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로 닥친 美·日·中의 '한반도 覇權 다툼'

입력 : 2014.07.05 03:01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이 방한 이틀째인 4일 서울대를 찾았다.

중국 주석이 국내 대학에서 직접 강연한 것은 처음이다. 시 주석이 "안녕하십니까"라는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자 박수가 쏟아졌다. 시 주석은 강연에서 한국 인기 TV 드라마를 언급했고,

 

영상 자료와 책 1만여 권을 서울대에 기증하고 서울대생 100명을 중국 여름 캠프에 초청했다.

상대국 국민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지지를 끌어내는 외교 기법의 하나인

매력 공세(charm offensive)를 직접 펼친 것이다.

시 주석은 강연에서 "한·중 양국은 역사상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항상 서로 도와주면서 함께 극복했다"며 "400년 전 임진왜란 때 양국 국민은 적개심을 품고

어깨를 나란히 해서 전쟁터로 향했다"고 말했다.

 

이어 "20세기 상반기 일본 군국주의의 야만적인 침탈, 한국·중국의 영토에 대한 강탈로

우리 모두 큰 고난을 겪었다"며 "우리(양국) 인민들은 생사를 같이하고 서로 도와줬다"고도 했다.

 

중국이 한국을 침략해 국토를 짓밟고

재산과 부녀자들을 약탈했던 역사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중이 과거 일본의 침략에 함께 대응했던 역사만을 거론한 이유는 자명하다. 일본 아베 정권 등장

이후 본격화된 중·일 갈등에서 한국이 중국과 함께 대(對)일본 공동 전선에 나서달라는 뜻이다.

시 주석은 전날 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내년은

중국의 항일(抗日) 전쟁 승리 및 한반도 광복 70주년"이라며 한·중 공동 기념행사를 제안했다고 한다.

 

두 정상은 이번에 이틀에 걸쳐 일본의 과거사 왜곡 등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정상회담 직후 발표한 공동성명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시 주석의 제안이 알려진 것은 중국 관영 매체의 보도를 통해서다.

정상회담에서 3국의 문제에 대해 협의했더라도 그 내용은 공개하지 않는 게 외교 관례이고 국제 상식이다.

중국이 이런 관례를 무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은 시 주석의 발언과 관영 매체 보도를 통해

지금의 '중국 대(對) 미·일의 각축'에서 한국을 중국 쪽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시 주석은 이번에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질서 구축'에

한국이 주요한 당사자로 동참해 줄 것을 원한다는 뜻을 밝혔다.

현재 중국 외교의 초점은 미국의 대(對)중국 포위망을 막는 데 있다.

 

시 주석이 지난 5월 상하이에서 열린 '아시아 교류 및 신뢰 구축 회의(CICA)'에서

"아시아 안전은 아시아인이 지켜야 한다"며 지역 안보 기구 창설을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한국은 일단 이 회의에 참여하고 있지만 분명한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시 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창립을 제안했다"며

"관련 국가들이 적극 참여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AIIB는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개발은행(ABD·

본부 필리핀)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중심으로 운영되는 아시아 전담 은행의 성격이 강하다.

 

미국은 이 같은 움직임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AIIB 가입 여부에 대해서도 "추후에 최종 입장을 정하겠다"고 하고 있다.

시 주석의 방한에 맞춰 일본은 북한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북이 4일 일본인 납북자 재조사 특위를 구성하는 것에 맞춰 아베 내각은 북한 사람의 일본 입국 제한,

대북 송금(送金) 및 현금 반출 제한, 인도적 선박 왕래 규제 등을 완화했다.

 

2006년 북의 1차 핵실험 후 일본이 독자적으로 실시해 온 대북 제재의 일부를 푼 것이다.

이 추세라면 가까운 시일 안에 북·일 외상 회담이 열리고 아베 총리가 직접 북을 찾는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아베 정권은 자신들의 과거사 도발로 한·일 외교 채널이 막히자 북한에 접근하는

것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존재감을 키우겠다고 작정한 듯하다.

미국은 일본의 대북 제재 완화에 대해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면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은 시 주석의 방한에 대해 일제히 "중국이 한·일 관계가 악화된 것을

이용해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의 유대를 해치려 하고 있다"는 우려를 쏟아냈다.

 

오바마 미국 정부가

내건 '아시아 회귀' 전략은 아시아 각국의 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고,

 

한·일 관계 악화로 한·미·일 3각 안보 협력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미국으로선 한반도를 무대로 벌어지는 주도권 경쟁에서 중국이 한발 앞서 나가는 것 아니냐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번 시 주석 방한과 일본의 대북 접근으로 주변 강국들의 한반도를 둘러싼 패권(覇權) 다툼이

더 이상 먼 미래 일이 아니라 우리 앞에 닥친 현실 문제로 다가왔다.

 

100여년 전 우리 선조들이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無知)와 거듭된

오판으로 나라를 잃었던 뼈아픈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한·미 동맹을 굳건하게 지키면서 한·중 동반자 관계도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숙명이다. 그렇다고 원칙 없는 줄타기가 능사는 아니다.

 

우리의 국익(國益)에 맞지 않는 사안에 대해선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이 나라를 지키면서 국민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길이며,

어떻게 해야 북의 도발을 억지하면서 통일을 앞당기고 동북아와 세계 평화·인권에 기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중심에 두고 외교적 활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04/2014070403853.html?editorial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