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역사의 개척자, '핵랑'

새 역사의 개척자, '핵랑'

 

89년 '발췌본', 95년 '모본'이 발견된 이후로 

화랑세기」의 진본 논쟁은 10년이 넘도록 계속 되어 왔다.

 

그러한 싸움이 계속된 끝에

최근에는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는 쪽으로 학계의 의견이 쏠리고 있는데

여러 근거들이 계속해서 제시되고 있다. 만약 발견된 이 책이 진본으로 인정이 된다면,

실존하는 역사서중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보다도 오래된 역사서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역사학계에 적잖은 충격을 던져줬다.

이 책에 나온 그때 당시의 풍속과 문화가 모두 진짜라면 지금 현재 나와있는 역사학 연구 결과의

절반 이상이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화랑세기를 인정할 수 없다는 사학계의 반발도 그만큼 거세었던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필사본에 의하면, “화랑세기”는 1세 위화랑(魏花郞)으로 부터

32세 신공(信功)까지 화랑들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이 책에는 화랑들의 생활상 및 계보를 비롯하여 당시 왕실의 근친혼 등의 성 풍속 등 개방적인 성 풍속과,

왕위의 계승 방식, 권력 쟁탈 음모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중 특히 화랑세기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김대문의 가계를 보면, 1세 풍월주 위화랑이 5대조이고, 4세 풍월주 이화랑(二花郞)이 고조부,

12세 보리공(菩利公)이 증조부,

20세 체원공(體元公; ‘화랑세기’의 위서를 주장하는 서울대 노태돈 교수는 예원[禮元]이 옳다고 한다.)

이 조부, 그리고 28세 오기공(吳起公)이 부친이다.

 

김대문은 진골귀족가문 출신으로 704년(성덕왕 3) 한산주도독을 지낸 인물이다.

저서로《계림잡전(鷄林雜傳)》《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한산기(漢山記)》

《악본(樂本)》이 있다.

삼국사기 편찬에 큰 참고가 되었으며 통일신라의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화랑세기"의 짧은 발문(跋文)을 보자.

  “선고께서 일찍이 향음(鄕音)으로 화랑의 세보를 기술하다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하였다.

불초(不肖)는 공무의 여가에 화랑 행정의 큰일과 계파 맥락의 바르고 사악함을 모아서,

선고께서 옛일을 상고하신 뜻을 잇고자 하였다. 어쩌면 선사(仙史)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있으리라.

”(조기영 편역. 화랑세기. 도서출판 장락. 1997. p.183)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화랑세기”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를 거쳐서까지 완성하고자 했던 책의 주인공인 화랑은 어떤 존재였을까?

어떤 힘으로 신라의 통일을 건설하는 주역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앞에서 밝히고자 한 '선사仙史'라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화랑(花郞)이란 ‘천지화랑’(天地花郞)의 준말로‘천왕랑’(天王郞) ‘용화낭도’(龍華郞徒)라고도 한다.

천지화랑과 천왕랑이라는 말을 비교해보면 화랑의 본 뜻을 알 수 있다.

 

또한 화랑의 별칭으로 쓰이는 용화낭도란 

미륵불(彌勒佛)의 수족이 되어서 지상 위에 인류의 용화낙원(龍華樂園) 세계를 건설하는

화랑이라는 뜻이다.

 

 

환단고기 신시본기에 의하면, 

 

낭(郞)이란‘삼신호수지관’(三神護守之官)

즉 삼신상제님을 수호하는 벼슬뜻하며

달리 삼랑, 삼시랑, 삼신시종지랑으로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신상제님이란 세계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 'God' '미륵불' '옥황상제'등의 호칭으로 불러왔던 절대자를 칭하는

우리민족 고유의 호칭이다. 

 

낭가의 역사적 뿌리는

환웅천황께서 동방의 새 역사를 개창할 대 환국에서 거느리고 온 문명개척단 3천 명이며

이들을 제세핵랑이라 불렀다.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지 시대에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와 관료, 제사장, 장교가 모두 미혼의 젊은이들인 낭가에서 나왔다.

 

그들은 삼신상제님게 올리는 제사를 주관하였으며

신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신교의 성소인 소도의 경당에서 문무에 정진하였다.

 

이 낭가제도는 배달국의 제세핵랑에서 시작되어

단군조선의 국자랑, 북부여의 천왕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절, 신라의 화랑,

고려의 선랑(혹은 국선, 재가화상)으로 이어졌다. 

이후 낭가제도는 고려 인종 때 승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의 실패로 인해

국풍파가 유학파에게 패하여 몰락함으로써 명맥이 쇠잔해졌다.

 

그러나 그 정신만은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려

최후의 1인까지 대몽 항쟁을 펼친 삼별초의 난에서 여실이 드러났으며,

조신시대 진유眞儒의 선비정신에까지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갑오 동학혁명, 구한말의 항일 구국운동과 3·1 독림운동, 광복군의 독립운동 등으로

민족의 위기 때마다 낭가의 정신은 유감없이 발휘되어 왔다. 

 

한 마디로 신교의 적통자 낭가의 상무정신은 하늘과 땅의 광명의 역사를 개척하여 

동방 겨레의 '한'의 뿌리를 밝히고 그 이상을 실현하는 원동력이다. 

 

이는 동방의 9천년 역사를 이끌어온 대한의 혼이요,

삼신문화를 지켜온 한민족의 수호정신이었던 것이다.

 

지금 인류 역사의 전환점인 개벽기에 사는 우리들이 다시금 역사를 되돌아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 문화의 흐름이 조화와 통일로 흐르고 있는 현재 아직까지도 분란쟁투를 계속하고 있는

 

세계의 이질적인 문화들,

종교들의 사상이념들을 모두 포용하고 진실로 새로운 해답을 내줄 수 있는

우리 문화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낭가, 핵랑'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핵랑과 우리문화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

 

출처 : http://www.jsd.or.kr/hwan/community.php?mid=99&r=view&uid=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