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갖춤 [ 馬具 ]

 

정의

말(馬)을 부리는데 사용되는 도구들.

내용

말은 뛰어난 기동성과 힘을 갖추고 있어 기계문명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의 이동,

정보전달, 물자수송, 전쟁 등 여러 분야에 이용되어 인류문화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말을 효과적으로 부리는데 있어서 사용되는 도구를 통틀어 말갖춤이라 한다.

말의 쓰임새에 따라 승용(乘用), 가용(駕用), 만용(輓用), 농용(農用) 등으로 나뉜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말갖춤은 기원전부터 출현해 삼국시대의 4∼5세기대에 완전히 갖추어진다.

삼국시대의 말갖춤은 주로 승용으로 무덤 발굴조사에서 얻어진 유물과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그 모양과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다.

 

말갖춤은 기능과 쓰임새에 따라 4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말을 다루어 부리기 위한 제어용 말갖춤(制御用 馬具),

기수(騎手)가 말에 올라 앉아 신체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안정용 말갖춤(安定用 馬具),

말을 장식하기 위한 장식용 말갖춤(裝飾用 馬具), 말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용 말갖춤(防禦用 馬具) 등이 있다.

말을 다뤄 부리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장구(裝具)로서 굴레와 고삐, 재갈(轡)로 이루어져 있다.

 

(가) 굴레

말의 머리에 면직 또는 가죽끈을 가로 세로로 둘러 감아서 말머리를 얽어맨 것이다.

여기에 고삐와 재갈이 매달려서 기수가 말을 부리게 된다.

재료가 썩기 쉬운 것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옛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없다. 그러나 삼국시대 신라의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토기와 고구려 벽화고분인 쌍영총의 기마인물상 등의 그림에서 그 형식을 짐작할 수 있다.

 

(나) 고삐

고삐이음새 또는 재갈멈치에 매단 가죽끈으로 기수가 말에게 명령을 내리는 직접적인 수단이다.

굴레와 마찬가지로 주로 가죽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두 썩어 없어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삼국시대 신라의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토기와 고구려 벽화고분인 쌍영총의 기마인물상,

안악 3호무덤 행렬도 등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 재갈

말을 다뤄 부리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기능을 가진 장구이다.

이것은 옛무덤에서 출토되는 말갖춤 중 재갈이 가장 많은 것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재갈은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쇠(銜), 그 양끝에 매달려서 재갈쇠의 탈락을 방지함과 동시에 굴레에 연결되는

재갈멈치(鏡板), 재갈과 고삐를 연결하는 고삐이음쇠[引手]로 이루어져 있다.

 

재갈쇠는 금속제의 봉(棒) 또는 2개의 봉을 꼰 것의 양끝을 구부려서 끝부분에 둥근 고리를 만든 것이다.

마디 수에 따라 1개의 봉으로 된 것(一連式), 3개의 봉으로 된 것(二連式), 3개의 봉으로 된 것(三連式)으로 나뉜다.

삼련식의 재갈쇠는 중국 한대(漢代)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 재갈에 많이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가야의 진주 옥봉 7호분, 신라의 경주 월성로 가-1호분에서 출토된 재갈과 같이 삼련식도

있으나 대개 이련식의 재갈쇠가 사용되었다.

고삐이음쇠는 삼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을 보면 철봉의 가지수가 한 가닥 또는 두 가닥으로 된 것이 있다.

고삐의 가죽끈과 직접 연결되는 바깥고리의 형태는 삽의 손잡이모양, 표주박 모양, 본체에서 굽은 것이 있다.

재갈은 재갈멈치의 평면형태에 따라 크게 표비(鑣轡), 판비(板轡), 환판비(環板轡), 원환비(圓環轡)의

 4가지로 나뉘며 사용시기와 지역은 약간씩 차이가 있다.

 

① 표비 : I자형, S자형, 고사리형 등으로 길게 만들어진 재갈멈치가 재갈쇠 바깥고리에 끼워져

재갈쇠의 탈락을 방지하는 재갈이다. 처음에는 동물의 뼈(鹿角,骨製) 또는 나무(木製)로 만들어졌으나

차츰 청동 혹은 철제로 만든 것도 사용되었다.

 

표비는 기원전 6세기 이래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의 동서에 걸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말의 혀나 아래턱을 강하게 압박함으로써 말에 대한 제어력이 매우 강력한 재갈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는 중국 한대에 청동제 또는 철제의 재갈멈치를 가진 표비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후의 평양 정백동과 석암리, 대구 평리동, 시기가 약간 늦은 경주 조양동, 경주 내남면 탑리,

울산 하대 유적 등에서 S자형의 재갈멈치를 가진 표비가 출토되었다.

삼국시대에도 널리 사용되어 고구려지역의 만보정 242호, 가야지역의 김해 양동리와 대성동,

부산 복천동, 합천 옥전, 고령 지산동, 백제지역의 청주 신봉동 등의 무덤에서 여러 점이 발견되었다.

 

② 판비 : 원형(圓形), 심엽형(心葉形), 타원형(楕圓形), f자형 등 평면형태가 판(板)모양의 재갈멈치를 갖춘 재갈이다.

판비는 재갈쇠와 고삐이음쇠의 연결이 재갈멈치의 중앙에서 이루어진다. 기능상 말에 대한 제어력이

다른 형식의 재갈에 비해 약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발달하였다. 현재까지 출토된 실물자료를

보면 북방의 고구려와 그 주변지역에서는 일찍부터 판비가 개발되어 사용되었다.

남부지방에는 늦어도 4세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김해 대성동 제41·42호분,

마산 현동 제43호분 등에서 간략하게 만든 철제재갈이 발견되었다.

 

5세기대가 되면 전국에서 발견되며 재갈멈치가 철 외에 은, 금동으로 만들어지고 그 위에 용문, 十자문,

인동문 등 여러 가지의 장식이 베풀어진 화려한 것으로 발전한다.

대개 의장용(儀裝用)의 재갈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도 여러 가지로 만들어져 신라에서는 심엽형 또는 타원형,

백제와 가야에서는 f자형의 독특한 판비가 만들어져 지역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③ 환판비 : 편평한 철대(鐵帶)를 구부려서 원형(圓形) 또는 타원형(楕圓形)의 큰 고리를 만든 다음,

그 안쪽에 다시 재갈쇠와 고삐이음쇠가 연결되는 철대를 ⊥자형 또는 ×자형으로 가로 질러서 만든 재갈이다.

환판비는 대개 철제품으로 판비에 비해 제작이 간단하며 움직임이 자유로울뿐만 아니라

특별한 장식이 베풀어지지 않았다. 대개 실용품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낙동강 하류역에서는 5세기를 전후한 무렵부터 발전하였다.

가야무덤인 부산 동래 복천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등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또한 백제의 청주 신봉동고분군, 신라의 경주 황남동 109호분 4곽에서도 발견되었다.

 

5세기 후반대가 되면 신라에서는 장식성이 강한 판비가 많아지는 것에 비해 가야에서는

여전히 이 종류의 재갈이 널리 사용되고 있어 양 지역간의 특성이 보인다.

 

④ 원환비 : 철봉(鐵棒)을 구부려서 원형 또는 타원형의 둥근 고리모양으로 만든 재갈멈치에 재갈쇠와

 고삐이음쇠가 연결된 재갈이다. 재갈멈치가 말의 빰에 미치는 압박이 가장 낮으며 재갈쇠와 고삐이음쇠의

움직임이 자유로와 실용성이 가장 높은 재갈로 인식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3∼2세기부터 사용된 재갈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6세기대의 가야무덤인 진주

가좌동 1호분, 옥봉 7호분, 신라에서는 경주 미추왕릉 9구 A호 파괴고분 2묘곽 등에서 철제의 원환비가 출토되었다.

말에 걸터앉은 기수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말갖춤으로서 안장(鞍裝)과 이것을 붙들어 매다는

가슴걸이와 후걸이, 그리고 발걸이(鐙子)로 이루어져 있다.

 

(가) 안장

안장은 기수가 말 위에 앉아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장구이다.

삼국시대의 안장은 크게 보아 안장 앞가리개(前輪), 안장 뒤가리개(後輪),

기수가 앉게되는 안장대(座木)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에 안장대 위에 깔아 기수가 편안하게 앉도록 하는 안장깔개(鞍褥), 안장 아래에 깔아 말의 등을

보호하는 언치(下鞍), 말이 달릴 때 흙이 기수의 발에 튀지 않도록 안장의 양쪽에 드리우는 다래(障泥)가 있다.

삼국시대의 안장은 중요한 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예는 거의 없다. 다만,

경주 금령총 출토의 기마인물형토기와 고구려 벽화고분의 그림을 통해 대개의 모양을 알 수 있다.

 

옛 무덤에서는 안장의 여러 부분을 연결하고 장식하는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금속판이 출토되고 있다.

이른 시기에는 철제품이 대부분이나 5세기대가 되면 재질이 금동 등 화려한 것으로 변하고 여러 장식이 베풀어진다.

 

신라의 무덤인 경주 황남대총 남분 출토 안장은 금동판을 용문으로 투조하고

옥충(玉蟲)의 날개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식리총 출토 안장은 금동판에 용봉문을 투조한 것으로

삼국시대의 높은 공예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나) 발걸이

발걸이는 안장과 연결된 가죽끈에 매달아서 말의 양쪽에 늘어뜨린 것이다. 기능은 기수가 말에 쉽게 오르기

위해 발을 딛는 디딤대, 또는 말을 타고 달리는 중에 양쪽발을 걸쳐서 신체의 안정을 유지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전쟁 등에 있어서 기수가 중무장(重武裝)을 했을 경우 말 위에서 신체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발걸이의 발명은 재갈과 굴레 등에 비해 늦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처음에는 가죽 등

유기질제의 발걸이가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서진대(西晋代) 금분령 21호묘의 좌측에만 발걸이가 묘사된 기마용(騎馬俑)과 청동제 발걸이 1짝이 출토된 중국 안양 효민둔 154호묘의 예로 보아, 처음 발명된 때에는 말에 오를 때의 디딤대로서의 기능만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에 발걸이가 말을 타고 달리는 중에도 신체의 안정유지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양쪽 발을 딛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중장기마전(重裝騎馬戰)과 같은 전쟁방식의 변화가 금속제 발걸이의 출현을 재촉했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된 발걸이는 형태상 발을 딛는 부분이 타원형 또는 삼각형의 큰 고리모양으로

만들어진 윤등(輪鐙)과 디딤대에 발을 감쌀 수 있는 자루모양의 장치를 한 호등(壺鐙)으로 크게 나뉜다.

다시 재질에 따라 목심금속판피윤등(木心金屬板被輪鐙), 철제윤등(鐵製輪鐙), 청동제윤등(靑銅製輪鐙),

목심금속판피호등(木心金屬板被壺鐙), 철제호등(鐵製壺鐙)으로 나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주로 사용된 목심철판피윤등(木心鐵板被輪鐙)은 나무에 철판을 덮어 씌운 것이다.

목심의 일부에만 철판을 덮어 씌운 것에서 전체를 덮어 씌운 것으로 발전한다.

또한 발을 딛는 디딤대도 폭이 좁고 아무런 장치가 없는 것에서 디딤대가 넓어지고 발의 미끄럼 방지를 위한

큰 못이 장치된 것으로 변화·발전한다.

 

이 종류의 발걸이는 출토 비율이 가장 높고 여러 형태로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무덤의 연대와

고대사회의 발전수준, 교류관계 등을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다루어지고 있다.

철제윤등은 목심금속판피윤등에서 발전된 것으로 보다 강력하며 실용성이 높아진 발걸이다.

신라의 금령총, 식리총, 호우총, 가야의 합천 옥전고분군, 함안 도항리고분군 등에서 출토되었다.

 

호등은 지금까지 출토 예를 보면, 가야무덤인 합천 반계제 다A호분, 합천 옥전 75호분에서만 발견된 매우

희귀한 것이다. 다른 형식의 발걸이에 비해 실용성이 떨어지며 만드는 것도 복잡해

삼국시대에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만이 사용한 의장용(儀裝用)으로 생각된다.

실용성보다는 장식적인 요소가 강한 말갖춤으로서 말띠드리개(杏葉),

말띠꾸미개(雲珠)와 말의 가슴걸이에 매달아서 말의 움직임에 따라 소리를 내는 말종방울(馬鐸),

말방울(馬鈴), 말의 머리에 씌워 장식하는 말머리꾸미개(馬面), 기꽂이 등이 있다.

 

(가) 말띠드리개

말띠드리개는 가슴걸이와 후걸이에 매달아 늘어뜨린 장식품이다.

금속제가 출현하기 전에는 기원전 5세기 스키타이의 무덤인 파지리크 1호분의 예에서와 같이,

면직 또는 가죽을 말의 좌우측에 매달아 장식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나라에서 금속제의 말띠드리개가 출현한 것은 4세기부터이다.

처음에는 철제로 만든 살구잎모양의 심엽형(心葉形)이 유행하였다.

그 예는 김해 대성동 3호분 등에서 볼 수 있다.

 

5세기대에 본격적으로 발달하여 재질은 철제 외에 은제, 금동제 등 화려한 것으로 변하며,

장식도 투조기법에 의해 삼엽문, 십자문, 인동문, 용문 등 여러 가지가 베풀어진다. 형태도 여러 가지로 만들어져

고구려에서는 심엽형, 신라에서는 고기꼬리모양의 편원어미형(扁圓魚尾形),

백제와 가야에서는 검신(劍身)모양의 검릉형(劍菱形)이 독특하게 만들어져 지역적인 특성을 보인다.

 

(나) 말띠꾸미개

굴레와 가슴걸이, 후걸이의 가죽끈이 교차되는 곳을 서로 묶어 연결하는 장구이다. 처음에는 실용을 목적으로 철제로 만든 간략한 형태였으나 차츰 장식성이 높아지는 한편 형태와 재질이 다양해져서 화려한 것으로 변화·발전하게 된다.

삼국시대의 말띠꾸미개는 크게 환형(環形), 판형(板形), 반구형(半球形) 등으로 나뉜다. 4∼5세기에는 실용을 목적으로 한 철제의 환형운주가 널리 사용되다가 5세기 후반부터 신라에서는 금동제의 입주부운주, 무각소반구형운주 등 화려한 것이 유행하게 된다.

 

말은 삼국시대의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적의 화살이나 창 등의 무기로부터

말을 보호하기 위한 말머리가리개(馬胄)와 말갑옷(馬甲) 등의 방어용 말갖춤이 만들어지게 된다.

 

(가) 말머리가리개

크고 작은 여러 모양으로 자른 철판을 말머리모양과 크기에 맞게 접합해 만든 것으로 중장기병(重裝騎兵)의

말에 씌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무덤에서는 실물자료가 출토된 예는 없으나 안악 3호분, 삼실총 등의 벽화고분의 그림에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라의 경주 황남동 109호분 4곽, 가야의 부산 복천동 10호분, 합천 옥전 23·28·35·M1·M3호분에서는

철판으로 만든 실물자료가 발견되어 고구려 벽화고분 그림의 사실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 말갑옷

철판을 크고 작은 여러 모양으로 자른 다음 가죽끈으로 연결해 만든 것이다. 말머리가리개와 함께 출토되며,

말에 씌워진 모습은 고구려의 삼실총, 쌍영총 등의 벽화고분의 그림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무덤에서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예는 드물다. 부산 복천동 35·36호분, 합천 옥전 28·M1호분에서는 일부분이

발견되었다. 함안 도항리 마갑총에서는 말의 목부분과 몸통부분을 가렸던 말갑옷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말갑옷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伽耶古墳 出土 鐙子에 대한 硏究(柳昌煥, 韓國考古學報 33, 1995)
신라와 가야의 馬具(金斗喆, 韓國古代史論叢 3, 1992)
加耶 初期馬具에 대하여(申敬澈, 釜大史學 18, 1994)
馬具(金基雄, 韓國の考古學, 金廷鶴編, 1972)
高句麗古墳壁畵(北韓考古學術叢書 8, 朝鮮畵報社, 1986)
馬具(小野山節, 世界考古學事典, 平凡社, 197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