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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禪問答)

 

◆선문답의 개요

선문답은 깨달음의 응용과 확인
그리고 체득을 지향하는 선종의 전통적인 표현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뜬금없는 동문서답이나 내용 없는 언어의 유희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잘 가꾸고 보존되어 내려온 선종의 전통적이고 비밀스런 문화에 속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인류가 가진 가장 위대한 표현기능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묻고 답하는 일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발전의 원동력이자, 인간이 지닌 가장 본능적인 <자기표현수단>이다.


우리는 불교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묻고 답하는 일>
이야말로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우기 실제적인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가르침은 더더욱 질문에 대한 답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범주속에서 발견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선문답이다. 선문답은 동문서답이 아니요, 신비적인 유희도 아니다.
선가의 언어 체계속에서 드러나는 절실한 표현방식인 것이다.

 

◆선문답

선문답은 선(禪)을 지도, 체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선사(스승)와 납자(제자) 사이의 문답이다.
어찌 보면, 좀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대화라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문답에는 항상 명확한 주제가 있다.


그것은 불교의 진리를 체득하는 것에 관한 것과 불교의 진리, 즉 선종에서의 선(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선의 진리를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설명이나 가르침이 없다. 단지 물음에 대하여 단순하게 드러낸 대답이 있을 뿐이다.
또한 선문답은 깨달음에 관한 검증을 위해서도 쓰여진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선문답은 깨달은 사람 사이의 법의 문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교종적 설명이 아니고, 선종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묻고 답하는 것이다.
여기에 선문답의 난해한 면이 있는 것이다.
선문답에는 그래서 선기(禪機)가 드러난다.

여기에서 막힌다면 그것은 곧바로 물은 사람의 현성공안(現成公案)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가르침의 방편이 또한 선문답인 것이다.

억지로 이야기하자면,
선문답은 깨달은 사람이 선종의 전통적 방식에 의해서 본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공안과 함께 선사의 지극한 지도편달의 한 방편이다.


선종의 이러한 전통적 방식은 대화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시적(詩的) 형식을 빌린 게송을 통해서도 드러내어 진다.

 

◆초심자가 공안(公案, 화두)을 보면

초심자의 경우에는 완전히 헛소리처럼 들리기 쉽상이고
아니면 전혀 반대인 신비주의적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선문답은 결코 있지도 않은 허위를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선의 진리를 그대로 일상적 언어를 통해 뱉어 낸 행위에 불과 한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禪의 도리를 설명해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수행을 해나가는 데 장애만을 줄뿐이다.

하지만 선문답을 완전히 비논리적 유희나

동문서답식 해프닝으로만 받아들이는 현상이 존재한다면
이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은 바로 불교의 정수이고, 이러한 선을 접할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올바른 불교를 배우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문답에 사용되는 언어

다양한 언어들이 선문답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적인 표현을 위주로 표현하는

 悟道頌이나 傳法偈 등의 게송을 살펴보면 상당한 상징과 비약이 등장한다.


그러나 거기에 사용되는 언어도 마찬가지로 상식적 언어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다만 논리의 비약이 따를 뿐이다.

혹시 이해못하는 단어나 어휘는 시대상황 속에서

지금은 약 간 이해하기 어려운 방언이나 도구의 이름 정도가 고작이다.


그리고 선문답에서는 단순한 언어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할, 방, 손짓, 발짓, 몸짓, 시늉 등의 광의의 언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할은 벽력같은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방은 주장자로 상대를 치는 것이다.

또한 손짓, 발짓, 몸짓, 시늉 등이 모두 상황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구사되어 진다.
난데없이 계속 소리만 지른다면 그것 또한 선사를 흉내내는 사선(死禪)일 것이다.

 

◆선문답의 기능과 한계

선문답이 공안화 되어 수행의 지침으로 쓰이는 것은 간화선의 훌륭한 전통이다.
물론 간화선의 병폐를 동시에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문답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즉 수행이 없는 선문답은 성립도 안될 뿐더러, 있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또한 선문답만을 일삼는 다면, 이것 또한 하나의 폐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생긴다.

수행에 힘쓰지 않고 언구言句에 쫓아다니며 허덕이는 이가 분명히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간화선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깨달음은 결코 선문답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선문답으로 인해 생긴 공안에 의지해서

올바른 수행이 지어졌을 때만이 깨달음의 조건이 갖추어 지는 것이다.

선문답은 깨달음의 응용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드러냄인 것이며, 또한 확인인 것이다.
공안 하나를 뚫으면 1800공안을 다 뚫는 다는 것이 빈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훌륭한 선사의 적절한 한마디는 기연으로 맞아 떨어질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항상 참구하며, 수행하는 자세일 것이다.

선문답은 활발발지한 응용의 세계이므로,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척이나 중요시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혹한 입장에서 보면 더욱더 미혹을 가중시킬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아무리 활발발지(活潑潑地)한 선문답의 세계도 결국은 공안 하나의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오로지 힘써 수행하는 자세가 먼저 필요한 것이다.

 

3. 무문관(無門關)을 통해 보는 화두의 분류

공안(화두)에 대하여 분석하거나 분류하거나 왈가왈부하는 일은 禪에 있어서
금기(禁忌)하는 부분이지만 배우는 부분에 있어 약간 분류해보고
그 공안의 성격을 이해하고 더 많은 공안들을 접하되 수행을 더욱 진전시키기 위함이다.

간화선과 구두선

讀書독서    不見聖賢불견성현   爲鉛塹傭위연참용
居官거관    不愛子民불애자민   爲衣冠盜위의관도  
講學강학    不尙躬行불상궁행   爲口頭禪위구두선
立業입업    不思種德불사종덕   爲眼前花위안전화

 

책을 읽고도 성인이나 현자를 못 본다면
글씨를 배끼는 사람에 지나지 않고,

 

벼슬 자리에 있으면서도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관복을 입은 도둑에 지나지 않는다.

 

학문을 가르치면서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구두선일뿐이고,
사업을 일으키고도 덕을 심지 않으면 눈앞에 피고 지는 한때의 꽃일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간화선 수행은 임제(臨濟) 선사를 종조(宗祖)로 하는
임제종(臨濟宗)을 통해 확립되어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현대 물질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지도 방식이,
특히 일본 임제종의 경우 너무 틀에 박혀 공식화되어 버렸다는 지적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피상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비춰지는 것뿐이지
실제로 그 속을 들어가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즉, 수행자의 기본 지침서인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들어있는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젖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든다[蛇飮水成毒 牛飮水成乳]' 라는
구절처럼 간화선도 좋은 스승밑에서 제대로만 수행하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잘못하여 조사 어록(語錄)에 담겨있는 귀절의 참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언구에 현혹되어 마치 크게 깨달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간화선을 입으로만 수행하는
구두선(口頭禪)이라고 매도하는 선어(禪語)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구두선의 폐해 때문에 야호선(野狐禪)이니 앵무새선이니 사다리선이니 하는
유사한 선어들이 홍수를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항상 다시 말하지만 모든게 음양이다.
독음독양은 만사불성이라.

음없는 양 존재하지 못하고 양없는 음 존재하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이理론이냐 이氣론이냐 하는 유교의 퇴계 이황선생과 율곡 이이의
이치가 먼저냐 기가 먼저야 하는 싸움과 같다.

모두가 중요하다.
다만 지소선후만 있을뿐이다.

간화선도 역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화두와 공안를 잡고
생사를 뛰어 넘는 대오각성을 하기 위해서 진정한 수행을 하기 위한 참된 전제 조건이 될것이다.

생사관 참 좋은 말이다.
깨우침의 극치는 죽느냐 사느냐
갖느냐 버리느냐 하는 생사관에 다 들어있다.

상제님 말씀에 佛은 仙의 밑자리라고 가르침을 내려주셨다.
조화를 쓰기 위해서는 마음자리가 닦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영생불사와 능엄경의 육통법도 생사를 뛰어 넘는 텅빈 막사선 막사악이 중요하다.
간화선과 구두선을 무시하고


세속에 찌들은 사심과 탐욕으로 수행에 임한다면
천사만마의 밥이되어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목숨을 보존하지 못한다.
또한 그러한 사례를 무수히 보아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간화선은
수행에 앞서 먼저 세상 만사가 한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우치고 들어가면 간화선의 중요함도 결코 그르다 할수는 없다.

지소선후면 즉 근도어라.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 것을 안다면
도에 가깝다고 하였다.그러므로 순환의 정신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지후각(먼저 알고 난 뒤에 각이 열린다)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이것은 필자의 뼈아픈 경험이며 깨우침이다.

상제님 진리에 정통 하려면 유불선 기독교의 핵심에 통달해야한다.
항상 크게보고 깊게 생각하자..................


용봉.jpg 
불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