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절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懇)


소강절(1011-1077)은 북송(北宋) 때의 역학자(易學者)이며 도학자(道學者)이다.

 

본명은 소옹(邵雍)이고 자(字)는 요부(堯夫)인데

 

사후(死後)에 '강절(康節)'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짐에 따라,

후대 사람들은 그를 '강절선생(康節先生)'으로 불렀다.

 

그의 선조(先祖)는 하북(河北) 범양(笵陽)에서 살았고,

그는 어려서 부친 소고(邵古)를 따라 공성(共城)으로 가서 살다가,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는 낙양(洛陽)에 정착(定着)하였다.

고관출신이었던 부필(富弼)과 사마광(司馬光)이 그에게 밭을 사주어 손수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自給自足)하며 살았다.

 

그는 뒤늦게 왕씨(王氏)와 혼인(婚姻)하여 백온(伯溫)과 중랑(仲郎) 두 아들을 두었는데,

백온(伯溫)은 부친의 학문을 계승하여 '황극계술(皇極繫述)'과 관물내외편해(觀物內外篇解)'를 지었다.

 

소강절은 소년 시절부터 쾌할(快活)하고 강개(慷慨)하였다.

젊은 시절 그는 과거(科擧)를 준비하기 위해 소문산(蘇門山)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고학(苦學)하던 중

스승 이지재(李之才)를 만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스승으로부터

수학(數學), 역학(易學), 역법(曆法), 춘추(春秋) 등을 배웠다.


그는 백장원(百丈原)에서 수 년 동안,

잠자는 것과 추위와 더위를 잊고 오직 학문 탐구에만 열정을 쏟았다.

 

그 결과 그의 학문은 날로 향상되었는데 문득 탄식하여 말하기를 '

옛 선인들은 벗을 숭상하였는데 나만 홀로 사방에 이르지 못하였구나' 하면서 전국을 유랑하였다.

 

긴 유랑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도(道)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는 이후 낙양(洛陽)으로 이사하여 평생동안 출세(出世)하지 않고 은거(隱居)하였다.


소강철이 낙양에 은거하고 있을 때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추천을 받아 관직(官職)이 주어졌으나,

매번 사절(辭絶)하고는 부임(赴任)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거처(居處)하는 집을 '안락와(安樂窩)'라고 하였으며,

 자칭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 하였다.


그리고 봄과 가을에는 작은 수레를 타고 낙양의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과 교유(交遊)하였는데,

낙양인(洛陽人)들은 모두 그를 좋아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빈부귀천(貧富貴賤)을 가리지 않고

항상 온화하게 대했으므로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


선생은 아침마다 향을 피우고 정좌하였으며,

신시(申晴)에는 술을 마셨는데 훈훈한 기운이 조금 돈다 싶으면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그는 그가 마시는 술 이름을 태화탕(太和湯)이라 이름짓고, 취흥이 오르면 문득 시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소강절과 가깝게 지냈던 인물로는 사마광(司馬光)과 정씨(程氏) 형제가 있었는데,

특히 정씨 형제와는 30년 넘게 같은 마을에 살면서 세간사(世間事)에 대해 논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죽음에 임박하여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는 이들에게 그는 밝게 웃으며,

 '사람의 생사(生死)는 예나 지금이나 늘 있어 왔던 일이며,


누구나 겪게 되는 일상사(日常事)에 불과하다.

(生於太平世, 長於太平世, 死於太平世).'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소강절의 나이 67세로 희령(熙寧) 10년 7월 5일이었다.

 

명(明)나라 세종(世宗)은 소강절의 인품과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선유소자(先儒邵子)'라는 성현(聖賢)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선생의 생전에 늘 가깝게 지내왔던 정명도(程明道)는 '선생께서는

안으로는 성인의 자질을 갖추었고, 밖으로는 왕도(王道)를 갖춘 분이었다.'고 말했으며

또한, '선생은 지선(지善)의 경지에 도달한 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이천(程伊川)은, '선생은 급류(急流)를 만나 그 가운데 무모하게 뛰어들어 휩쓸리지 않고

깊은 유곡(幽谷)에 들어가 편히 머무름으로써 평생을 쾌락(快樂)하게 살았다.'고 하였으며

 

남송(南宋)의 주자(朱子)는, '선생은 마음을 허명(虛明)하게 가짐으로써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理致)를 미루어 깨달았다.'고 하였다.


특히 이율곡 선생은 '역수책(易數策)'에서, '천년 뒤에 태어나 네 성인(聖人)의 뜻을 얻고,

하늘과 사람을 연구하여 성리(性理)에 통(通)한 사람은 소강절뿐일 것이다.

그의 학문이 진희이(陳希夷)로부터 나왔으나 그가 홀로 깨달아 안 묘(妙)한 이치는 스승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소강절은 이미 역(易)의 이치에 밝고, 또 역의 수에 정통하였으므로

복희(伏犧)의 선천학(先天學)과 문왕(文王)의 후천수(後天數)를 정밀하게 분석하였고,

 

칼날을 빈틈없이 놀리듯 하늘과 땅의 처음과 끝을 다하여 알았으며,

물화(物化)의 감응(感應)을 통하여 미래의 일을 알고 그 지혜를 이용하는 것이 신(神)과 같았으니

어찌 소강절의 심역(心易)을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강절은 평생 거의 읽지 않은 책이 없었는데,

육경(六經)은 원문(原文)만을 보고, 주해서(註解書)는 보지 않았다.

그리고 경서(經書)를 주해(註解)하는 일도 없었다.

 

또한 그는 역(易)의 괘상(卦象)과 수(數)에만 관심이 있었으므로

주역(周易)의 문사(文辭)에 대해서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문사(文辭)가 아닌 상수(象數)로써, 성인(聖人)의 뜻과 역(易)의 이치를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소강절은 자신의 학문을 '선천학(先天學)' 또는 '심학(心學)'이라고 하였으며,

 '선천학의 근본은 마음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誠)'을 강조하여, '선천학(先天學)은 성(誠)을 위주로 한다.

지성(至誠)이면 능히 신명(神明)과 통할 수 있고, 불성(不誠)이면 즉, 득도(得道)가 불가(不可)하다.'고 하였다.

소강절이 체득(體得)하여 펼친 중심사상(中心思想)은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며,


만물과 사람은 한 몸이라는 것이었다.

즉, 그는 천인합일(天人合일)과 만물일체(萬物一體), 물아여일(物我如一)을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우주만물(宇宙萬物)과 합일(合一)된다면,

이것이 곧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소강절의 학설의 연원(淵源)을 살펴보면,

그 역사가 매우 삼원한데,

당말(唐未)의 화산도사(華山道士) 진단(陣)이 선천도(先天圖)를 종방(種放)에게 전해 주었고,

종방은 목수(穆修)에게 전했으며, 목수는 이지재(李之才)에게 전했고,

이지재는 소옹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강절의 저서에는, '황극경세(皇極經世)''어초문대(漁樵問對)''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등이 있다.

그의 역(易)을 전한 사람으로는 그의 아들인 소백온(邵伯溫)과 제자 왕예와 장혼이 있고,

이후로는 장행성(張行成)과 축비(祝秘)가 소강절의 상수역을 계승했으며,


소강절의 상수역(象數易)을 발전시킨 사람으로는 주진(朱震)과 채원정(蔡元定), 채침(蔡枕)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화담(徐花潭)선생이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밝았으며,

이퇴계(李退溪)선생도 소강절의 상수역(象數易)에 조예가 깊었다.

 

소강절이 관여하여 저술했다는 점술서(占術書)로는,

'철판신수(鐵板神授)' '하락이수(河洛理數)''황극책수조수(皇極策數祖數)' '매화역수(梅花易數)' 등이 있다.

 

안락와(安樂窩)

주역의 계사상전(繫辭上傳) 제 2장에 보면, '군자가 평상시에 편안히 있는 것이 역(易)의 서(序)이며,

즐겨 완미하는 것은 효사(爻辭)이다(君子, 所居而安者, 易之序也, 所樂而玩者, 爻之辭也)'라는 구절이 있는데,

 

안(安)과 락(樂)은 여기에서 따온 말이 다. 그러므로 '안락와(安樂窩)'라 함은

'역서(易書)를 완미(玩味)하는 사람이 사는 움막'이라는 뜻이다. 

 

자료출처 : http://blog.daum.net/mposok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