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美 북한전문가의 6·25비사 본격증언]

“워싱턴은 극동사령부 G2의 남침경고를 묵살했다”
전쟁 조짐 무시한 워싱턴

북한은 1945년 이래 5년이 지난 이 시기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여왔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평가는 지극히 안이했다. 6·25전쟁이 터지는 순간까지 미국은 북한의 전쟁준비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거나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에 의구심을 품고 연구하던 중에 비밀보고서가 아니였는데도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뭉치(40여쪽)를 발견했다. 6·25전쟁 당시 극동사령부 소속 정보참모부 부장이었던 찰스 윌로비 장군의 개인보관문서철이다.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윌로비 장군 자신이 서명하고 엮어놓은 ‘Aid And Comfort To The Enemy(적에 대한 격려와 협조)’라는 풍자적인 제목 아래 <언론의 한국전쟁에 관한 동향>(Trends in Korean Press Reports)이란 부제를 달고 전쟁 상황을 모아 정리해 놓은 것이다.(Gen. Charles A. Willoughby, Aid and Comfort to the enemy, Trends in Korean Press Reports, Tokyo, 1951.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시에 있는 맥아더 기념연구소 소장)

이 자료 가운데 본문에 소개한 보고서를 보면 윌로비 장군의 정보 자료에는 6·25전쟁 발발에 대한 예고가 이미 1950년 1월에 있었고, 같은해 3월에도 ‘G-2 report’(일일정보 일지보고서) 형식으로 워싱턴에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윌로비 장군이 6개월 전에 전쟁 조짐을 발견하여 워싱턴 당국에 보고했으나 무시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워싱턴 당국이란 일차적으로 국무부이며 이차적으로는 CIA와 군당국자다.

맥아더 원수 휘하에서 오랫동안 정보참모를 한 윌로비 장군은 유능한 정보전문가였다. 하지만 워싱턴 당국은 ‘극동사령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애치슨라인에 들어있는 필리핀의 마닐라 호주의 멜버른, 모어즈비, 도쿄 정보에 더욱 신경을 썼던 것이다.

‘맥아더 원수 연구’로 유명한 D. 제임스 클레이턴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워싱턴 당국이 윌로비 장군 정보보고서를 깎아내렸다고 기술한다.

첫째, CIA나 국무부 당국자들은 윌로비 장군이 오만하고 성미가 급하다고 보았다. 그들의 호의를 사지 못했기 때문에 윌로비의 정보는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둘째는 1949년 6월에 선언한 바 있듯이 한국은 미극동사령부 관할지역 밖에 있었다. 윌로비가 한국에 관한 보고서를 올릴 때마다 그저 ‘시끄러운 군소리’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윌로비 장군은 워싱턴 당국의 정책 담당자들이 한반도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전문가로서의 직감에 따라 한반도 내에 그의 정보조직을 만들었다. 바로 그것이 Korean Liason Office(KLO)로 G-2와 직결시켜 북한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했던 것이다. 워싱턴 당국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윌로비의 정보는 그저 ‘잡다한 소리’(…so his KLO was regarded by some in Washington as a brazen, extralegal creation)라고 무시했다.

‘KLO 부대’

8240부대 또는 KLO(Korea Liaison Office)로 불리는 정보 및 첩보부대는 원래 8086부대로 알려진 미8군 소속의 빨치산부대를 흡수해 한국전에 투입한 부대였다. 이 부대는 6·25전쟁 당시 도쿄에 있던 미극동사령부 정보처 소속으로 맹활약했다.

정보활동은 원래 CIA가 했어야 하나 윌로비 장군의 정보팀이 단연 우세했다. 예를 들면 CIA는 북한에 요원 15명을 파견했으나, 8240부대는 65명을 두었다. 그러나 정책결정권이 있는 CIA에게 윌로비 장군은 밀렸다. 그의 매일정보일지를 살펴본 필자 판단으로는 그의 보고가 적에 대한 정보 자체일 뿐 정책수행자들의 ‘정책(policy, strategy)’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것 같다.

윌로비 장군의 보고서 중에서 1950년 6월24일자 보고인 #2945는 심각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인민군 제4사단(3일 후에 서울에 진입하는 부대. 서울 공략의 수훈부대로 ‘서울근위사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945년 9월부터 1949년 9월까지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싸운 중국 인민해방군출신 조선인들로 조직, 가장 강력한 부대로 평가받았다. 이들의 원위치는 진남포였으나 전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1950년 6월15일 주둔지를 떠나 6월18일에는 남천을 지나고 6월23일까지 집결구인 적곡리에 모였다)의 부대 이동에 관한 정보와 특히 38선 근처 집결구(集結區)에 대한 확실한 정황을 분석할수 있는 정보자료다.

6월24일자 보고서는 (1) 인민군 4사단에 관한 동정 (2) 4사단이 소련과 중국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병력이라는 것과 특히 미제 M-1소총을 소지했다는 점 (3) 4사단에 관한 많은 정보는 전에도 여러번 통보했다는 사실과 함께 이권무(李權武)가 사단장이라는 사실 (4) 소련 제7태평양함대(3척의 8000t급 순양함, 46척의 잠수함 포함)의 수상쩍은 움직임과 블라디보스토크항의 소련 해군 활동 (5) 이미 지난 3∼4월에 내려졌던 ‘38선 부근에서 민간인 철수명령’을 상기하면서 (정보보고서 번호 #2808호, 2791호) 6월24일 현재 민간인이 철수하지 않은 지역을 강조하고, 북한 정부가 38선에서 민간인을 대피시키면서 건설 현장에 징발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점 등 매우 중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다.

대통령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에서 벗어나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아시아대륙의 반도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당장 전쟁 기운이 발생하고 있는 한반도를 무시했다. 당시 미국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오만했거나 무식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공산주의의 전술과 공작을 경험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는 점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큰 의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오판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당시 한국은 전쟁 준비를 감추고 있던 북한을 과소평가하고 자만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명령만 내리면 이북의 평양, 원산까지 하루에 완전히 점령할 자신과 실력이 있다”고 했다. ‘호랑이 부대’로 자칭하던 김석원 장군은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먹으며, 저녁은 신의주에서…”식으로 빈소리를 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윤치영씨도 “…남북통일의 유일한 길은 이북의 실지(失地)를 대한민국의 힘으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은 “금년 국군의 목표는 실천 행동으로써 ‘미회복 지구’를 회복하고 국토를 통일하는 것”이라고 말해 북한을 자극하고 그들에게 구실을 주었다.

당시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이었던 유양수씨(柳陽洙)의 증언을 들어보면 더욱 가관이었다고 판단된다. 전투정보과에는 북한반과 남한반이 있었다. 이 부서에는 당시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면한 박정희씨가 문관 자격으로 있었고, 북한반장으로 김정숙 대위 김종필(JP)중위 등 육사 8기생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전투정보과 북한반은 미국 정보원 같은 능력은 없었지만 그런 대로 북한 인민군의 38선 집결상황과 공격준비가 100% 완료된 것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국장인 장도영 대령에게 보고했지만 그 반응은 냉담했다.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심각했는데도 국장급 이상 간부,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신성모씨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않았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걱정거리’를 유보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유양수 과장은 이를 고민하다가 군의 명령계통을 어길 수 없어 상관인 장도영 국장에게 재차 보고 형식으로 채근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과장자리를 면책당하고 6사단 전투정보과로 전보 명령을 받는다. 결국 대한민국은 육군본부에 전투정보과 과장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맞게 된다. 유양수 과장은 6·25가 터진 당일 새벽에 원주로 떠나 6사단(당시 김종오 대령이 사단장이었다) 정보참모로 부임한다.

따지고 보면 1950년 당시 한국군은 물론 미극동사령부,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를 간과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실수를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청년시절(약15년간)에 경험했던 반일독립무장투쟁을 밑천삼아 군사력을 길러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을 면밀히 준비해왔던 것이다.

북한은 위의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원래의 계획대로 남한을 점령했고, 남한 사람들은 희생을 당했다.

남한의 정치인들이 총자루 한번 잡아보지 못한 지식인들로 신사였다면, 북한의 권력자들은 김일성을 비롯해 일제와 직접 맞서싸웠던 무장전사라는 사실도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또 오늘날 이상스럽게도 한국의 지도자들 가운데 박정희대통령을 제1인자로 꼽는 이유도 한번 더 음미해볼 일이다.

난시(難時)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특히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에선 군대 경험이 있는 인사들이 정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김일성의 대일무장투쟁 경험은 ‘남조선혁명무력통일전쟁’을 위한 자산이었고 이러한 체험을 보완해 가면서 남침전쟁을 계획했던 것이다.

   (끝)

김영훈 < 美 연합감리교회 정회원목사 >
발행일: 2001 년 07 월 01 일 (통권 502 호)
쪽수: 432 ~ 441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