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공명의 출사표

 

 

천하사 일꾼의 길 

 

천하사를 하는 자는 먼저 망한 뒤에야 흥하고,
죽음에 들어가야 살길을 얻게 되느니라.

 
대장부 일을 도모함에 마땅히

마음을 크고 정대히 가져 ‘내가 죽어도 한번 해 보리라.’ 하고
목숨을 생각지 말아야 할지니
 
작은 일에 연연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일꾼이 일을 도모함에 무서워서 못하는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한 연고니라.

 
내 일을 하다가 곤란은 있을지언정 그릇 죽지는 아니하리라.
천하사 하려다가 좀 갇히는 것이야 무서울 것이 있느냐.
 
爲天下者는 不顧家事니
위천하자     불고가사

 

천하사를 하는 자는
집안일을 돌볼 수가 없나니 
제갈량(諸葛亮)이 성공치 못한 것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로 인함이니라.
 
수운가사에 ‘연포(連抱)한 좋은 남기 두어 자 썩었은들
양공(良工)은 불기(不棄)라도 그 말이 민망하다.

장인(匠人)이 불급(不及)하여 아니 보면 어찌하리.’라 하였나니 잘 알아 두라. 
 
<증산도 도전 8편 22장>

 

위의 성구말씀을 설명을 드리자면

상제님께서는 제갈량이 성공치 못하였던것은

바로 전장에 나가는 시점에서 출사표 내용에 집안을 염려하는 뽕나무 팔백그루를 논하였는데

여기에서 천지신명으로 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또한 천지신명이 응하지 아니하므로 해서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 실패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무릇 천하사를 하는자는 개인의 작은일에 연연하면 대사를 그르치는 법이다.

그래서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하면서 '모사재인'이요 '성사재천'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일을 꾸미는것은 사람이 하고 그 일을 이루게 하는것은 하늘 즉 신이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강태공의 육도삼략은

손자의 손자병법과는 비교 할 수 가 없으며,  무릇 깊은 병법이란 

인간의 인위적인 권모술수로만 승리한다는것은 진정한 병법을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천도(天道)를 바탕으로 하는

천하를 다스리는 병법이 아니면 잔머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인간과 더불어 병법을 펼치는 것이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신(神)이 들어야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도(神道)를 알아야 하는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통천문이란

하늘의 별자리를 보아서 이치를 깨우치는것도 있지만은 그 보다 더 핵심은 

눈에 보이는 껍데기 하늘이 아닌  진정한 참하늘의 내면인 신(神)의 존재에 통해야 함을  

철저하게 깨우쳐야 하는것이다.

 

이것은 병법 뿐만이 아니고  국가와 민족 그리고 역사, 철학, 종교, 학문등등

모든분야에 있어서 공부법은 먼저 체體라고 할 수 있는 신(神)의 존재부터 알고 공부 해 들어

가야 하는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한낱 멍청한 학술적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사가 말살되어 신의 개념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무덤을 파헤지면 나오는것 마다 제사문화요,천제문화다.

옛 사람들은 한결같이 신을 잘 모셔 왔던것이다. 그 신이란 다름이 아니고 사람이며,

사람이 죽으면 천지신명이 되는것이다.

 

사람은 육체를 가진 신이요, 신명이란 육체가 없는 영체로서의 신인것이다.

 

불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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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表)란?

고대에는 군주에게 헌언(獻言)하는 것은 모두 상서(上書)라고 하였으나
한대(漢代)에 와서는 장(章)․표(表)․주(奏)․의(議)로 분류하였다.
표는 전적으로 진정(陳情)에 관한 것만을 가리켰으나 후세에는 용도가 넓어져,
논간(論諫)․추천(推薦)․경하(慶賀)․위안(慰安)․진사(陳謝)․탄핵(彈劾) 등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형식을 중시하는 문체이지만
삼국(三國) 촉(蜀)나라 제갈 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
진(晉)나라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 등은 탁월한 내용으로 유명하다.


옛부터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고,
이밀의 진정표陳情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며
한유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을 읽고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우애를 모르는 자라고 했다.

 

 

제갈량은 최후의 전투를 하기 위해
오장원으로 출진할 때 이미 자신의 천수가 다했음을 알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하여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하는
자기의 정성이 하늘에 사무쳐 상제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수명도 연장되고 대업도 완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제갈량은 장막안을 정결히 하고 제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만약 칠일간 주등이 꺼지지 않는다면 그의 기도를 하늘이 받아들인 것이고
그의 수명은 열두 해가 연장될 것이다.

 

제갈량의 부하 장수인 강유는 사십구명의 장수들과 함께
장막 밖에서 제갈량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고 같이 정성을 드렸다.

이렇게 지극정성을 드린지 육일이 지났다.


이제 하루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마직막날 밤, 갑자기 진문 밖에서 함성이 일어나고 한 장수가 급히
위나라 군사의 침입을 알리려 장막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러다 그만 제단을 건드려 제구와 제물이 쓰러지고 주등이 꺼지고 말았다.
불행히도 제갈량의 기도를 하늘이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공명은 두 차례의 북정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오장원(五丈原)에서 길지 않은 생애 오십사년을 마감한다.

그는 죽음에 임해 다시 후주에게 표문을 올린다.


이 글에서 공명은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고 있다.

 

“끝으로 신의 집에는 뽕나무 팔백 그루와
박전 오십경(五十頃)이 있사와 자손의 의식은 넉넉하오나,


다만 신이 밖으로 나도는 동안에는 소용되는 바를 모두 관(官)에 바랐삽고
따로 모음이 있지 않사와 신이 죽는 날 안에 비단 한 조각,  밖으로 푼돈이 따로 없어

끝까지 폐하께 심려를 끼치게 되었음을 송구히 여기옵니다”

 

뽕나무와 밭은 그가 유비의 군사로 나가기 전에 일구어 가졌던 재산이다.
 <출사표 (出師表)> 제갈량 (諸葛亮)>


선제께서 창업을 반도 이루기 전에 중도에 승하하시고,
이제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우리 익주가 피폐하니,
이는 진실로 국가가 위급하여 존재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시위하는 신하들이 안에서 게을리하지 않고,
충성스럽고 뜻있는 군사들이 밖에서 몸을 잊고 있는 것은
선제의 특별한 대우를 추모하여 폐하에게 보답하고자 해서입니다. 

 

폐하께서는 진실로 들으시는 자세를 열고 펴시어
선제의 유덕을 빛내어 지사들의 사기를 키우실 것이요,
망령되이 스스로 자신을 하찮게 여겨 비유함에 본의를 잃어 충간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궁중과 부중이 모두 일체가 되어야 하니,
잘하는 사람을 승진시키고 잘못하는 사람을 벌주는 것을 달리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부정한 일을 저질러 죄과를 범한 자와
충선한 일을 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담당관에게 맡겨서 형벌과 상을 논하여
폐하의 공평하고 분명하신 다스림을 밝혀야 할 것이요,
편벽되고 사사로이 하여 궁중과 부중으로 하여금 법을 달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시중과 시랑인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은 모두 어질고 성실하여
뜻과 생각이 충성스럽고 순수합니다. 

 

이 때문에 선제께서 선발하시어 폐하에게 물려주셨으니,
어리석은 신은 생각하옵건대 궁중의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그들에게 자문하신 연후에 시행하시면 반드시 폐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넓히고
유익하게 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성행이 착하고 공평하며 군사를 잘 알아,
옛날 시험삼아 등용함에 선제께서 그를 '능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중의로 상총을 천거하여 도독으로 삼았으니,

어리석은 신은 생각하옵건대 영중의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에게 자문하신다면 반드시 행진이 화목하고 인물의 우열이 제자리를 얻을 것입니다.

 

현신을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함은 이는 선한이 융성했던 이유요,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함은 이는 후한이 기울고 패망한 원인입니다. 

 

선제께서 생존해 계실 때에 매양 신과 이 일을 논할 적마다
일찍이 환제와 영제에 대하여 탄식하고 통한으로 여기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시중상서인 진진과 장사인 장예와 참군인 장완은 모두 곧고 성실하여 충절에 죽을 수 있는 신하들이오니,
원컨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하시고 신임하시면
한나라 왕실의 융성을 날짜를 꼽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평민으로서 몸소 남양 땅에서 농사를 지어 난세에 구차하게 목숨을 보존하려 하였고
제후들에게 알려지거나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을 비루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이 직접 왕림하시어
초려 가운데로 세 번이나 신을 찾아주시고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 때문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께 국사에 분주히 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 후 경복을 만나 패군한 즈음에 임무를 맡고 위란한 때에 명령을 받든 지가 21년이 되었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의 근신함을 아셨기 때문에 승하하실 때에 임하여 신에게 대사를 맡기시니,
신은 명령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걱정하고 탄식하여,
부탁하신 것을 이루지 못해서 선제의 밝음을 손상시킬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5월에 노수를 건너 깊이 불모지에 쳐들어갔습니다. 

이제 남방이 이미 평정되었고 무기와 갑옷도 이미 풍족하니,
마땅히 삼군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거의 저의 노둔한 재주를 다하여,
간흉을 제거하고 한실을 부흥시켜 옛 도읍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이 선제에게 보답하고 폐하에게 충성하는 직분입니다. 

 

참작하여 가감해서 충언을 다 아뢰는 것으로 말하면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의 책임이오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역적을 토벌하여 한실을 흥복하는 일을 맡기시어,


신이 일을 이루지 못하거든 신의 죄를 다스려 선제의 영령에게 고하시고,

(만일 덕을 일으키는 말을 아뢰지 않거든)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의 허물을 책하시어


그들의 태만함을 드러내시며,
폐하께서도 또한 스스로 꾀하시어 선도를 자문하시고
바른 말을 받아들이시어 깊이 선제의 유칙을 추념하소서.

 

신은 은혜를 받자와 감격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멀리 떠나야 하오니,


표문에 임하여 눈물이 흘러 아뢸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갈량 (諸葛亮)>

 

 

 

진정표(陳情表) - 이밀(李密)

 

저는 불행하게도 일찍이 부모를 잃어,
생후 6개월 된 갓난 아이 때 아버님과 사별하였고,
나이 네 살 때 외삼촌이 수절하려는 어머니의 뜻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조모(祖母) 유씨(劉氏)께서 제가 고아가 되고 몸이 약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몸소 어루만지며 키워주셨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병이 많아서 아홉 살이 되어도 걷지 못하였고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고생하면서 성인(成人)이 되었습니다.
가문이 쇠퇴하고 박복해서 늦게 서야 자식을 두었으니,


밖으로는 기복(朞服)이나 공복(功服)을 입을만한 가까운 친척도 없고,
안으로는 문 앞에서 손님을 응대할 어린 시동(侍童)하나 없습니다.

 

홀로 외롭게 살아가면서 내 몸과 그림자가 서로 위로할 따름인데,
조모(祖母) 유씨(劉氏)도 일찍이 병에 걸려 늘 자리에 누워 계셨습니다.


저는 탕약을 달여 올리며 한 번도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의 조정을 받들게 되면서 맑은 교화(敎化)를 온 몸에 입고 있습니다.


전의 태수(太守)인 규(逵)는 저를 효렴(孝廉)으로서 발탁하였고,
후에 자사(刺史)인 영(榮)은 저를 수재(秀才)로 천거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모의 공양을 맡아줄 사람이 없어서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마침 조서(詔書)가 특별히 내려져서 저를 낭중(郎中)으로 임명하였고,
얼마 안 있어 나라의 은혜를 입어 저에게 세마(洗馬)의 벼슬이 내려졌습니다.

 

외람 되게도 미천한 몸으로 동궁(東宮)을 모시게되니,
제가 목을 바친다해도 그 은혜를 다 보답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사정을 모두 아뢰는 표(表)를 올리고, 사퇴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조서(詔書)를 내리시어 절실하고도 준엄하게 제가 책임을 회피하고 태만함을 책망하고,
군(郡)과 현(縣)에서는 다그쳐서 제가 길을 떠나도록 재촉하며,
주(州)의 관리들도 문 앞에 와서는 성화같이 서두르고 있습니다.

 

제가 조서(詔書)를 받들어 빨리 달려가고 싶지만, 조모 유씨의 병환이 날로 위독하고,
구차하게 사사로운 정을 따르고자 하소연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제가 벼슬길에 나아가야 하는지 물러가야 하는지 참으로 낭패(狼狽)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지금의 조정은 효도로서 천하를 다스려서 모든 노인들이 동정을 받아 양육되고 있습니다.
하물며 저는 외롭고 고달픔이 남보다 더욱 심하니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저는 젊었을 때, 위조(僞朝)인 촉(蜀)나라를 섬겨 낭서(郎署)에서 근무하였습니다.
본래 출세하기를 바랐을 뿐, 명예나 절개도 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는 망국의 천한 포로로서,
지극히 미천하고 지극히 비루한데도 과분하게 발탁되니,
어찌 감히 주저하며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조모 유씨가 마치 해가 서산에 지려는 것처럼 숨이 끊어지려고 하여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아침에 저녁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조모가 없었더라면 오늘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며,
조모께서는 제가 없으면 여생을 마칠 수 없을 터이니,
조모와 손자 두 사람이 서로 목숨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臣) 밀(密)은 금년에 나이 44세이고, 조모 유씨는 금년에 연세가 96세입니다.
그러니 제가 폐하께 충성을 다 할 날은 길고, 유씨께 은혜를 보답할 날은 짧습니다.

 

까마귀가 어미 새의 은혜를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조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만이라도 봉양하게 해 주십시오.


저의 괴로움은 촉(蜀)의 인사(人士)들만이 아니라,

양주(梁州)와 익주(益州) 두 주(州)의 장관들도 훤히 아는 것이며,
천지신명께서 실로 모두 보고 있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어리석은 저의 정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저의 작은 뜻을 들어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것은 조모 유씨께서 다행히 여생을 끝까지 보존하게 된다면,


제가 살아서는 목숨을 바쳐 충성하고,
죽어서는 결초보은(結草報恩)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삼가 절하며 표(表)를 올려 아룁니다.

<이밀(李密)>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


연월일 계부 나 유가 네(십이랑) 상사를 얘기를 들은 지 이레 만에
슬픔을 머금고 정성을 다해 건중(종)을 시켜 제철음식으로 제수를 갖추어
너 십이랑의 영에 고 하노라.

 

슬프다.


내 나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성장하면서
미처 의지하는 바를 살피지 못하게 되었으니 오직 형수에게 의지하였다.
중년에 맏형이 남방에서 몰하였는데 나와 네가 모두어렸으니 형수를 따라 하양에 귀장하였다.

 

그리고 나서 너와 더불어 강남에서 객지생활을 할 때는
외로운 몸끼리 함께 고생했으니 일찍이 하루도 서로 헤어진 적이 없었다.

 

나는 위로 세 형님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에,
선대의 혈통을 잇는 자손으로 손자로 네가 있고 아들로 내가 있을 뿐 이었다.

 

2대에 걸쳐 각기 한 사람뿐이니 형상도 어렵고 그림자도 외로웠다.
아주머니(형수)께서 언제나 너를 어루만지고
나를 가리켜며 “한씨 집안에는 이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때 너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기억이 없을 것이다.


나는 비록 기억은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그처럼 슬픈 일인 줄은 몰랐다.

내 나이 열아홉에 비로소 장안으로 왔으며 그 4년 후에 돌아가서 너를 보았다.
또 4년에  내가 하양으로 가 성묘를 했을 때,  형수의 시신을 따라와 장사 지내던 너를 만났다.

 

다시 2년 후, 내가 변주에서 동승상을 보좌할 때 네가 나를 찾아와
그곳에서 1년 머물다가 가서 처자식을 데리고 오겠노라고 청했던 것이다.
다음해에 동승상이 돌아가시고 내가 변주를 떠나게 되어 너는 결국 오지 못했다.

 

같은 해에 나는 서주에서 융사를 보좌하게 되어
너를 데리고 올 사람을 비로소 가게 했으나 나는 또 관직을 그만두어 너는 또 올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네가 동쪽으로 따라 온다고 해도
동쪽 또한 객지라 오래 머물 수 없으니 항구적인 대책을 도모 하기는 서쪽으로 돌아가서
집안을 이루고 너를 데려 오려 했었다.

 

슬프다.


네가 갑자기 나를 버리고 죽을 줄 누가 알았으랴.
나와 네가 모두 소년이었을 때
비록 잠시 서로 헤어지더라도 결국에는 마땅히 서로 더불어 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너를 버려두고 장안에서 객지생활을 하면서 얼마 안 되는 봉록을 구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비록 만승의 공상이라 하더라도 나는 하루도 너를 버리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맹동야가 부임할 때 내가 너에게
편지 써 보내기를 “내 나이 40이 되지 않았는데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치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부와 숙부들의 형들이
모두 건강했음에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해 볼 때,
나같이 쇠약한 사람이 어찌 오래 살수 있겠는가.


내가 갈 수 없고 네가 즐겨 오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네가 한  없는 슬픔을 안게 될까 두렵다고 했다.”

누가 젊은이가 죽고 늙은이가 살아남으며
건강한 사람이 요절하고 병든 사람이 무사할 것을 알았겠느냐.

 

슬프도다. 참말인가. 꿈인가. 죽었다는 기별이 진실이 아닌 것이 아닌가.
참말이라면 우리 형님의 성덕으로 그 후사를 요사하게 하겠는가.

 

너의 순결함과 총명함으로 그 은혜를 입을 수 없었단 말인가.
젊고 굳센 자가 요사하고, 나이 많고 쇠약한 자가 살아남아서 온전하다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꿈인가, 전하는 것이 참말이 아닌가.
동야의 글과 경란의 보가 왜 내 곁에 있는가.

 

슬프다.
그 진실인가.
내 형의 훌륭한 덕으로도 그 후사를 요절케 했으며
너의 순명으로 마땅히 그 집을 빛나게 할 자가 그 은택을 입을 수 없었다.


이른바, 하늘이란 진실로 측량하기기가 어렵고  신이란 진실로 밝히는게 어려운 것이다.
이른바 이치랑 추측할 수 없는 것이며 수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나도 금년부터 희끗희끗하던 머리가 변해 하얗게 되기 시작했고
흔들리던 치아가 혹 떨어져 빠지게 되었다.
체력이 날마다 더욱 쇠약해지고 의지와 원기가 날로 쇠미해지니
너를 따라 죽지 않을 날이 얼마나 되지 않겠느냐.

 

죽어서 지각이 있다면 그 헤어짐이 얼마나 되겠으며 죽어 지각이 없다고 하면
슬픔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고 슬픔을 느끼지 않을 것이 무궁하게 될 것이다.

 

네 아들이 겨우 열 살이고 내 아들이 다섯 살인데
나이가 어리고 튼튼한 사람도 목숨을 보존할 수 없으니
이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어 독립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 슬프도다. 슬프도다.
네가 작년에 편지하기를 “근래에 각기병에 걸려 가끔가다 심하다 했다.”
나는 말하길 “이 병은 강남에 사는 사람이라면 늘 걸리는 병이다.”하고
처음에는 그것을 근심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아 슬프도다.
마침내 이것으로 인하여 너는 목숨을 잃었단 말이냐.
아니면 다른 질병이 있어 여기에 이르게 되었느냐.


네가 보낸 편지에 6월 17일에 쓴 것으로 되었는데 맹교의 편지에는 6월 2일에 네가 죽었다고 하였고
경란의 보고서에는 날짜의 기술이 없었다.

 

아마도 맹교의 하인은 집안 식구들에게 죽은 날짜를 물어 보아야 하는 것을
몰랐을 것이고 경란의 보고서에는 마땅히 날짜를 언급해야 하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맹교가 나에게 편지를 써 보낼 때 하인에게 물었더니 하인이 함부로 말함으로 써 그것에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

 

이제 내가 건중에게 너를 제사 지내게 하고 너의 아들과 너의 유모를 조문하게 하였다.
그들에게 식량이 있어 빈소를 지키며 상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데려 올 것이고


만일 상기를 마칠 때까지 지킬수 없다면
즉시 데리고 오되 나머지 노비들은 모두 너의 상기를 지키게 할 것이다.


나의 힘으로 개장할 수 잇다면 끝내 너를 선영에 장사 지낼 것이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그 원하는 바를 다하게 될 것이다.

 

아 슬프도다.
네가 병든 것에 대해 나는 그 때를 알지 못하였고 네가 죽은 것도 내가 그날짜를 알지 못하는구나.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봉양하며 함께 살지 못했고
죽어서도 너의 시신을 어루만지면서 슬픔을 다하지 못하는구나.


염을 할 때도 그 관에 기대지 못하고 하관을 할 때도 너의 무덤에 가보지 못했구나.

나의 행실이 천지신명께 죄를 얻어 너를 요절하게 만들었고


내가 또 효도를 다하지 못하고 자애롭지 못해서 너와 더불어 서로 봉양하며 살아가면서
서로를 지키다가 죽지도 못했구나.

 

한 사람은 하늘 끝에 있고 한 사람은 땅 끝에 있으니 살아서 그대의 그림자가
나의 몸과 더불어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죽어서도 혼이 나의 꿈과 더불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구나.


내가 진실로 그렇게 했으니 그 또한 무엇을 탓 하리오.

푸르고 푸른 하늘이시여 어떻게 그 끝이 있으리오.


지금부터 나는 세상살이에 의욕이 없을 것 같다.
마땅히 몇 이랑의 밭을 이수와 영수 근처에 구하여 여생을 맞이하겠다.


내 아들과 네 아들을 가르쳐 그들이 성장하기를 바랄 것이고
내 딸과 네 딸을 길러서 그들이 시집가기를 기다리겠다. 다만 이와 같을 뿐이다.

 

슬프다.
말은 다함이 있을 지라도 정은 끝이 없구나.
너는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아 슬프다. 흠양할 지어다. 

 

 

韓愈는 누구인가?

韓愈(766~824)의 字는 退之(퇴지).
諡號(시호)는 文公(문공). 河北省(하북성) 昌藜(창려)사람이다.
宋나라 때 昌藜伯(창려백)에 追封되어 한창려 또는 창려선생으로 불리워졌다. 


唐代(당대)의 文豪로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중 第一人者이다.

목종 장경 4년에 죽었다.(5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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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