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미래는? _ 북한 핵문제와 상씨름의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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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상씨름을 붙이리라”


증산 상제님은 100여년 전 천지공사를 집행하실 당시,

 “현하대세가 씨름판과 같으니 애기판과 총각판이 지난 뒤에 상씨름으로 판을 마치리라”

증산도 도전5:7:1고 말씀하였다.

 

미·일·중·러 등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무대 삼아 벌이는 각축전을 씨름판에 비유해 말씀하신 것이다.
 
『개벽 실제상황』(안경전, 대월출판, 2005) 에서는

러일전쟁(1904~1906)과 1차 세계대전(1914~1918)을

애기판 씨름으로, 중일전쟁(1937~1945)과 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총각판 씨름으로 정리해준다.

 

그리고 상씨름은 이러한 두 단계의 전쟁을 거쳐 일어날 큰 전쟁으로

“개벽상황과 직결되는 결승전이며  인류사의 새 장을 열기 위한 끝내기 승부”이다.

이 상씨름은 “씨름판대는 조선의 삼팔선에 두고 세계 상씨름을 붙이리라”

(증산도 도전5:7:3)는

 

증산 상제님 말씀처럼 조선의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이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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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이란 무엇인가?

2차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의 두 나라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남과 북에 진출하면서

그 점령지의 경계선을 그은 것이 아니던가!

남북한의 분단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국가가 남북을 나눠 점령하다보니 서로 다른 체제가 출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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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남북한 단일 정부를 세우려는

일부 인사들의 노력은 있었지만 이념적 대립은 너무나 컸다.

한쪽은 미국을 모델로 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았던 반면 다른 한쪽은 자본주의를 인민에 대한

착취 체제로 규정하고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두 가지 이상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결국

 

하나의 정부가 아니라 남북한 각각의 단독정부 출현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고 2년 뒤 북한은 남한을 공산주의 체제로 통일하기 위해 침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한국전쟁이 『개벽 실제상황』에는 상씨름의 시작으로 정리되어 있다.
 
 
동서냉전과 한국전쟁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냉전시대의 대표적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남북한만의 전쟁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에서는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한 남한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6개국의 군대로 구성된 UN 연합군이 파견되었으며 소련과 중국 역시 북한을 도왔다.

한국전쟁은 어느 면에서 보자면

좌우 이데올로기와 진영이 한반도에서 맞부딪친 국제전 성격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3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그 어느 쪽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결국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평화협정이 아닌 정전협정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남북한의 대립은 끝나지 않았다.

남북한의 대립은 세계적인 차원의 냉전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 역시 모든 부문에서 체제경쟁을 하였다.

유럽도 공산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간의 첨예한 대립을 면할 수 없었다.
 
 
동구권 공산주의 블록의 붕괴와 북한의 선택


세월이 흘렀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 공산주의 진영 안에서 체제붕괴의 조짐이 나타났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정책으로부터 소련 체제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소련 체제의 균열은 동구권에 광범위한 자유화 운동을 촉발하였다.

1989년 독일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소련 연방도 무너졌다.

연방을 구성하던 다수의 민족공화국들이 소련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순식간에 공산주의 블록이 와해된 것이다.
 
이러한 동구권의 붕괴 이전에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에 의해 개방정책이 시도되었다.

공산주의 경제정책의 한계를 절감하였던 그는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과감한 실험을 한 것이다. 그의 자본주의 도입 시도는 성공하였다.

현재까지 심각한 정치적 혼란 없이 중국 경제의 발전과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체제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고 중국이 개방정책을 채택함에 따라

더욱 더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이는 두 차례에 걸친 국제정치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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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북핵 위기와 제네바 합의

처음으로 북한 핵 문제가 제기되었던 1994년에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확신한

미국 클린턴 정부가 북한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검토함으로써 한반도에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카터 전(前)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회담으로 적극적인 돌파구가 마련되어

그 해 10월 북미 양국간의 제네바 합의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제네바 합의는 북한이 핵시설의 가동을 중지하는

대신 2기의 경수로와 매년 50만 톤의 중유를 받는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에 더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완화하며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도 들어가 있었다.

이러한 합의의 실천을 위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설립되고 2000년 경수로 건설에 들어갔다(경수로 건설비용의 70%가 남한의 부담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제네바 합의는 깨졌다.
 
북미 양측은 합의 불이행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였다.

북한이 1998년 파키스탄 정부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핵폭발 실험을 하고

핵연료 재처리 시설도 가동함으로써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는 것이 미국의 주장이었다.

반면 북한은 미국이 중유 제공을 제외한 어떠한 약속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제2차 북핵위기와 6자회담

미국 역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회피하긴 힘들다.

무엇보다 2001년 초에 보수적인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에 대한 유화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특히 9.11 테러 이후 조지 부시는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다.

신정부는 클린턴 정부가 한 제네바 합의도 지킬 마음이 없었다.

 

대북 강경파인 네오콘들은 제네바 합의를 깰 구실을 찾았다.

2002년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계획을 추진한다는 의혹이 바로 그러한 구실을 제공하였다.

부시 정부는 제네바 합의에서 약속된 경수로 건설과 중유공급을 중단하였다.

이에 맞서 북한은 다시 핵확산금지조약(NTP)을 탈퇴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변국들의 외교적 노력이 전개 2003년 8월 처음으로

6자회담이란 것이 개최 되었다.

이것은 남북한을 포함하여 한반도 주변 4대 강국들이 참여한 다자간 회담으로,

상제님이 말씀하신 ‘오선위기(五仙圍碁)’의 구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6자회담은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열렸으나 실질적인 진전을 거두지 못했다.

작년에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개발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신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들여놓지 않고 또 북한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또 북미 양국은 상호주권을 존중하고 양국간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한반도의 비핵화가 실현될 것이라는 약속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흥분하였다.

그러나 이 9.19 공동선언은 공(空)문서로 전락하였다.

경수로 제공이 먼저냐 핵폐기가 먼저냐를 놓고 양국간의 입장이 달랐던 것이다.
 
 
남한의 햇볕 정책과 북한의 벼랑끝 전술

북한을 테러 지원국, 불량국가, 폭정의 전초기지로 보는 미국의 시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미국은 9.19 공동선언 직후부터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를 단행하였다.

북한의 대외계좌를 동결함으로써 북한의 목을 죄려고 한 것이다.

2006년에 들어서는 경수로 건설도 중단되었다.

북한은 이에 맞서 핵탄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미사일 발사실험을 감행하였다.
 
이처럼 현재까지 핵개발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대립과 갈등은 몇 차례의 합의를 거쳐

해결될 듯 보였으나 여태 해소되지 않고 한반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북미간의 대립과는 달리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간의 관계는 상당히 개선되어 왔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금강산 지역이 남한 관광객에게 개방되었고

또 남북한 경제협력사업의 근간인 개성공단이 건설되었다.

 

북한으로 하여금 대화와 토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려는 소위 햇볕정책이다.

이러한 유화적인 대북 정책은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한층 더 확대되었다.

남한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남북한간의 대립구도 해소를 통해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시키고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길을 닦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과 북한 모두 이러한 남한의 열망과는 반대로 자신들만의 길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핵을 둘러싼 북미간의 대립은 남한의 손을 벗어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동치는 한반도, 그 운명은?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 번 북한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생각해보자.

북한은 소련과 동구 공산진영이 모조리 붕괴한 이후에도 살아남아 자기식 사회주의 체제의 고수를

외치는 나라이다. 그리고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세계초강대국 미국에 대담하게

맞서는 나라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북한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러 외국으로부터 계속해서 식량원조를 받아야 할 지경이다.
 
북한은 이러한 인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미국이 그러한 외부의 적이었다.

북한 정권이 이렇게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이라는 존재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사실 북한에게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순전히 허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1994년 북핵 위기시에 보여주었듯이 미국은 실제로 북한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강한 무기체계를 가진 미국이 공격을 한다면

북한이 오래 견디지 못할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북한은 이러한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북한은 체제에 대한 완벽한 보장이 주어지지 않는 한 쉽사리 핵을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북한의 핵은 미국에만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한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그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다.

중국의 경우 직접적으로 북한 핵에 대해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나

 

북한의 핵개발이 일본의 군비증강을 부추기고 동북아시아 정세를 혼란에 빠뜨릴 위험성이 있다는

데서 북한의 전략에 대해 비판적이다.

 

더욱이 경제발전에 우선적 가치를 두고 있는 중국이 볼 때 북한의 전략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최근 북한의 미사일 개발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제재결의안에 북한의 혈맹 중국이 찬성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이 세계에서 완전 고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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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역시 미국과 맞서고 있는 이란이나 시리아 같은 나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 역시 미국에 의해 불량국가로 낙인찍혀

면밀한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에 북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재 북한은 막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다. 핵과 미사일을 갖고 더욱더 위험한 도박을 감행하여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는 것 외에는 별다른 탈출구가 북한에게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북한의 협박과 도박에 미국이 언제까지 인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 오선위기 상씨름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주변 4대강국이 펼친 6자회담의 마당 위에서

막바지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올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이 오선위기 상씨름판을 뒤흔들고, 동북아 질서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지난 100년의 역사가 그러했듯, 한반도 주변 강국의 패권경쟁은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지금 한반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100여년전 증산 상제님은

인류사의 새 장을 열기 위한 끝내기 상씨름 승부의 결말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상씨름으로 종어간(終於艮)이니라.

전쟁으로 세상 끝을 맺나니 개벽시대에 어찌 전쟁이 없으리오.

아무리 세상이 꽉 찼다 하더라도 북쪽에서 넘어와야 끝판이 난다.”

(증산 상제님 말씀, 道典 5:415:2~3)
 

김현일 _ 증산도사상연구소 연구위원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6.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