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2013년)이 지나

두번의 60갑자를 맞이하는

120년이 되는 (2014년)이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난해와 같은 갑오(甲午)년이다.

이 갑오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였다.
동학혁명은 분명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여명을 알린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조선왕조는 최상층으로부터 말단 관료에 이르기까지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

오늘날 지금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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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대개벽의 여명

하루는 김병선(金炳善)에게 글 한 장을 써 주시니 이러하니라.

 

日入酉配 亥子難分
일입유배 해자난분

 

日出寅卯辰 事不知
일출인묘진 사부지

 

日正巳午未 開明
일정사오미 개명

 

日中爲市交易退 帝出震
일중위시교역퇴 제출진

 

해는 유시에 들어가는데
해시와 자시의 변별하기 어려움에 필적하고
해가 인시, 묘시, 진시에 나오는데 아직 세상일을 알지 못하며

 

해가 사시, 오시, 미시에 남중하는 때
나의 도(道)와 세상일이 환히 드러나느니라.

 

해가 정중하여 문명의 장이 서고

교역이 끝나 장이 파하면 태조가 진방에서 나오시느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닭이 울면 새벽이요 개가 짖으면 사람이 다니게 되느니라.
금년 운수가 명년 4월까지 가느니라.” 하시고

 

진사(辰巳)에 성인출(聖人出)하고
오미(午未)에 낙당당(樂堂堂)이라.”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개명장 나는 날엔 일체 개심(開心)하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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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인들은 갑오동학혁명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나상민(본부)
 
 
올해는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12주년이 되는 해다.

 

동학에 대한 담론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의 근대역사에서 동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무엇보다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했던

이 땅의 많은 지식인들은, 동학혁명에서 역사의 희망을 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이 글에서는 동학혁명이 반외세·반봉건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는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당시 조선인들이 동학혁명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민족의 꿈과 좌절의 역사를 짚어보고자 한다.

 
 
선천역사의 벼랑 끝에 선 조선

조선은 1876년,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음으로써
근대세계 체제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조정에서는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함으로써
근대 일본의 실정을 파악하려 하였다.

 

결국 이들에 의해 개화파가 형성되는데,
그들 대부분은 처음에는 유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다가 점차 일본의 근대 문물을 동경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김옥균·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1884년)이 일어난다.

 

이 쿠데타는 결국 청국의 개입을 불러오는데, 이후 조선은 10여 년 동안

청나라의 우민화정책에 침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였다.
동학혁명은 분명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여명을 알린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조선왕조는 최상층으로부터 말단 관료에 이르기까지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

 

백성들을 수탈하고 탐학을 일삼던
지배계급 관료들은 동학군의 봉기로 인해 크나큰 체제위기를 절감했다.

 

동학군의 봉기에 대해 그들은 심각한 고뇌에 빠졌다.
특히 관군이 잇달아 패하고 전주성이 함락되자, 조정은 청국에게 차병(借兵)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동학혁명은, 조선왕조의 제국주의 체제로의 편입을 가속화시킨 사건이자,
동시에 근 5백 년 동안 조선을 지탱해온 낡은 유교 질서의 파산을 고한 충격적 사건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사학자인 박노자는 “갑오개혁의 기간,
즉 일본군이 경복궁에 불법 침입하여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 밑에 친일 정권을 세운 1894년 7월23일(음력 6월 21일)부터 …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1896년 2월 11일까지의
약 2년 정도의 시간대를 (역사전환의) 결정적 분기점”이라 보고 있다.

 

당시 조선왕조는 동학군들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근대세계 체제에 조선이 하위파트너로 편입되지 않았다면,
동학군은 한양까지 진격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구체제에 속한 단순한 유교국가 만은 아니었다.
국태민안(國泰民安)보다는 부국강병의 논리가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서양의 사회진화론적인 논리는, 조선 민족의 생사존망을 좌우하는
새로운 이념으로 일부 지식인들에게 자리 잡아 갔다.
 
한편 대신(大臣)들과의 대화에서 고종은 ‘청국(淸國)의 예’를 들며,
중국이 영국에게 차병(借兵)을 요청했던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는 급변하는 시대상을 직시하고,
민중들의 고충과 요구를 경청하고 수용하려는 태도보다는 낡은 질서와
자신의 권력에 집착한 것으로 보인다.
 
 
외세 의존적 개화파의 동학혁명 인식


당시 조선의 지배층 앞엔,
근대적인 신무기를 갖춘 ‘열강(列强)’이라는 신세계가 새롭게 펼쳐졌다.

 

1883년 보빙사로 미국에 갔던 유길준1)(兪吉濬, 1856∼1914)은
생물학을 공부한 미국인 진화론자 에드워드 모스 교수로부터 일반진화론과
사회진화론2)을 배운다.
 
유길준은 서구라파를 여행한 후 『서유견문』을 남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무튼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유학적 세계관을 극복하면서 서양 열강의 사회진화론적
근대화 논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갑오개혁의 실력자 유길준은 동학혁명이 발발했을 때,
동학이 ‘문명화’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인식하여 이를 무차별 학살한 일본군을 크게 치하하였다.
당시 최고 지식인 유길준이 동학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해있던
박영효(朴永孝, 1861∼1939)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후 일본의 힘을 빌어 귀국하였다.

그는 같은 해 12월 17일, 김홍집 내각에 발탁되어 내무대신이 되었다.

 

이 내각에서 갑신파(갑신정변의 주도세력)는 박영효와 서광범 둘 뿐이었다.

김홍집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한 박영효는 일본에 의존하는 한편 왕실과도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의 개혁구상은 갑오내각에 있어 정치적 위협이 될 수 있는
동학농민세력을 진압하는 한편 일본형 근대국가를 넘어선 서구 지향적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학군의 지도자 4명을 처형하는데도 개입했으며,
동학군과 힘을 합쳐 친일내각을 뒤엎으려는 이준용(대원군의 손자) 일파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구한말의 우국지사, 황현은 ‘죽음을 눈앞에 둔
전봉준이 박영효와 서광범을 크게 꾸짖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물론 박영효는 개혁의 과정에서 일본의 이권을 거부하는 자주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분명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고 정당제도를 확립하여 국민의 권리를
신장시킨다는 급진적인 개혁의 이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은 개혁을 추구함에
있어 위로부터의 개혁’, 다시 말해 일본형의 권위주의적 모델을 추구하였다.
그들에게는 오직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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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길준은 갑오경장 중 군국기무처 의원,
내각총서, 내무협판, 내부대신 등을 역임하며 개혁을 주도한 갑오내각의 실세이다.
그는 1895년 단발령을 시행하여 유림들의 커다란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2) 사회진화론은 이 세계가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세상’이며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아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힘의 논리,
제국주의의 논리’를 담고 있다.
 

 
 
동학농민군과 양반계급의 동학혁명 인식

그럼 동학농민군은 자신들의 거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먼저 동학군지도부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전명숙 장군과 김개남 장군을 보자.

전명숙(全明淑, 1855∼1895) 장군은 서당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고 한다.

 

유영익은, “전봉준이 열세 살 때 지었다는 ‘백구시(白驅詩)’와 처형당하기 전에

쓴 ‘절명시(絶命詩)’ 그리고 1894년의 ‘무장(茂長)포고문’ 등이 한결같이 격조 높은 작품들임을

감안할 때 서당이나 향교에서 탄탄한 유교적 고전교육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재판 시 심문자에게 “사(士)로 위업을 하압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유교적 소양을 몸에 익힌 백의한사(白衣寒士)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한마디로 왕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민비척족 세력을 제거하고,
상하가 합심하여 살만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개남(金開南, 1853∼1894) 장군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급진적 ‘혁명’을 열망하였다.
그는 참서(讖書)에 심취하여 남원에서 49일 동안 머무는 등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자신을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했으며 수하들에게 관직을 주는 등 역성혁명의 뜻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당시 민중들의 생각은 무엇이었는가.
먼저 동학군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띤 세력의 결집’이라 말할 수 있다.

 

동학군지도부의 구성을 보면 잔반층(殘班層),

다시 말해 몰락 양반과 서얼계층이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 민중들은 참서나 비기에 심취하여

진인(眞人)을 모시고 새 세상을 맞아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희망에 심취하여 있었다.
그들은 전명숙 장군이 ‘진인’이라고 믿었으며 주문만 읽으면 총탄이 범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선사회의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관료와 양반들은, 동학을 서학과 함께 문제시하여 좌도난정(左道亂正)으로 몰았다.

특히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동학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민병대를 조직, 동학군에 대항하였다.
 
이처럼 당시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은 자신들의 사상과 신념,
혹은 현실적인 요구에 따라 천양지차로 갈렸다.
 
 
일심으로 못 배웠나니…
혁명의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다.
수많은 민초들이 일본군과 정부군의 총칼에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그들은 쓰러져 갔는가? 동학혁명은 왜 실패했는가?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 대성사를 내려 보내시고,
이후 몸소 조선 땅에 강세하신 증산 상제님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일심(一心)으로 석 달을 못 배웠고
삼 년을 못 배웠나니 무엇으로 그들(일본 사람)을 대항하리오.
(道典 5:4)
 
 
당시 현실을 살았던 조선인들이
한마음(一心)’으로 힘을 모아 공부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계신다.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인들은,
동서 문명이 세계자본주의 체제로 통합되어 가는 시운을 맞아,
그 대안을 마련함에 있어 서로 다른 생각으로 분열하였다.

 

개화파는 개화파대로, 동학군지도부는 지도부대로,
왕실은 왕실대로 서로의 다른 생각을 조율하지 못한 채 힘을 하나로 결집하지 못하였다.

또한 양반과 관료계급은 동학군을 탄압하고자 일어섰고,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연연하였다.
 
역사의 낡은 틀을 뒤바꾸는 혁명은, 총칼과 의기만 갖는다고 성취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천시(天時)에 부합되어야 하고, 또 원숙하게 깨어진 사상과 비전을 바탕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을 때 혁명의 이상은 역사속에 현실화된다.

 

당시 우리 민족은 역사 변혁의 시운을 맞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할 주체세력의 결집을 이루지 못하였다.

 

개화파는 일본의 근대화에 압도되어 외세 의존적 개혁사상에 집착하였고,
동학군은 각기 체제개혁과 역성혁명의 대의를 걸고 세상을 바꿔보려 하였다.
 
만약 당시 우리 한민족이 넓은 식견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힘을 하나로 모았다면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으리라.
 
<참고자료>
유영익 저,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 일조각, 1998.
박노자 저,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인물과사상사, 2005.
박노자 저, 『우승열패의 신화』, 한겨레신문사, 2005.
황 현 저, 정동호 편역, 『한글로 풀어쓴 매천야록』, 꿈이있는집, 2005.
이희근 저, 「1894년 동학지도자들의 시국인식과 정국구상」, 『한국근현대사 연구』제8집, 1998.
 

출처 : 월간개벽 2월호

 

 

 

전명숙이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킴 

갑오(甲午 : 道紀 24, 1894)년에 태인 동골 사람 전명숙(全明淑)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동학 신도들을 모아 고부에서
난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으니라. 

 

일찍이 전명숙은 신묘(辛卯 : 道紀 21, 1891)년부터
3년간 서울을 오르내리며 흥선대원군을 만난 일이 있더니 

 

대원군이 명숙의 뜻을 물은즉
제 흉중(胸中)에 품은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오.” 하고 대답하니라. 

 

 

거사를 만류하심 

증산께서 명숙과 나이 차이는 많이 나나 일찍부터 교분이 있으시더니 

갑오년에 하루는 명숙이 찾아와 말하기를 내가 민생을 위해서 한번 거사를 하려 하니

그대가 나를 도와주시오.” 하거늘 

 

증산께서 그 전도가 이롭지 못함을 미리 아시고 “때가 아니니 나서지 말라.” 하시며
성사도 안 되고 애매한 백성만 많이 죽을 것이라.” 하고 경계하시니라. 

 

이에 명숙이 대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안 된다면 나 혼자라도 하겠소.” 하고 물러가니라. 

 

 

명의 대세를 지켜보심 

혁명이란 깊은 한(恨)을 안고 일어나는 역사의 대지진인즉,
동방 조선 민중의 만고의 원한이 불거져 터져 나온 동학혁명으로부터
천하의 대란이 동하게 되니라. 

 

증산께서 후천개벽을 알리는 이 큰 난의 대세를 지켜보고 계셨으니,
이 때 증산은 성수 스물넷이요 명숙은 마흔 살의 백의한사(白衣寒士)더라. 

 

개벽의 새 시대를 알린 이 혁명은
갑오년 정월과 3월, 9월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나니라
.

(증산도 道典 1:43) 

 

 

동학혁명의 발발 

갑오년 정월에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악정과
토색질에 분개한 농민들이 전명숙을 두령으로 하여 배들평의 말목장터에서 봉기하니 

고부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모두 풀어 주고

원성의 근원인 만석보(萬石洑)를 헐어 버리니라. 

 

이에 조정에서는 쫓겨난 조병갑의 후임으로
박원명(朴源明)을 새로이 고부 군수로 임명하거늘 
박원명이 진심으로 선치(善治)를 베푸니
어느 정도 원성이 누그러진 백산(白山)의 농민군이 모두 해산하니라. 


동학교도 대검거령

한편 이른바 ‘고부민란’의 진상을 밝히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按{使)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는 동학 교도를 민란의 주모자로 몰아
동학 교도 대검거령을 내리니

 

고부 전역에서 군졸들이 죄없는 농민들을 구타하고
부녀자를 강음(强淫)하며 재산을 강탈하고 가옥을 불지르며

또 동학 교도를 조기 꿰미 엮듯 포승줄로 묶어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그 처자들까지 살상하니라.

 

이에 전 군민의 통분이 뼈에 사무쳐 민심은 순식간에
다시 험악해지고 장차 큰 난리가 터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고부 전역을 휩쓸더라.
(증산도 道典 1:44)

 


문남용과 전설의 인물 ‘오세동’의 운명적 만남

문남용이 황토현 전투에 참여한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어디선가 “생불(生佛)이 들어온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거늘

 

남용이 보니 키가 큰 장정 하나가 어린아이를 업고 들어와
자리에 내려놓더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으니라.

 

이 때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를
신인(神人)이라, 오세동(五歲童)이라.” 하는데 남용이 그 체구를 보니 일곱 살 정도이더라.

 

동학 간부들이 오세동 앞에 과자를 놓고 “드십시오.” 하며
예를 다하여 모시되 오세동은 아무 말이 없거늘 누군가 비웃으며 말하기를
산부처라더니 벙어리를 데려왔나 보다.” 하니라.

 

얼마 후 오세동이 자신을 업고 온 장정에게 묻기를
진중에 총 든 군사가 몇이냐?” 하니 그 사람이 대장에게 물어 오세동에게 그대로 전하거늘

 

오세동이 좌중을 향해 호령하기를 총 든 군사는 모두 모이라!” 하고
지필을 들이라.” 하더니 남용을 가리켜 먹을 갈게 하니라.

 

이에 오세동이 총 든 군사의 숫자대로 손바닥만 한 종이에
푸를 청(靑)’ 자 비슷한 글을 써서 그 군사들에게 각기 나누어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잃어버리면 너는 죽는다.” 하더니
얼마 후 다시 말하기를 “하나는 할 수 없이 죽겠구나.” 하니라.

 

이어 오세동이 이것저것을 일일이 지시하니 동학군이
그 명에 따라 산을 둘러가며 잔솔가지에 이불보와 치마를 뜯어 중간 중간에 쳐 놓고

밤새 간간이 관군을 향해 총을 쏘며 신경전을 벌이매 관군이 이불보를

동학군으로 오인하여 총을 쏘아대거늘 그 틈에 동학군이 관군 진영을 기습하여

동이 틀 무렵에 대승을 거두니라.

 

이후 남용이 노인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진격하는
동학군의 머리 위로 백로(白鷺)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더라.’ 하니라.
(증산도 道典 1:47)


때는 언제입니까

전투가 끝나자 오세동이 자신을 업고 왔던 장정에게 말하기를
십 세가 안 된 아이가 전쟁은 불가하다.” 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자!” 하니라.

이 때 동학군들이 무릎을 퍽 꿇고 오세동을 붙잡으며 때는 언제입니까?” 하고 묻거늘

 

오세동이 한시 두 구절을 써 주는데
남용이 앞 구절만을 기억하니 이러하니라.

 

花老太童禾處子
화로태동화처자

 

남용이 글을 보고 대강의 뜻을 짐작하여
동학군도 아직 때가 아니다.’ 하며 동학군의 대열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오거늘

 

신이한 오세동의 지혜와 기상에 크게 충격을 받은
남용은 이로부터 나도 도를 닦아야겠다.’는 구도의 의지가 가슴 속에 요동치니라
.
(증산도 道典 1:48)

  


동학군의 패망을 예고하심

그 해 7월 어느 날 밤에 불을 밝히지 않고 홀로 앉으시어 깊은 명상에 잠기시니라.

 

이 때 조화로 충만한 천지의 원신(元神)을 열고 삼매에 드시어
동학군의 운명을 예시하는 옛 시 한 수를 읽으시니 이러하니라.

 

月黑雁飛高하니 單于夜遁逃라
월흑안비고선우야둔도

 

欲將輕騎逐할새 大雪滿弓刀라
욕장경기축대설만궁도

 

어두운 달밤에 기러기 높이 나니 선우가 밤을 타서 도망하는구나.

경기병 이끌고 뒤쫓으려 할 적에 큰 눈 내려 활과 칼에 가득하도다.

 

이 글로써 사람들에게 동학군이 겨울에 이르러 패망할 것을 일러 주시며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시더니 과연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매
이 말씀을 순종한 사람은 무사히 화를 면했으나 듣지 않고 종군한 자는 모두 죽음을 당하니라.

 

증산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증산을 일컬어 말하기를 신인(神人)이라.” 하고 “공부 않고 날 때부터 아는 사람이라.” 하니라.
(증산도 道典 1:51)

 

전명숙 장군을 찾아가심

한편 전명숙 장군의 주력 부대는 10월 말경에 공주를 공략하기 위해 비장한 공세를 펼치니라.

증산께서 몰살의 큰 위기에 처한 동학군의 운명을 내다보시고

곧장 공주에 있는 전 장군의 진영을 찾아가시어

무고한 백성들만 죽이고 절대 성공을 못 하니 당장 전쟁을 그만두시오.” 하고 강권하시나

 

명숙은 외세를 몰아내고 탐관오리를 물리쳐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뿐인지라 증산께서 일러 주시는 어떠한 말씀도 새겨듣지 아니하니라.

(증산도 道典 1:56)

 

 

불안과 두려움이 온 나라에 가득함

동학혁명 이후로 국정(國政)은 더욱 부패하여 벼슬아치는 오직 포학(暴虐)과 토색을 일삼고
모든 학(學)과 교(敎)가 참된 덕을 잃어 온갖 폐단을 낳아 선비는 허례만 숭상하며,

 

불교는 혹세무민에만 힘쓰고,

동학은 혁명 실패 후 기세를 펴지 못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서교(西敎)는 세력을 신장하기에만 급급하니라.

 

이에 세상 인심이 날로 악화되고 백성들은 고난과
궁핍에 빠져 안도할 길을 얻지 못하여 곳곳마다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하더라.

(증산도 道典 1:65)

 

 

서양으로 넘어가는 동양을 붙들어 주심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동학(東學) 신도들이 안심가(安心歌)를 잘못 해석하여 난을 지었느니라.

 

일본 사람이 3백 년 동안 돈 모으는 공부와
총 쏘는 공부와 모든 부강지술(富强之術)을 배워 왔나니
너희들은 무엇을 배웠느냐.

 

일심(一心)으로 석 달을 못 배웠고
삼 년을 못 배웠나니 무엇으로 그들을 대항하리오.
그들 하나를 죽이면 너희들은 백이나 죽으리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

 

이제 최수운(崔水雲)을 일본 명부, 전명숙(全明淑)을 조선 명부,
김일부(金一夫)를 청국 명부, 이마두(利瑪竇)를 서양 명부로 정하여
각기 일을 맡겨 일령지하(一令之下)에 하룻저녁으로 대세를 돌려 잡으리라.

 

이제 동양의 형세가 누란(累卵)과 같이 위급하므로
내가 붙들지 않으면 영원히 서양으로 넘어가게 되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4)


 

동학 역신 해원 공사
공신이 여러 성도들을 돌려보낸 뒤에 상제님께서
공신, 경수, 응종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경석이 성경신(誠敬信)이 지극하므로
달리 써 볼까 하였으나 제가 스스로 청하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로다.

 

지난 갑오년에 동학 신도들이 여러 만 명 학살되어
모두 지극히 원통한 원귀(寃鬼)가 되어 우주간에 나붓거리는지라

 

원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안으로는 불량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나니
다만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못함이라.

 

마음으로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릇 죽은 자가 수만 명이니

그 신명들을 해원시켜 주지 않으면 후천에 역도(逆度)에 걸려 반역과 화란이 자주 일어나

정사(政事)를 못 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제 그 신명들을 해원시키려고
원혼을 통솔할 자를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제국을 말하니 이는 스스로 청함이라.
이제 경석에게 동학 역신 해원의 삼태육경(三台六卿) 도수를 붙이리라.” 하시고

 

그 부친이 동학 접주로 그릇 죽었고 경석도 또한 동학 총대(總代)였으니
오늘부터는 동학 때 한 맺힌 신명들을 전부 경석에게 붙여 보내어 이 자리에서
왕후장상의 해원이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춘치자명(春雉自鳴)의 설화(說話)를 들어 보라.
배짱이 그만하면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하리니 뒷날 두고 보라.

석이 금전도 무수히 소비할 것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도 갑오년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니라.
경석에게 밥주걱을 맡겼나니 경석은 제왕(帝王)만큼 먹고 지내리라.

 

이렇게 풀어놓아야 후천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 하시고
두루마리에 글을 써서 대공사를 처결하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205)

 

너의 동토(東土)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무르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주었더니

 

조선 조정이 제우를 죽였으므로
내가 팔괘 갑자(八卦甲子)에 응하여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에 이 세상에 내려왔노라.

최제우는 유가(儒家)의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나니 나의 가르침이 참동학이니라.

 

동학교도가 모두 수운(水雲)의 갱생(更生)을 기다리나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느니라.

내가 수운을 대신해 왔나니 내가 곧 대선생이니라.

(증산도 道典 2:94)


동학 주문에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으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

 

내가 천지를 개벽하고 조화정부를 열어
인간과 하늘의 혼란을 바로잡으려고 삼계를 둘러 살피다가

너의 동토에 그친 것은 잔피(孱疲)에 빠진 민중을 먼저 건져 만고에 쌓인 원한을 풀어 주려 함이라.

 

나를 믿는 자는 무궁한 행복을 얻어
선경의 낙을 누리리니 이것이 참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 난다.’ 하였으니 그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증산도 道典 3:184)
 

남조선 국운 도수

하루는 약방에 성도 여덟 사람을 벌여 앉히신 뒤
사물탕 한 첩을 지으시어 그 봉지에 사람을 그리시고
두 손으로 약봉지를 받쳐 드시며 시천주주를 세 번 읽으시니라.

 

이어 여덟 사람으로 하여금 차례로 돌려서 그와 똑같이 하게 하신 후에
남조선배가 범피중류(汎彼中流)로다.” 하고 노래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갑오년(甲午年)에는 상륙을 못 하여 풍파를 당하였으나
이제는 상륙하였으니 풍파는 없으리라.

 

장차 조선이 제일로 좋으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388)

 

불사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