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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과 구두선

讀書독서    不見聖賢불견성현   爲鉛塹傭위연참용
居官거관    不愛子民불애자민   爲衣冠盜위의관도  
講學강학    不尙躬行불상궁행   爲口頭禪위구두선
立業입업    不思種德불사종덕   爲眼前花위안전화

 

책을 읽고도 성인이나 현자를 못 본다면
글씨를 배끼는 사람에 지나지 않고,

 

벼슬 자리에 있으면서도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관복을 입은 도둑에 지나지 않는다.

 

학문을 가르치면서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구두선일뿐이고,
사업을 일으키고도 덕을 심지 않으면
눈앞에 피고 지는 한때의 꽃일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간화선 수행은 임제(臨濟) 선사를 종조(宗祖)로 하는
임제종(臨濟宗)을 통해 확립되어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현대 물질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지도 방식이, 특히 일본 임제종의 경우 너무 틀에 박혀
공식화되어 버렸다는 지적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피상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비춰지는 것뿐이지
실제로 그 속을 들어가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즉, 수행자의 기본 지침서인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들어있는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젖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든다[蛇飮水成毒 牛飮水成乳]' 라는
구절처럼 간화선도 좋은 스승밑에서 제대로만 수행하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잘못하여 조사 어록(語錄)에

담겨있는 귀절의 참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언구에 현혹되어 마치 크게 깨달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간화선을 입으로만 수행하는
구두선(口頭禪)이라고 매도하는 선어(禪語)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구두선의 폐해 때문에

야호선(野狐禪)이니 앵무새선이니 사다리선이니 하는 유사한 선어들이

홍수를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항상 다시 말하지만 모든게 음양이다.
독음독양은 만사불성이라.

음없는 양 존재하지 못하고 양없는 음 존재하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이理론이냐 이氣론이냐 하는 유교의 퇴계 이황선생과 율곡 이이의
이치가 먼저냐 기가 먼저야 하는 싸움과 같다.


모두가 중요하다.
다만 지소선후만 있을뿐이다.

간화선도 역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화두와 공안를 잡고
생사를 뛰어 넘는 대오각성을 하면 진정한 수행을 하기 위한
참된 전제 조건이 될것이다.

생사관 참 좋은 말이다.
깨우침의 극치는 죽느냐 사느냐
갖느냐 버리느냐 하는 생사관에 다 들어있다.

상제님 말씀에 佛은 仙의 밑자리라고 가르침을 내려주셨다.
조화를 쓰기 위해서는 마음자리가 닦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영생불사와 능엄경의 육통법도

생사를 뛰어 넘는 텅빈 막사선 막사악이 중요하다.


간화선과 구두선을 무시하고
세속에 찌들은 사심과 탐욕으로 수행에 임한다면
천사만마의 밥이되어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목숨을 보존하지 못한다.
또한 그러한 사례를 무수히 보아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간화선은
수행에 앞서 먼저 세상 만사가 한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우치고 들어가면 간화선의 중요함도 결코 그르다 할수는 없다.

지소선후면 즉 근도어라.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 것을 안다면
도에 가깝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순환의 정신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지후각(먼저 알고 난 뒤에 각이 열린다)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이것은 필자의 뼈아픈 경험이며 깨우침이다.

상제님 진리에 정통 하려면 유불선 기독교의 핵심에 통달해야한다.
항상 크게보고 깊게 생각하자..................

불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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