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 

저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

  • 지역

    > 영국

  • 분야

    역사

    • 해설자

      이종호(페르피냥대 공학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장기자문위원, 과학분야 저술가)

    로마는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제국을 여러 구역으로 분할해 통치했다.

    364년,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us I, 재위 364∼375)는 동생인 발렌스(Valens, 재위 364∼378)에게 아우
    스투스(Augustus)
    1)라는 칭호를 주면서 로마의 동쪽 지역[하(下) 다뉴브 지방에서 페르시아 국경선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하도록 했고, 자신은 일리리쿰, 이탈리아 및 갈리아2) 지방을 직접 통치했다.

    375년, 아시아 내륙의 강력한 유목민인 훈(Hun)족이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볼가(Volga) 강을 건넜다.

    야만적 기마 집단인 훈족은 동고트족(Ostrogoths)이 거주하던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을 유린했고,

    이들에게 쫓긴 서고트족(Visigoths)의 왕 아타나리크(Athanaric, ?∼381)는 주민들을 이끌고 다뉴브 강 남쪽의

    로마 영토로 들어가, 동쪽 로마 황제 발렌스에게 트라키아(Thracia)로 이주해 살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원했다.


    서고트족의 이동은, 제국의 변경 지역에서 일어났던 그 이전의 부분적이고 우발적인 이주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지만 발렌스는 이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단 다뉴브 강을 건너기 전에 무장을 해제할 것과, 부모들의 충성의 담보로 어린이들을 따로 떼어 아시아의 여러 속주에 분산시킨다는 조건이 있었다.

    당시 다뉴브 강을 건넌 서고트족 이주민은 남녀노소를 합쳐 100만 명

    (당시 서고트족 장병 수를 20만 명으로 추정)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처음에 발렌스는 서고트족의 이주를 오히려 반겼다. 속주민들이 징집을 면제받기 위해 매년 납부하는

    거액의 황금으로 황실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거주지를 잃고 쫓겨 내려온 고트족들을 진정한 피난민으로 대우하지 않고 마치 전쟁의 포로처럼

    하대했다. 로마인들은 당초의 약속과 달리 토지를 할당해 주지도 않았고 생활필수품에 무거운 세금을 매겼으며,

    보잘것없는 식품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았다.

    서고트족은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일 잘하는 값비싼 노예를 넘겨주어야만 했다.

    378년, 분노한 서고트족은 마침내 하드리아노폴리스(Hadrianopolis)에서 발렌스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로마군을 공격해 격퇴하고, 여세를 몰아 진격하는 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발칸반도를 마음껏 유린했다.

    이러한 서고트족의 봉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황실 관리들의 부패였다. 트라키아로 이주할 때 모든 무기를 로마에

    내주어야 했던 서고트족은 안전을 위해 무기를 가져야 한다며 무기를 휴대하는 대신 그들이 갖고 있는 재화와

    여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고, 로마의 황실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발렌스 황제는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군대 3분의 2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는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군에 대승했던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에서보다

    로마에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또 이 전투는 전쟁사상 보병에 대한 중장기병(重裝騎兵)의 첫 승리라는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로마제국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해 자신감을 얻은 서고트족은 로마 영토 안으로 남하를 계속했다.

    382년, 로마는 결국 다뉴브 강 남쪽에 정착한 서고트족에게 자치를 허용했고 그 전투원들은 로마 군단의 번병3)으로

    편입되었지만 허울일 뿐이었다. 새로운 땅에 정착한 서고트인들은 곧바로 자신들이 로마와 훈족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로마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위협적인 북방의 훈족에게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고트족은 강력한 로마제국과 훈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공법을 택했다.

     

    즉, 발칸반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자신들이 섬기는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의 국경 수비대라 할 수 있는 서고트족 번병들이 로마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군단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우두머리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395)는 로마의 영토가 짓밟히는 와중에도 종교 정책에만 매달렸다.

    그는 그리스도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이교로 취급하면서 그 신전을 파괴하고 이교를 믿는 자들은 모든 도시에서

    추방했으며 그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가 로마에 보다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자신의 유언으로써 로마제국을 동과 서로 분리하도록 한 것이다. 그는 열일곱 살의 아르카디우스(Arcadius, 재위 395∼408)에게 동로마를, 열 살의 호노리우스(Honorius, 재위 395∼423)에게 서로마를 분할해 주었다. 이번 분할은 과거에 로마제국이 원활한 통치를 위해 영토를 여러 개의 속지로 나누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테오도시우스의 제국 분리 이후 동로마와 서로마는 완전히 독립적인 제국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401년 12월, 훈족이 처음 유럽을 공격한 지 26년이 되던 해, 매서운 한파가 엄습해 라인 강이 얼었다. 알라리크(Alaric, 재위 395∼410) 왕 휘하의 반달족(게르만족) 약 1만 5000명은 라인 강을 건너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로 들어가 이탈리아의 포(Po) 강 유역의 평야로 진격했다. 당시 4만 명에 달하는 반달족이 로마의 상비군으로 있었는데

    로마제국이 이들에 대한 급료와 보조금을 중단 혹은 삭감한 것이 반란의 이유였다.

    당시 서로마제국의 군을 지휘하고 있던 장군도 반달족인 스틸리코(Flavius Stilicho, 365?∼408)였다.

    스틸리코 장군은 402년 알라리크에 대항해 피에몬테 지방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해 말 베네토 지방에서 알라리크를 결정적으로 격파한다. 스틸리코는 자신의 동족인 반달족에게 일단 승리했지만 그들을 회유해 예전처럼 동맹군으로 묶어 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알라리크에게 많은 공물을 주어 변방의 우려를 씻어야 한다고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했다. 당시 로마에서 알라리크에게 제시한 보조금은 황금 4000파운드였다.


    알라리크가 잠잠해지자 호노리우스 황제는 서로마 수도를 로마에서 라벤나(Ravenna)로 옮기는데,

    이 결정은 로마가 야만족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조처였다. 호노리우스는 수도를 옮긴 후 야만족들에 대항해 이제까지 취했던 보조금 정책을 폐지하고 공격적으로 나선다. 그의 강경 노선은 처음에 성공을 거두었다.

    406년 야만족 혼성군[반달족, 알란족(Alans), 동고트족 등]이 토스카나 지방에 침입했을 때 스틸리코는

    서고트족과 훈족을 용병으로 고용해 이들을 격퇴한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볼 때 스틸리코는 로마인이 아니라 반달인인데다가 로마의 황족과 너무나 가까운 관계였다.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딸과 결혼했고 자신의 첫째 딸은 호노리우스 황제의 황후였고 둘째 딸 역시 그의 측실(側室)이었다. 여하튼 로마의 최고 군사 지휘관으로 로마를 위해 스틸리코가 제 몫을 다하고 있었지만 스틸리코의 위세에 겁을 먹고 있던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원로원 의원들이 스틸리코가 황제 자리를 찬탈할 수 있다고 참소했다.

     

    그러자 생명에 위협을 느낀 스틸리코는 라벤나에 있는 한 성당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잡혀서 참수당한다.
    로마는 스틸리코를 제거하면 반달족과 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로마의 기대와는 달리 알라리크가 408년에 직접 로마를 공격한다. 명분은 로마제국에서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황금을 제때에 지급하지 않았고,

    그들이 북아프리카, 달마티아 지역에 정착하게 해 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했다는 것이었다.

    알라리크는 곧장 로마로 진격해서 마침내 로마 성벽 아래에 진을 쳤다. 알라리크가 대군을 교묘하게 배치하고 로마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한 열두 개의 문을 장악한 후 인근 지방과의 모든 교통을 차단하는 한편 로마의 생필품 공급로인 티베리스 강(지금의 테베레 강)을 봉쇄하자, 결국 로마는 알라리크에 굴복해 호노리우스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로 로마 시장인 아탈루스(Attalus)를 옹립했다. 알라리크에 의해 졸지에 로마 황제가 된 아탈루스는 로마의 성문을 활짝 열고 알라리크를 로마에 입성하게 한 후 서로마제국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와중에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로마로서는 도박에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얼마 후 라벤나에 머물고 있으면서 알라리크의 위협에 대항하던 호노리우스에게 낭보가 전해진다. 로마의 정예 군단이 라벤나 항구에 상륙했고, 아탈루스가 아프리카로 파견한 장병들이 호노리우스의 부하들에게 격파되었다는 것이다. 상황이 반전되자 코미디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알라리크가 자신이 세운 꼭두각시 아탈루스에게 등을 돌리고 호노리우스를 다시 서로마의 황제로 복위시킨 것이다.


    그러자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생각한 호노리우스가, 과거에 로마가 알라리크와 맺은 모든 협약은 영원히 폐지되었다고 선언한다. 호노리우스의 선언에 발끈한 알라리크는 410년에 군대를 이끌고 로마 성벽에 다시 나타났다. 로마는 알라리크에 맞서 결사적인 항전을 결의했으나 당시 로마에 살고 있던 알라리크의 동족이 한밤중에 성벽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로마가 건국 이래 1163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완전히 점령된 것이다.


    알라리크는 로마를 점령한 후 1차 때와는 달리 점령군으로서 다소 유머러스한 장면을 연출한다. 부하 병사들에게 3일간의 약탈을 허용한 것이다. 알라리크의 약탈은 비교적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졌지만 로마가 약탈되었다는 것 자체가 대제국 로마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의 여건을 봤을 때 알라리크가 로마를 점령한 후 직접 통치할 수도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알라리크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왜 회피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여하튼 알라리크는 로마에서 3일간 마음껏 약탈한 후 철수했다.

    알라리크가 사망하자 그의 의형제 아타울프(Athaulf, 재위 410∼415)가 반달족을 이끌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평화롭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역에 정착했다. 아타울프의 후계자는 현 프랑스 지역인 보르도, 푸아티에, 툴루즈 등 여러 도시를 포함한 아키텐 지방에 서고트족을 정착시켰으며 툴루즈는 6세기 초까지 서고트족의 수도였다.

    한편 훈족에 의해 쫓겨났던 알란족은 피레네산맥으로부터 바다 쪽에 걸쳐 에브로 강의 계곡을 따라 정착하고,

    다시 루시타니아(현재의 포르투갈)의 각지로 흩어졌다.

    게르만족 중에서도 반달족의 이동은 가장 두드러지는데, 반달족은 에스파냐의 인근 지역을 정복하고 강력한 함대를 이용해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서로마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문화를 가진 속주 아프리카 점령이 시작된 것이다. 반달족은 439년에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트리폴리까지 진격했으며, 지중해의 코르시카ㆍ시칠리아ㆍ사르데냐 섬도 점령했다.


    브리타니아(영국)도 게르만족인 주트와 색슨이 점령했고, 5세기 중엽∼6세기 중엽에는 또 다른 게르만족인 앵글이 브리타니아에 근거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침입에 대응한 브리타니아인들의 저항도 완강해 유명한 아서왕의 영웅적인 전설이 나오게 된다. 여하튼 브리타니아를 포함해서 서유럽에는 각 지역에 정착한 민족들이 새로운 국경을 세웠는데, 그 국경은 현재까지 큰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후 게르만족과 훈족은 일진일퇴하면서 동ㆍ서로마제국을 공격하는데, 이 와중에 로마 시는 건설된 이래 처음으로 약탈당하기까지 한다. 특히 훈족의 아틸라(Attila, 406∼453)는 밀라노를 점령한 후 자신이 로마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배자인 아틸라가 결혼식 후 급사하면서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한 훈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후계 자리를 놓고 아틸라의 아들들과 그의 휘하에 있던 야만족이 싸우던 중 급부상한 사람은 아틸라의 심복 참모였던 오레스테스(Orestes)였다.

    오레스테스는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고 475년에 그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재위 475∼476)에게 자의(紫衣)4)를 입힌다. 오레스테스의 전력을 잘 알고 있는 게르만족들은 그에게 이탈리아

    땅의 3분의 1을 요구했다. 오레스테스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일부 게르만족들이, 로마의 장군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스키리족5) 출신의 오도아케르6)를 그들의 지도자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오레스테스는 파비아(Pavia), 플라켄티아7)로 달아났지만 반란군에게 붙잡혀 살해된다. 문제는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에 대한 처분이었는데 오도아케르는 정세를 살핀 후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 그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스스로 퇴위하면 연금을 지급해 주며 조용히 살도록 허락하겠다고 제의했고,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476년에 서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동ㆍ서 고트족이 주력이 된 게르만족이 그들보다 훨씬 야만적인 훈족에게 근거지를 빼앗기고 로마제국 안으로 들어온 지 불과 몇십 년 만에, 지중해 전역과 구세계를 호령하던 권력과 문화의 거인,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멸망시켰던 것이다.

    오도아케르는 부하들의 황제 칭호 제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황제가 아니라 왕(King)이라 칭했다. 그가 로마 황제가 되지 않은 것은 그동안 불운했던 로마 황제의 종말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적인 서로마제국의 점령자로,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오히려 로마제국의 제도를 따르기도 했다.

    4세기 초반만 해도 로마의 틀은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었다. 야만족들이 로마제국 국경 바깥쪽에서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고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로마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국경의 길이가 1만 6000킬로미터나 되었지만 60만 명에 이르는 상비군을 갖추고 있는 만큼 로마의 군사력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사실상 야만족의 침입으로 약간의 곤란에 처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감히 로마제국에 도전해 제국 전체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보편적으로 제시되는 로마제국의 멸망 요인은 군사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경제적 취약성과 여러 도시의 쇠퇴, 인구 감소, 식민지 문화나 야만인 문화에의 동화, 그리스도교의 채택, 그리고 콘스탄티노플로의 천도 등의 모든 것이 고대 로마의 종말을 재촉한 원인이었다.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제국이 노화될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며, 강력한 제국을 운영하던 국가들 모두에게서 이 같은 쇠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말한다.


    서로마가 멸망한 때는 476년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1453년 오스만투르크의 메메드 2세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했으므로, 로마제국의 쇠망사는 멸망할 때까지 단절된 적이 없는 동로마사를 중심으로 적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는 서로마가, 멸망하기 얼마 전에 권한을 동로마에 귀속시켰기 때문이다. 즉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로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동ㆍ서로마로 분리되었지만 다시 통합 로마가 되었다는 뜻이다. 서로마가 오도아케르에게 점령되었을 때 마지막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동로마의 황제인 제논(Zenon, 재위 474∼475, 476∼491)에게 공식적인 합병을 요청했고 제논은 이를 승낙했다.

    정치적 합의에 따라 동로마가 공식적인 통합 로마제국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로마의 멸망 시점을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상정하는 것은, 동로마제국 스스로 서로마 지역에 대한 통치를 포기했고 현대사에 미친 영향도 동로마보다는 서로마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 영토에 자리 잡고 있던 동로마는 현지에서는 정복자로 간주되었고, 동로마제국의 신민은 피정복민인 그리스인들이었다.

     

    7세기경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us II, 669∼711)를 끝으로 동로마에서 라틴어(로마의 언어)는 거의 소멸되고,

    황실에서조차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그리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동로마가 현지의 문화에 동화되어 버렸음을 의미한다. 종교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동로마는 로만가톨릭이 아닌 그리스정교회를 고수했다.

    러시아를 포함하는 동구권에서 주로 신봉하는 그리스정교회는 서유럽의 로만가톨릭과 다른 길을 걸어

    세계사에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아진다.8)

    이 문제는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을 고민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대체로 다음 세 시기로 구분해 저술했다. 제1기는 트라야누스(Trajanus, 재위 98∼117)

    황제와 안토니누스(Antoninus, 재위 138∼161) 황제 시대로부터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의 야만족 등

    (기본적으로 훈족을 의미)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시기까지다.

     

    제2기는 동로마제국의 영광을 회복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재위 527∼565)로부터 아랍인의 소아시아 및 아프리카 정복과 800년의 서로마제국 부활, 즉 샤를마뉴(Charlemagne, 카를 대제, 재위 768∼814)의 등극까지다. 마지막으로 제3기는 서로마제국의 부활로부터 터키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공략 그리고 로마 황제 계보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의 약 6세기 반의 기간을 포함한다. 이 기간 동안 등장하는 십자군의 역사를 포함해 다룬다. 한마디로 100년에서 1500년에 이르는 서유럽의 역사와 서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동방의 역사를 총괄한다.


    그러나 기번은 원래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구상하면서 서로마의 멸망을 위주로 생각했다. 그의 ≪로마제국 쇠망사≫ 제1권 서문에서도 그는 제2기, 제3기에 대해 기대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확약할 용기가 없다고 적었다. 그런데 그의 ≪로마제국 쇠망사≫ 제1기, 즉 제1ㆍ2ㆍ3권에서 다룬 서로마 멸망사가 예상보다 큰 반향을 일으켜 소위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자 당연히 동로마를 포함한 전 로마사를 구성한 대업은 통속적으로 말한다면 거의 억지로 완성한 것이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주로 다룬 앞의 3권은 필력이 왕성해 마치 소설을 보는 것 같은 순발력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임에 반해, 뒤의 3권은 앞의 3권에 비해 긴 시간을 압축해 놓은 것은 물론 동로마 황제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 흥미를 반감시켰을 뿐 아니라 필력도 떨어진다는 평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차이가 발생한 것은 서로마사와 동로마사를 편찬할 때 그의 집필 여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신흥 부르주아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난 기번은, 노동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한량이자 사교계에서 대접받는 주요 인물로 시종일관했다. 그러나 자금줄은 할아버지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아버지인 에드워드 2세가 쥐고 있었으므로 그는 돈에 관련한 모든 일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는 현명하게도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스위스에 체류할 때 사귄 약혼자 쉬잔과 파혼한 것도 아버지의 압력 때문이었다.9)


    기번은 아버지가 보내 준 자금으로 유럽을 여행하면서 로마제국의 멸망사를 쓸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당대에 ≪로마제국 쇠망사≫와 같은 대작을 출간한다는 것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특정 작가를 제외하면 스스로 출판 비용을 대야만 출간이 가능했는데 아버지에게 자신의 책을 출간하자고 설득할 재간은 없었던 기번은 출간을 계속 늦추었다.


    1770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산, 즉 자신의 돈으로 그의 나이 39세였던 1776년에 서로마사를 다룬

    ≪로마제국 쇠망사≫ 제1권을 출간했다.

    이 책이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당대 최고의 지성인 중 한 사람이 된다.

    그는 많은 유산으로 부를 누렸고 책으로도 명성을 얻었으므로 아쉬울 것이 없었지만, 독자들이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즉 서로마제국사 전체를 빨리 출간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그는 제1권을 출간한 지 5년 후인 1781년에야 제2ㆍ3권으로 서로마제국사를 완성했다.

     


    제2ㆍ3권의 발간이 늦어진 것은, 그가 ≪로마제국 쇠망사≫ 제1권의 성공으로 당대의 한량들이 선호하는 하원의원에 당선된데다 무역식민위원회 위원으로 공직까지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직책들이 전적으로 한직(閑職)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간적인 구속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제2ㆍ3권은 그가 그런대로 틈틈이 집필해 완성한 것이다.


    제2ㆍ3권 역시 호평을 받아 그는 전 로마사, 즉 동로마사까지 완결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문제는 서로마사를 집필할 때와는 여러 면에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공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그는 동로마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애착을 느끼지 않았다.10) 더욱이 부와 명예를 모두 갖고 있는 기번으로서는

    별로 애착이 느껴지지도 않는 동로마사에 악착같이 전념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가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어서 갑작스러운 영국 정치 상황 변화, 즉 그가 지지하던 노스(Frederick North) 경의 내각이 무너져 그는 졸지에 공직에서 물러나 실업자 아닌 실업자가 되었다. 공직에서 나왔다고 해 생활 문제를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는 오랜만에 남는 시간에, 유보했던 로마제국 쇠망사의 후속편 집필에 박차를 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번은 서로마사 집필에서 보였던 애정과 정열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평가하는 학자들이 처음 서로마사와 후반 동로마사가 매우 큰 질적 차이를 보인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총 71장으로 나누어 서술했는데, 약 400년간의 서로마사를 38장으로 마무리했고 서로마가 멸망한 후 1000여 년의 동로마사를 33장으로 마무리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장점은 로마의 장구한 역사를 당대의 시대상과는 다소 다른 시각으로 집필했다는 것이다. 동시대인들은 역사의 주요 기능이 도덕적 교훈을 찾아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번은 엄청난 사료와 자신이 신봉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기번의 이런 집필 의도는 ≪로마제국 쇠망사≫에 대한 줄기찬 공격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불경한 로마제국 쇠망 이야기

    ≪로마제국 쇠망사≫는 발간된 이후 시종일관 종교적 불경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그는 신의 존재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른 폐해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했던 것이다.

    특히 제1기의 제15장과 제16장, 마지막 부분인 제38장의 <서로마제국 멸망의 개관>에서 적은 종교,

    즉 기독교에 대한 그의 시각이 우선적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다루면서 시종일관 견지한 맥락은, 로마 멸망의 가장 큰 요인으로 야만족의 침입을 우선시하면서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약한 로마인이 이에 적절하게 대항치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이러한 견해가 당대의 종교인과 지식인들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특히 그의 서술에 대한 종교계의 공격은

    매우 혹독했는데, 토머스 보들러는 종교적인 요소를 모두 삭제한 ≪로마제국 쇠망사≫의 특별판을 편찬하기도 했다.

    세인트폴 성당의 딘 밀먼은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11)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한 뻔뻔스럽고 비정직한 공격을 자행하고 있다.”

    기번이 당대 종교계의 심한 반발에 부딪친 것은 어린 시절 옥스퍼드를 중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열다섯 살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이신론(理神論)12)에 입각해 신의 존재에 대한 이론을 나름대로 정립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영국의 성공회가 아니라 당시 영국 사회가 가장 엄중하게 적대시하던 가톨릭교의 신앙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기번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으로 대표되는 회의주의와 무신론에 반감을 품고 영국국교회의 미온적인 중용을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하고 역사상 유일하게 정통적이며 보편적인 교회의 교리에, 말하자면 논리적인 순서를 밟아 가톨릭에 회귀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처신은 그가 영국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1753년 당시의 ‘로마교황청에 대한 복종을 교사하는 자의 죄는 대역죄와 맞먹는다’라는 공공연한 주장에 기번이 반기를 든 셈이었다. 기번의 처신에 놀란 아버지는 아들을 곧바로 옥스퍼드대학을 중퇴시키고 스위스로 보냈는데, 기번은 아버지의 의도대로 스위스에서 체류한 지 1년 만에 다시 신교로 돌아온다.


    기번이 단기간이나마 종교적인 문제로 영국 교회에 반항한 사건은 그의 경험과 지혜가 깊어 감에 따라 점점

    퇴색했지만, 그는 ≪로마제국 쇠망사≫의 제15장과 제16장에서 그의 종교적 신념과 체험을 나름대로 접목하려 했다.

    바로 그의 가슴속에 있던 내용을 솔직하게 토로함으로써 결국 당대의 지성인들로부터 배척받은 것이었다.

    제15장 <초기 기독교회 기적의 능력>에서 기번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초기 기독교회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기적들은 오랜 기간 참으로 인정되어 왔으나 최근에 와서는 자유롭고 정밀한 연구를 통해 공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일반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유럽의 다른 개신교 성직자들 간에는 전반적으로 악평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에 관한 우리들의 견해는 어떤 특정한 논거에 의해 좌우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연구와 반성의 풍토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적과 같은 사건을 입증하는 데 어느 정도의 증거를 요구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보면 성직자들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듯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앞의 설명을 완곡하게 변명한다.

    “이 미묘하고도 중요한 논쟁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역사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는 종교와 이성의 관심사를 조화할 이론을 채택하고 그 이론을 올바르게 적용하기에 매우 힘이 들며 또한 우리가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할 만한 행복했던 기간의 한계를 오류와 기만 없이 정확하게 규정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을 정확히 음미한다면 기번이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에 관한 한 성직자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은연중 노출했는데 기번은 기적에 관한 한 보다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만일 기적들이 현실적으로 정당하게 인정될 수 있었더라면 모든 시대마다 불신자들을 믿게 하고 이단자들을 논박하고 우상 숭배 민족들을 개종시키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하늘의 간섭을 정당화할 충분한 동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시의 지지자라면 누구나 기적의 실제를 믿지만 합리적인 많은 사람들은 기적을 믿기 어려워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또는 점차로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믿고 있는 기적에 대한 그의 언급은 성직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번은 계속해서 성직자는 물론 바티칸 교황까지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제15장 <기독교인들의 단결과 계율>에서 그는 당대의 성직자들을 정면으로 공격한다.

     

    “교회의 직책을 얻은 최초의 신도들인 경건하고 겸손한 사제들은 오늘날 로마 교황의 삼중관(三重冠, tiara)이나 게르만 대주교의 주교관이 상징하고 있는 것과 같은 권력과 위엄을 소유할 수는 없었으며 또 이런 것들을 주겠다고 하더라도 거부했을 것이다.”

     

    기번의 기독교에 대한 전 방위적 공격은 제16장 마무리에서도 기독교인들의 화를 돋우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선전되는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의 숫자가 터무니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많은 탄압이 있었더라도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사망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순교하고자 하는 정열이 강했기 때문에 때로는 자발적으로 출두해 고소인의 요구에 응했고 이교도들의 공공 행사를 난폭하게 방해했으며 심지어는 불더미 속에 기꺼이 뛰어들기도 했다는 것은 인정했다. 또한 주교들이 그러한 행동을 금지한 적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편애하는 역사가에 의하더라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16)에 의해 시작된 10년간의 대박해 기간 중에 목숨을 잃은 주교는 단 아홉 명뿐이라고 제시했다. 그리고 기번은 이 기간 중 처형된 기독교인의 총수를 약 2000명으로 추산했다.


    그에 대한 서방 종교계의 혹독한 비판에 영국성공회는 물론 가톨릭 측도 합세했는데, 그것은 그가 로마교황청이 이단으로 규정한 그리스정교회가 견지하는 아리우스(Arius, 250?∼336)파의 이신론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기번은 무엄하게도 로마교황청과 영국성공회 등 서구 종교계의 정통성을 송두리째 부정한 셈이 된 것이다.


    종교계, 특히 성직자들을 더욱 분개하게 만든 것은 사람들이 교회에 내는 헌금이 결국은 로마의 멸망을 갖고 왔다는 기번의 시각이었다. 그는 허울 좋은 자선과 헌금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 국가나 개인의 재산 중 상당 부분이 헌납된 것은 물론, 로마군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병사들에게 주어야 할 봉급이 금욕과 정결의 미덕을 설교하는 무가치한 남녀들에게 분배되고 탕진되었다고 혹평했다. 물론 그가 교계를 무한정 공격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쇠퇴가 기독교의 국교화로 촉진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급격한 멸망을 늦추고 정복자의 흉포한 기질을 누그러뜨렸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적었다.

    여하튼 그에 대한 종교계의 공격이 어찌나 심했던지 그는 1776년 말 계모에게 자신이 몸 성히 잘 있다는

    편지를 보내면서 “워싱턴(미국 초대 대통령)에게나 퍼부을 정도의 치열한 연속 포격 속에서도

    무사할 것 같습니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번은 기독교인으로서 종교계의 줄기찬 공격을 묵살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책에 대한 평가의 공개적인 반응으로 ≪제15장 및 제16장 중 일부 구절의 변호≫를 출간했다.

    그 이후로 그는 대체로 자신의 공격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는데 자서전에서는 “경건한 자, 소심한 자 및 신중한

    자에게 미칠 영향을 예상했다면 문제의 내용을 다소 부드럽게 표현할 생각도 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다루면서 종교계에 미칠 영향보다는 로마사에 보다 충실한 의견을 중심으로 피력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종교계를 화나게 만들 줄은 몰랐다고 실토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기번은 자신의 글에 문제점이 없으므로 계속 문제점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를 분명히 했다.


    문제는 종교계가 기번의 글을 빌미 삼아 계속 논쟁을 벌일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저술하면서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참’이라고 인식될 때 비로소 자신의 책에 그 내용을 삽입했고 또한 자신의 글이 갖고 올 파장을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 글을 정리했다. 즉 기번을 계속해서 공격할 경우 오히려 피해자가 되는 것은 기번이 아니라 종교계일 가능성이 더 많았다.

    기번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은 그의 이슬람교에 대한 솔직한 설명 때문이었다.
    기독교계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와 초기 회교의 팽창 과정을 설명하면서 “기독교 사회에서는 신용하지 않는 자료에 크게 의존했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기번이 로마제국의 멸망 자체를 서유럽을 위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를 포함한 세계사적인 틀에서 다루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번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멸망한 후기 동로마제국에 대해 “나약하고 참담하며 따분한 이야기”라고 지적할 만큼 경멸적인 서술도 주저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와 같은 서술이 사려 깊은 역사가가 적을 내용은 아니라는 데 공감했지만, 기번이 시종일관 견지한 것은 동로마제국이 이슬람교에 의해 멸망한 근본적인 이유가 동로마제국의 무능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서로마의 멸망이 야만족의 침입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마 자체가 부패하고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지적과 궤를 같이한다.


    문제는 이들의 무능을 응징해 정복에 성공한 측이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교라는 점이다. 당대의 종교적인 논리, 즉 기독교가 이슬람교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 있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기번은 냉철한 시각으로 기독교 국가였던 동로마제국을 매도했다. 이것이 서유럽인들에게 곱게 보일 리는 없는 일이었다.



    기번의 세 가지 판본(기번은 재판과 3판에서 계속 내용을 수정했으므로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함)을 비교해 편집한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베리(J. B. Bury) 박사는 기번을 시대를 초월한 스승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번이 역사학자들의 공통적인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장점들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가 기번의 장점으로 내세운 것은 과감하고 정확한 평가 기준, 바른 안목과 문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기지, 문제점 있는 내용은 유보하고 의구심을 표명하는 적절한 판단력, 자신의 독특한 표현 방법에 대해 시종일관하는 집중력 등이다. 사실 이러한 뛰어난 장점이 없었다면 ≪로마제국 쇠망사≫가 그동안 발전해 온 고고학적 성과의 기초, 즉 지난날의 오류 수정을 통한 후학들의 지적에 슬기롭게 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13)

     

    로마사를 전공하는 일부 학자들은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완전히 맹신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한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일부분이 다소 기번의 편견에 의해 저술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술과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번의 평가나 작업이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그가 역사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정확성과 엄밀성을 갖고 ≪로마제국 쇠망사≫를 저술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이 현재에도 ≪로마제국 쇠망사≫가 세계인들이 선호하는 고전으로 손꼽히는 이유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이후 역사학뿐만 아니라 정치ㆍ경제ㆍ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나폴레옹에게 제국의 야망을 갖게 했고, 처칠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할 때 이 책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또한 영국의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가 1949년 아일랜드의 분리 독립 문제와 같은 중요한 일이 산적해 있던 와중에도 ≪로마제국 쇠망사≫를 두 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이 책의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특히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한 이유의 하나로 이 책의 매우 커다란 영향력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했다고 고백했다.

    서로마 멸망과 한반도 신라ㆍ가야와의 연계

    근래 한국의 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놀랍다. 그동안 줄기차게 논란이 되어 왔던 단군이 중ㆍ고등학교의 교과서에 삽입되는가 하면 유럽의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이 한민족과 친연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가야ㆍ신라의 김씨가 북방 기마민족, 특히 흉노(匈奴)14)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낯설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중 훈족이 한민족과 친연성이 있다는 주장은 매우 충격적인데,

    이 주장은 각종 사료와 유물로 뒷받침되어 더욱 놀라움을 준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그동안 한국사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유물로 꼽혔던 ‘황금 보검(黃金寶劍)’이다.

    이 칼은 5∼6세기 유물로 추정된다.

    정식 명칭이 ‘경주 계림로 보검(慶州鷄林路寶劍)’인 이 칼은 보물 635호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3년 경북 경주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의 도로 공사를 하면서 배수로를 파고 있을 때

    땅속에서 적석총(積石塚)이 발견되었다. 계림로 14호분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황금 보검과 함께

    금귀고리와 금으로 만든 사자 머리 형상의 띠고리(버클) 등도 발견됐다.


    무덤 주인공의 가슴 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은 철제 칼집과 칼은 없어지고,

    길이 36센티미터의 금장식만 남아 있다. 누금15)과 붉은 마노 장식이 돋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유물은 아니다. 학자들은 이들 양식이 트라키아 지역에 살고 있던 켈트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본거지가 유럽 다뉴브 강 중부였던 켈트인은 이베리아반도ㆍ스코틀랜드ㆍ아일랜드와 트라키아에 정착했다.

    트라키아는 지금의 헝가리ㆍ루마니아ㆍ불가리아 일대에 해당하며 아틸라가 본영을 설치한 판노니아16)를 포함한다.



    문제는 신라에서 이 지역까지의 거리가 거의 8000킬로미터나 된다는 점이다.

    황금 보검은 대체 어떤 경위로 신라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까. 경기문화재연구원장 조유전은 “학계에서는

    페르시아 같은 서역에서 만들어져 수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서 교역로가 옛 신라 때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황금 보검에서 주목되는 점은 가운데 태극무늬를 닮은 무늬가 세 개 들어간 것과 표면의 나선무늬다.

    태극무늬 안의 꽃봉오리 장식은 고대 켈트인들이 사용했고, 나선무늬는 그리스 특유의 무늬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대 유물 전문가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는 계림로의 황금 보검을 제작한 금세공 기술자는 로마 문화에 정통한 사람이며, 주문자는 켈트족 출신의 트라키아 왕이었다고 보았다. 함께 출토된 사자 머리 버클은 기원전 4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 그리스ㆍ로마 지역에서 쓰이던 형식이라는 것이다.17) 이 버클은 원래 황금 보검을 차기 위한 허리띠에 달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 고구려, 백제나 중국에도 없는 이 유물이 신라에서만 나왔을까?

    이런 일급 보물이 상거래 대상이었을 리는 없기 때문에 트라키아 사절이 신라까지 왔거나 신라 사절이 트라키아에서 가져왔을 거라는 게 요시미즈의 추측이다.18) 황금 보검의 제작 연도를 5∼6세기로 추정한다면 적어도 당시에 이들과 어떠한 방법으로든 연계되었기 때문에 트라키아에서 제작된 황금 보검이 신라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황금 보검이 신라에서 발견된 것이 바로 이들 훈족이 한민족과 친연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다소 수긍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훈족이 한민족의 일파임은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우선 훈족의 골상이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 일명 납작 머리)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 지역부터 독일의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훈족은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고 머리 둘레에 고랑 같은 주름이 팼으며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편두임을 알아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 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진한(辰韓) 사람들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야국이 창립됐던 경남 김해의 예안리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또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 등 신라 왕도 편두였다고 기록했다. 편두를 만드는 것은 중국인과는 구별되는 동이(東夷)족 사이에 매우 오랫동안 성행했던 풍습으로 간주된다.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는 대ㆍ소형 동복(cup cauldrons)이 발견된다.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동복은 정화 의식(purification rite)에서 고기를 제물로 바칠 때 쓰는 동제 용기(銅製用器)로, 대형 화분처럼 생겼다. 이러한 동복은 가야 시대 고분인 경남 김해의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동복은 가야 등의 원류가 북방 기마민족이라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훈족은 동복을 말 등에 싣고 다녔는데,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국보 91호) 토기에도 말 등에 동복을 싣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게다가 기마인물상의 주인공들도 모두 편두다.



    또한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은 한민족의 금관 등 머리 장식 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 형상[출자형(出字形)] 장식과 녹각(鹿角) 형상 장식이 많다. 이는 북방 민족에게도 나타나는 풍습으로, 북방 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 정착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무덤의 주인과 함께 사람들을 함께 매장하는 순장(殉葬)은 북방 유목민의 전형적인 습속인데, 가야 지방의 고분군에서 순장된 인골들이 발견되며 대릉원의 황남대총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다. 특히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1호분의 경우 우마(牛馬) 등의 머리를 베어 목곽 위에 놓은 형태가,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 민족의 동물 희생 행위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무덤의 부장품을 구성하는 각종 유물들은 도구의 분화와 생산력의 증가를 표현해 주는 증거로, 부장품의 양이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후장(厚葬)과 박장(薄葬)으로 나뉜다. 후장은 가야ㆍ신라 묘제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로, 북방 민족 사이에서 성행한 습속으로 간주한다.



    또한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입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 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들을 숭배 대상으로 삼는다. 가장 일반적인 토템 대상인 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가장 중요한 유사성으로는 훈족이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맥각궁은 만드는 데만 5년,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한민족 비장의 활이다. 고구려 무용총의 말 위에서 몸을 돌려 파르티안 기사법19)으로 사냥하는 무사의 활도 각궁이다.


    그렇다면 고대 한민족의 원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훈족과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인으로 갈라서게 됐을까. 이는 진 시황제 때부터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흉노의 흥망성쇠와 연계된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약 600년간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과 각축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끊임없이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흉노는 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기간에 걸쳐 혈투를 벌였고, 그러는 동안 부침을 겪으면서 민족이 동ㆍ서로 나뉘는데 서쪽으로 간 흉노족이 훈족으로 불린다.

     

    이를 ‘흉노의 서천(西遷)’이라 부른다. 흉노들이 정주한 지역에 370년경부터 혹독한 한파가 엄습하자, 그들은 보다 서쪽으로의 이동을 단행하며 이어서 375년에 게르만 야만족을 공격하는데, 이것이 결국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이다.20)

    한편 한반도 내에서 훈족과의 친연성이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가야와 신라 지방인데, 중국과의 전쟁 와중에 훈족의 지배 집단 중 일부가 동천(東遷)해서 한반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학자들은 흉노ㆍ동호ㆍ선비ㆍ오환 등 북방 기마민족들의 흥망이 가야와 신라의 건국시기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경상도 가야고분에서 전형적인 북방 기마 민족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 자체가 북방 기마 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했던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흉노에 포함됐던 한민족의 일파가 서천해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다른 일파가 동천해 가야ㆍ신라 등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만일 서쪽으로 간 세력이 훈족이 되고 동쪽으로 간 세력이 신라와 가야의 지배 민족이 됐다는 설(說)이 맞는다면, 트라키아와 신라의 연결 고리, 즉 황금 보검이 신라에서 발견될 수 있는 필요ㆍ충분 조건이 생기는 셈이다.



    기번의 서로마 멸망 이야기는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박진감과 흥미를 유발한다. 특히 제1기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의 요인으로 게르만, 훈, 흉노 등 야만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들은 근래의 연구에 의해 한민족과도 깊게 연계되고 있어 더욱 중요성을 부여받고 있음을 앞에서 설명했다. 사실 훈, 흉노, 한민족이 친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고대사를 다루는 퍼즐을 완벽하게 맞춘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하지만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이를 찾아보는 것도 즐거움이 될 것이다.

     

     

    각주

    1) 황제를 뜻함.
    2) 갈리아(Gallia): 고대 유럽의 켈트인이 기원전 6세기부터 살던 지역으로, 현 프랑스 지역 등을 포함했던 지방.
    3) 번병(confederates): 황제에게 봉사하는 군대.
    4) 황제 자리를 의미함.
    5) 스키리(Sciri)족: 훈족의 일파로 추정됨.
    6) 오도아케르(Odoacer, 433∼493): 훈족의 일파로 추정되는 스키타이족 출신.
    7) 플라켄티아(Placentia): 오늘날 이탈리아의 피아첸차(Piacenza).
    8) 공식적으로 동로마가 서로마를 합병했지만, 동로마는 실제적으로 서로마 지역을 통치하지 않았으므로 합병에 관한 것은 일종의 에피소드로 간주된다. 또한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샤를마뉴가 황제로 대관(戴冠)되어, 이를 근거로 서유럽이 동로마의 영향에서 완전히 독립한 ‘서로마제국의 부활’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로마제국의 정의에 관한 문제는 엄밀한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학자들의 평가에 따라 달라진다.
    9) ≪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김영진 역, 대광서림, 2007.
    10) 기번의 동로마사가 다소 추상적인 서술로 일관된 것은, 기번이 원천적으로 동양적 황제를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11) ≪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황건 역, 까치, 1991.
    12) 이신론: 세계를 신이 창조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신을 세상일에 관여하거나 제시하는 그런 인격적 존재로는 생각지 않고, 세계는 독자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종교론이다. 이신론은 기적이나 계시의 존재를 부정한다.
    13) 앞에 든 책.
    14) 흉노: 중국의 이민족인 오호(五胡) 가운데 진(秦)나라ㆍ한(漢)나라 때에 몽골 고원에서 활약하던 기마민족. 기원전 3세기 말에 묵돌 선우가 모든 부족을 통일해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 국가를 세웠으며, 이 국가는 최전성기에 중국 영토의 세 배에 달했던 거대 제국이었다.
    15) 누금(鏤金): 금에 무늬를 새김.
    16) 판노니아(Pannonia): 다뉴브 강 중류 우측의 헝가리 분지(盆地) 지역으로, 현재의 베오그라드를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를 포함.
    17) ≪로마 문화 왕국, 신라≫, 요시미즈 쓰네오,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2.
    18) <키스트(KIST) 이종호 박사의 색다른 해석 “그리스ㆍ켈트 특유의 무늬 있어”>, 유석재, 조선일보, 2009.
    19) 파르티안 기사법: 말을 질주시키면서 뒤로 몸을 틀어 화살을 쏘는 행동을 의미한다.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활을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이 높다. 이 기술을 습득한 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중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20)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아침, 2007;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 이종호, 백산자료원, 2003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31059

    고전해설ZIP,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9, 지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