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의 혼간지(本願寺) 자리에 오사카 성을 짓고 조선 침략을 총지휘했다. 사진가 권태균



유능한 지배층과 무능한 지배층을 가르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현실인식 문제다. 유능한 지배층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지만 무능한 지배층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그렇게 머릿속의 바람을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동안 나라는 깊숙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선조는 재위 8년(1575) 김효원(金孝元)을 함경도 경흥부사로 좌천시켰다. 당쟁을 유발해 조정을 시끄럽게 했다는 견책이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8년 10월 1일자는 이조판서 정대년(鄭大年)·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 등이 “경흥은 극지 변방으로 오랑캐 지역에 가까우므로 서생(書生)이 진수(鎭守)하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고 반대했다고 전해 준다. 인사를 담당하는 두 판서가 건의하자 선조는 김효원을 조금 내지인 부령(富寧)부사로 보내고, 당쟁의 다른 당사자인 심의겸(沈義謙)도 개성유수로 내보냈다. 두 판서가 ‘경흥이 오지이므로 서생이 진수하기 마땅치 않다’고 계청한 것은 조선 지배층의 인식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문신이 무신을 지휘하는 도체찰사 제도가 법제화된 나라에서 서생 운운하며 변방 근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체가 지배층의 의무를 망각한 것이었다.

임임진왜란에 대해선 현재까지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군이 느닷없이 부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통신사 부사(副使)였던 김성일(金誠一)의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란 보고 때문에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인식이다. 둘은 결국 ‘조선은 일본이 침략할 줄 몰랐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 침략하리라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세종 25년(1443) 변효문(卞孝文)이 조선통신사로 다녀온 이래 무려 150년 만인 선조 23년(1590) 3월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것 자체가 일본이 공언(公言)하는 침략 의사가 사실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마도주 소 요시시케(宗義調) 부자에게 명나라를 공격할 길을 조선에 빌리라는 ‘가도입명(假道入明)’과 조선 국왕을 일본으로 오게 하라는 ‘국왕 입조(入朝)’의 명령을 내렸다.

소 요시시케는 도요토미가 조선통신사를 직접 만나면 두 개의 요구조건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알리라는 생각에서 조선에 거듭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조선은 소 요시시케에게 선조 20년(1587) 2월 흥양(興陽)을 침범해 녹도보장(鹿島堡將) 이대원(李大源)을 전사시킨 왜구 두목과 조선인 사화동(沙火同)을 압송하고, 붙잡아 간 조선인들을 송환시키면 통신사를 파견하겠다고 답변했다. 사화동은 고된 부역과 공납(貢納)으로 바치는 전복(全鰒)의 수량이 지나치게 많다면서 일본으로 귀화해 왜구를 손죽도로 안내한 조선 백성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2년(1589) 7월조는 일본에서 긴시요라(緊時要羅) 등 3인의 왜구와 사화동, 그리고 조선 포로 김대기(金大璣) 등 116명을 돌려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만큼 대마도주는 조선통신사 파견에 사활을 건 것이었다. 그래서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그 대가로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다. 정사를 서인 황윤길, 부사를 동인 김성일로 삼은 것은 선조 나름의 탕평책이자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파 차이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랐다. 황윤길은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한 반면 김성일은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는 유학자의 시각으로 일본을 얕보았다.
진왜란에 대해선 현재까지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군이 느닷없이 부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통신사 부사(副使)였던 김성일(金誠一)의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란 보고 때문에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인식이다. 둘은 결국 ‘조선은 일본이 침략할 줄 몰랐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 침략하리라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세종 25년(1443) 변효문(卞孝文)이 조선통신사로 다녀온 이래 무려 150년 만인 선조 23년(1590) 3월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것 자체가 일본이 공언(公言)하는 침략 의사가 사실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마도주 소 요시시케(宗義調) 부자에게 명나라를 공격할 길을 조선에 빌리라는 ‘가도입명(假道入明)’과 조선 국왕을 일본으로 오게 하라는 ‘국왕 입조(入朝)’의 명령을 내렸다.

소 요시시케는 도요토미가 조선통신사를 직접 만나면 두 개의 요구조건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알리라는 생각에서 조선에 거듭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조선은 소 요시시케에게 선조 20년(1587) 2월 흥양(興陽)을 침범해 녹도보장(鹿島堡將) 이대원(李大源)을 전사시킨 왜구 두목과 조선인 사화동(沙火同)을 압송하고, 붙잡아 간 조선인들을 송환시키면 통신사를 파견하겠다고 답변했다. 사화동은 고된 부역과 공납(貢納)으로 바치는 전복(全鰒)의 수량이 지나치게 많다면서 일본으로 귀화해 왜구를 손죽도로 안내한 조선 백성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2년(1589) 7월조는 일본에서 긴시요라(緊時要羅) 등 3인의 왜구와 사화동, 그리고 조선 포로 김대기(金大璣) 등 116명을 돌려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만큼 대마도주는 조선통신사 파견에 사활을 건 것이었다. 그래서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그 대가로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다. 정사를 서인 황윤길, 부사를 동인 김성일로 삼은 것은 선조 나름의 탕평책이자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파 차이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랐다. 황윤길은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한 반면 김성일은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는 유학자의 시각으로 일본을 얕보았다.

통신사 일행은 수많은 고생 끝에 4개월 만인 1590년 7월 말 교토(京都)에 들어갔으나 도요토미는 통신사를 즉각 만날 생각이 없었다. 도요토미가 동쪽 정벌에 나갔다는 소식에 하염없이 한 달 반가량을 더 기다렸으나 도요토미는 9월 초 귀경한 후에도 궁전인 취락정(聚樂亭)을 수리한다며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자 통신사 일행 중에 도요토미의 측근 호인(法印) 등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빨리 만나고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김성일은 “사신이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와서는 한결같이 예법대로 해야 한다”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겨우 도요토미를 만나게 되었다. 귀국한 사신에게서 상황을 자세히 들은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도요토미가 안고 있던 어린애가 옷에 오줌을 싼 이야기를 전하면서 “(도요토미는) 모두 제멋대로이고 매우 자만(自滿)하여,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태도였다”고 적고 있다.

왼쪽 사진은 왜군 장수의 황금가면(위)과 전투 때 입은 갑옷. 오른쪽 사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우여곡절 끝에 받은 도요토미의 국서(國書)도 문제투성이였다. ‘조선국왕 전하(殿下)’라고 써야 할 것을 ‘합하(閤下)’라고 쓰고, 조선의 선물을 ‘예폐(禮幣)’라고 써야 하는데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예물이란 뜻의 ‘방물(方物)’이라고 쓴 것 등이 그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하겠다면서 조선이 군사를 내어 도우라는 구절이었다. 『국조보감』은 김성일이 겐소(玄蘇)에게 강하게 항의해 몇 구절을 고쳤다고 전하면서 “황윤길 등은 ‘겐소가 그 뜻을 달리 해석하는데 굳이 서로 버티면서 오래 지체할 것이 없다. 빨리 돌아가자’고 말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두 사람은 사행(使行) 기간 내내 서로 다투었다. 황윤길이 무기(武氣)가 충만한 일본의 숭무(崇武) 분위기에 겁을 먹었다면, 김성일은 오랑캐의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고 얕보았다. 두 사람은 선조 24년(1591) 정월 귀국하는데 황윤길이 도요토미에 대해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고 달리 보고했다.



국조보감』은 “김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말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보고 내용이 상반될 경우 정사(正使)의 말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집권 동인은 반대 당파의 말이라고 무시했다. 도요토미의 국서에도 명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통신사가 귀국할 때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회례사(回禮使)로 따라왔는데 이들도 ‘내년(임진년)에 침략하겠다’고 공언했다. 『선조수정실록』 24년(1591) 3월조는 일본 회례사를 만난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이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상국(上國)을 침범할 것이다”는 회례사의 발언을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조정은 ‘인심을 소란시킨다’면서 오억령을 심희수(沈喜壽)로 갈아치웠다. 자신이 들은 정보를 사실대로 보고했다고 선위사를 갈아치운 것이다. 조선 지배층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의 상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국왕 선조는 침략 경고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때 왜가 침범하리라는 소리가 날로 급해졌으므로 임금이 비변사에 명령해 각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셨다”고 적고 있다. 선조는 전쟁 대비에 나섰던 것이다. 이때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은 “이순신이 드디어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水使)로 발탁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가 선조 24년(1591) 2월인데, 이순신의 발탁에 대해 사간원은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선조는 “이러한 때에 상규(常規)에 얽매일 수 없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지 말라”고 막아 주었다. 『선조수정실록』 25년(1592) 2월 1일자는 “대장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여러 도에 보내 병비(兵備)를 순시하도록 하였다”고 전하는데 이 역시 선조가 전쟁 대비책을 지시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이 4월 초하루에 사제(私第:집)로 찾아왔기에 “머지않아 변고가 있으면 공이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할 터인데,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의 어렵고 쉬움이 어떠하겠는가”라고 묻자 신립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고 대답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가 임란 발발 열이틀 전이었다.

류성룡이 “지금은 왜적이 조총(鳥銃)과 같은 장기(長技)까지 있으니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요”라고 거듭 말하자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 해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일축했다. 서생은 변방에 근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문신, 쳐들어와도 아무 걱정 없다고 호언하는 무신,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머릿속의 상상을 현실로 여기는 사대부가 지배하는 나라에 도요토미는 자신의 공언대로 400여 척의 배를 띄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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