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혼 빠진 민족입니다. 역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그마치 환국, 배달, 조선의 6,960년의 뿌리역사가 신화 속 이야기로, 허구의 역사로,

우상숭배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동시에 역사와 함께 한 우리의 문화와 정신도 잃어버렸습니다.

동방 신교는 인류의 시원문화


우리의 뿌리문화는 바로 신교神敎입니다.
모든것은 뿌리를 바탕으로 시작하는것이 역사입니다.

한민족은 상고 시대부터 신교神敎를 국교로 삼아 생활해 왔습니다.

신교神敎를 제대로 알았을 때 한문화의 실체에 눈을 뜨게 됩니다. 신교의 핵심은 삼신三神입니다.

桓雄(환웅)이 乃以三神(내이삼신)으로 設敎(설교)하시고 以佺戒(이전계)로 爲業(위업)하시고
而聚衆作誓(이취중작서)하사 有勸懲善惡之法(유권징선악지법).


환웅께서 삼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고, 전계로써 삶의
본업[業]을 삼으며, 백성을 모아 맹세하게 하여 권선징악의 법을 두셨다.

- 삼성기 하

神市開天之道(신시개천지도)는 亦以神施敎(역이신시교)하야 知我求獨(지아구독)하며
空我存物(공아존물)하야 能爲福於人世而已(능위복어인세이이)라.


환웅천황께서 펼치신 신시 개천의 도는 신도(삼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어,

나를 알아 자립을 구하며 나를 비워 만물을 잘 생존케 하여 능히 인간 세상을 복되게 할 따름입니다.

- 단군세기 중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의 가르침

신교는 또한 ‘풍류風流’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신라의 지성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풍류의 정체를 ‘유불선 삼교를 다 포함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령스러운 도’라고 밝혔습니다. 19세기 말에 나온 신교총화에서도

신교를 뭇 종교의 조상이며 모태가 되는 뿌리 진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신교는 환국 시대 이래 환족의 이동과 함께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 나가 인류 정신문화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서양의 신탁神託(oracle) 문화 역시 신전神殿에 소속된

무녀巫女들을 통해 신의 의지나 신의 가르침을 받아 내리는 것으로 신교 문화의 한 형태입니다.

신교는 한민족의 고유종교이자 인류의 황금시절, 태고 문명의 근원이었던 시원종교입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환단고기』에는 한민족의 고유 신앙이자 인류의 시원 종교이며
원형 문화인 신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교神敎의 문자적 뜻은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푼다’, 다시 말해서 ‘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단군세기』의 ‘이신시교以神施敎’,『규원사화』의 ‘이신설교以神設敎’,
『주역』의 ‘이신도설교以神道設敎’ 등의 줄임말이 곧 신교이다. 신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과 천지 만물을 모두 다스리는 통치자 하나님인 ‘삼신상제님’이시다.
그러므로 신교는 ‘삼신상제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즉 신교는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인류의 원형 신앙이다.
(역주본 해제 83쪽)

환단고기가 전하는 동방신교문화

1. 신교의 성소, 소도

동방 신교문화에서는 하늘에 천제를 올리던 성스러운 곳을 소도蘇塗라고 하였습니다.

소도에서는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고 주위에 금줄을 쳐서 사람의 출입을 금하며,

매년 3월과 10월에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소도에서는 하늘의 신과 인간이 교감하는 큰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를 신목神木 또는 신단수神檀樹라고 합니다. 초대 단군왕검이 천자로 추대되기 전

천제를 올린 장소인 ‘단목터[檀木之墟]’는 고조선 최초의 소도라 볼 수 있습니다.


고조선의 11세 도해단군이 전국의 12명산 가운데 아름다운 곳을 뽑아

국선소도’를 설치함으로써 소도를 중심으로 한 신교문화가 크게 융성하게 됩니다.

소도와 같은 종교적 성지는 이미 배달시대부터 있었습니다. 『삼국유사』「고조선」조條를 보면

배달국의 초대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시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신시神市라 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太白山頂神檀樹下 謂之神市].


소도의 신단수 문화가 변형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것이 바로 솟대[立木]입니다.

소도는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일본에 가면 소도문화의 원형을 만나게 됩니다.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신사神社가 곧 그것입니다.

蘇塗祭天(소도제천)은 乃九黎敎化之源也(내구려교화지원야)라.
소도에서 올리는 제천 행사는 바로 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삼신오제본기


모든 종교의 시조이며 원조는 우리민족의 신교로 부터 시작되었다.
우리의 뿌리문화는 바로 신교神敎입니다. 동방 신교는 인류의 시원문화

http://magic.ne.kr/xe/?mid=a32&document_srl=62584


우리민족의 국교이며 정교인 신교를 버리고 외래종교를 받아들이는 순간

주체성과 자아를 잃어버리고 민족성이 사분오열되어 국운이 쇠하여 항상 자중지란을 일어켜

스스로 망해왔다. 그 원흉은 외래사상에 빠져 자신의 민족문화정신을 버렸기 때문에

정신의 부평초가 되어 떠돌며 고구려 이후 계속 망해고 자멸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현실의 민족성을 보라! 사분오열하여 망해가는 현실을 직시해보라!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고대역사적으로 우리민족은 전세계를 호령하였다.

이것이 역사를 말살하고 잃어버린 민족의 죄업과 업보가 되어 오늘날도 헤메고 있는것이다!

삶은 소대가리가 되었지만 썩은 뇌라도 있다면 생각해 보라!!!


도가의 경전
그러니까 도덕경은

근초고왕 시절 막고해가 태자에게 간언할 때 부터 나오기 때문에
늦어도 근초고왕 시절에는 들어오지 않았겠나 보고 있습니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영류왕과 연개소문이 당의 환심을 얻기 위해 도사와 경전을 청한 것이 기록상 최초이다

624년에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도사(道士)들을 보내서 천존상(天尊像)과 도법(道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가르치게 한 것이 우리나라 도교 전래의 첫 기록이라고 한다.


삼국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이다.
372년(소수림왕 2) 6월에 진나라의 순도와 아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왓다.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후,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이 세워지고 각종 불상들이 만들어졌다.
또 많은 사람들이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불교가 전파될 무렵 고구려는 급속히 영토가 늘어났고,

다른 민족들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기 때문에 불교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침류왕 1), 백제의 침류왕 때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들어와 절을 짓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 뒤 536년(성왕 13년)에  백제 불교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552년(성왕 29년)에 백제 불교는 일본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많은 고승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불교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의 불교 수용은 쉽지 않았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인정하기 위해 노력하엮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527년(법흥왕)에서야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 공인을 선포하였다.
그 후, 급속히 발전하여 국가적 종교로 존숭되고 승려와 사원의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제일 먼저 고구려 그다음 백제 다음 신라순으로 불교를 받아드렷습니다.



고구려의 불교

고구려의 불교 전래는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의 왕 부견이 보낸 순도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이어 동왕 4년에 아도가 입국하였으며, 곧 초문사와 이불란사가 건립되면서

장려되기 시작하였다.


백제의 불교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으로부터 마라난타에 의해서 전해졌으며
곧 한산에 사찰이 건립되어 국가적으로 장려되었다. 역시 국가적인 필요성에서 받아들인 것이며
남조와 관계가 깊은 백제로서는 그곳으로부터 승려를 맞아들여 그 포교에 노력하게 되었다. 


신라의 불교
신라는 사회적인 후진성에서와 같이 불교의 전래에 있어서도
가장 늦었으며 5세기 눌지왕때에서야 고구려의 묵호자(아도)에 의해서 전하여졌다.

그는 고구려 백제의 경우와 달리 개인적으로 입국하여
경상도 일선군(지금의 선산) 모례집에서 포교를 시작하였으나 강인한 원시 신앙과 배타성으로 거부되었다.


그러나 6세기에 이르러 송의 사절인 원표에 의해서 왕실에 불교가 전래되었고
차차 민간으로 침투되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커다란 시련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로 완강한 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법흥와 14년(527)에 공인되었고 홍륜사가 건립되면서 불교는 왕실의 보호 속에서 발전되었다.


유교는 공자가 창시자 이다.
그래서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공자는 지금의 산둥지방의 작은 도시(취푸라)에서 주전551년 11월21일 탄생.
노국 창평향 추읍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구(丘),자는 중이.
부친은 숙양흘.모친은 안증재.부친의 세째부인으로 아버지보다 50세 연하.
모친이 이구산에서 빌어 낳다고 하여 이름을 '구' 라고 함.
지금으로 말하면 그는 공무원 이였다.그러니 종교를 창시하려던 것이 아니다.


46세에 중도재 되고 52세에 '군수'직 후에 대사구(법무장관 격)에 임명되어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 땅을 돌려 주도록 하였으며 난신인 대부 '소정묘'를 죽였다.

이후 경공이 주위 나라에 속아 쾌락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
대립되고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판단하여 벼슬을 사직하였다.
68세에 정치 포기.그는 50세 위인 도교의 노자를 찿아 예를 묻기도 했다함.


나는 나면서 부터 이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이것을 빠르게 구했을 따름이다'하였다
그의 사상은 제자들의 언행록인 논어에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윤리적인 사상임.
그의 사상은 살았을 때 실현되지 못한체 증자,자사(손자) 이후 맹자에 이르러 왕성하였습니다.


공자는 아들(백어)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그 후(1년) 제자의 죽음에도 충격을 받아 7일 후 병으로 누워 74세로 임종 하였으며(479년4월11일),
내세를 말하지 못한 종교인이 아니라 공무원(정치인)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음
유교는 고대 중국의 한 철학유파라하여 종교로 말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유교경전은 시경(시집),서경(고대사),역경(주역),예기(제례에 관한 서),춘추(역사)이다.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간의 대화모음이다.보통 사서삼경을 근본으로 한다.

공자는 삶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서만 죽음을 논했다.


삶을 알기 전에 어찌 죽음을 알 수 있는가? 였다.

조상과 하늘과 땅에 대한 경배는 제례와 연관 된다.
내세나 영혼을 말하지 않고 조상의 혼령을 제사한다는 것은 일반종교의 조상숭배와 다를바 없다.

오늘날의 유교는 혼합적 사상으로 변질된 하나의 풍습이 되버렸다.


유교가 내세를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 종교에 포함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제례를 중심으로한 유교는 아시아에 집중하여 존재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세워진 때는 18세기 후반으로,
그 이후 교회는 19세기 말까지 거의 100여년에 걸쳐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근대적 사회를 이룩해보려는 노력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러한 노력과 맞서서 전통적인 질서를 계속 유지하려는 움직임도 강화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천주교회는 이 땅에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노력하던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나, 교회가 창설된 다음 해부터 교회는 혹독한 탄압에 직면하였다.
이 탄압의 와중에서도 도처에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졌고,신도들은 믿음을 키워나가며, 이웃에 복음을 전했다.

100여년 간에 걸친 참다운 박해는 신앙의 가치를 거듭 확인해 주었으며,
혹형에도 굴하지 않는 신도들의 용기는 우리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박해기>1784~1884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18세기 말엽의 조선사회는,
양반사회의 모순이 중첩되어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이 그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민중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새로운 사회질서를 찾던 변혁기의 왕조사회였습니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적 전통(성리학)은
현실의 여러 모순을 극복하기에는 힘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사상과 문물들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이 완고한 현실의 타파를 위한
새로운 운동(실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문명의 흐름을 타고 서구의 그리스도교 사상도 들어오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에 보내진 외교사절단을 통하여 {천주실의}, {칠극} 등의 천주교 교리서가 들어와
실학파들과 남인계 소장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지게 되었습니다.


학문적 호기심으로 연구되던 천주학은 천진암과 주어사의 연구모임인
강학회'를 통해 신앙적 실천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마침내 이벽, 정약용, 권철신, 권일신 등은
천주교에 대한 지식의 폭을 넓히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 
공부하여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천주교 4대 박해

신유박해(순조 1년.1801년)
조선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박해로1801.1.10.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되어 12.22에 반포한 반교문,
즉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이가환 등 남인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
강완숙이  처형 또는 옥사했고 정약전, 정약용 등은 유배됐다. 가을에는 황사영 백서
발각으로  관련자 처형 등 순교자는 모두 3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1801년1월10일. 신유박해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돼12월22일
반포한척사윤음’   으로 끝났다.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 당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기독교는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왔는데
그 이전 착하게살던 사람 모두 사탄인데 구원을 못받고 지옥을 가야하나요?

너무 억울한것아닌가요?


참으로 현명한 질문이며, 여기에서 기독교의
무지막지한 교리해석이 나오는것이다. 이것이 현 기독교의 정신구조이며 실정이다.

용봉.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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