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국기는 녹색, 하양, 빨강의 세 가지 색으로 된 세로 삼색기(Il Tricolore)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쓰였던 삼색기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초록은 희망을, 하양은 신뢰를, 빨강은 사랑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 레푸블리카 이탈리아나[*], 문화어: 이딸리아, 음역어: 이태리(伊太利))은
남유럽의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의 두 섬 시칠리아 및 사르데냐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북쪽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또 주변 바다로는 동쪽의 아드리아 해, 남쪽 이오니아 해, 서쪽에 티레니아 해와 리구리아 해로 둘러싸여 있다.
이탈리아 영토 내에는 위요지 국가인 산 마리노와 바티칸 시국이 있으며,
스위스 영토에 이탈리아의 월경지인 캄피오네 디탈리아가 있다.
국토 면적은 301,338 km²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인구는 60,200,000여 명으로,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고, 전 세계 기준으로는 23위이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로마를 비롯하여, 밀라노, 나폴리, 제노바, 피렌체, 토리노, 베네치아 등이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로 알려진 이 땅은 에트루리아나 고대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문화와 민족의 요람이었다.
수도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며 수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로마가 몰락하자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과 동고트족 등 게르마니아 부족과 노르만족, 사라센 등 오랫동안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수 백년 뒤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유럽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르네상스가 탄생하였다.
로마가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수많은 왕국(사르데냐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등)과 도시국가들(베네치아 공화국 등)로 분열되었다가 1861년에 이르러서야 "리소르지멘토"라는 격변기를 겪으며 통일을 이루었다. 19세기 말부터 양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이탈리아는 식민지를 거느리게 되어 리비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에티오피아, 알바니아, 로도스 섬, 도데카니사 제도, 중국 톈진까지 지배하였다.[1] 원래 군주제 국가였으나(통일 이탈리아 왕국) 1946년에 공화정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57년 유럽 공동체(EC)의 창립 회원국이었으며, 1993년에 유럽 공동체는 유럽 연합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99년에 유로화를 채택하였다.
프랑크 왕국 =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된 로마를 공격, 멸망시킨후에 만든 게르만족들의 나라중 하나로써 게르만 민족들이 만든 나라중에서는 가장 강대국이었습니다. 프랑크왕국은 한창 번성하다가, 중간에 프랑크 왕국의 국왕의 힘을 능가하는 권력자 피핀(714~768)은 로마 교황청의 허락을 받고 국왕의 자리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서 프랑크왕국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카롤루스 대제(742~814)가 프랑크왕국을 매우 번창시킵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의 죽음 이후 9세기 중반에 자식들의 내부분열로 인해서 서프랑크, 동프랑크, 이탈리아로 나누어졌는데 현재 각각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고 있습니다.
동고트왕국의 시대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476년 로마 제국은 멸망되었다.
훈족이 무너지자 그 영역에 있던 동고트족은 테오도릭왕(474-526)을 수장으로 독립한다.
그는 동로마 비쟌틴 황제의 명으로 이탈리아 총독이 되고 488년이래 3차례 원정끝에
490년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오도아케르 정권을 붕괴시킨다.
따라서 493년 이탈리아에 동고트왕국이 건설되었고, 이후 507-26년 서고트왕국을 정벌하였고
이탈리아 주변의 모든 영역을 평정하였다. 테오도릭왕은 비쟌틴에서 교육을 받은 지혜로운 왕으로써
로마문화의 유산을 계승하는데 노력하였다.
그의 통치와 행정체계를 위한 명령은 테오도릭 법전으로 성문화되었다.
또한 그의 정권은 게르만과의 융합적인 정책과 로마의 전통을 대표적으로 계승한다는 2중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여 로마문화의 부흥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게르만족과의 편의적 결혼정책의 파탄과 로마교황과의 불화등으로 정국은 불안정해지고
개혁적 정책수행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왕의 죽음 (526)은 이탈리아반도를 혼란에 빠트렷다.
한편 비쟌틴의 동로마제국에서는 가장 위대한 유스티아누스황제(527-65)가 등극하여 이탈리아와의 동고트전쟁(535-53)을 수행하고 동고트족을 반도에서 몰아내었다, 이후 반달왕국도 534년 멸망시켰다. 따라서 이탈리아 반도는 황폐화되었고, 고전문화 부흥의 꽃도 시들어 버렸다.
이후 8세기까지 이탈리아는 로마적인 전통과 게르만의 야만적인 문화가 혼제하고 융합되는 대혼란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즉 로마문화는 하향평준화되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결국 고대사회의 버팀목들은 점진적으로 붕괴되여갔다. 로마의 Latifundium 대토지사유제도와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등은 사라지고 농촌중심의 자연경제체제로 전환되고 지방분권적 요인이 성장되여 모든 도시와 지방은 점진적으로 고립되어 갔다.
*훈족:
카스피해의북쪽과 동쪽 초원 지대에 살던 유목 민족.
4세기 중엽부터 서쪽으로 이동하여 흑해 북쪽 기슭에 사는 동고트족을 무찌르고,
이어 다뉴브강 하류 유역의 서고트족을 압박하여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원인이 되었다.
5세기 중엽에 가장 세력을 떨쳐 아틸라의 지휘 아래 서쪽은 라인강에서 동쪽은 카스피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453년 아틸라가 죽은 후 왕자들의 분열과 게르만 여러 부족의 반란으로
훈 제국은 무너지고 흑해 연안으로 가서, 다른 민족과 혼혈하고 동화됨으로써 민족의 전통이 사라져 버렸다.
*동고트트족:
게르만인에속하는 고트족의 한 분파. 기원전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국경선이던 라인강과 다뉴브강의 북쪽에서 여러 부족이 갈라져 살고 있었다. 아직 원시적인 생활을 하던 그들은, 식량이나 그 밖의 물자를 얻기 위하여
자주 로마의 영토 안으로 침입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그들을 막는 데 애를 먹었다.
그들 중 하나인 고트족은 1세기 무렵 비스와강의 하류 지역에 정착하였고, 3세기 말에 이르러 한 무리는 다뉴브강 하류 지역으로, 그리고 또 한 무리는 흑해 북서 해안으로 이동하여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분리되었다. 그들 역시 자주 로마의 영토 안으로 침입하였으며, 그 중 동고트족은 돈강(고대의 타나이스강)에서 드네스트르강(고대의 티라스강), 그리고 흑해에서 프리퍄티 습지대인 벨로루시 남부 지역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이들은 4세기 후반 헤르만릭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서고트 이하 많은 부족을 정복하여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370년경 중앙 아시아로부터 밀려온 유목 민족인 훈족에게 정복되었고,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 헤르만릭 왕은 노년의 나이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이 후 계속되는 훈족의 공격에 쫓긴 게르만의 한 부족이 다뉴브강을 건너 로마 영토로 침입하자, 이를 계기로 다른 게르만 부족들도 잇달아 로마 영내로 밀려 들어와서 곳곳에 그들의 왕국을 세웠다. 이 같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유럽 세계는 암흑 속으로 빠져 들었으며, 서로마 제국도 이 혼란의 시기인 47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동고트족은 훈족에게 패배한 후 약 80여 년 동안 역사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그 후 로마의 연합군으로 다뉴브강 중류 파노니아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족들이 중부 유럽으로 이주한 뒤에도 작은 무리가 크림 반도에 남아 있으면서 중세 시대 초기까지 종족의 정체성을 보존했다. 그러다가 455년 아틸라의 사망으로 훈 제국이 멸망하자 독립하여 파노니아(지금의 헝가리) 지방에 이동, 정착하였으며, 이 무렵부터 아마라 가문의 왕권이 확립되었다.
세력 확장 시기에 아마라 가문의 왕가 출신인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부족민을 거느리고 483년에 로마의 영토인 다키아와 모에시아를 침공하였으며, 488년에는 판노니아를 거쳐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오도아케르를 격파하고 493년까지 전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라벤나를 수도로 삼아 동고트 왕국을 세웠다. 테오도리쿠스는 로마 문화를 받아 들이기 위해 카시오도루스, 보에티우스 등의 로마인을 등용하여 로마계 주민과의 융화에 노력하여 번영을 이룩했다.
서고트 왕국을 원조하기도 하면서 한때 게르만계의 모든 부족 국가의 패권을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고트족은 테오도리쿠스 왕의 만년에 이르러 그들의 아리우스파 신앙과 로마계 주민의 가톨릭 신앙의 대립이 심각해져 교황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러다가 테오도리쿠스가 죽은 후 테오다하드 이후의 왕위 상속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다. 이 때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 내분을 계기로 535년에 간섭 전쟁을 일으켜 동고트 왕국을 침공했다.
전쟁은 거의 20여 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 결과 이탈리아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동고트족 역시 토틸라를 왕으로 세우고 격렬하게 대항하였으나, 끝내는 555년 비잔틴 제국에게 멸망당하였다. 현재 비잔틴 제국에게 멸망당한 고트족에 대한 기록 중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554년 이전에 이탈리아어로 씌어진 것들이다.
프랑크왕국의 시대
6세기 말부터 엘베강 하류에 정착했던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의 북부지역에 침입하여 롬바르디아(Lombardia)지역을 정복하였다. 이들세력은 실제로 로마 교황에게는 커다란 위협적이었고, 교황령의 재산과 영토를 유린하였다. 따라서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와 후계자들은 수차례 프랑크왕국의 도움을 청하였다. 실질적으로 프랑크왕국이 메로빙가에서 카로링가로 교체되는 주요한 배경은 교황과 롬바르디아문제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롬바르드 세력은 751년 카로링조의 성립과 더불어 교황을 보호하는 군주의 자격으로 점진적으로 약화되었고,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동로마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칼)데제을 바티칸에서 로마제국의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북부이탈이아는 프랑크왕국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이탈리아의 역사는 프랑크왕국의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843년 베르덩 분할조약에 따라 왕국이 지금의 독일,프랑스와 이탈리아지역으로 나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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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유럽 이탈리아반도에 있는 공화국.
정식 국호는 이탈리아공화국(Republica Italiana, Italian Republic)이며, 수도는 로마(Rome)이다.
면적 30만1223㎢, 인구 5740만 명(1988년)이며, 인구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인이다.
언어는 이탈리아어이며, 종교는 99%가 로마 카톨릭을 신봉한다.
기후는 알프스와 접한 북부 일부 지역은 겨울에 대륙성기후를 보이나 그 밖의 대부분 지역은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를 보인다.
이탈리아의 역사는 기원전 7세기경 이 지역에 살았던
그리스인이나 에트루리아(Etruria)인의 세계까지 올라가지만,
로마에 의한 역사는 이탈리아반도의 통일 시기인 기원전 270년경부터이다.
고대 로마제국은 대제국을 형성하면서 번영을 누렸으나, 395년 동서로 분열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의 멸망에 이어 476년 서로마제국도 멸망하였다.
그 뒤 중세 교황시대에는 동방무역으로 여러 도시가 번영했으나, ‘신대륙의 발견’ 이후
16세기부터는 주위의 여러 세력에 의해 반도가 분열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침체되었다.
그 후 19세기 초엽에 분열되었던 도시국가들이 사르디니아(Sardinia) 왕국에 병합되면서 통일운동이
일어났으며, 1860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고, 1871년 수도를 로마로 옮기게 되었다.
(1) 역사적인 관계
이탈리아는 비교적 일찍부터 동양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마르코 폴로(Polo,M.)에 의하여 고려(Kauli)라는 이름으로 우리 나라가 이탈리아에 소개된 이후 이탈리아는 우리 나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통해 조선을 알게 된 것은 16세기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두 나라는 중국을 매개체로 피상적으로 서로의 처지를 파악하는 정도였다.
두 나라의 관계에서 마테오 리치(Ricci,M.)는 중요한 인물인데, 그를 통하여 이탈리아는 조선을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조선은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접하였다. 서학이니 실학이니 하는 사상이 조선에 이입됨으로써 당시의 지성사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하였다. 실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나 가릴 것 없이 리치를 통한 예수회의 삶과 서양의 과학사상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탈리아와 조선이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이다. 1866년에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위하여 극동에 파견되었던 아르미뇬(Armignon) 선장에 의해 준공식적인 접근이 시도되었다. 아르미뇬이 타고 왔던 마젠타호는 우리 나라 배와 우연히 만나 서로 친선을 약속하고 선물을 교환하였다.
아르미뇬은 귀국보고서에서 조선의 배가 아주 청결했으며, 조선의 인삼이 지닌 마력이 대단하다고 적었다. 아울러 그는 조선인들이 천부적으로 자존심이 강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문을 닫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자기들의 충고나 상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와 조선이 정부 차원에서 직접적인 교섭을 시도한 것은 1880년 6월에 사보이아(Savoia)라는 제노바 출신 공작에 의해서이다. 피사니호(Pisani號)의 선장으로서, 그의 임무는 두 나라 사이의 통상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조선정부와의 접촉이었다. 그는 부산과 원산을 통해 조선 정부와 계속적으로 교류할 의사를 밝혔으나 당시의 강한 쇄국정책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그 뒤 1878년에 제주도 근해에서 상선인 비앙카 페르리카호가 조난을 당하여 산토로(Santoro)라는 선원 한 사람이 조선인에 의해 구조되자, 사보이아는 조선 정부의 친절에 보답한다는 구실로 다시금 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은자의 나라로만 알려지던 조선은 1882년(고종 19) 미국과, 1883년 독일과 상호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마침내 굳게 닫고 있던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1884년 5월 순양함 크리스토포로 콜롬보호(Cristoforo Colombo號)를 파견하여 관계 수립을 서둘렀다.
북경(北京)에 주재하던 데 루카(De Luca) 공사가 최초로 파견되어 조선과 공식적인 접촉을 하였다. 조선에서는 김병시(金炳始)에게 루카와 회담하도록 하여, 1884년 6월 26일 우호·통상 및 항해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은 이탈리아를 통하여 쇠퇴해 가는 국권을 재정립시키려고 노력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이탈리아는 조선으로부터 광산채굴권을 얻으려고 하였다. 광산채굴권은 몇 차례의 어려운 고비를 넘긴 뒤에야 허가되었다. 외교관계가 이루어지자 서울에 상주하던 외교관들에 의해 조선에 관한 정보가 이탈리아에 직접 전해졌고, 그에 따라 관심도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조선의 역사·풍습·지리·경제생활·언어·전설·민담 등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소개한 노첸티니(Nocentini,L.)의 업적은 오늘의 학계에서도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하여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조선과 이탈리아의 관계도 제2차세계대전이 종료될 때까지 두절되고 말았다.
특히, 예수회에 소속되어 있던 고메스(Gomez,P.)·프로에(Froe,L.) 등이나 마테오 리치·마르티니(Martini,M.)의 보고서를 통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산발적인 정보를 얻어 오다가 종교적인 박해가 심해지면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소개 책자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한·이교섭사소고(허인, 한국외국어대학교, 1984)
이태리개황(외무부, 1985)
I primi contatti a livello culturale e diplomatico fra Corea e Italia(Santangelo, P., 한국외국어대학교, 1984)
Studi e publicazioni sulla Corea in Italia(Anselmo, Santangelo, Tamburello, 1982)
Italia e Corea(Bertuccioli,G., in Affari Esteri, 1984. )
Korean Studies in Italy(Santangelo,P., 제5회 국제학술회의 세계한국학대회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