 없다.

 

또 맹자는 말한다.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서
부하 땅으로 옮아 갔다가 명조 땅에서 졸하였는데 그는 동이사람이었다.
(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 鳴條 東夷之人也…)

 

이렇게 유교사상에서 진원지적인 존재로서의 요와 순 그는 동이족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공맹(孔孟)사상의 계맥에서 제2인자적 존재인 맹자의 증언
즉 "순은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그 누가 부정하겠는가 말이다.

 

동이족의 요순의 사상 즉 동이사상을 이어 받은 것이 공자의 사상이요
맹자의 사상인 소위 공맹 철학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명확히 입증되었다.


다. 불교의 동방선재(선재)

지금의 불교가 석사불을 그 교조로 하고 있으나
석가 이전의 부처는 가섭불(迦葉佛)인데 가섭불이 해동에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석가의 불교가 중국을 거쳐 대륙을 동으로 횡단하면서
해동 고구려에 도착한 것은 석가가 가신 지 약 9백년이 지난 뒤였다.

 

그런데 고구려의 도승 아도(阿道)가
국경을 넘어 계림(新羅) 땅으로 최초에 불교를 전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도가 신라 땅에 오기 그전부터
신라나라에는 전불(前佛)시대의 절터가 일곱군데나 있었다고 하였다.

(阿道本碑)

 

현존 동류한 석가 불교시대에 지은
흥륜사(興輪寺), 영흥사(永興寺), 황룡사(黃龍寺),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妙寺),
천왕사(天王寺), 담엄사(曇嚴寺) 등이 그것인데
이 절 등은 모두 전불시대의 절터에다 다시 세운 신라창건사이다.

 

또 중국에서 불교가 고구려에 최초에 유입된 것이 소수림왕 2년(372)이라고 했는데
이보다도 오히려 369년 전인 한평(한평) 4년 (서기 4년)에
금강산에 금상 52불(金像五十二佛)이 있어 절을 세웠다고 하였다.
(東國與地勝覽)

 

또 "해동 금강산에는 보살들이 살고 있었는데 예로부터 보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곳은 법기보살이 권속 1천 21백명을 거느리고 거기서 늘 불법을 설하고 있다."라고
대방광불화엄경 보살주철품에서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옥룡집(玉龍集) 및 자장전(慈藏傳)에서도 "신라의 월성 동편 용궁남(龍宮南)에는
가섭불이 설법한 연좌석(宴座石)이 있는데 그곳은 즉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절터였으나
지금의 황룡사로서 일곱절터중에  그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또 고려 충숙왕 15년에 인도의 석가로부터 1백 8대 조사인 지공선사(指空禪師)가
양주 천보산의 회암사(檜巖寺) 땅을 둘러보고 "이곳은 과거에 7불시절의 큰 절터였다.
(此基地 上世七佛時節 大伽藍之址也)라고 회암사 상량 모연문(上樑募緣文)이 밝혀 놓고 있다.

 

또 태백유사에서는  "불교가 처음 들어와서 절을 세워 대웅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승도(僧徒)들에 예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옛습속을 따른 것이지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니다.
(本非僧家之言也)라고 하면서 "한웅(桓雄)을 대웅(大雄) 이라고 일컬었다"고 적혀 있다.

 

이상에는 도교, 유교, 불교 문화의 그 뿌리 향방을 추적해 보았을 때에
모두가 우리 해동의 동방 동국에 연관되어져 있으니 이로 미루어 보아 동양사상의 발상원천이
동국으로 가설지어짐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되었다.

 


3. 서구 사상의 뿌리

서구 문화의 두 줄기는 신본주의 (神本主義:헤브라이즘)와
인본주의 (人本主義:헬레니즘)로 나누어 살필 수가 있는데,
이 둘은 그 사상사적 근원을 소습 추적해 본다면 약 5500년 이전에 매소포타미아 지방에 있었던

메르 문화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서구 문화이 근원을 알려면 수메르 문화의 향방 출처를 탐색해 보자.
그런데 영국 학자 크램머(Kraemer.1897)는 "슈메르 족은 동방에서 왔다"고 했는데
다크라쓰는이 역사적 사실을 재확인 했다.
(슈메르 이스라엘 한국, 문정창).

 

S. 크램머와 C.J 볼 역시 슈메르 족이 사용했던 설형문자가
복희(伏羲:전 3528~3413)가 만든 설형문자와 너무나도 같다는 것이다.
(김상일, 한사상 67쪽)

 

또 일본의 우에노(上野景福)도 "슈메르에서 사용한 설형문자는
태호 복회가 사용한 팔괘부호(八卦符號)등과 흡사하고 소아시아에선 영국까지
이동한 켈트(celt) 고음부(古音符)와 오감(ogam)문자 등과 흡사한 것이다"하였고,

 

C.H. 고든 박사(영국)도 슈메르족들이
중근동(中近東)에 들어서기 전에 무슨 고대문자적인 기호를 가지고 온듯 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서구 문화의 시원의 원점인 슈메르 문화가 동방에서 옮아 왔다고 하였고
동방에서 옮아올 적에 가지고 온 문 자가 태호복희가 창제한 문자와 같다고 하였다고
슈메르 문화의 뿌리는 복희시대, 복희의 원향(原鄕)과 관계지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말하자면 "실로 한국어와 슈메르 어의 비교는 적어도

①우리 한국 문화가 인류 시원 문화라는 것과
②우리 한국 문화가 중국 문화 이전부터 있어 중국 문화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과
③일본 문화는 한국 문화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혀 줄 것이다."
(김상일 한사상, 69쪽)고 할 수 있을 것이다.

 

C.H 고든(영)도 "일본어의 모어(母語)는 부여어(夫餘語)였다" 고 지적한 바 있다.
수메르에서 신(神)이 딩그르(dingir)인데 옛적의 상형문자가 ※로 표시되었다.

 

C.J 볼(Ball)은 ※에서 한자의 임금 "제"자가 만들어졌다고 하였는데
(김상일 한사상, 80쪽)

 

고사변(古史辨)에서는 임금 "제"자 고자가
※이렇게 모습되어 있는 (古史辨 7권190권)것으로 보아 슈메르 ※는
동방의 ※와 유사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조금 복잡한 동방 표기에서 슈메르의 표기가 간소화된 것임을 엿볼 수가 있다.

 

세계의 법률학자들의 법률의 원천을 탐색한 논문 중에 보면
전 동경대학의 나까다(中田薰·日本)교수의 "고법전에 근거한 문화동원론고(文化東源論考)"에 본다면
모세의 5경은 그 제정 유래 및 각 법조(法條)의 형식과 내용에 까지
함무라비(전, 1704)법과 거의 같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밀러(Miller)는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이 바빌로니아의 남(南)우루 시(市)에서
함무라비 왕의 고향인 하라안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주했을 때 갖고 왔던 하나의 법전을 상정하며
모세법은 함무라비 법과 같은 원법전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바빌로니아의 제 1왕조 제6대왕인 함무라비가 공포한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 왕이 창작한 것이 아니고 이전에 있었던 슈멜 법의 수정보수법이 아닌가 하고 추정했는데


1914년 미국의 크레이(Clay)나 루츠(Lutz)가
슈메르 법전의 단간(斷簡)을 발견하면서 의심못할 정설이 되었다.

 

그렇다면 모세의 5부경이 함무라비 법전에서 나왔고
함무라비 법은 슈메르 법에서 근거하였다고 정돈되어지는 데는 의심할 바 없다.


그렇다면 슈메르 문화가 동방 동이족인 태호복희 문화와의 관계적 유출상을 보아
"서구 문화의 정점인 슈메르 문화의 원향(原鄕)은 동이문화에서"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헤브라이즘(Hebraism:神本主義)과 헬레니즘(Hellenism:人本主義)의 뿌리
즉 서양문화의 집약된 두 개의 줄기는 슈메르 문화라는 뿌리에 귀착이 되면서
그 뿌리인 슈메르 문화의 고향은 동녘으로 설정되어진다.

 

우리 동방 동이의 한 사상은
신(神)과 인(人)이 분화되지 아니한 신인(神人) 일체주의인 것이다.
(안호상, 철학개론, 119쪽)

 

우리의 한사상(Hanism)에서는 일즉다 다즉일 (一卽多 多卽一)의 포용적 이지
흑백성적(黑白性的)인 대립과 배타성은 아예 존재할수 없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 의상조사 법성게).

 

우리의 참전경 총론에 보면, 여화신(女禍神)이 흙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어 7일만에 이루어 마쳤다.(女禍鍊土造成而 往之魂 七日而成焉)는 기록이 있다.

 

이와 꼭같은 기록이 풍속통의 (風俗通義)나 고사변(古史辨 第六冊)에도 적혀 있다.
이것은 구약의 창세기 2장 1~3절, 7절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사략(史略)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4. 21세기의 태평양 시대와 "한" 사상

지중해 시대의 신본주의에서 대서양시대의 인본주의로 옮아온
인간의 가치 추구는 만족할 단계에 들어서지 못하여 새로운 대안을 탐색하야 할
태평양 시대인 21세기의 문턱에 와 있다.

 

신본주의는 신을 빙자한 인간학대로 허구주의에 빠졌고
인본주의는 초인적인 신성 섭리를 무시한 물량주의를 낳게 되었다.
말하자면 신의 가치를 강조하니까 인간 가치가 떨어지고 인의 가치를 주장하다 보니
신의 좌대가 무너졌다.

 

우리나라 옛 교과서의 동몽선습에서는 말하기를 "신인(神人)이 있어
태백산 단목하에 내리시거늘 나라사람들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아 요(堯)와 같은 때였다.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시니 이가 단군(檀君)이니라
(東方에 初無君長하니 與堯로  立하사 國號를 朝鮮이라 하시니 是爲檀君이라)"라고 하였다.

 

동몽선습에 등장되는 이 신인(神人)은 서구사상에서는 20세기 말인 오늘까지
신(神)과 인(人)이 귀일점을 못 찾아 신본주의와 인본주의가 따로 따로 놀고 있는데
우리는 벌써 4천 3백 년전에 이미 신인일체(神人一體)의 신인주의(神人主義)로서
단군이라는 실체의 신인이 나타나서 세상을 다스렸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대작가, 벽안(碧眼)의 신부(神父) 게오르규는
최근 우리나라를 다녀 가면서 "내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 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홍익인간 사상이야 말로 미래의 세계를 주도할 평화사상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세계적인 역사학자 토인비는
"태평양시대의 21세기는 극동에서 세계를 주도할 사상이 나올 것이다" 고 예언하였다.

 

게오르규는 또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러프레스 프랑세스'지를 통해 기고한 글에서(1986.4.18)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단군의 통치이념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法律)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이다. …

 

한국인들은 5대륙의 거대한 공사장에 진출,
단군의 이념 '홍익인간'에 충실하면서 일하고 있다" 라고 설파하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의 동학이 제창한 후천 5만 년 지상천국 전설의 요체는
"천황씨 시대의 뿌리사상으로 되돌아 가야한다."고 절규하였는가 하면
강증산(姜甑山)은 "원시의 군본사상으로 돌이켜야 세계평화의 후천선경(後天仙境)이 건설된다"고 강변하였다.
(原始反本 地上天國建設)

 

동과 서의 거인(巨人)들이 외친 괄목할 이 동방사상은 "홍익인간"이요
홍익인간은 앞에서 실린 바와 같이 서양사상의 산출처인 슈메르 문화가 배출된 원초지요,

 
또 동양의 3대(유, 불, 도)사상의 원산지의 천지개벽 사상이었음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었다.

어쨌든 인류문화의 동방 기원설과 관련하여 새로운 세기를 맞는
오늘에 인류의 뿌리 문화가 갖는 태평양에 뛰울 자항보도(慈航普渡)의 깃발을 생각해 본다.

 

자유발언 1990년 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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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시원을 찾아서

  


일본 신대문자설;

일본의 신대문자는 한글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의 일부는 한글이 신대문자를 모방한 것이라는 설을 퍼뜨리기도 했으나
나중에 신대문자는 그들이 일부러 자기네 문자의 연원을 길게 잡기 위해
만들어서 전국 곳곳에 흩어놓았다는 것을 자백한 바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신대문자 자료가 이세신궁에 보관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여러차례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신궁 측에서는 그런 자료는 없다고 일언지하에 말한다.

두 가지 중 하나의 추측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오래된 신대문자라는 것은 없다-라는 것이 하나고.
실제로 이세신궁에서 그런 오래 된 신대문자를 보관하고 있다면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 것이 오히려 우리 고대문자를 빌어온 증거물이 된다고 파악이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일본내에서도 신대문자설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그 시점은 묘하게도 한단고기가 발견된 이후다. 한단고기에는 가림토문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이 신대문자를 훈민정음보다 오래 되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문자의 근원은 가림토문자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그들은 직시한 것이다.

런데 아쉽게도 정작 우리나라 학자들이 가림토문자를 믿지 않는다.


아니 한단고기 전체를 믿지 않는 실정이다.

현재 역으로 외국 학자들이 연구결과가 더 많다.


한자 기원설;

한자의 근원은 환웅시대의 신지 협덕이 만든 녹도문이 그 근원이라는 설이 거의 맞아 보인다.
녹도문의 자형은 한자의 전서와 상당히 흡사하다.

 

즉 상형(相形)으로 시작하여 지사문자가 나왔고
그 자들이 결합하여 회의(會意)문자 그리고 형성(形聲)문자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글의 자형은 그런 육서(六書)적인 조자 원리와는 너무나 많이 다른 것이다.

한자의 자형과 발음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다.


은나라때 갑골문자(甲骨文字), 주나라의 대전(大篆), 진나라 무렵의 소전,

한나라의 예서(隸書)와 목간(木簡), 동진, 당나라 무렵의 해서(楷書)...
급기야는 문화혁명 이후 간체자에 이르기까지
한자는 끊임없이 변해왔으며 지금도 새로운 자들이 생산되고 있다.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에서조차 그렇다.
그러나 한글은 그렇게 심한 변화를 겪지 않는다. 그렇게 크게 변할 모양 자체가 아닌 것이다.

한자는 표의 문자라 자기 문자로 표현이 않되어서 가르칠때 발음을 영어를 빌려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한글은 다르다.
한글은 표음 문자인 동시에 표의 문자인 세계 유일의 문자로 않되는 발음이 없다.

그리고 한글 자음, 모음 자체에 뜻이 의미가 숨어 있고 문자에도 각각 의미가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한글을 표음 문자로만 가르치는 우매함을 우리가 범하고 있으니 문제다.
분명 한글은 표의 문자인 동시에 표음문자이다.


한자도 환웅시대에 우리 조상이 만든 녹도문자를 기원으로 발전하였고,
한글은 가림토 문자 때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니 그 두 문자는 뿌리가 하나다.
다만 한글이 한자에 종속된 것은 결코 아니다.

 

원래 옛날 4000년 전에는 우리민족은 한글을 지금 처럼 배우지 않았다.
자음 발성원리에 따라 몸을 신경을 순화시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깨달음을 얻는 과정으로 한글을 배웠다.

 

한글은 발성으로 사람의 성품을 순화시켜 주는 기능이 있는데 현재의 한글은 일제시대때 반음으로 사용되는
 ㆍ △ 등 반음을 제거하여 성품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상실되었다.

다시 옛날 한글 자음 모음으로 복원해야 하는데 지금컷 사용을 그리해서 습성이 되어 문제가 크다.

 


산스크리트어 기원설;

이 설은 상당히 유력하기는 하다.
왜냐하면 산스크리트어의 모체인 싯담어와 우리말은 일치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사전을 보면 우리말과 의미가 상통하는 것이 수천개는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발음은 유사하나 자형은 너무나 다르다.
샨스크리트어(범어, 범천 세계에서 쓰는 문자)는 한글과 문자 형태는 다르나 발음이 같다.
같은 뜻의 문자를 찾아 비교해 보면 발음이 정확이 같다고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같은 민족이 두 개의 민족으로 나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샨스크리트어를 사용한 샤카족은 외모가 우리와 같다. 인도 사람 외모가 아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샨스크리트 대백과 사전에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인 부루나 존자가 그린 석가모니 부처님 초상화를 보면 전형적인 우리민족 얼굴이다.
거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단군의 후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민족이 북극에서 남하하면서 3갈래로 동쪽,
중앙남쪽 서쪽으로 이동한 갈래중 서쪽으로 이동한 민족이 천축국 지역으로간 민족중 한 갈래이기 때문이다.

 

한글과 샨스크리트어는
유사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문자는 다른 경로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산스크리트어는 거의 9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글은 4000년 전 무렵 가림토문자가 최초의 기록이다.

 

림토 문자도 그 전 배달신시 때 사용하던 문자를 정선하여 3세 가륵단군 때 을보륵이
만들었다하니 훨씬 그 전부터 한글이 있었다는 애기이다.

한글과 샨스크리트어는 그 형상은 분명 다르다.


다만 의미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은 서로의 문자를 통해
우리 민족의 시원을 찾아가고 사상을 추적하는 데에는 분명 큰 이점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수메르문자와 우리말과의 관계도 그러하다.
수메르문자가 우리 한글의 기원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수메르는 우리 상고시대의 12연방 중의 하나인 수밀이국인 것으로
봐서 우리 민족의 한 유파였다고 보인다.

 

세계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수메르문자,
그 것 역시 우리 민족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영국학자 크래머 (Kraemer, 1897-) 와

일본의 우에노 (上野景福) 교수가 발표한 것을 종합 해 보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절대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 (八卦符號) 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5500 년 전에 서쪽으로 옮겨 왔다" 는 것입니다.

 

복희와, 수메르에서 최초로 우르 (Ur)국을 건설한 왕조나 최초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에
문화국을 건설한 엔릴 (Enril) 영웅이나 거의 같은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5500 년 전에 복희문화를 가지고 동이족이 서쪽으로 갔다는 얘기가 됩니다.


무엇이 그것을 입증하는가?

수메르 말이 우리말하고 같은 것이 많이 있다는 게 최근 미국에서 연구가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라는 말 자체가, 곧 '소머 리' 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송화강을 우수하, 음만 그대로 따면 속말수라고 부 릅니다. 소머리강이다 이거죠.


수메르어는 한글의 원류는 아니다. 자형이 다른 것이다.

김상일 교수는 한국어와 수메르어를 비교. 연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히브리 문자 기원설;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는, 먼저 이 사실부터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4700 년전에 나온 중국 '황제내경 소문' (黃帝內經素問) 편을 보면 동이족이 살고 있는 이 지역 즉

"동방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로 문화가 발생한 곳 (東方之域天地之所始生也)" 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누가 뭐라 고 해도 지구상 문화의 최초 원산지는 동이족이 살고 있는 동방지역이라는 거죠.

 

그리고 기독교의 한 단면만 말하자면 법률학자인 동경 대학의 나까다 (中田薰) 교수가
'고전법에 근거한 문화동원론고 (文化東源論考)' 에서 말하기를,
모세의 5경의 출처를 조사해보니까 함무라비 법전 속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나까다 교수는,
모세하고 함무라비 사이에 500년의 연조가 있지만 모세의 5경은 함무라비 법전을 계승한 것이고,
이는 또 수메르법에서 나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수메르의 역사 시초가 지금으로부터 5500 년 전인데,
남은 과제는 수메르족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국학자 크래머 (Kraemer, 1897-) 와 일본의 우에노 (上野景福) 교수가 발표한 것을 종합 해 보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절대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 (八卦符號) 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5500 년 전에 서쪽으로 옮겨 왔다" 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민족 동이족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조철수 박사는 히브리문자와 한글의 발음순서나 체계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글이 히브리문자를 모방한 것일까?

 

가림토 문자가 생긴 그 무렵은
이미 우리가 히브리 문자를 차용할 수 없는 시기임을 알아야한다.

 

히브리어는 약 3300년 전 유대인, 즉 히브리인이 쓰던 말을 뜻하였다.
가림토 문자는 4000년 이상 전이다. 세종조라고 할지라도 히브리문명과 우리는 교류의 흔적이 없다.

 

오히려 히브리문명이 우리의 문명을 오랜 세월 전에 모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복희씨와 여와씨가 중국신화의 원류다.


씨-라는 호칭은 천손민족에게 붙이는 것이며 복희와 여와는 분명 우리 민족이었다.
여와 - 그 설화를 모세가 차용하여 여호와라는 호칭을 만들어냈다는 설이 있다.

 

우리민족 경전인 '삼일신고' 신훈 (神訓)에 나오는 "신(神)은 재무상일위 (在無上一位) 하사
유대 덕대혜대력 (有大德大慧大力) 하사 생천(生天) 하시며
주무수세계 (主無數世界) 하시고..." 하 는 것이 바로 완벽한 기독교의 일신사상 그대로입니다.

 

또 '참전계경' 총론에 보면 "여화신 이
흙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어 7일 만에 이루어 마쳤다.
(女禍鍊造成而注之魂七日而成)" 하는 것은 기독교 창세기 2장 7절하고 꼭 같습니다.
여호와와 여와, 야희와 여, 희 등은 음도 같고 행적도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나 수두 제단에 치외법권 지대가 있다 는 내용,
그리고 동지에 양을 잡아 붉은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구약의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동지에 붉은 팥죽을 끓여 문설주에 바르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한 풍속들이 여기서 건너가 전해 내려온 거죠.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영어의 알파벳 자모도 여러 개 보입니다.


가림토 문자는 4177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반해,
알파벳의 역사는 길게 잡아야 3000년을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혹 알파벳도 가림토 문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요?
차후에 연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히브리문자 근원설은 절대 아님이다.
(ㅎ-이 들어가는 음은 극존칭에 자주 쓰인다. 할렐루야 할머니. 할아버지 훌륭한..)

 


고전(古篆)기원설;
고전이라는 것 역시 옛 전서(篆書),
즉 한자를 말함인데 한자와 우리 문자가 한 뿌리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 자형과 자형이 가진 의미부여는 매우 상이한 것임을 이미 밝혔다.


파알리어 기원설;
초기불경의 서사체인 파알리어를 말함인데 산스크리트어기원설과 유사한 것이다.
서장문자기원설도 그리 다른 것은 아니다.
그 모두 글자의 형태는 판이하게 다르다.


태극사상 기원설;
정인지가 훈민정음제자해에서 자모음이
음양과 오행의 이치에 맞는다고 한 부분에서 나온 의견이다.
그 말은 이치가 있다.

 

단지 그 것을 태극사상이다-라고만 하기에는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음양은 자모 중에 무엇과 상합하며 오행은 무엇과 일치하는가-등을 차후에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아설순치후음으로 자음의 구분이 가능하다.


가림토 기원설

한단고기(삼한관경본훈)에 의거. 3세 단군 가륵이 삼시랑(재상) 을보륵에게 명하여
가림토 문자를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기록은 단기고사에도 나온다.


그런데 단기고사에는 을보륵이 가림토를 만들었다고 나오지 않고 2년 봄에
박사 을보륵에게 명하여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精選)하였다. 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가림토 이전에도 국문은 있었다는 뜻이다.

 

배달국 신시 때에
이미 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태백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 부터 있었다.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神市)의 고각(古刻)이 있다.

 

단군 가륵 2년,
삼시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만드니 이를 가림다(加臨多)라고 한다.

 

원래 자음이 110자 정도인데 38자를 정선하여(가리어 즉 간추려서 그래서 가림다)

배달국 신시 때부터 있던 문자를 3대 단군 때 수정 보완하여 만든 것이 바로 가림토 문자이다.

당시에 새로운 문자를 창제한 사실은 <<단기고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가림토 문자를 신전(神篆)이라고도 하였는데, 조선조 세종대왕 때 이 가림토 문자를 수정 보완하여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했던 것이다.이러한 사실에 대해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0월 초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으니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모방한 것이다.즉 가림토 문자를 토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림토 문자가 훈민정음과 70%가 일치한다.

불경 문수사리경에 자음과 모음에 천지 만물의 이치가 담겨 있음을 말하고 있다.


비밀에 가려진 문자-가림토

한편 한단고기 - 단군세기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단군조선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B.C, 2181년)

"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多)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

 

《한단고기》의 저자 또는 전수자인 이유립은 《한단고기》를 공개하기 3년 전인
1976년 월간 《자유》 5월호에 가림토에 관한 글을 발표했습니다.

《태백유사(太白遺史)》에는 「흉노의 조상에 모수람이라는 자가 있어 천신을 섬겼으며 (중략)


그 풍속이 사납고 맹렬하여
수렵을 좋아하고 흙을 굽고 밧줄을 꿰어 신표로 삼으니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후략)”

이에 따르면 이유립은 가림토를 흙을 굽고 밧줄을 꿰어(煉土貫索) 신표로 쓰는 문자,
즉 결승문자(結繩文字)라고 적고 있습니다.

 


《한단고기》에 실린 가림토의 생김새는 한글,
특히 훈민정음 창제 때 판본체의 한글과 매우 비슷합니다.

또 훈민정음 창제기록에도 예 전자를 모방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최만리 상소문에도 옛 전자를 본땄다는 구절이 나오지요.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속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한편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영어의 알파벳 자모도 여러 개 보입니다.
가림토 문자는 4177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반해,
알파벳의 역사는 길게 잡아야 3000년을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혹 알파벳도 가림토 문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요?
차후에 연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종대왕은 지금으로부터 5000여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의 원형인 가림토 문자가 있었으며,
훈민정음은 가림토 문자를 활용하여 재창제 되었다는 진실을 왜 당당하게 밝히지 못 했을까요?


조선조 초기는 이미 중국(명나라)의 눈치를 보던 정신적 속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이름도 명나라 황제의 낙점으로 결정되었고,
새 임금이 등극하거나 세자의 임명 등도 명나라에 보고를 했어야 했지요.

 

"고조선秘史", "대변설", "도징기", "삼성밀기",
"옥추경", "조대기", "지공기", "천부경" "통천록", "표훈천사"등
한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기록하고있는 책들은 이씨조선의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마음대로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민족 고대사 기록서를
명나라 사대주의에 빠져 눈치를 보면서 다수거하여 말살하였다 하니
참으로 조선시대는 민족사의 암흑기로 불행한 시기임니다.


그러니 공자를 사모하던 유학자들이 우글거리던 이조시대에,
중국에게 문화. 문명을 전수해주었던 단군조선의 역사를 전달하기는 아마 몹시 힘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한글 재창제 이후 세종대왕 재위시
전국에 집서령이 내려져 수거된 책들이 불태워졌고,
그 과정에서 가림토문자와 관련된 책들이 소멸되어 훈민정음의 뿌리는 알 수 없게 되었지요.

(참고서적-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정연종 )

 

 

발해의 대야발이 AD 727에 쓴 단기고사란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가림토 문자이야기가 나옵니다.


3세 단군 가륵 제위 3년에 단군이 고설에게 명하여 국사를 편찬하게 하고,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그 일년전 기록도 나옵니다.

 

갸륵왕 재위 2년 봄에 을보륵 박사에게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精選)토록 하였다.
정선(精選)이라는 말은 자세하게 가려 뽑는다-는 말입니다.
가림토 이전에도 국문은 있었다는 뜻입니다.

 

단군세기에 나오듯이 진서(眞書)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것이 한글의 원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문자는 어려웠다고 하여 간추린 끝에 가림토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한글의 시원은
어디까지 넘어가야 그 뿌리가 시원하게 밝혀지는 것일까요?

배달국 신시 때에 이미 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태백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다.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神市의고각古刻이있다.

배달국 신시 때부터 있던 문자를
3대 단군 때 수정 보완하여 만든것이 바로 가림토 문자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가림토 문자를 신전神篆이라고도 하였는데,
조선조 세종대왕 때 이 가림토 문자를 수정보완하여 신미대사가 주축이 되어 훗날의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과 함께 한글을 창제했던 것입니다.

 

신숙주 성삼문 김수온 한계희 등은 창제 이후 원활한 반포와 자료보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창제에 직접적인 공을 새운 이들은 신미대사와 왕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들이 이미 어느 정도 모아졌으며 앞으로 좀 더 확충하여 발표될 예정임.)

 

 

단기고사의 또 다른 우리 글 기록

 

第一篇(제1편) 前檀君朝鮮(전단군조선)

 

第12世 阿漢(아한) 檀帝(단제=檀君)와 유위자가 나눈 대화중에서-

 

유위자;
폐하께서는 백성을 선하게 다스리시어 덕이 만방에 넘치니
나라의 문명 정도가 하나라를 훨씬 초월합니다

 

그러나 하나라는 다음 조에 이르러서는 禮樂法度(예악법도)가 찬연히 구비될 것이며
聖賢(성현)이 배출되어 經典(경전)을 저술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 여러 학자들이 각각 그 理想(이상)을 말하리니
문화의 향상이 전무후무하여 천하를 휩쓸 것이므로 만국이 그 문화를 仰慕(앙모)하여
다투어 그 나라에 와서 배우고 익혀 학문의 전성시대가 될 것입니다

 

중략-

이 후손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여 상대를 침략하는 전쟁만 일삼고
문화는 점점 퇴보하여 祖國文字(조국문자)는 돌보지 않고

 

남을 흠모하는 사상이 날로 높아져 수천년 후에는 그 나라 문물을 사모하여
이에 미친 사람이 나라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문자는 다 없애고 그들의 문자만 專用(전용)할 것이며
그 문자로 우리나라 國名(국명)과 王號(왕호)와 官名(관명)과 地名(지명)과
모든 물건의 이름을 번역할 것이며 이름까지 그들의 이름과 같아


우리를 그 나라 사람으로 알게 되고
마지막에는 자손들이 그 先祖(선조)를 잃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장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고 심히 원통한 일입니다
엎드려 비옵기는 오직 폐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염려하시어
뒷일을 미리 준비 하시옵소서 하였다


임금께서 선생은 참으로 천고의 神人(신인)이로다
능히 반만년 후의 일을 추측 하도다 하시고 천하에 조서를 내려 비석을 나라의 사방 경계에 세우고

그 碑面(비면)에 우리나라 문자로 帝王(제왕)의 이름을 새겨 영원히 國文(국문)을 보전하라 하셨다.

 


九月山(구월산) 馬韓村(마한촌)에
옛 글자로 된 비석이 하나 있어 梵文(범문)과 비슷한데

후세사람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村名稱馬韓(촌명칭마한)
마을 이름은 마한이라 하는데

 

別有殊常石(별유수상석)
특별히 구별되는 범상한 돌이 있네

 

臺荒躑躅紅(대황척촉홍)
누각은 황폐하고 철쭉은 붉게 피었는데

 

字沒苺苔碧(자몰매태벽)
글자는 파묻히고 산딸기와 이끼만 푸르구나

 

生於剖判初(생어부판초)
천지가 처음 열릴 때 만들어서

 

立了興亡夕(입요흥망석)
나라가 흥하고 망하고 기우는 것을 세우기를 다 하였네

 

文獻俱無徵(문헌구무징)
문헌으로 다 고증할 수는 없으나

 

徜非奇氏跡(상비기씨적)
이것이 기씨의 즉 기자조선의 발자취가 아니겠는가


[상자가 없어서 같은 글자인 徜(상)자를 씀]

長白山(장백산) 安興嶺(안흥령)에도 비석이 있다고 한다.

 


우리 한글의 기원은 세종조 때가 아니다. 그때는 한글을 중창한 것이다.
훨씬 뒤로 3대 단군 가륵시대에 을보륵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 때 역시 자세히 가려 뽑은, 정선(精選)한 것이다.

 

그 이전에 이미 우리글은 있었다.
가장 오래 된 한글에 대한 기록은 딱 잡아서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중국 서안 지방에 대규모 피라미드가 수십게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유물의 년대가 5000년이전으로 도자기 표면에
한글의 자음 ㄱ,ㄴ, ㄷ, ㅂ 원방각(○□△)등이 표기되어 있다 한다.

 

피라미드 길이가 300m 정도인 전체 모양을 볼려면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야 볼 수 있다고 한다.
인공위성으로 사진 상으로도 나타난다.

 

돌로 쌓아서 만든것으로 중국의 흙으로 쌇은 방식과 다르고 중국황하 문명(4000년)보다
그이전 문명으로 옛날에는 중국땅이 아닌 지역이란다.


그것이 저들의 한계인데
우리정부나 역사 학자들이 나서서 정통사학을 회복하는데
많은 연구와 투자를 하여야 하는데 일부 정통사학자를 제외하고 뒷짐지고


식민사관에 사료잡힌 사학자들이 아직도 학교 강단에서 왜곡역사를 가르치고,

아예 지금은 수능에서도 선택 과목으로 하는 어쳐구니 없는 작태가 벌여지고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n19/6NYU/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