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아와 미케네 문명, 그리스문명의 직계 조상

 

최정호 최정호성형외과 원장(의학. 심리학박사)

 

기사입력 [2010-04-28 15:49] , 기사수정 [2010-04-28 15:30]

 

 

[아시아투데이=이순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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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트로이목마 ;

발굴된 트로이 성문에 들어갈 수 있는 고증된 크기인데 어른 10명이 채 들어가지 못할 만큼 작았다.

 

출처-다음카페 bakje

 

오래전에 가족들과 터키 일주여행을 한 적이 있다.

10일간 버스로 터키전역을 이동하는 여행이었는데 아내와 아들은 오랜 이동시간에 힘들어했지만

나에게는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여행이었다.

 

그때 방문한 트로이 유적지가 생각이 난다.

여행 가이드가 하는 말씀 “세계 3대 허무 관광중 하나가 트로이 목마 관광입니다”

 

호화로운 얘깃거리가 가득 찬 트로이전쟁을 기대하고 왔다가 너무나 작은 규모의 성곽과

실제의 크기로 만들어졌다는 트로이목마의 초라한 모습이 오랜 시간의 이동과 정성을 보상하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아들이 목마 안까지 올라가 사진을 찍은 기억이 난다.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공항에서 처음 본 글귀가 'land of civilization' 이었다.

과연 터키는 ‘문명’의 발상지로서 많은 유적지를 보여주었고 나는 그 흔적을 찾아다니느라

10일 동안 황홀한 경험을 즐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오스만 튀르크의 터키가 아니라

 

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와

생각의 발견자들이 활약했던 소아시아(지금의 터키)가 바로 이곳이었음을 재인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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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의하면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그들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아킬레우스이다)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이 던진 가잔 아름다운 여신에게 드린다는 사과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발생했다.

에게해 패권을 놓고 소아시아 세력과 그리스 세력간의 전쟁을 신화한 것으로 간주된다.

 

생각의 발견자’ 그리스인을 찾아가기 전에 그들의 문명의 직계조상인

크레타의 미노아문명과 그리스본토의 미케네문명을 들려야한다.

 

1870년 이전에는 에게 해의 섬과 소아시아(지금의 터키)해안에서 수백 년 동안이나

거대한 문명이 번성했으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고도로 발달한 에게 문화의 중심지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고고학자가 아니라 독일의 은퇴한 사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매료되었던 그는 그 얘기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라고 상상했고

그는 사업으로 큰돈을 번 뒤 자신의 꿈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결국 트로이를 찾아냈고, 미케네와 티린스까지 발견해냈다.

 

그는 헬렌을 납치했던 파리스의 나라 트로이와 그리스연합군 사령관인 아가멤논의 나라 미케네까지 발견하여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역사’의 구술전승임을 증명하였다.

 

미케네 문명에 속할 것이라는 크레타 문명을 20세기를 출발하는 해인 1900년 영국인 에번스가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발굴을 시작한 후 유럽의 역사는 다시 쓰여 지게 되었다.

화산 폭발로 묻혀버렸던  폼페이 유적처럼 크레타는 풍성한 과거의 기록을 간직하고 있었다.

 

크레타는 유럽문명이 독창적으로 발원한 장소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유기적 관계에서

발전한 유럽의 최고 고대문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크레타는 에게 해의 고대시대에 특별한 장소였다.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 포도주 빛 바다의 한가운데 떠 있는 섬,

물에 둘러싸인 크레타 섬은 아름답고 비옥하다. 크레타 주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시는 90개가 있다.

 

그곳에서는 아카이아인, 용감한 크레타 섬 원주민, 키도니아족, 도리아족과 고귀한 펠라스기족의 세 부족들등

온갖 종족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그 섬의 도시들 중에는 위대한 제우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고

미노스가 9년 주기로 다스린 대도시 크노소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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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돈의 저주로 흰 소에게 욕정을 품게 된 왕비 파시파에에게 다이달로스가 나무로 만든 암소를 건네는 장면

1세기경 폼페이, 프레스코화 크레타는 그리스 신화에서 특별한 장소이다.

 

주신 제우스가 양육된 곳이고, 유럽의 어원이 된 에우로파가 제우스의 세 아들 미노스, 라다만티스,

사르페돈을 낳은 곳이다. 역사와 신화가 뒤섞인 고대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신화로 전승되어온 신비롭고 은밀한 역사를 재구성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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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달로스와 아들 이카루스-프레데릭 레이튼 다이달로스는 신화에 등장하는 건축가이자 예술가이다.

 

‘제우스는 태어나자마자 이다산에 있는 동굴에 숨겨졌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자식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아내 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모두 먹어버렸다.

 

레아는 남편을 속이고 제우스를 대지의 아들인 쿠레테스에게 맡겨 몰래 키웠다.

제우스는 염소의 젖을 먹고 자랐다. 티탄족과 형제들의 연합군으로 아버지를 왕좌에서 쫒아낸

제우스는 자신의 씨를 잉태한 에우로파가 크레타에 정착하도록 한다.

 

그의 아들 미노스는 완벽한 법률을 갖추고 주신의 아들답게 제국을 통치한다.

제우스는 아들 미노스에게 해안을 지킬 수 있도록 탈로스라는 청동인간을 주었다.

 

교만해진 미노스는 황소 한 마리를 바치라는 포세이돈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포세이돈은 왕비 파시파에가 그 황소를 사랑하도록 만들어 미노스에게 벌을 주었다.

 

다이달로스에게 황소와 사랑할 수 있도록 암소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파시파에는

황소와의 교미에 성공하여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로스를 낳고

화가 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미로’를 만들어 그 괴물을 가두어버린다.

이 ‘미로’는 에게 해에서 미노스 영향아래 있는 주민에게 가해진 ‘억압의 멍에’의 상징이 되었다. ]

아테네에서는 해마다 7명의 청년과 7명의 처녀를 바쳐야했다.

이 끔찍한 조공은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제물로 바칠 젊은이들과 함께 크레타로 향할 때까지 이어졌다.

테세우스에게 반한 미노스의 딸 아드리아네는 ‘라비린토스’라고 명명되어진 이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줄 실뭉치와 미노타우로스를 쳐 죽일 마법의 칼을 테세우스에게 주었다.

 

테세우스는 괴물을 죽이고 잡혀왔던 젊은이들을 풀어주었다.

테세우스는 아드리아네와 함께 도망치다가 닉소스에 그녀를 버렸다.

 

화가 난 미노스에 의해 자기가 만든 미궁에 감금된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새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만들어 새처럼 날아서 탈출을 한다.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잊고

너무 높이 날다가 태양의 열에 의해 밀랍이 녹아 바다로 추락한다.

크레타는 그리스 신화에서 비중이 높은 공간적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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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 출처-브리태니커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의 영웅담에 등장하는 전설의 왕 미노스의 이름에서 따온

미노아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에 소아시아에서 크레타로 건너온 이주민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이 문명의 이름을 명명한 것도 에반스이다.)

 

이들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거쳐 기원전 2000년경에 도시 및 초기문자를 발전시켰다.

미노아문명은 미노타우로스 신화와는 달리 보기 드문 평화를 사랑하는 문명이었다.

 

아마도 그리스본토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1900년경에 그리스로 이주해온 인도-유럽어족의 그리스인 조상들이 건설한

미케네문명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미노스는 에게 해와 그 연안을 지배하며 공물을 받았고

아테네의 건국의 아버지인 테세우스는 미노스에게 바쳐진 젊은이를 구했다는 신화로 건국의 정당성과

위대함의 선전하기위한 출발로 삼는다.

 

학자들에 의하면 ‘라비린토스’는 미노스의 왕궁으로 알려진 크노소스의 호화로운 왕궁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그리고 발굴된 유적은 미노아에서 황소를 숭배했다는 증거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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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자A; 주로 선으로 이루져 있다고 해서 선문자라 명명되었다.

아직 해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출처-시공사 크노소스

 

 

미노아 문명에 발굴 당시 유럽이 열광한 이유 중 하나는

발굴된 유물이 지극히 현대적인 예술양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노아 예술은 고대에 유행한 아르누보 형식이었고 당시의 세기말 예술과 지극히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태평성대를 이루며 일상용품도 예술작품이었던 세계인 크노소스는

당시의 예술흐름에 충분한 고대의 화답이었다.

미노스는 이집트나 소아시아와 다른 현대적 감각의 독창적인 예술품을 남겼다.

미케네인 들은 아마도 기원전 1500년경에는

크레타를 침공하여 지배권을 장악하고 에게 해의 지배세력이 된 것 같다.

 

이 같은 사실은 선문자B를 해독한 영국 청년 마이클 벤트리스에 의해 밝혀졌다(1952년).

크레타에서 발견된 상형문자와 선문자A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지만 선문자B는 그리스문자임이 밝혀졌다.

 

본토의 미케네, 테베, 필로스 같은 후대의 왕궁에서 발굴된 문서에 쓰인 문자였다.

그래서 이를 해독할 수 있었는데 선문자B로 쓰인 점토판의 기록은 이곳이 미케네에게 정복되었고

점토판에 쓰인 기록은 크노소스 점령의 결산을 정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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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와 미노타우르스; 테세우스는 실제로 아테네 왕조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테세우스의 크레타 원정은 그의 건국신화인 셈이다.

출처-시공사 크노소스

 

기원전 1250년경에 미케네인은 소아시아 서부의 패권국 트로이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중해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때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전승되어

반인반소의 미노타우로스전설과  일리아드, 오딧세이등 장대한 서사시가 되었다.

 

그러나 미케네의 영광도 잠시 그들은 기원전 1200년에서 1100년 사이에 도리아인에게 굴복하게 된다.

도리아인은 철제무기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원시적이었기 때문에 기원전 800년 때까지

그리스에는 암흑의 시대가 계속된다.

 

원주민인 미케네인 들과 침략한 도리안인들은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두 가지형태의 도시국가

즉 스파르타방식의 라코니아형태와 아테네방식의 아티카형태로 분화해갔다.

 

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암흑시대의 말기에 문자로 처음 기록되었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는 이즈미르는 현재에도 존재하는 터키 남부의 항구도시로

암흑시대의 그리스본토는 소아시아의 자양분으로 성장했음이 분명하다.

 

미노아와 미케네문명의 유사성은 두 문명이 긴밀한 관계였음을 증명하는데

아직도 크레타의 문자는 해독하지 못하고 있어 두 문화의 정확한 관계는 미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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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로 변한 제우스가 에우로파를 태우고 바다를 건너고 있다

-에우로파의 유괴, 노엘 니콜라 쿠아펠1726-1727

 

 미노아문명이 평화를 사랑했다는 증거는 그들이 남긴 독창적인 예술작품을 통해서 알려져 있다.

그들이 남긴 프레스코 화는 섬세하고 자유분방하다.

 

온화하고 조용한 에게 해의 자연환경은 그들에게 침략보다는 무역을 선택하게 했고

그들은 고대세계에서 최대의 교역국이 되었다. 

 

그리스인은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헤르메스 등의 신을 미케네 인에게서 물려받았다.

그리스문명이 인류문명에게 내린 선물을 고려하면 그들에게 뿌리를 제공한 미케네와 미노아문명의

다양한 단면이 더욱 의미를 가지게 된다.

 

크레타는 2차 대전 때 까지도 지중해의 전함이라 일컬어 질만큼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크레타에서 발생한 문명은 적어도 유럽의 최초의 문명이다.

그 이전의 원초문명은 모두 동쪽에서 발생하였다.

 

아마도 기원전 3000년쯤에도 동쪽의 선진문명이 전해지는 요충지였을 것이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와 에우로파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알려진 미노스왕은 죽어서 하계의 판관이 되었다.

 

아게노르의 딸인 에우로파는 제우스의 꾐에 빠져 동침을 하지만 크레타 섬에서 버림을 받는다.

에우로파는 페니키아지역 지금의 팔레스타인지역의 공주였으므로 신화는

미노아문명이 소아시아에서 발원하였음을 증언한다.

 

미노스가 왕위를 찬탈할 때 그의 형제모두가 사랑했던  밀레토스라는 자가 추방당해

다시 소아시아 쪽으로 건너가 세운 도시가 탈레스를 비롯한 ‘생각의 발견자’들의 도시 밀레투스이다.

 

그리스신화는 오랜 시간 동안 그리스본토와 미노아문명

그리고 소아시아사이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전승기록인 듯 보인다.

 

우리는 암흑기를 호메로스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기원전 1200년부터 기원전 800년 때까지

수많은 호메로스들이 음유시인이 되어 그들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행적을 노래하고

비참한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며 장대한 서사시를 공동창작 했음을 이르는 명칭이다. 

 

에게 해를 중심으로 동쪽의 문명은 서쪽으로 전달된 듯 보이고

미노아와 미케네문명을 만들었던 종족들은 도리아인의 침략에도 살아남아 이오니아인들로

스스로를 칭하면서 에게 해와 본토를 중심으로 폴리스(도시국가)를 만들게 된다.

 

이제 우리는 과학과 철학의 창시자들과 곧 만나게 된다.

물론 그들이 이룬 성과는 선배들로부터 학습한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비로소 이때부터 근본적인 ‘질문’이 체계적이고 대규모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들은 ‘우주의 본질’, ‘진리의 문제’, ‘인생의 의미와 목적’등 인간이 생각 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도 이때부터 기록되어있다. 

 

<이순용 기자 sylee@as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