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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북방 민족들 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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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자료 : 상생출판 환단고기 역주

 

고조선과 흉노족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북방 민족들간의 관계를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도 있다.
3세 가륵단군 6년(BCE,2177)에 "임금께서 열양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둬놓았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에 나오는 약수는 오르도스 지방. 즉 현재의 감숙성 서북부에 위치한 강으로
바로 흉노의 근거지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단군세기>의 기록은 고대 동아시아 역사의 주역 가운데 하나로서 중국 북방의 초원지대를
호령했던 흉노의 시조가 바로 고조선 사람이었음을 밝혀준다.

 

흉노는 일찍이 음산과 오르도스 일대에서 유목을 하여 생활하였는데 그 우두머리를 선우라고 하였다.
흉노는 한나라 초기 묵특선우(BCE,209~174)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의 대유목제국을 세웠다.

 

묵특선우는 고조선처럼 제국을 셋으로 나눠 통치하는 신교 삼신문화의 체제를 도입하였다.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우현왕이, 서쪽은 좌현왕이 통치하였다.

 

흉노의 선우는 자신을 '탱리고도 선우'라고 하였는데, 탱리는 '하늘'을 뜻하는
흉노어 '텡그리'의 음역이고, '고도'는 아들을 의미한다.
즉 자신을 천자로 내세운 것이다.

 

흉노는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조상을 숭배하였으며, 일 년에 세 번 천제를 지냈다.

중국사에서 흉노는 4세기 전국시대에 처음 역사 기록에 등장한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흉노는 틈만 있으면 전국시대 나라인 연, 조, 진나라를 침략하던 골칫거리였다.

이 세 나라는 모두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이것이 만리장성의 기원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흉노를 공격하였지만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진에 이어 등장한 유방의 한나라도 흉노의 공격으로 시달렸을 뿐, 흉노 제압에는 실패하였다.

 

한조고 유방의 경우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가까스로 뇌물을 주고 빠져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여자와 공납을 보내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한 무제 때 와서는 다시 흉노와의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이 전쟁은 40년간 계속되었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고 그 곳에 군현을 설치하려 한 것도 흉노를 견제하기 위했서였다.
위만조선과 북부여가 흉노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 때 한국사와 연관하여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흉노 휴도왕의 아들이 그 모친과 함께 한나라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된 것이다.

그는 왕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후에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으로 인해 한무제의 눈에 띄어
황제의 측근이 되었다.

 

이 사람이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제) '투후'로 봉해졌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이다.

그 후손들은 계속 지위가 높아져 공주(원제의 비 효원공주)도 배출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왕망도 김일제의 고손이다.

 

김일제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면서 이들도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그래서 흉노의 자손인 이들은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비문과 중국 시안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등은 신라 김씨의 조상이 김일제임을 밝혀주고 있다.

중국 사서 기록에 의하면 소호금천씨의 후예인 김일제는 한무제로부터 김씨 성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1세기 초 한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 후손들은 신라와 가야로 와서 왕권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가야의 유물들 중에는 기마민족의 유적들이 대거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들 가운데 중요한 것이 동복이다.


청동제 솥인 동복은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말에 싣고 다니던 물건으로서
유럽의 훈족 루트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가야를 세운 기마민족은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
흉노가 한반도와 일본으로만 이동한 것은 아니다.
흉노는 AD 48년경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 둘로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고비사막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의 보호를 받고 북흉노가 초원을 호령하는 사태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흉노는 한제국과 남흉노 연합세력의 압박을 받는 한편
초원 동부지역에서 흥기하기 시작한 선비족의 공격을 받으면서 약화되어, 91년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의 일리강 유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흉노는 그곳을 근거로 인근 국가들을 지해하기도 했지만 결국 몰골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경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 4세기 중반 갑자기 '훈'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훈족이 처음으로 유럽에 나타난 것은 370년경 흑해 북부였다.
이들은 볼가강을 건너 알란족을 공격하고 알란족과 함께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 대륙에서 민족이동의 대물결을 초래하였다.

 

공포에 질려 도주한 게르만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몰려들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게르만 족의 이동은 서양 역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가져온 사건으로 평가된다.
훈족은 이 시기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유럽 여러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훈족은 아틸라 대왕(395~453)하에서 유럽 일대의 거대한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를 훈제국이라 부르는데 우랄 산록으로부터 라인강, 다뉴브 강, 발틱해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고조선과 돌궐족

 

<단군세기>에는 흉노의 시조에 대한 언급 뿐 아니라 투르크계인 '강거'의 기록도 나온다.
'강거'는 흉노의 서쪽에 자리잡은 유목민으로서 <사기>에도 나오는 족속이다.

가륵단군 8년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군이 지백특에서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백특은 티베트를 가리킨다. 18세 단군 때에는 지백특 사람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티베트 인근에까지 뻗었음을 시사해주는 간접적인 증거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6세기 중반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는 만주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이 출현했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스스로를 '튀르크'라고 불렀고,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오늘날 터키라는 나라의 이름도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튀르크'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돌궐제국은 기원후 1세기 중반경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의 건국은 553년에 '투멘'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유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일릭카간'이라는 칭호를 갖고 즉위하였다고 한다.

 

6세기 중반 몽골리아를 장악한 돌궐은 곧바로 대외원정에 나서기 시작한다.
제2 대 카간은 서쪽으로는 헤프탈을 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접경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거란족을 복속시켰으면, 북으로는 바이칼호에 이르고,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부.북제로 나뉘어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이 두 나라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에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고 당태종이 대북방 강경책으로 선회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돌궐은 급속하게 쇠약해졌고,
결국 630년 태종과 북방의 또 다른 유목세력의 연합작전에 돌궐의 카간이 생포되고,
초원의 대제국은 일거에 무너져버렸다.

 

유라시아의 유목민은 졸지에 당제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돌궐인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만리장성 주변의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5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다가, 682년에는 쿠틀룩과 톤육쿡이라는
두 사람의 지도자가 이끄는 돌궐인이 고비사막을 넘어서 북방으로 갔고,
마침내 687년에는 자신들의 성산인 외튀캔 산지를 회복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건된 나라를 돌궐 제2제국이라 부르며, 당의 지배를 받기전, 즉 533년 부터
630년까지 존재했던 국가를 제 1제국이라 부른다.

 

쿠틀룩은 '일테리시 카간'이라는 칭호를 취하였는데 이는 '흩어진'백성을 모은 군주'라는 뜻이다.
그를 도운 건국공신 톤육쿡은 재상이 되었고 두 사람은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돌궐제국은 752년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지게 되고,
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위구르가 몽골의 모든 유목인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 이은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 후 돌궐의 후예들은 오랜 세월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몽골족이 세운 일한국의 세력권에서
유목생활을 하거나 이슬람의 노예, 용병으로 전전하다 975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이란 동북부를 중심으로
가즈나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후 이슬람 세력의 약화를 틈타 남으로 이동하여 바드다드를 점령하기도 하고,
소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비잔틴과 총돌하기도 한다.

 

이후 소아시아 반도 서부와 북부에 '베이'라고 칭해지던 수령이 다스리는 군소왕국을 건설한다.
이는 후일 오스만제국을 건설하는 오스만족의 터전이 된다.

 

마침내, 투르크족은 오스만 1세에 의해 1299년 돌궐의 제 3제국이란 할 수 있는 오스만투르크라는
독립 왕조를 세우게 되고, 1307년 룸 셀주크왕조를 멸망시키고 소아시아를 통합하게 된다.

돌궐제국의 후예는 지금의 터키공화국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선비족의 역사

 

북흉노가 91년경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버리자 그 자리를 채우고 들어온 것은 동쪽의 선비족이였다.
2세기 중반 단석괴라는 걸출한 인물의 출현으로 분산된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유목민의 전형적 군대편제방식인 좌익.중군.우익에 준하여

동부.중부.서부의 삼부체제로 재편하여 선비 제국을 건설하였다.

 

단석괴의 선비제국은 북으로는 바이칼호, 서로는 신장의 이리강, 동으로는 부여까지
7천 킬로미터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그가 사망한 뒤 혼란에 빠진 선비는 가비능이라는 인물에 의해 일시 세력을 회복하지만
235년 그가 암살당하자 선비연합체는 각 지역으로 분산. 할거하면서 대대적인 이동이 일어났고
일부는 남하하여 북중국으로 들어갔다.

 

3세기 말이 되면 화북 지역에 거주하는 호족의 숫자가 600만~700만 명에 이르게 되는데,
당시 한족이 1,00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유목민이 남하했는지 알 수 있다.

바로 이러란 민족대이동의 물결 속에 일부 유목민은 북중국이 아니라 한반도로 내려왔다.


그들 중 일부는 신라에 정착하였다.

4~5세기가 되면서 신라에서 갑자기 대형 적석목관분이 조영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기류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마구,커다란 솥인 동복,동물 양식의 버클, 아키나케스식 단검, 금관,
유리제품 등이 그러하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훈족의 출현으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규모의 민족이동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몽골족의 역사
<단군세기> 4세 오사구단군 조를 보면, 단군이 그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몽골족의 기원은 3천 년 전 주대의 동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환단고기>에 의하면 몽골족의 시조는 무려 4천 2백 년 전의 인물인 것이다.

동호는 하가점 상층부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전국시대 연나라와 접했던 동호는 여러 유목민족속들의 느슨한 연맹을 칭했는데
다수의 후국을 거느린 고조선이 이 동호일 가능성이 높다.

 

4세기경 동호는 매우 세력이 강했는데 연의 장군 진개가 동호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동호 역시 제련술과 궁술, 기마전투술이 뛰어나 진개는 그가 인질로 있는 동안 동호의 기술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연나라는 동호를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그런데 몽골 일대의 동호는 한대에 흉노의 묵돌 선우에게
패한 후 (BCE 209년)약화되었다. 그 후 동호라는 이름은 사서에서 사라지고 선비,오환으로 등장한다.

선비제국이 붕괴되면서 여러 부족들(탁발,모용,유연,거란,실위,)이 분립하였는데,
징기스칸의 선조는 실위족에 속한다,

 

모용씨는 5호 16국 시대의 전연,후연,서연,남연 등의 나라를 세웠다.
<단군세기>에는 30세 내휴단군 때 에는 흉노, 32세 추밀 단군 때에는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고조선이 여러 북방민족들과 맺은 다양한 군사적, 외교적 관계를<환단고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현재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나 고조선은 BCE 24세기 건국 초기부터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던 나라이다.

 

주류 사학계의 논리에 의하면 청동기 시대 이전인 BCE 2333년에는 국가가 있을 수 없다.
청동기 단계에 와서야 고대 국가가 출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없이 석기만으로도 고대국가가 건설되었으며, 4천 5백 년 전의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고,

후기 베다시대 (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소개한 하가점 하층문화의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납 성분이 많아 단단하지 못한 중국의 검들과는 다르다.

 

비등점이 서로 다른 청동과 아연을 합금하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청동기 수준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문명 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물이 있다.
BCE 4세기경에 만들어진 직경 21cm 안에 0.3m 간격으로 13,000개의 가는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여러꼭지 잔줄무늬 거울)이다.

 

선의 굵기가 머리카락 한 올에 불과한
이 청동 거울은 전 세계를 통틀어 오직 고조선 문화권에서만 발굴되었다.

고조선은 당시 동북아 문명의 주역으로서 고도의 청동 문명을 꽃피운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 97~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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