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한국의 종교 증산도

월간중앙1998년 10월호 - 한국의 종교 증산도  
한국의 종교⑩ / 증산도
 제 41호 1998.10.01

 

역사와 법통
세계 종교사상 최초로 여성에게 법통 전수

김수헌 月刊중앙 WI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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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은 자신을 추종했던 당대 수십명의 남성 성도들을 제쳐두고

高判禮란 여성에게 법통을 전수했다.

이는 抑陰尊陽의 질서를 正陰正陽으로 바로잡은 것이라고 증산도는 설명한다.

 

고판례 首婦, 차경석의 보천교로 이어진 증산도 법통이 8·15해방 이후 증산도 제2부흥기를

개척한 지금의 안운산 종도사,

그리고 70년대 포교대운을 일으킨 안경전 종정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를 담았다.

 

▲김제군 금산면 동곡(구릿골)약방. 증산이 약방으로 쓰던 곳으로

9년 천지공사의 마지막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았다고 한다.

 

증산도는 80년대 이후 태동한 민족종교의 한 아류 정도인가.

 여기에 대해 증산도측은 단연코 아니라고 말한다.

 

증산의 탄강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듬어보면

증산도의 역사는 부흥기와 침체기로 뚜렷이 구분된다.

 

증산도의 부흥기는 일제 초기의 제1부흥기와 45년 해방 이후의 제2부흥기,

그리고 7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의 제3부흥시대다.

침체기는 민족종교 탄압이 극에 달했던 30년대 이후부터 일제 말엽까지와

6·25전쟁 이후의 폐허 속에서 한민족이 재기의 몸부림을 치던 50년대, 60년대다.

 

증산도는 지난 1백여년 동안 현대사의 부침(浮沈)과 그 호흡을 함께했다.

강증산이 31세 되던 해인 1901년에 연 새로운 도(道)의 중심내용은 무엇인가.

 

증산도는 동학의 뿌리

그것은 우주 질서의 주재자인 상제(上帝)가

우주가을의 인존(人尊)시대를 맞아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세상에 온 상제가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해 병든 천지,

병든 세상을 뜯어고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집행해 후천선경을 연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증산의 개벽사상이 동학으로부터 영향받았다고 생각한다.

최수운(1824∼1864)이 강증산(1871∼1909)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인물이므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증산도의 입장은 세간의 상식과는 전혀 다르다.

 

도(道)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거꾸로 증산도가 동학의 뿌리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주장이 제기될 수 있는가.

그것은 증산도의 창도자인 강증산의 위격(位格)이 ‘상제’(上帝)라는 데 있다.

증산은 자신을 미륵불이며 상제라고 했다.

 

상제는 민간에서 회자되던 한울님이요 천주(天主)님이다.

그런데 동학의 창시자인 최수운(崔水雲)은 자신의 깨달음을 밝힌 “동경대전”(東經大典)에서

자신이 바로 상제로부터 천명(天命)과 도통(道通)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가 도통할 때 상제로부터 받은 주문이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증산도는 하늘의 상제가 최수운에게 도통과 주문을 내려 자신의 강세를 예고(豫告)케 하고,

곧이어 인신화현(人身化現)한 분이 바로 강증산 상제라고 한다.

 

또한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 즉‘천주님을 모시고 조화를 정한다’는 의미는

인간 본성에 깃든 한울님을 모신다는 불교적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역사의 무대로 내려오시는 천주님을 모시고(侍天主),

새 역사 질서의 조화를 정한다(造化定)는 것이다.

 

‘우주의 주재자인 상제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 바로 이것이 모든 증산도 교리의 근본이 되는 명제다.

증산은 인류의 고통과 비극이 우주 질서의 상극성(相克性)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이 상극의 자연질서를 바로잡지 않고는 광구창생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즉, 단순히 마음자리만 닦아서는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증산은 자신을 추종했던 당대 수십명의 남성 성도(聖徒)들을 제쳐두고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여성에게 법통(法統)을 전수했다.

그 분이 바로 고판례(高判禮, 1880∼1935) 란 여성이다. 증산도에서는 이를 ‘수부(首婦)도수’라고 부른다.

 

이것은 인류 종교사뿐 아니라 인류 문화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동·서양 종교사를 통틀어 여성이 최고지도자로 떠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증산도의 수부도수는 이러한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질서를 정음정양(正陰正陽)으로 바로잡는 것을 상징한다.

증산은 정음정양의 새 우주를 열고, 개벽진리를 역사 속에 씨뿌리는 머리로서 수부(首婦)를 말한 것이다.

수부는 증산도 교단을 창업하는 여성, 증산도를 처음으로 세상에 선포하는 지도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증산도에서는 도의 법통은 오직 고수부(高首婦)로부터 비롯되며,

수부를 부정하고 꿈과 계시를 통해 무엇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법통의 조작이요 난법(亂法)이라고 주장한다.

 

고판례 수부가 증산도를 현실역사 위에 종교조직으로 태동시킨 것은 증산 상제 어천(御天) 2년 후인 1911년이다.

이때 처음 교단이 들어선 곳은 정읍(井邑) 대흥리(大興里)였다.

고수부는 증산을 추종하던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교단을 창립하고 포교를 총지휘했다.

 

이때 포교 확산의 결정적 요인은 태을주(太乙呪)라는 주문을 통한 체험 신앙이었다.

태을주를 집중 수도함으로써 병든 자가 일어나고,

신기한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보편화되면서 교세가 급속도로 신장했다.

 

그러나 이 첫 교단은 곧 분열한다. 여러 교파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것은

고수부의 원줄기를 이은 차경석(車京石,1880∼1936)의 보천교(普天敎)였다.

일제 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보천교는 간부교인만 55만명, 일반 평신도까지 합치면 6백만 신도에 달했다고 한다.

 

암울했던 일제의 식민통치시절, 보천교는 민족의 독립운동에도 큰 기여를 했다.

당시 보천교는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앞으로 학계에서 보다 활발하게 연구되고 발굴돼야 할 현대사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증산도 제1부흥기는 36~37년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극심한 민족종교 말살정책에 의해 침체기로 접어든다.

제2부흥기 개척한 안운산 종도사

 

45년 8·15 해방 후 증산도의 제2부흥기를 개척한 인물은

현재 증산도의 최고지도자인 안운산(安雲山, 1922∼) 종도사(宗道師)다.

부친 안병욱은 서산에서 수백석 농사를 짓던 부호로, 제1부흥기인 일제시대에는 독실한 보천교 신자였다.

따라서 운산은 어려서부터 자연히 증산의 이념을 숭앙하게 되었다.

 

운산이 증산의 천명을 깨달은 것은 12세. 그는 7일간의 집중적인 태을주 수련을 통해

초통(初通)하고 자신의 천명을 자각했다고 한다.

 

그는 때가 되면 반드시 증산 상제의 개벽의 도를 펴는 일을 하리라 결심하고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천하를 돌아다니며 때를 기다렸다. 그는 24세의 젊은 나이로 마침내 해방을 맞이한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종교와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여건이 마련됐지만

증산도는 사실상 새 출발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일제 말기 10년동안 보천교 신도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아 수많은 사람이 투옥되고 순교한 뒤였다.

세상은 강증산이 역사의 인물인지조차 모르는 황무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젊은 운산은 자신의 온 재력과 정력을 다 바쳐 포교에 전념했다. 그가 본부로 정한 곳은

고수부가 마지막 교단 살림을 했던 전북 김제의 용화동. 당시 교단의 명칭은 증산교(甑山敎)였다.

 

젊은 운산은 총사수(總師首)가 되어 백절불굴의 노력을 경주해 6·25 전쟁 직전까지 수십만명이

다시 태을주를 읽는 제2부흥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뿐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증산도는 다시 침체기로 빠져들고 말았다.


우리 민족이 경제부흥에 박차를 가하던 74년, 안운산 종도사는 다시 포교를 시작했다.

그는 교단본부를 대전에 두고 자신의 아들인 안경전(安耕田) 종정(宗正)과 함께 도문을 열었다.

 

70년대 중반에 일어난 제3의 부흥기에서 포교 대운을 일으킨 인물은 안경전 종정이다.

경전은 80년 “증산도의 진리”를 발간해 증산 상제의 사상과 천지공사를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교리체계를 정립했다. 이 책은 오늘날 증산도가 세계로 뻗어가는 초석이 됐다.

 

경전은 그뒤 83년 “이것이 개벽이다”(상, 하)를 발간했는데,

이 책은 증산도를 대중화시키는 획기적 전기점이 되었다.

이후로 경전은 84년 증산도대학교를 설립해 증산도의 주요 간부와 봉직자를 길러냈으며,

안운산 종도사와 함께 전국의 여러 도장(道場)을 순회하며 말씀을 전했다.

 

제3의 증산도 부흥기의 획기적 사업 중 하나는 증산도 통일경전(經典)인 “도전”(道典) 발간이다.

이제 증산도는 국내의 신앙 대중화는 물론 해외 포교를 통한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증산도 통일경전“道典”편찬의 역사적 의의

 

증산도 眞法시대 개막 알리는 대사건

1992년(壬申년) 음력 9월19일, 이날은 증산도 1백년 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증산상제 탄강 1백22주기 성탄 치성절이었고 증산도 통일경전(經典)인 “도전”(道典)이 출간된 날이기 때문이다.

도전은 과연 어떠한 책인가. 왜 도전 출간이 그토록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가.

 

증산은 89년 전인 1909년 어천(御天)했다. 그후 17년 뒤인 26년 증산의 언행을

기록한 최초의 문서인 “증산 천사 공사기”가 출간됐고 이어 3년 뒤 “대순전경” 초판이 발행됐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용화전경”“성화진경” “대개벽경” 등이 간행됐다.

 

그런데 왜 또다시 “도전”이 나와야만 했는가. 그것은 기존의 기록들이 증산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 사실을 왜곡하는 부분이 많고,

나아가 증산이 펼친 도법의 참된 경계를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증산을 추종했던 많은 성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형렬·차경석·박공우 등 주요 성도들의 증언만 채록했다는 한계도 있다.

따라서 증산의 행적과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전인류에게 참된 개벽의 도를 알리는 일은

증산도의 큰 과제로 남아 있었다.

 

안경전(安耕田) 종정(宗正)은 74년 3변 도운(道運) 개창과 더불어 이 일을 시작했다.

도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막대한 인원과 예산을 투입해 공사(公事) 관련 유적지를 일일이 답사하고

증산을 추종했던 성도들과 그 후손들을 빠짐없이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우주 주재자로서 상제의 진면목을 1백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증언한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분이 바로 김호연(1897∼1992) 성도다.

김호연 성도는 증산이 천지공사를 행하기 시작한 1901년 불과 다섯살 난 어린 소녀였다.

증산은 1909년 천지공사를 마칠 때까지 줄곧 그녀를 남자아이처럼 꾸며 데리고 다녔다.

증산은 어린 호연을 수행시켜 심령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경지에서

증산의 조화세계를 목격하고 오랜 세월동안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도전” 출간은 증산과 고수부의 참된 가르침이 세상에 그대로 드러났음을 알리는 도사(道史)의 분기점이다.

한마디로 증산도 진법(眞法)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대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