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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자료 : 상생출판 환단고기 역주

 

고조선의 정치에서 가장 큰 특징인 삼한관경제는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삼성기> <단군세기> <태백일사>에서 일관되게 전하는 것으로,

고조선 역사와 문화의 핵심을 헤아리는 결정적이고 중대한 열쇠이다.

 

관경제에 대한 이해 없이는 고조선의 영토 범위, 여러 도읍지, 복잡한 대외 관계등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현 사학계가 고조선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가장 중대한 이유가 바로 신교 삼신문화에 근거한
삼한관경제에 대한 인식 부족에 있다.

 

고조선의 강역

 

고조선은 그 영토가 동쪽으로는 한반도의 동해에 미치고, 북쪽으로는 흑룡강을 지나 시베리아까지,
남쪽으로는 큐슈와 일본 본토까지, 서쪽으로는 몽고와 바이칼호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이러한 고조선을 고려, 조선의 사대주의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반도 북부의 소국으로 줄여 놓았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 몇 개만 고증해 보아도 그 진실을 쉽게 드러난다.

 

제위 67년 단군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보내어 9년 대홍수를 겪고 있던 중국에 '오행의 원리로 물을
다스리는 법' 을 전하여 요순정권을 구해주었다.

 

그때 중국과의 국경을 살펴,유주와 영주를 고조선 땅으로 영입하였다.
두 곳은 오늘날의 하북성과 요령성 일대이다.

 

<위서> <지형지>에 따르면 영주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동쪽에 있었다.
중국의 동쪽 끝이면 바로 고조선의 서쪽 끝이다. 고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중국 대륙까지 뻗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3세 흘달단군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을 정벌할 때 빈과 기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빈과 기는 현재의 섬서성에 위치하는데 주나라가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이때 고조선 군사와 낙랑 군사가 합세하였다고 하는데, 이 낙랑은 과연 무엇인가?
낙랑은 이미 배달의 태호 복희씨 때부터 있었던 지명으로 지금의 하북성, 요령성 일대 지역이다.


고조선의 낙랑은 23세 아홀단군 때 낙랑홀이라는 성으로 <단군세기>에서 다시 나타난다.

한편 낙랑은 하북성 인근에 있었던 고조선의 제후국 이름이었다.


BCE 300년 경 연나라가 번조선을 침입해 와 만번한을 새로운 국경으로 정하였다.
<사기> <위략> <삼국지> <위서동이전> 등의 중국 사서도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 사가들은 "고조선의 서쪽 땅 2천여 리를 빼앗았다" 는 구절을 더하였다.
만번한은 만현과 번한현을 합친 말로서, 만현은 지금의 요령성 개주시, 번한현은 그 인근의 새성시이다.

 

연나라에게 2천 리를 빼앗겨 줄어든 강역의 새 국경이 요동반도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원 국경은 어디였는가?

 

고조선의 위치를 처음 언급한 <산해경> 과 <전국책> <설원> <수경주> 등의 기록으로 볼 때,
지금의 난하가 고조선의 국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0세기 후반 요서 지역에서 중요한 고고학 발굴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하가점문화이다.
하가점은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의 한 촌락으로, 건조한 기후 때문에 유적과 유물이 빗물에 유실되지 않고
시대별로 층층이 잘 보존된 곳이다.

 

그 상충에서는 유목민 문화가 나타났고, 하층에서는 BCE 2400~ 1500년에 걸친 농경집단의
청동기 문화가 나타났다.

 

하층에서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문헌 기록으로 보나 유물로 보나,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드넓은 동북아시아의 대국이었다.

 

송호정 등 일부 학자들은 당시에 이런 제국이 존재할 수 없다고 단정하지만 역사적으로
기마민족 국가는 농경민족 국가보다 훨씬 광대한 영토를 가졌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말의 질주 속도는 시속 60킬로미터가 넘으며, 실제로 13세기 몽골 기마군단은 유럽에서 하루
100킬로 이상을 진군하였다.

 

고조선은 기마민족적 요소를 가진 나라였기 때문에 동북아의 광대한 강역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었다.

 

고조선의 대외관계

 

고조선과 당시 중국 왕조들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단군세기>는 고조선이 초대 단군 때부터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조선의 강역을 논하면서 잠시 소개하였듯이, 순임금 때 중국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대홍수를 당하였다.


그 전에 조조선의 도움으로 보위에 오른 순은 9년 동안 계속된 물난리도 고조선의 도움으로 해결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순은 정치적으로 고조선에 더욱 예속되었다.

 

고조선은 회수와 태산 지역의 제후들을 평정하고 그곳에 설치한 분조를 순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고,
현 산동성 교남시의 낭야성에 감우소(우순의 정치를 감독하는곳)를 설치하여
순으로부터 분조에 관한 일을 보고받았다.

 

이로 볼 떄, <서경>의 "사근동후"는 순임금이 동방의 천자를 알현하였다' 고 해석된다.
우가 세운 하나라(BCE 2205~1766)도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우는 원래 아버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순임금에게 처형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치수사업을 맡아보던 관리였다.

 

순을 대신하여 참석한 도산회에서 그는 고조선의 태자 부루에게 오행치수법이 적힌 금간옥첩을 받았다.
이 비법으로 홍수를 해결하고 인심을 얻은 그는 순의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를 열었다.

하나라는 마지막 군주 걸에 이르기까지 내내 고조선을 상국으로 모셨다.


하나라에서 상나라로 중원의 왕조가 교체되는 데도 고조선의 힘이 작용하였다.

상나라의 초대 임금인 탕이 하임금 폭군 걸을 정벌하고자 하였을 때, 13세흘달단군이
처음에는 걸을 지원하였으나 걸의 포악한 정치가 개선되지 않자 결국 탕의 손을 들어주었다.

상나라는 동북방을 존숭하였다.


그래서 상나라 말기의 도읍지였던 하남성 안양시 은허유적의 궁전,성벽,무덤 등은 모두 동북방을 향하고 있다.
상나라의 동북방에는 고조선이 위치하고 있었다.

 

고조선을 문화의 조국으로 받들던 상나라는 12대 하단갑 때부터 조공을 바치지않고,
심지어 22대 무정에 이르서서는 급기야 고조선의 변방을 침범하였다.

이에 21세 소태단군과 22세 색불루단군이 상나라를 쳐서 대파하였다.
패전을 거듭하던 상나라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결국 멸망하였다.

 

상나라 다음, 550년 동안 중원을 지배한 주나라는 일반적으로 한족이 일으킨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창건자 문왕과 무왕은 그들의 시조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이족 출신이다.

 

상나라의 군대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던 주나라가 창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동이족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나라 건국을 도운 동이족,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강태공이다.
무왕이 나중에 강태공을 산동반도의 제나라에 봉한 것도, 동이족 출신인 그를 주 왕실에
비협조적인 그 지역 동이족을 다스릴 적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문왕과 무왕 이후 주나라는 앞선 왕조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에 조공과 방물을 바쳐 예를 표시하였다.

 

요컨데 고조선은 동북아의 천자국이었으며,

하.상.주의 중국 3왕조는 모두 고조선의 정치적 지배를 받았다.

 

<환단고기 역주 94~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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