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佛의 길-1] 선(仙), (佛) 수련의 요체.

 

선가(仙家)의 수행론 - 수심연성(修心鍊性)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지형체(佛之形體)니 도를 닦으려면 체(體)부터 잡아야 하느니라.

 

器虛則受物이요 心虛則受道니라

기허즉수물      심허즉수도

그릇을 비우면 물건을 담을 수 있고

마음을 비우면 도를 받을 수 있느니라.

 

도를 이루는 것은 너희들 하기에 달렸느니라.

공부하다가 일심을 잃으면 죽느니라.

 

<甑山道 道典 2편 142장>

 

불지형체. '형체'란 형신의 체, 즉 심법을 말한다.

그러나 형체의 뜻에는 보다 더 깊은 인간생명의 근원적 실재의 의미가 내재해 있다.

체(佛性)는 형(身)을 전제로 하므로, 불교는 형과 체를 동시에 강조하여

나의 형 속에서 본래의 체를 잡고 사물의 상상을 깨닫게 한다.

 

유불선(儒佛仙: 유가, 불가, 선가)의 진액을 거두게 하여

모든 도통신(道統神)과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려 각 족속들 사이에 나타난

여러 갈래 문화의 정수(精髓)를 뽑아 모아 통일케 하느니라.

이제 佛之形體(불지형체)하고

仙之造化(선지조화)하고 儒之凡節(유지범절)의 삼도(三道)를 통일하느니라.

내가 유불선 기운을 쏙 뽑아서 선(仙)에 붙여 놓았느니라.

[道典4:16]

 

불가(佛家)가 마음을 강조하였다고 하나 육체를 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밝히는 데서 뿐만 아니라 마음을 닦고 수련한다는 적극적 의미에서

선가(仙家)는 육체적 수행의 이론적 체계화를 세우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동양의학은 음양오행의 철학적 이론을 근거로 하고 있는 바,

그 정밀하고 "자세한 이론은 선가에 있으며 의학은 그 끄트머리 즉 말단을 이어받았다"

[동의보감]고 한다.

 

* (참고) 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선가의 대가인 정북창 선생의 동생인 정작 선생이

허준 의성과 함께 참여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 이론적인 틀은 선가에서 제공한 것이다.

물론 정작 선생도 단학의 대가이다.

 

이를 통해 상제님께서 약장을 짜실 때 고부의 선인포전 기운을 바탕에 까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선의(仙醫)가 아니면 이 세상을 고쳐낼 수 없다'는

도전 개정판에 대한 사부님의 말씀을 상기해보라.

 

선도수련은 천지일월과 그 축소판인 인체 속의 운행체계를

아주 정밀하고 통찰력 있게 인식하고 있다.

 

사실 선가의 이론 그 자체가 우주변화원리의 핵이라고 해도 무방하며,

그 원리를 나의 몸으로 체득하여 불멸의 생명 경계인 선(仙)으로 들어가는 것을 추구한 것이다.

옛말에 "단가(丹家-仙家)와 산가(山家)는 역법(逆法)이 요체"라는 말이있다.

 

hy3.gif선도수련과 풍수지리는

'거꾸로 되돌아가는 역(逆)법'이란 말이다.

이때 역법(逆法)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선가 수도의 핵심이랄 수 있는 역법은

단순히 '거스른다'고 라고 이해하면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이때 역이란 생명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생명과

도의 근원으로 되돌아감)을 뜻하는 것으로,

 

분열과 상극으로 인해 죽음으로 이르는 나의 몸과 정신을 다시 우주 생명의 본원으로 되돌리는 것을 일러 역(逆)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마디로 생명과 도의 뿌리로 돌아가는

원시반본(原始返本)과 역법(逆法)은 완전히 동일한 뜻인 것이다.

 

그 과정이 먼저 하단전에 있는 정(精)의 양기(陽氣)를 사정시켜 배출하지 아니하고,

다시 뇌(腦)인 신(神)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를 수승화강(水昇火降: 물은 위로 불은 아래로 내려와 조화가 생김)이라고도 하며

환정보뇌(還精補腦)라고도 한다.

 

정(精)이란 쉽게 말하면 인체의 동력원이다.

자동차도 기름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듯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피(血)이다.

그 혈(血)이 다시 한 차원 숙성 변화되면 맑은 정액(精液)이 된다.

 

정은 단순히 정액뿐 아니라 인체의 호르몬 기운으로 보기도 한다.

이 정(精)은 신장(腎臟)에서 주관한다.

 

인체는 소천지로서 신체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항상 인체는 내열(內熱)을 발생한다.

이 열(熱)을 잘 흩어주며 또한 정(精)을 남용치 않으면 인체는 건강하고 장수하게 된다.

이것을 학술용어로 성명쌍수(性命雙修: 정신과 육체를 함께 닦음)라고 한다.

 

즉 마음을 잘 조절하고 기(氣)와 생명수인 정(精)을 남발치 아니하고

"뇌"인 신(神)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로써 수행의 시기는 나이가 젊을수록, 더욱 어릴수록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학술용어로 금목상합(金木相合)이라고 하며 ,

청룡(木)과 백호(金), 즉 용과 호랑이가 서로 엉킨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전일(專一)한 하나의 상태가 되어 안정의 궁극상태에 이르게 되어

인체는 천지조화의 근원과 만나게 된다.

 

성명쌍수란 무엇인가?

수련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명쌍수(性命雙修) 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데 성명쌍수의 '성(性) ' 과 '명(命) ' 을 에워싸고 적지 않은 오해와 혼란이 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령 '성' 이라고 하면 으레 남녀 성별을 일컫는 것이거나 성행위로서의 섹스를 나타내는

글자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선도에서 가장 중요한 수련방법의 하나인 성공(性功) 을

자칫 섹스 공부쯤으로 착각하는 경향마저 있다.

최근에는 '성공(性功) 해야 성공(成功) 한다' 는 제목의 책까지 출판됐을 정도다.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한마디로 '섹스에 강해야 성공한다' 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仙道에서 '성(性)' 은 그런 통속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性이란 글자의 뿌리를 캐보면 '성(性)' 은 사람이 태어날(生) 때부터 타고난

마음(心) 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性功)' 의 참뜻은 본래의 바른 마음을 찾는 이른바 '마음 공부' 로 풀이된다. 사람이 마음을 바로 닦으면 생광(生光) , 즉 빛을 낳고, 빛은 밝음으로 상징되고,

밝음은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마음 공부의 요체다.

마음 공부의 극치는 바로 견성(見性) , 즉 본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성명쌍수에서 명(命) 은 명공(命功) 의 준말이다.

'명' 이란 글자는 사람(人) 이 하나(一) 를 향해 조아리는 것(叩) 을 상징한다.

이것은 명공(命功)의 본질이 하나(一) 를 찾는데 있음을 말해준다.

 

仙道에서 하나(一) 는 만물의 비롯됨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늘 또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한다.  곧 사람이 소우주라는 말도 이래서 생겨난 것이다.

'명공' 은 '성공' 과 대칭을 이룬다. '성공' 이 마음 공부로 요약되는 것처럼
'명공' 은

이른바 '몸 공부' 로 설명된다. 그러나 '명공' 은 단순히 체조나 하는 몸 공부가 아니다. 자기 몸안의 하나(一) 의 기(氣) 를 완벽하게 닦아 태초의 무극의 상태인

순양(純陽)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성명쌍수란 마음 공부와 몸 공부를 함께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성공(性功)' 과 '명공(命功)' 을 균형있게 함께 닦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 과 '명공' 을 각각 따로 닦고 궁극적으로 균형을 잡도록

가르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성' 과 '명' 의 이규(二竅) ,

즉 두 구멍 자리는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仙道에선 '性' 의 구멍은 머리골에 있고, '命' 의 구멍은 아랫배에 있다일컫는다.

 


불가(佛家)의 수행관 - 명심견성(明心見性)


을사(乙巳 : 道紀 35, 1905)년 봄에 하루는

상제님께서 전주 불가지(佛可止)에 머무시며 대공사를 행하시니라.

이 때에 한 성도가 명을 받들어 불(佛) 선(仙) 유(儒) 세 글자 가운데서 불(佛)자를 짚으니 상제님께서 심히 기쁜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네가 바로 짚었도다.” 하시니라. 道典 5:65

 

진묵대사.bmp

(좌: 진묵대사 영정, 상제님 천지공사를 통해 불도의 종장으로 임명되셨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에서 꽃을 피우고 한국에서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그만큼 대덕 고승들이 우리 한국에서 많이 나왔다. 불교수행의 핵심은 명심견성이다.

곧 마음을 밝히어 자기 본연의 불성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불립문자(不立文子),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한다.

여기서 문자는 언어를 뜻하기도 한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즉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것이다.

 

선가는 단전호흡 등의 육체적 수행을 강조한 측면이 있으나

결국은 마음과 육체수련을 다 강조하여 순양(純陽)의 궁극세계를 지향했다.

마음과 육체를 성(性)과 명(命)으로 직접 연결시키는 데는 미묘한 문제가 있으나,

 

불가는 마음의 수행을 더 강조하여 마음의 핵심인 성(性)을 꿰뚫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도 결국은 성명쌍수를 주장한다.

 

단지 그 과정과 가르침을 치나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거의 모든 이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앉아서 화두를 튼답시고 허망하게 마음만 붙들고 늘어졌을 뿐이다.

 

우리는 꼭 알아야하는 것이 선불(仙佛)의 진정한 가르침은 마음 또는 육체 어느 한 곳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듯 소천지인 육체와 천지의 중심인 마음 전부를 도세계로 들어가는 길로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궁극적인 종착지와 방법론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선(仙)은 무극의 허무세계를 궁극의 지향점으로 삼았고,

불(佛)은 태극자리인 생명탄생의 궁극점인 공세계를 지향점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불가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만물은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였다. 불성이 곧

천성(天性)의 본래자리인 일심(一心)의 경지를 가리킴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이 불성을 회복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중흥기를 이룬 육조 혜능대사는 그 핵심이 무념, 무주, 무상에 있다고 했다.

 

사물의 본질은 시시각각 변화하므로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한다. 또 무심이라고도 한다.

실질적으로는 정(情)과 성(性)이 하나로 합일된 일심(一心)상태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정(情)적인 마음을 무심(無心)케 하고 견성(見性)하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돈과 점(頓,漸)의 두가지 방법상의 논란이 있어 왔다.

 

불가의 무심은 원효대사가 밝혔듯이 실지로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의 합치된 자리인 일심(一心)상태로 진(眞)과 속(俗)이

둘이 아닌 것인데, 이를 단순히 공허한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적멸한 측면만을 강조하다 보니 도리어 산 속에서 주저앉아 허무만을 추구하는 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진정한 불가의 가르침이 마음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듯, 그들의 종지가 산 속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즉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 적극적인 중생구제의 활동으로 상극의 바다에서

헤매이는 중생들을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