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인종분포

56개 민족입니다. 그중 소수민족이 55개국이며

중국 13억 인구중 약93%가 한족이고
그다음 몽골족,만주족,위구르족,쫭족(모두2000만이상) 등등 순서입니다.
조선족은 약400만좌우입니다.

 

그리고 만주족은 여진족의 후손입니다.

비록 청국이 중국을 통치했지만 그당시에도 한족이 주류였습니다.
현재 만주족은 자신의 언어,문화도 거의 모두 상실했습니다.


청국이 중국을 다스리면서 대부분 만주족이 한족에 융합했고
만주족은 현재 언어도 자신의 만주어가 아닌 중국어를 대부분 사용합니다.
거의 한족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 중국영토는 현재영토보다 엄청나게 더 컸습니다.
아편전쟁후 서방열강들에게 수많은 영토를 빼앗겼습니다.

 

그중 시베리아부근의 많은 영토와 현 러시아의 연해주,
사하린섬,중앙아시아부근의 많은 영토들을 러시아에게 빼앗겼습니다.

 

홍콩도 영국에게,
대만은 일본에게 뺴앗기고 현재의 몽골은 러시아에 의해서 빼앗긴다음 독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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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중국사상의 근저에는 항상 하늘에 대한 관념이 있는데,
하늘숭배의 기원에 대해서, 종래에는 농경생활과의 관련으로 설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근래는 문화인류학의 연구성과로,
하늘의 숭배는 본래 동아시아에서 중근동에 걸친 유목민족의 신앙에서 생겼다는 설이 유력해졌다.

 

이런 선을 따라서 생각하면, 기원전 12~기원전 11세기경 서북부에 진입해서
신왕조를 세운 주(周, 기원전 1050?~기원전 256)는 원래 유목부족이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에,
하늘의 신앙은 이 주나라의 부족이 중국에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 된다.
단, 주나라는 바로 농경생활로 이행했기 때문에, 하늘의 신도 농업신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의 하늘은 인격신으로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자인 왕조도 하늘의 의지대로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 무렵은 중국 또한 제정일치의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도 중기의 춘추시대(기원전770~기원전 453)가 되면,
하늘은 점차로 인격신의 성격이 희박해지며,
하늘은 <천도>라는 도ㆍ법칙으로 전화하여 비인격화가 진행했다.


결국에는 종교를 떠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공자가 선조숭배를 중시한 것은 모순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공자가 가족제도의 유지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선조숭배가 가진 현실적 기능이 필요 불가결 하다는 것을 인정한 결과이다.

 

원래 주나라 왕조는 일족을 제후로 봉하는 봉건제도 위에 성립하였기 때문에,
가족결합이 천하의 질서를 지지하는 원리가 되었다.
춘추시대가 되면 천자나 제후 상호간의 가족연대 의식이 희박해지고, 실력에 의한 항쟁이 격화되었다.

 

공자는 주초의 봉건제 정신으로의 복귀를 이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족도덕의 강화에 노력하는 한편,
힘에 의한 정치를 부정하고 도덕에 의한 정치를 강조했는데 이것이 유교의 근본정신이 된 것이다.

 

공자 직후에 전국의 제자백가 시대가 시작하는데 (기원전453~기원전 221) 제자백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계속된 약소국가의 흥망의 결과, 망국의 사대부나 선비가 실직하여 대량의 인텔리 양인이 발생했다.
그들은 재취직의 기회를 구해서 제후에게 자신의 이상을 유설했는데
소위 국가경영을 전문으로 하는 컨설턴트 무리인데 이것이 제자백가이다.

 

유가의 도덕정치설, 묵가의 겸애설, 법가의 법치설, 병가의 병법설,
도가의 무위자연설 등 주장하는 바는 다양하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사상이 일시에 나타난 것은 이후의 중국사에도
그 예가 없으며 거기에서는 전국의 무질서에 의한 사상의 자유가 있었다.

 

진ㆍ한시대진(기원전 221~기원전 207)은 겨우 15년간으로 끝났는데,
시황제는 후의 중국의 국가체제에 결정적인 각인을 남겼는데
그것은 주의 봉건제를 폐지해서 군현제를 수립한 것이다.

주의 봉건제에서는 제후는 물론, 그 가신인 사대부도 신분을 세습했다.


그런데 시황제는 일체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천하를 군과 현의 행정구로 나누고, 일대(一代)의 관리로 고쳤다.
이후의 중국은 20세기에 걸쳐서 관료제 국가의 체제를 유지했다.


이 체제가 중국의 사상이나 문화일반에 미친 영향의 심각함은 참으로 측량키 어렵다.

한(기원전 202~기원후 220)나라 왕조는 진의 탄압 정책이 인심을 잃은 것에 대한 반성으로,
초기 70여년간 자유방임 정책을 취했는데
그 때문에 이 시기에는 도가의 노장사상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노장은 무위자연을 이상으로 하는데, 정치적으로는 자유방임의 입장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도 무제 시대가 되면, 왕조의 기초도 다져지고,
적극정책의 필요성도 생겨났기 때문에, 노장에서 유가로의 전환이 행하여져서,
유학이 왕조 공인의 관학으로 정해졌다.

 

이후 역대 왕조는 이에 따라서 2000년에 걸쳐서 유교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동시에 무제는 시황제 이후의 군현제ㆍ관현제를 정비하고,
민간에서 유학의 교양을 갖춘 인물이 있으면 지방관의 추천을 통해서
이를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를 정했고 이로써
학문교양을 갖추고 있으면 어떤 사람이라도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관리가 되면 권력, 명예, 수입이 약속되기 때문에 그 매력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학문적 교양이 있는 자는 모두 관계에 집중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지식인 즉 관리, 관리 즉 지식인이라는 중국의 독특한 공식이 성립하였는데
중국사상에 정치색이 강한 것은 관리가 문화를 독점한 결과이다.
이 때문에 한대 400년의 문화는 정치색ㆍ유교색으로 채색되는 결과가 되었다.

 

육조시대한대가 정치ㆍ문화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이에 이은 육조 400년(3~6세기)은 철학ㆍ종교ㆍ문학ㆍ예술의 시대였다.


그 전환은 지식인의 성격 변화에 의한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한대 문화의 담당자였던 관리가 육조에 들어와서 귀족화한 것에 의한다.
한대의 관리의 신분은 일대에 그친 것이었으나,
후한의 중기 이후, 관리를 배출하는 가문이 고정화되는 경향이 나타나서,
결국에는 관리의 신분이 세습화하고, 귀족화되었다.

 

귀족 특징의 하나는 정치나 도덕에 대해서 냉담하며,
문학, 예술, 종교 등에 강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육조 문화는 바로 이런 특징을 가진 귀족문화였다.
이 변화는 먼저 노장사상의 전성으로 나타났다.

 

육조 초기, 일찍이 죽림칠현을 비롯한 노장 사상가가 배출되어
유교의 예를 무시한 행동을 취하고, 동지끼리 모여서 정담의 회합을 즐기는 풍조가 유행했다.
이 시대에는 유교의 『역경』과 『노자』, 『장자』를 합쳐서 삼현이라고 하고,
그 학문을 현학(玄學)이라고 하였는데,

 

지식인의 교양으로서는 유학보다는 현학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컸다.
또한 이와 함께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대에 비로소 불교가 지식인의 관심을 끌게 된 점이다.


그때 불교가 육조 지식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첫 번째 원인은
불교의 근본의인 <공(空)>이 노장의 <무(無)>에 통하는 점을 가지는 점,

두 번째는 종래의 중국에는 전혀 없었던 윤회설인, 삼세 보응설을 가져온 점이다.


여기에서는 두 번째 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인생이 현세만의 것이 아니라,
과거에 무한한 전생을 가지며,
사후에도 무한한 내세를 반복한다는 설은 그것만으로도 중국인에게는 경이로운 새로운 주장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전생의 행위의 선악이 현세의 화복을 가져오고,
현세의 행위가 내세의 존재양식을 결정한다는 삼세보응(三世報應)의 설은
종래 유교에서는 난문시 된 도덕과 행복의 일치의 문제에 훌륭한 해결점을 준 것이었기 때문에,
그 매력은 절대적이었다.

 

이 때문에 육조인은 여기에 바로 불교의 본의가 있다고 하고,
삼세보응설을 통해서 불교에 이끌렸는데
육조가 수ㆍ당과 함께 불교의 황금시대가 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불교 이외의 종교로는 후한 말의 오두미도(五斗米道)에 의해서
기초가 구축된 도교가 주로 서민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육조 지식인의 일부에서도 받아들여지게 되었는데 여기에도 육조인의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이 있다.

 

수ㆍ당시대수(581~619)ㆍ당(618~907 )의 지식인도 귀족적 관료라는 점은 육조와 변함없다.
이 때문에 수ㆍ당의 사상계도 근본적인 경향에서는 육조와 동일한 상태에 있었다.
단, 수ㆍ당에서는 불교의 우위가 더 한층 강하고, 그 규모도 더 한층 장대해졌다.
중국 특유의 종파 불교가 일제히 성립된 것도 그 표현이다.


이에 대해서 유학은 관학의 지위를 유지하면 서도 지식인의 생활원리로서 기능하는 힘이 부족하였다.

도교는 왕조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서 불교와 함께 융성했는데,
이 또한 지식인의 생활원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ㆍ당 지식인의 정신을 지지한 것은 불교이며,
문학ㆍ예술이었는데 여기에도 육조풍의 귀족의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단, 당의 중기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후에는 지식인 사이에서 위기의식이 싹트기 시작해서,
유교정신의 부흥의 필요성을 제창하는 자도 나타났는데
한유가 불교의 배척을 호소하고,
그 제자가 복성(復性)ㆍ주정(主靜)을 주장해서 송학의 선구가 된 것이 그 일례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태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불교는 당말 무종의 대규모 배불사건으로 재기불능할 정도로까지 타격을 받았는데,
선종과 정토교만이 융성을 계속 해서 다음의 송대에 계승되었다.

 

송대당말부터 오대 50년의 전란 사이에 세습귀족의 경제적 지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송대(960~1279) 이후의 지식인은 다시 한대풍의 일대만의 관리로 되돌아가고 정치적 관심을 되찾았다.

송대에는 지식인의 정치적 관심을 자극하는 문제가 산적했으며
송 일대는 끊임없이 북방 부족의 위협에 시달려, 북송은 결국 금에 멸망하고
강남으로 옮겨서 남송을 재건했는데,


그 남송 또한 금과의 끊임없는 긴장상태에 처해졌다.

지식인 사이에 개인 마음의 평안만을 구하는 불교 등에 의지할 수 없다는 반성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데
그것은 동시에 유교정신의 진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단, 유학이 불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항할 만한 철학이 필요하였다.
종래 유교의 철학은 약체였기 때문에 이를 보강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 요구에 응답해서 나타난 철학적 유학이 바로 송학이다.

 

그러나 그 철학은 유학에 내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노장이나 불교의 교리에서 보강할 필요성이 있었다.


특히 송대는 선종의 전성기로, 지식인의 정신에도 깊이 침투했다.

이 때문에 송학의 이론이 선종색을 띠고 있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송학은 이 철학은 어디까지나 정치ㆍ도덕의 실천의 원리로 한 것으로,
선종이 출가초속을 이상으로 한 것과는 그 입장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송학은 남송의 주희(주자)에 의해서 대성되었다.

주자학을 구성하는 개개의 요소는 이미 북송의 송학에서 준비된 것이 많으며,
주자의 독창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적은데,


이들을 논리적으로 정합하고 하나의 완결된 철학체계로 한 것은 주자학의 힘으로
그것은 철학, 정치, 역사, 과학을 포괄하는 장대한 학문체계였다.

이 주자학은 동시대인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는데,
곧바로 조정의 공인을 얻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한 때는 <이학의 금지>를 받기도 하였다.
그것이 관학인 된 것은 원대에 들어온 이후이다.


단 이 주자학은 불교의 천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주자학의 융성에 반비례해서 중국 불교는 송, 원, 명, 청으로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서 쇠퇴를 거듭했다.

동일한 현상은 조선왕조나 일본의 에도(江戶)시대에서도 볼 수 있다.


같은 남송에 주자학에 대립하는 사상가가 탄생했는데 그것은 주자와 동시대인인 육구연(상산)이다.
양자의 입장의 상위는 인간 마음의 견해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는데
주자는 인간의 마음은 그대로는 불완전 하며,
이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독서에 의해서 마음 밖의 이치를 구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육상산은 인간의 마음은 완전한 이치를 구비했다는 <심즉리(心卽理)>의 설을 주장하고,
독서 등에 의해서 외물의 이치를 추구하는 것은 근본을 잃고 끝으로 달리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육상산의 입장은 순수주관주의이며, 유심론인데 그 점에서 불심종(佛心宗)이라고 하는 선종에 가깝다.
이 육상산의 설도 적지 않게 지지자를 얻었으나,
결국 주자학의 융성에 압도되어서 화통이 끊어졌으며 그 재흥은 명의 왕수인 (양명)을 기다려야 했다.

 

원대원대(1260~1368)의 100년간은 몽고족의 정복왕조로,
중국의 전통문화를 무시하는 것이 많았으며, 강력한 무단정치를 하였다.
이 때문에 사상계도 침체하고 유학 또한 불진 상태에 있었다.
단, 4대의 인종이 중단되었던 과거를 부활하여 주자학을 관리등용의 조건으로 한 정은 주목된다.

 

이 제도는 그대로 명ㆍ청시대에도 계승되었는데 이는 당시
이미 주자학이 유학을 대표하는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라마교(티벳불교)가 원조에서 융성한 것이 유명한데,
그것은 궁정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일반 서민 사이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 보다도 신도교가 이 시대에 보급된 것이 사회적으로는 중요하다.
이 신도교는 원종에 앞선 금조, 즉 북송을 멸망시켜서 중국의 북반을 지배하고,
남송과 대립 병존한 여진족 왕조의 시대에 탄생했다.
금조 지배하의 화북지방은 전화로 인해서 민중의 생활은 황폐의 극에 이르렀다.
이 상황에 나타난 것이 왕중양을 교조로 하는 전진교나 태일교, 진대도교 등의 신도교이다.

 

이들 신도교에 공통되는 특징은 구도교의 연단(練丹)이나 불로장생을 주장하지 않고,
서민 생활의 밀접한 실천도덕에 중심을 둔 점에 있다. 동시에 상층의 지식계급에 대한 배려도 보이는데,
특히 전진교에서는 선종의 교의를 대폭으로 도입해서
견성(見性)을 위한 타좌(打坐), 즉 좌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삼교일치의 설을 주장해서, 유ㆍ불ㆍ도의 3교는 삼발이의 다리관계에 있다고 보고,
신자에게 『반야심경』, 『노자도덕경』, 『청정경』, 『효경』을 읽을 것을 권했다.
이 금대의 신도교, 특히 전진교는 원대에 들어오면서
그 극성기를 맞이하고, 라마교에 대항할 정도의 세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 기초가 안정됨에 따라서 과거의 혁신적 기풍을 잃고 결국에는
구 도교풍의 불로장생을 위한 연단술이나 무축적(巫祝的)인 제사도 부활하여,
결국에는 구도교와의 구별이 없어졌다.

명대명대(1368~1644)의 300년간은 중국인의 왕조를 잇고,
전체적으로는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발전이 현저하고,
이에 따라서 문화 또한 난숙의 극에 이르고, 결국에는 퇴폐의 징조조차 보이게 되었다.

이는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등의 소설ㆍ희곡류의 유행에서
단적으로 보이고 있으며 사상의 세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주자학은 과거를 통해서 관학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점차로 형해화해서 본래의 유교정신의 활력을 잃었다.


그 원인은 주자학이 인간의 지성ㆍ이성에 중점을 두고,
윤리적으로는 엄숙주의에 빠질 경향이 있었던 것에 의한다.

이성보다도 정의(情意)를 중시하는 명대인에게는
주자학의 이성주의에 대신하는 철학에 대한 대망이 있었고
거기에서 나타난 것이 왕수인(양명)의 철학이다.

 

양명학은 송의 육상산의 주관주의적 심학의 성격을 계승하고,
인간의 심성에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양지(良知)를
다한다는 <지양지(至良知)>를 학문수양의 목적으로 하였는데
그 지(知)는 시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지행합일>을 강조했다.

 

이 양명학의 입장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올바르다고 확신한 것이 진리이며,
그 진리는 곧바로 실행으로 이행한다고 하여 강력한 주관주의와 행동주의에 지지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반드시 학문 지식을 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간이직절(簡易直截)이다.

이것이 정의를 존중하는 명대 지석인의 공감을 얻는 동시에,
무학한 농민이나 상인의 일부에서도 지지자를 얻은 이유이다.

 

단, 그 강력한 주관주의로 인해서 좌우 어떤 방향을 취할지가 자유로,
양명학파에 서는 다양한 분극화가 진행되었다.

명이 청에게 멸망 했을 때, 절의를 지켜서 순교한 대유 유종주를 우파의 대표격으로 한다면,
좌파의 대표자는 이지(탁오)이다.

 

이탁오는 왕양명의 양지설을 발전시켜서 동심설을 주장하고,
자연의 동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동심은 사욕, 즉 세리(勢利, 지위재리)의 욕망을 포함하는 것이며,
성인(聖人)이라고 하여도 인간인 이상 사욕을 가지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성정(性情)대로 살면 좋은 것으로,
부자연한 도덕에 구속될 필요는 없으며 이런 이탁오의 본능적 자연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입장은 『장자』의 외편ㆍ잡편에 보이는 후기도가와 유사하고,
유학인 양명학의 범위에서도 일탈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탁오의 설은 명대의 난숙기의 풍조에 합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공명자를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수구파로부터의 공격도 심해서,
76세 때 관헌에서 붙잡혀서 옥중에서 자살하고, 그의 저작은 금서가 되었다.

이처럼 양명학에 좌우의 진폭이 큰 것은 그의 철저한 주관주의가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불교계에서는 송대부터 시작된
유ㆍ불ㆍ도 3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융합사상이 점차로 성행하는 동시에,
불교 내부의 제종사이에서도 현저해져, 선과 화엄, 선과 염불의 융합이 행하여졌다.

그중에서도 선과 염불의 쌍수는 가장 성행해서 염불선이 불교계의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명말의 불교계의 최후를 장식한 4대사(大師)는 모두 그것이며,
그중에서도 운서주굉이 그 대표자인데 청조에 들어와 불교라고 하면 염불선을 가리켰으며,
수ㆍ당 이후의 여러 종은 모두 모습을 감추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하며 오로지 일본만이 여러 종 병립의 형태를 남기고 있다.

 

청대청조(1616~1912)는 만주족이 세운 정복왕조인데,
원조와는 달리 중국민족의 유화를 도모하는 정책을 취했다.
특히 초기부터 중기까지의 강희ㆍ옹정ㆍ건융의 제왕은 문학을 좋아하는 군주로,
문화사업을 일으켜서 명대 이후의 관료지식인을 회유하는데 노력했다.


따라서 청대는 유학의 전성기의 하나가 되었는데,
그 유학의 내용은 송ㆍ명 시대와는 현저하게 달랐다.

주자학이 관학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한 것에는 변함없지만,
일반 지식인은 주자학이나 양명학의 철학을 공소(空疏)해서 내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여,
오로지 경전이나 사서의 실증적 연구에 임했다.

 

그래도 청조 고증학의 시조라고 하는 고염무나 황종희 등에는
명말의 주자학이나 양명학에 의거한 경세의 뜻이 보이는데,
그 후는 순수학술연구에 몰두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이 청조 고증학의 성과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반면에 사상적 내용이 결여되었다는 대상을 수반한다.

단, 이 사이에 고증학의 대가인 대진(戴震)이 주자학의 이성중심주의를 부정하고,
인간의 정성존중의 입장을 주장한 것이 이채를 띠고 있다.


만약 인간성의 존중이 근대사상의 특징의 하나라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근대의 맹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1840년의 아편전쟁, 51년의 태평천국의 난을 경험함으로써
대청제국도 내외양면의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사상계에도 변혁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먼저 유학의 세계에 나타났다.

건융ㆍ가경의 고증학의 전성기가 끝나는 동시에,
공자를 정치제도의 개혁논자로 보는 공양학(公羊學)이 나타나서 유력해졌는데
그 파에서는 청조 말기에 강유위가 나왔다.

 

그는 그 『대동서』에서 인류사회의 최후 도달점은
국가ㆍ계급ㆍ인종ㆍ남녀ㆍ가족의 구별이 없는 대동의 세상이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서양사상의 영향이 있다고는 하여도,
유가 경전의 『예기』 예운편을 중심으로 구성된 유토피아 사상이다.

 

그러나 강유위는 이상의 실현에는 매우 신중하여,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기준을 취하고,
현재의 정조를 입헌군주제로 고친다는 방향을 취했다.
이 때문에 혁명 분위기의 진전과 함께 그는 보수반동론자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유학에서 나온 자가 가진 숙명이다.

 

민국혁명(1911) 후, 원세개가 제정의 부활을 기도했을 때에도 유교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9년의 5ㆍ4운동시에 잡지 『신청년』에 의거한
진독수 등을 중심으로 격렬한 배공론(排孔論)이 전개되고,
가족제도의 호지를 도모하는 유교야말로 근대화의 적이며,
군주전제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여서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이후 우여곡절은 있었어도 모택동 정권의 확립과 함께 사상계는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었다.

 

출처: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