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C0C3752D84342151FEF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안경전의『 환단고기』

 

한국사 교과서는 처음부터 다시 쓰여야 한다.

한민족의 역사는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

 

우리 역사바로 세우기에 생을 걸고

30년 집념의『 환단고기 역주본』을 펴낸 안경전安耕田 증산도 종도사.

그의 생생한 육성으로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 -『환단고기』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대담 박정하

 

역사는 한 나라의 강력한 힘이요, 무기입니다”

- 뿌리 깊은 한민족사의 왜곡 실상 -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의 백마고지로 들어가는비무장지대 초입의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4세기 로마 작가 푸블리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경구(Si vis pacem, para bellum.)이다.

 

그 어떤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언제 어디서든 전쟁은 엄연히 있어 왔다.

그 어떤 나라도, 그 어떤 국민도 전쟁을대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안경전 종도사는숱한 전쟁들 중에서도 이른바 ‘역사전쟁’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쟁 가운데 가장 큰 전쟁은 역사전쟁입니다.

역사는 한 민족, 한 국가가 이루어 온 모든 것의 뿌리입니다.

마땅히 역사전쟁에서 패배한다는것은 곧 오늘까지 그 민족이 이룬 모든 것을 잃는 것이지요.

이런 까닭에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1863~1952)는 ‘역사를 잊어버린 자, 역사에 휩쓸려가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동북아를 중심으로 영토를 빌미삼은 갈등과 충돌 역시 그 본질은 역사전쟁, 문화전쟁입니다.”

역사전쟁이 치열한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어릴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해서 배우고 철석같이 믿어온 ‘교과서 속의 역사’는

과연 우리의 진정한 역사인가? 안 종도사와의 ‘일그러진 우리 역사 이야기’로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환단고기』> 대담을 시작한다.

272A5D3852D8427629D4CF


“역사를 잊어버린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
영토전쟁, 영토분쟁이란 말은 익숙해도 역사전쟁이란 말은 언론 등에서

잘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가리키며 어떤 뜻입니까.

“지금 세계무대의 중심이 동북아로 이동하는 가운데,

동북아의 역사질서가 대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동북아,

그 중에서도 특히 한중일 3국은 지금 역사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수천 년 동안 지속돼온 역사 주도권 싸움입니다. 나라 이름부터 보십시오.

중국은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국[中國]으로 역사의 주도국이라 합니다.

일본은 광명의 뿌리[日本] 국가라고 주장하며, 자기네 역사를 한반도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

자생의 역사로 했습니다.

중국은 2002년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한민족의 고대사를 그들의역사 속에 편입시켜 자국을 동북아의 최고最古 국가이자

중심 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중국의 동북방 변방지역에서 황하 문명보다

더 오랜 역사를가진 문명인 소위 홍산문화가 20세기초부터 발굴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주장해 온 중국 역사의 시원보다 훨씬 이전의 유적과 유물들이 나타난 것이지요.

 

난처해진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민족 역사관’이라는 교묘한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이때 가장 문제가된 중국사의 시원을 더 오랜 옛날로 끌어올리기 위해

중국은 소위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시작했습니다.

 

중국 고대사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3대 왕조 하·상·주의 연대를 확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화의 시대로 알려진 삼황오제三皇五帝 시절을실재實在한 왕조로 만드는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中華古代文明探源工程’을 2003년부터 진행했습니다.

이 공정은 하상주단대공정보다 한 술 더 떠서,

중국 역사를 1만 년 전으로 끌어 올려 중화 문명을‘세계 최고最古 문명’으로 변조하려는 계책입니다.

2249C23552D8429C22D41D



이 탐원공정의 일환으로 동방 문명의 주인공인한민족의 북방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치밀한 정치 공작을 벌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북공정東北工程입니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과거2천여 년 동안 자행해 온 동북아 역사왜곡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만주와 요동의 역사는물론 한반도의 한강 이북까지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데 있습니다.

동북공정에 깔린 중국의 저의가 무엇이겠습니까.

남북한의 통일에 대비해 동북 3성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근거를미리 만들어두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이통일되더라도 한국의 역사 무대를 한반도 안으로 한정시키고, 대신 중국이 동북아 전체의 맹주가 되고,

더 나아가 미국을 앞지르는 초강대국으로 비상해서 세계사의 종주가 되겠다는 의도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21세기의 세계를 중국중심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213E363452D842B0264984


일본은 일본대로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독도와 중국 근해 센카쿠 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주변국과 영토분쟁을 계속 야기하고 있습니다.급기야 아베정권이 등장해 군국주의 대표 구호인

‘천황폐하만세’를 외치며 과거의 침략행위를 전면부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의 독도 도발도 중국의 동북공정과 마찬가지로 동북아에서의 주도권 분쟁이며 역사전쟁입니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조선의 뿌리 역사를 제거하기 위해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이란 대목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왜곡하였습니다.

석유환국이란 우리 한민족이 옛적에 세운 나라, 곧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위대한건국建國 이야기인 동시에 인류 창세사를 드러내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환국의 나라 국國 자를인因자로 조작해서 ‘옛적에 환인이 있었다’는 한낱인물사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글자 하나를 바꾸어 한민족 7천년 상고사의 혼을 동시에 뿌리째 뽑아버렸습니다.

이렇게 동북아 역사는 주객이 전도된 배은망덕의 역사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한민족의 시원 역사가 완전히 말살되었습니다.

저 아시아 대륙을 무대로 활짝 열렸던 환국과 배달은 대한민국의 뿌리이자 중국과 일본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중국과 일본의 한국 고대사 왜곡과 말살은 결국 제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고 잡아먹는 ‘패악질’이고,

이는 실로 용서받지 못할 배은망덕입니다.”

역사전쟁이 어떤 것인가도 몰랐지만 그렇게까지뿌리 깊은 것인 줄도 잘 몰랐습니다.
뒤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우리 한국사는 중국이 끼친 중독中毒, 일본의 왜독倭毒,

서구의양독洋毒으로 온통 피멍이 들고 뒤틀리고 왜곡됐습니다. 그 역사는 오래 되었습니다.

 

일찍이 공자가 노나라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춘추春秋』라는 역사책을 편찬했습니다.

주나라 왕실을 종주로 삼는 대일통大一統 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사상을 표방한 책입니다.

그 후 중국 사서들은 이 『춘추』를 역사서술의 모범 또는 표준으로삼았습니다.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것인데

그 밑에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가깔려 있습니다.

여기서 중국사를 3가지 원칙으로쓰는 관행이 생겼습니다.

 

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한껏 부풀려 쓰고 수치스런 일은 감추었습니다.

(위국휘치爲國諱恥). 중국은 높이고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존왕양이尊王攘夷)

중국사는 상세히 쓰는 반면이민족 역사는 간단히 처리해 버렸습니다(상내약외詳內略外).

일본 역시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일본의 첫 역사서인 『고사기』(712년)와 『일본서기』(720년)가 편찬되었을 때부터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그못된 버릇은 19세기 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식민지화 하려고 할 때 다시 나타났습니다.

일찍이 우리삼국시대에 한반도 남부가 일본의 식민지였고 이에 더해 한국의 역사는 중국의 식민지로

시작됐다는악의적인 왜곡이었습니다. 조선의 병탄과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계략이었지요.

뿐만 아닙니다.

 

일본은 실제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동안 관변학자들을 동원해 식민사관을 세웠습니다.

일본이 물러간이후에도 그때 조선에 심어진 식민사관의 해독은청산되지 않고 지금까지 온존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중국과 일본 정부의 도발에 대해한국정부는 제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일본이 일으키는독도문제, 교과서 문제 등에 대해서도 분명한 대응을 못합니다.

리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동북아 역사전쟁의 의미와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있는 실정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사실 다 지나가 버린 일인데,

오늘에 와서 그것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거나 혹은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삶은 과거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또 지금 우리의 발걸음에 따라 미래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2649E53652D842E0098C90


과거가 단절되고 왜곡되어 있으면 과거의 소산인 현재의 역사의식도 뒤틀리고,

미래를 보는 올바른 시각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E. H. 카아가 말했듯이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그 때문에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소통될 때 비로소

우리는 닥쳐오는 모든 변화에 대비하고 밝은 미래를 열 수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미래에 대한 창조적인 의식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미래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은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놓고서 성姓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읽게 하되 어릴 때부터 읽게 할 것이며,

역사를 배우게 하되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게 할것이며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배우게 할 것이며,

지배계급뿐 아니라 피지배계급도 배우게 할 것이다.’라고 역사교육을 강조했습니다.

또 고려 말의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은

‘나라가 몸이라면 역사는 혼과 같다(國猶形 史猶魂)’고 했습니다.

혼이 없으면 몸이 어떻게 보존될 수있겠습니까?

 

국가와 민족을 소생시키는 깨어 있는정신을 위해 역사를 배워야, 그것도 바르게 배워야합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혼이 없는 민족이고정신이 없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대로 어엿한 국사 교과서도 갖고있고

또 수많은 역사학자나 교수, 교사들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역사교육의 바깥 틀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역사교육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현재 역사학계 쪽의 자리를 맡고 있는 사람들, 소위 ‘강단사학’쪽의 문제점을 말해야 합니다.

그보다 먼저 현재 고등학교에서 국사과목이 어떻게 대접받고 있는지 그 현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만들어놓아 많은 학생들이

국사보다는 좀더 공부하기 수월하다며 사회문화나 윤리 같은 과목을 선택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역사라고 하면 단편적인 사실들을 그 배경이나의미도 모른 채 무조건 암기해야 하는

과목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학교에서 우리의 상고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조선을 예로 들면 단군신화만 소개하고 실제로고조선의 통치와 문화 등 고조선의 실상에 대해서는

서술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교과서를 집필한강단사학(자들)의 책임입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일제 침략자들이 뿌리박아 놓은

식민사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강단사학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2101533352D843061FDD2A


현 강단사학의 뿌리는 친일학자인 이병도(1896~1989)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 강점기에식민사학의 보루인 조선사편수회(※1916년 중추원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출범하여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거쳐,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가 되었다)에서

수사관보(※修史官補, 역사를 편찬하는 수사관을 보좌하는 직책)로 3년(1925~27)간 일했던 인물인데,

그가 해방후에는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되어 자기 입김아래 후학들을 길러 냈습니다.

 

이렇게 무리를 이룬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한국전쟁으로 백남운 등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이 북한으로 넘어가고 안재홍, 정인보 같은 민족주의 사학의 거물들이 납북되자

곧바로 사학계를 장악했습니다. 현재 한국사학계의 중진 학자들도 대부분 그 직계 후예들입니다.

이들은 일제 식민사학이

우리 역사의 시원사를말살하는 지렛대로 이용한 소위 실증주의 역사학을 내세웁니다.

19세기 서양에서 ‘과학적 역사학’이라고 표방한 것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 학문유파는 실증할 수 없는 대상들을 모조리 역사학의경계 바깥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런데 표면적인 사실의 실증에 매달리다 보니 역사의 깊은 흐름을 놓쳤을 뿐 아니라

기록과 유물에 대한 숭배로인해 부지불식간에 유물론적인 역사학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인간의 정신활동은 사료나 유물로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증주의 역사학은 영혼이 없는 역사학, 인류의 정신문화가 말살된 역사학이 되어버렸습니다.

2445BC3B52D843211B27C1


그런 실증주의 사관으로 한국사학계는 서양에서유래한 단선적 발전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대사를 단순히 어떤 도구를 썼느냐에 따라석기-청동기-철기시대로 구분하고

고대사회 발전의 원동력을 도구에서 찾는 이론입니다.

 

이러한 물질주의적 단선적 발전론은 역사적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페루와 멕시코등에 남아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찬란한 고대유적은 철기를 쓰지 않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전쟁을 하는 데는 불리할지 몰라도 철기가 없었다고 해서

그들의 문명이 후진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5천 년 전의 고대 이집트문명도 단순한 도구를기준으로

역사발전의 단계를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고대 이집트인은일찌감치 철을 알았지만 철이 불순한 금속이라는믿음을 가지고 있어

철보다는 청동을 선호하였습니다. 그래서 철기시대가 유럽보다 늦었는데 당시유럽 특히 유럽 본토는

이집트문명에 비해 훨씬 뒤진 상태였습니다.

이같은 실증주의 역사학의 도구와 틀을 일제 식민사학으로부터 배워

그것을 우리 고대사에 들이 대고 우리 역사를 멋대로 재단한 것이 이병도 후예들의 역사학이었습니다.

 

사실 서양에서 나온 실증주의는 진화론, 오리엔탈리즘 등과 함께 서구 강대국들이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이용한 지적知的 도구의 하나였습니다. 이것을 일제가 가져다

한국사의 근원을 잘라내고 역사의 틀을 왜곡하는 데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실증주의의 한계나 폐해를 모르고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그것을 우리 고대사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고대사의 진실은심각하게 왜곡 말살됐습니다.

 

일례로 고조선 제1호 박사라고 알려진 한국교원대학교의 송호정 교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고대 국가는 철기 단계에서만 가능하고 청동기 단계에서는 부족국가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단군조선은 엄연한 역사가 아니라 그저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현재 우리 강단사학은 조선 후기에 권력을 농단했던 노론老論 파벌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주자학을 내세워 주자학에 어긋나는 모든 학설이나 주장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이러한 노론들의 행태를 요즘 강단사학이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자신들의주장과 반대되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독단적인 성격이 노론들의 행태와

닮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재 강단사학은 열린 역사학이 아니라

폐쇄적인 역사학을 지향하는 학문적 권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고대사나 정통 역사를 기록한 사서들도 적지 않았을 텐데요.

지금이라도 그 사서들을 통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으면 될 것이고요.

“안타깝게도 『환단고기』로 묶여진 다섯 책 이외의 정통 사서들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요인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외적 요인으로는 전란戰亂과 탈취를 들 수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무수한 전란戰亂 속에 사서들이 화재로 소멸되었거나 외적에게 탈취됐습니다.

역사학자 송호수는 사료 멸실의 대표적 사례로 열가지를 꼽는데 이 가운데 전란이 무려 일곱 차례에달합니다.

(도표 참조)

반면 내적 요인으로는 우리 스스로의 잘못도 큽니다. 다름 아닌 우리 선조들,

특히 집권층에서 앞장서 우리 정통 사서들을 없애버리는 과오를 저지르기도 했으니까요.”

사서 소실에는 우리 자신의 잘못도 있다”는 이대목에서 안 종도사는 특히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아니면 서양이든 외세의침탈에 의해 우리 역사책들을 잃어버린 것은 비판하고

욕할 수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그 귀중한 사서들을 없애려고 ‘기를 썼다’고 할 정도였으니

참으로 분개를 넘어 절망스럽고 허탈할 따름”이라는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왜 그랬을까?

어떻게 우리사서들을 자기 손으로 없앴다는 것일까.

우리 스스로 사서를 없앴다는 게 무슨 말씀인가요?
“일찍이 고려 때부터 우리 사서는 홀대 받았습니다. 현재 우리 역사책이다

 

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대표 사서로 꼽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책들이 지어질 때부터

우리 고유 사서들이 배척됐습니다. 그 일차적인 내적 요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 사서의 저자들에게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완고한 유학자였고,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불자佛子였습니다.

이들은 책을 쓰면서 당시까지 남아 있던 사서 중에서 유교사관과 불교사관에 위배되는

문헌은 고의적으로 배제했습니다.

그런 태도는 조선의 지배층에 와서 더 심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은 고려보다 더욱 강력하게유교를 장려하며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려고 했습니다.

그 선행 작업으로 한민족의 고유사서를 민간에서 간직해서는 안 될 책으로 규정하고는 이를모두 수거했습니다.

개국 초 『춘추』와 『자치통감 강목』만 사필(史筆,사관이 적은 공식 역사)로 여기고

한민족의 고유 사서를 이단이라 하여 모조리 압수 소각했습니다.

 

조선왕조 초기 태종(1367~1422)은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돼 있던 고유 사서를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해서 소각해 버렸습니다. 그의 아들 세조에서 예종과 성종까지 3대에 걸쳐서는

임금이 전국 관찰사에게사서 수거령을 내렸습니다.

 

사대주의에 충실한 조선 유학자들 가운데는

중국을 떠받들고 고조선의역사성을 부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조선 민족을 완전히 일본에 동화시키고자 기도했던 한국사 왜곡 작업에 우리도 동조한 면이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겠지요?
“일제 강점기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가 한 말이 있어요.

 

“조선인들에게일본혼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들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큰일이므로 영구적이고 근본적인 사업이 시급하다.

이것이 곧 조선인들의 심리 연구이며 역사 연구이다.”라는 것입니다.

당시 한국사 왜곡의 의도와 방향에 대해 밝힌것이지요

이 같은 방침에 따라 당시 조선을 통치하는 법령제정과 형벌을 관장하는 취조국은

조선의 관습과제도를 계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전국 각지의 사서들을 대량 수거하는 일에 나섭니다.

 

이들은 헌병과 헌병 보조원을 앞세워 1910년 11월부터 약 14개월 동안

조선 강토 구석구석을 뒤져 역사서를 포함한 각종 도서 20여 만 권을 거둬들여 대부분 불살라 버립니다.

지금의 서울 남산 식물원 자리에서 며칠 동안이나 책들을 불태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한민족 상고사에 관한 주요 서적 일부가 일본의 황실 도서관으로 옮겨져 비장秘藏되기도 한 사실이

그곳에서 1933년부터 12년 동안 근무한 박창화(1889~1962)에 의해 증언된 바 있습니다.

일제는 수거된 사서들 가운데

조선사를 왜곡하거나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남겨두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서 수거 만행은 그후 총독부의 조선사 편찬이 마무리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집니다.”

이처럼 우리 사서 혹은 역사의 근거 자료들이 이래저래 사라진 것을 빌미로

과연 실제 한국사 왜곡은 어떤 대목에서, 어떻게 자행됐을까. 안 종도사는 “일일이 열거하자면

첫째로 원체 많아서, 둘째로 분통이 터져서 다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과 우리 역사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일단 제가 빼놓지 않고 화제로 삼는 몇몇 사례가 있다.”고 했다.

2703643C52D8436A0D1FBD


어떤 것들입니까.
“일반인도 알아야겠지만 당장 우리 군에서부터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인물로

동방의 역사는 물론인류문명사에서 병법兵法의 시조(중시조는 강태공, 그후예가 손자, 오자서 등이다)

이신 치우천황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금살치우禽殺蚩尤
한중 고대사를 날조한 기록상의 첫 인물은2,100년 전 한나라 때의 사관인 사마천입니다.

사마천은 동북아의 한민족 강토로 쳐들어간 한 무제가 전쟁에 참패하고 돌아온 시기에 『사기』를 썼습니다.

『사기』는 「오제본기五帝本紀」로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중국인들이 황제黃帝라고 부르는 헌원의이야기가 처음에 나옵니다.

즉 헌원의 역사가 『사기』의 첫머리요, 중국 역사의 첫머리가 됩니다.

 

사마천은 헌원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간략히 적은 다음 곧바로 그와 치우 사이에 벌어진 전쟁,

탁록대전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치우가 난을 일으키며황제의 명을 듣지 않자,

이에 황제는 제후들로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사로잡아 죽였다.’

이 기록의 핵심은 ‘금살치우禽殺蚩尤(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 네 글자입니다.

그런데 『사기』의 삼가三家 주석(※『사기』 주석서 가운데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사기집해史記集解』, 『사기색은史記索隱』, 『사기정의史記正義』를 말한다)에는

치우에 대해 이와 다른 기술이 보입니다.

 

먼저 『사기집해』에는 ‘응소應劭가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라고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하의 지배자는 헌원이아니라 치우천황이었다는 말입니다.

 

치우에 관해보다 많은 내용을 제공하는 『사기정의』는 ‘치우 군대가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太弩)와 같은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했습니다.

 

한고조 유방劉邦은 전쟁에 나아가기에 앞서 언제나 치우천황에게 제를 올렸고,

안에 치우사蚩尤祠라는 사당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도

치우에게 지내는제사인 둑제를 지내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치우천황과 헌원의 관계에 대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한족漢族의 우두머리였던 헌원이치우천황을 꺾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치우천황이 10년 전쟁끝에 탁록대전에서 그의 무릎을 꿇리고 제후로 삼은 것이 사건의 진실입니다.

사마천이 서술한 ‘금살치우’라는 대목은 역사적 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사마천이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중국 역사의시조인 헌원을 천자, 즉 동북아의 주도권자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헌원이 천자가 되면, 중국은그 출발부터 천자의 나라가 됩니다.

 

중국을 처음부터 내내

동북아의 중심 나라였던 것으로 못 박기위해 ‘금살치우’라는 조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마천은 동방의 역사는 물론 인류 문명사에서

병법의 시조이신 치우천황의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 인물을 표현할 때도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동두철액銅頭鐵額)로 묘사하는등

인격말살을 한 뒤에 금살치우라는 결정적인 역사왜곡을 한 것입니다.

▶기자조선
다음으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마천도 『사기』「본기本紀」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후국의 역사를 다룬 「세가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이라 하여

갑자기조선이란 이름을 썼습니다. 그 뜻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 역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 전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여러 기록들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엄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상서대전』이란 유교서책에는 ‘기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대해 설명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반면 『사기』는기자가 책봉은 받았지만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했습니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했다’ 기록의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는 모순된 말을 합니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그와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자가 무왕의 신하였던 적이결코 없었기 때문에

사마천이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진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자라는 인물이 조선 왕으로 봉해진 역사적 사실은 전혀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더욱 주목할 것은 ‘기자가 조선으로 떠나버렸다(走之朝鮮)’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동방 땅에 그 전부터 조선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천명하는 내용입니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떠나 이웃나라 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보다 오래전부터 단군조선이 존재했던 덕분입니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기자조선은 중국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만조선
위만조선 역시 날조된 내용입니다. 우리 중·고교국사 교과서에는

‘위만의 국적과 관계없이 위만조선은 이전의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라고 쓰여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 인정하는 고조선의 왕은 단군왕검과 위만입니다.

 

다름 아닌 교과서 앞부분에 이처럼 떡하니 나와 있으니 위만 또는 위만조선을

모르는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그뿐 위만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습니다.

위만은 어떤 인물인가요?
위만은 한 고조 당시 연나라의 장수였습니다.

그의 상전인 연왕 노관盧綰이 정치적 문제 때문에 흉노로 망명하자 연나라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당시연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위만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 고조의숙청을 피하여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당시 한반도 번조선의 준왕에게 투항하였습니다(기원전 195년).

준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만아니라,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배은망덕하게도 위만은 그곳에서 몰래세력을 길러

이듬해에 왕검성을 쳐 한순간에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기원전 194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번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릅니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위만정권’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고조선의 정통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아주 배은망덕한 정권이지요.”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부끄럽게도, 안 종도사의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자는 그런 ‘내막’을 몰랐다. 

이어진 한사군漢四郡과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이야기는 더 충격적이었다. 안 종도사는 “기자조선이니


현 국정국사교과서의 위만정권 기사
중학교 고등학교
기원전 2세기경,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기원전 194). 이 시기에 철기 문화가 확산되면서 고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19쪽) 고조선이 강성해지면서 한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커 가자,

한은 대군을 보내어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은 막강한 한의 대군을 맞아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중국이 전국 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면서 유이민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 중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34쪽)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

이에 불안을 느낀 한의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34쪽)
※ 2009년도 교육과학기술부 발행 국사 교과서 (제7차 교육과정

위만조선이니 해서 한민족 역사가 기껏 2천 년 남짓 됐다고 조작한 것을 넘어,

중국과 일본은 아예한반도의 북쪽은 중국이, 남쪽은 일본이 지배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날조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떤 내용인가.
▶한사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강단사학계의 주류는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고조선 옛 영토에 설치되어 한민족을 지배한 것으로 믿어왔습니다.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 현도군은 압록강 중류, 진번군은 황해도 지역, 임둔군은 함경남도

-낙랑국은 낙랑군과 다르다.

최숭이 세운 낙랑국은 요서 지역에 있는 자신의 고향, 낙랑에서 이름을 따 왔다.

이 낙랑은 번조선 수도 왕검성이 있던지금의 하북성 창려현 지역으로 비정된다. 이에 반해 낙랑군은

한 무제가 번조선을 패망시키고 그곳에 설치하려 했던 4군四郡 중의 하나이다.

낙랑은 위만이 번조선을 찬탈해 다스렸던

왕험성王險城(번조선 말기의 수도로 지금의 하북성 창려昌黎)
지역이다. 본래 평양 일대에 있었던 낙랑은 고조선 삼한 중 번한番韓의 유민 최숭이 세운 ‘최씨 낙랑국’이며

낙랑군이 아니다. 이 평양의 낙랑국이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등장하는 낙랑이다.

현재의 평양지역을 낙랑군으로보는 인식은 당나라 이후에 생겼으며,

그 이전에는 요동에 있다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현재 우리 주류사학계에서는 ‘낙랑국樂浪國’과‘낙랑군樂浪郡’을 구별하지 못하고

낙랑군이 한반도 대동강 일대에 있던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즉기원전 108년, 한漢나라 무제가

위만정권을 멸하고 설치한 네 개의 군郡 중 평안도 일대에 낙랑과대방, 두 군을 두었는데,

고구려 미천왕 14년(313)에 낙랑군을 축출하면서 모두 회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동천왕 21년(247) 조를 보면, “왕은 환도성丸都城이 난리를 겪어 다시 수도로 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미천왕이 낙랑군을 축출하기 66년 전

일이므로 지금의 평양이 낙랑군 영역이었다면 남의 땅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말이되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

이 밖에도 기존 학설에 오류가 많으나 주류 사학계는

북한 학계의 최근 고고학 연구결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자신들의 학설과 맞지 않는 기존 기록도

잘못된 것이라며 여전히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있다는 전제하에 끊임없이 모순되는글만 되풀이 하고 있다.

중국 고대 역사서의 낙랑군 위치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낙랑 수성
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한서漢書』 「설선열전薛宣列傳」 - ‘師古曰: 樂浪屬幽州 낙랑은 유주(현 북경)에 속해있다.’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 - ‘樂浪郡,故朝鮮國也. 在遼東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동에 있다.’

갈석산碣石山
중국 하북성 창려현昌黎縣에 있다.

고대에 요동을 상징하던 갈석산은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이기도 하다.

『사기史記』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곳이다.”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갈석산이 있는 지역이 바로낙랑군이 있었던 위치이다.

 

그런데 이 갈석산이있는 수성현을 일제식민사학이 황해도 수안에 있다고

주장한 것을 이병도가 그대로 답습함으로써이 땅을 붓대 하나로 한나라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중국마저 이를 동북공정에 이용하고 있으나 갈석산은 워낙 유명한 산이므로

그들 『역사지도집』에는 제 위치에 표시해 놓았다.

하북성 갈석산의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주장한

일제식민사학:“수성遂城, 진秦나라의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遂安의 경계에서 시작…한서지리지에 의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 「낙랑군 수성현 및 진 장성 동단에 관한 고찰」)

이병도는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이라고 주장:
“遂城縣수성현……자세하지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명칭과 어떠한 長城址가 있어서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이병도, 「낙랑군고」)
이병도는 스승 이나바 이와기치의 견해를 무조건 추종해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낙랑군이 평양이었다는 동북아역사재단:
“위만조선은 그 왕성인 왕험성이 현재의 평양시 대동강 북안에 있었는데,

이는 위만조선과 한의 경계 역할을 한 패수浿水가 지금의 압록강이라는 점,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는 점,

 

왕험성 및 조선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열수列水가 지금의대동강으로 비정되고

있다든지 하는 점을 통해서입증된다.”(동북아역사재단, 고조선 조)라고 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도와주고 있다.

역에 설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날조된주장에 불과합니다.
한사군에 대한 최초 기록은 『한서』 「조선전」입니다. 그러나 같은 책인 『한서』의 「지리지」에서는

현도와 낙랑군의 위치만 기록되어 있을 뿐 진번과 임둔의 위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한무제가 사군을 설치한 기원전 108년으로부터 한 세대가지난 후인

한소제 5년(기원전 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로 보아 진번과 임둔은 한의 관리들에 의한 탁상행정의 결과로나온 실체가 의심스러운 존재였습니다.

낙랑군과 현도군의 위치는 『한서』 「가연전賈捐傳」에 한무제의 업적을 들면서

언급한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도와 낙랑으로써 군을 삼았다’는 기록에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즉 한반도 지역이아니라 갈석산이 위치한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입니다. 『진서』 「지리지」에도

 

한나라 때의 낙랑군 지역에 조선현과 수성현이 위치하고 있다 하였는데

수성현은 진시황 때 축조한 만리장성의 기점입니다. 이처럼 우리 것도 아닌 중국 기록으로 보아

낙랑군 등의 한사군이 있었다면 그 위치는 바로 지금의 하북성 지역입니다.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었다는 주장은 일제가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내용일 뿐입니다.

즉 한사군은 중국이 제일 먼저 왜곡을 시작해일본이 구체화했고 대한민국의 강단사학자들이

이를 역사의 정설인 것처럼 왜곡하였습니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일본도 중국에 질세라 한민족사를 아주 오래 전부터 왜곡해 왔습니다.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임나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지배했다고하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날조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한민족의선조들은 바다를 건너 가 일본 역사를 개척하고

고대 일본사회(=倭)의 지배층을 형성했습니다. 특히삼국시대에 왜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왜倭 조정은 백제의 분조分朝(지방정부)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백제가 망한 후, 왜는 기다렸다는 듯 친정집인 한반도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때까지 ‘왜’라고 부르던 나라 이름을일본으로 고치고(670년), 왜왕을 천황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를 건너 자신들의 역사를 개척한 백제인 이야기를 빼버리고

일본 역사를 자생自生 왕조사로 변색시킨 『고사기』(712)와『일본서기』(720)를 편찬했습니다.

자신들의 첫 역사서에서 천황가를 백제와 무관한, 소위 신대神代로부터 시작된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왕조로 조작한것입니다.

그리고는 거꾸로 모국母國인 한민족의 역사를 그들의 식민지사로 변조하였습니다.

‘4세기 후반 신공황후가 한반도의 소국들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라는 통치 기관을 설치하여

2백 년 동안 한반도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하였다’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을 날조했습니다.

 

4세기 후반이면 한반도에는분명히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네 나라가 겨루고있던 때입니다.

그것이 선명한 역사적 사실인데도한반도의 남부가 모두 일본에 종속되었다는

어이없는 이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일찍이 8세기에 이렇게 만들어진 남선경영론

(임나일본부설)은 19세기 말 일본의 조선침략 명분으로다시 악용되었습니다.

과거 그들의 조상이 한반도로 진출하여 지배하였으니, 근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옛 땅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강변한 것입니다.

 

이때 일본은 앞서조작된 남선경영론을 뒷받침할

사료史料가 빈곤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만주의 광개토태왕 비문까지 위조했습니다.

비문 가운데 자신들에게 불리한글자를 깨부수거나 석회를 발라 내용을 변질시켰습니다.

그리고는 변질된 내용을 해독해서는 임나일본부설을 공식화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사를

모두 일본의 식민 역사로 전락시켰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죠.”

교과서와 국사 수업에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내용들…

그것들은 과연 어디에 박혀 있던 것일까. 안 종도사는 “누구든 진짜 우리 역사를 알아보겠다고

파고들수록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을것.”이라면서 “더 큰 문제는 잔뜩 뒤틀린 내용들이,

아래로는 후세들에, 옆으로는 남들 나라로 자꾸확산된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이제껏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다른 나라 역사 교과서에 우리 한국사 내용이 어떻게 실렸는지 아주 궁금합니다.

“결론부터 당겨 말할까요. ‘중국의 식민지에서 시작해 그 역사가 2천여 년쯤 되는 나라’,

이것이 세계 각국 대부분의 교과서에 나타나 있는 한국사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다른 어느 곳보다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는 일본과중국의 교과서에 수록된 한국사 내용은 어떻습니까.

“먼저 일본 고등학교에서 가장 많이 채택하는 일본사 교과서에 소개된 한국 관련 첫 역사는 한사군입니다.

‘낙랑군에 당시 왜인 사회가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다’라는 본문에 이런 주석이 붙었습니다.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조선 반도에 설치한 한사군 중의 하나’로 낙랑군을 소개하면서,

그 위치를 ‘평양 부근으로 추정한다’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낙랑군은 중국풍의 높은 문화를 자랑하였다’라고

해서 한국을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속국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4세기에 남북분열 시대를 맞은 중국이주변 민족에 대한 지배력을 잃자

동아시아의 제諸민족은 국가형성 단계로 들어섰다’라고 하여, 중국이 혼란해진 그때 비로소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신라가 세워진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반도의 삼국의 성립 시대를 겨우 4세기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때는 삼국이 세워진 지 4백년도 더 지난 후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조선반도일부에는

소국 연합에 머물러 있던 가야가 있었으며, 『일본서기』는 그 가야를 임나任那라 부른다’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일본이 남쪽 땅에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는 주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한것입니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는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원시생활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 이어

4,700여 년 전의 황제 헌원을 중국 화하족의 시조로 내세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는 황제와 더불어 염제 신농씨를 그들의 조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염제가황제와 함께 ‘황하 유역의 저명한 부락의 수령’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염제는 5,300여 년 전 한민족의 나라인 배달의 문명을 크게 일으킨 3대 성황聖皇 중의 한 분으로

황제보다 5백년 앞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치우천황에 대해서도 왜곡하고 있습니다. ‘동방에 강대한 치우 부락이 있었다.

황제 부락은 염제부락과 연합하여 탁록전쟁에서 치우를 크게 이겼다’는 대목입니다.

치우와 황제에 얽힌 역사의 진실은 이미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도 버젓이배달의 환웅천황인 치우를

‘동방의 부락장’ 정도로 밝히면서, 승자와 패자를 바꾸어 헌원이 치우천황을 이긴 것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처럼 왜곡된 내용 말고는, 4세기 위진남북조까지 다루는 7학년 교과서가 끝나도록

동방 한민족과 관련된 내용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실정입니다. 고대 고조선은 중국의 왕조 성립에 깊이

관여했고 열국 시대에는 중국 땅과 한반도 사이에 정치경제적 교류도 빈번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교과서에는 그 어떤 내용도 없어요. 고대 한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밖의 다른 나라 경우는 어떻습니까.

“대개 앞에서 말한 중국과 일본의 왜곡 내용을수용, 답습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3대 교과서 출판사 중의 하나인 글렌코 맥그로 힐에서 간행한 『세계사』(2004)에는

한국 고대사가 이렇게 기술돼 있습니다.

 

‘기원전 109년경 한국은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 왕조가 몰락한 후 반도의 지배권을 되찾았고, 313년까지 신라, 백제, 고구려 세 왕국이 건국되었다.’

이 대목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아무런 언급이 없고, 그저 ‘한국 역사는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하였고

4세기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라고 돼 있어요.

최근 미국 교과서에서 한국사의 시작을 고조선으로 보는 서술이 등장하는 등

한국 고대사 부분에 대한 인식에 변화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내용은 여전히 진실과는 다른 왜곡된 기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와 북미 지역 이외의 세계사 교과서로 눈길을 돌려도

한국 고대사에 관한 내용 자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멕시코 교과서를 보면

‘한국은 중국의 옛 영토였다가 1910년 일본에 합병되었다’라고 쓰여 있어요.

 

한국의 고대사나 중세사에대한 서술이 거의 없는 반면

이 교과서가 유독 자세히 전하는 한국의 근대사는 일제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중

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

가 지금은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

이것이 멕시코인의 머릿속에 심어진 한국의 모습인 것이죠.

그리고유럽의 교과서도 대부분 한국전쟁과 경제 성장에대해 달랑 몇 줄만 서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의 원인이 오래 전부터 자행돼 온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있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들 두 나라는 한국사를 날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릇된 내용을 다른 여러 나라에

전파하는일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만 탓할 것도 아닙니다.

왜곡된 한국사가 세계에 그대로 소개된 또 다른원인은 우리 내부에도 있습니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70년이 되도록 일본 역사학자들이 왜곡 날조한 한국사를 그대로 국내외에 가르치고

소개해 온한국의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문제입니다.

 

불과수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보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국가를 건설한 위대한 역사인 고조선의 출현에 대해‘『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

 

’(2002년판 『고등학교 국사』)라고 마치 남의 말 전하듯이 기술해 놓은 겁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송호정이란 이는 자신이 쓴 『단군,만들어진 신화』에서 ‘한민족사는 기껏 2,700년이며

고조선은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대학교수요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말입니다.

최근에는 더더욱 기가 막힌 일도 벌어졌어요.

경기도 교육청 소속 역사 선생님 열일곱 분이 모여역사 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단군조선이 실재한 역사다, 그렇게기술한 겁니다.

 

그런데 과거 노무현 정부 때 국민 혈세를 투자해 만든

동북아역사재단이란 곳의 학자들이 이를 알고는 ‘당장 이 자료를 없애라’고 난리가 났어요.

‘단군조선은 신화다.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당장 제 손으로 제 역사를 가리고 지우고 축소하러 나서는

마당에 남들 탓하기도 민망할 노릇입니다.

 

역사 왜곡과 강단사학의 문제점은 오늘 이야기만으로는 다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조목조목 이야기할 것입니다.”
안 종도사의 얼굴이 상기됐다. 그렇다면 왜곡되지 않은, 우리 역사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아니,정확하게 표현해서 ‘『환단고기』가 전하는 우리 역사의 시작’은 어떤 것인가.

지금까지 ‘왜곡된 우리 역사 쪽’으로만 말씀하셨는데,

이제 화제를 확 돌려서 그 반대쪽, 그러니까 왜곡되지 않은 우리 시원역사의 참모습에 대해 말씀을 해 주십시오.

“우리 시원역사에 대해 말하려면 역시 『환단고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합니다.

거기에 잘 나와 있으니까요. 먼저 환단고기가 어떤 책인지 부터잠깐 이야기하지요.

『환단고기』는 신라 시대의 고승 안함로가 쓴 『삼성기』, 고려시대의 원동중이 쓴

같은 이름의 『삼성기』, 고려 말 이암이 쓴 『단군세기』와 범장의 『북부여기』, 그리고 조선 중기의

이맥이 쓴 『태백일사』의다섯 권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안함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고승이며,

이암은 고려 공민왕 때 재상을 역임한 정치가이자 뛰어난 학자입니다.

범장은 두문동 72인 가운데 한 사람이고, 이맥은 조선 중종 때의 관리였습니다.

모두 당대의 최고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글은 조선의 사대주의 사관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민족자주사관이었기 때문에 일반에 공개되지 못하고 일부 양반가에 비장되어오다가

1911년 운초 계연수에 의해 한권으로 묶여 간행되었습니다.

『환단고기』의 첫 두 권인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에 따르면,

단군조선 이전에 18대 환웅들이 통치하던 배달국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신시神市라는 곳에 도읍했다가 1,200년 정도 지나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 응원단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치우천왕은 이 배달국의 14세 자오지천왕으로,

이 분이 중국의 시조 헌원과 싸워 이긴 사람입니다. 그 때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청구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배달국을 세운 사람들은 『삼국유사』에도 보이듯이 환국桓國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환국의 환웅이 3천명의 문명개척단을 이끌고 동방으로 와 신시 배달국을 열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환국 사람들은 기존의 토착세력이자 곰을 토템으로 숭배하던웅족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홍익인간은 바로 이 배달국의 건국이념이었습니다.

배달국의 건국은 원동중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900년경의 일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연대인 기원전 2,000년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환웅이 나온 환국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있었던옛 국가로

안함로는 ‘오환건국이 최고最古’라고 했습니다. 환국이 가장 오래된 국가라는 뜻이죠.

환국의 통치자를 환인桓因이라 해서 역대 일곱 분이계셨는데 그 각각의 연대는 잘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원동중은 환국이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모두 12개 국으로 이루어진 연방이었다고 하면서

그나라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고 있습니다.

원래 『삼국유사』에도 보면,

그 첫 부분인 고조선기에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라는 말로 환웅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나중에 조선총독부의 식민사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석유환인’으로 바꿔치기 한 것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경대학 소장본에조차 엄연히 ‘석유환국’이라 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환국’에 대해 ‘제석을 가리킨다(謂帝釋也)’라고 주를 달았습니다.

제석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신天神입니다. 이마니시 류는 바로 이 문구를 빌미삼아 한민족의 위대한

나라 환국을 하느님을 의미하는 ‘환인桓因’으로 바꿔놓았던 것입니다.”

◎◎본래 『삼국유사』에 기록된 우리 정통 역사를 나중에 일본인들이 모두 왜곡했다는 말씀인가요.
“일본인들도 그랬지만 애당초 『삼국유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도 있습니다.

 

특히 단군조선을 심하게 왜곡했습니다.

마치 단군왕검이 홀로 1,500년이나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또 ‘단군은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식으로 근거 없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웅일호一熊一虎’라는 구절을 당시부락을 이루어 살던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아니라

한 마리 곰과 한 마리 호랑이인 것처럼 써놓은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 바람에 오늘까지도 곰과 호랑이이야기가 대한민국 건국신화처럼 돼버린 것입니다.

이밖에 고조선이 도읍한 왕검성이(지금의) 평양이라 하여 그 지리적 위치를 왜곡하였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내용들을 다바로잡아주는 책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그러면 고조선은 실제 어떤 나라였습니까.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는 2천년에 걸친단군조선의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상세히전하고 있습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어 47대代에 이르는 단군들이 통치한 나라입니다.

고조선은한 분의 단군이 통치하되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三韓으로 나뉘어 국가가 운영됐습니다.

이를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라고 합니다.

뒤에 22세 색불루 단군 때에는 삼한을 삼조선이라 불렀는데

44세 구물 단군에 와서는삼조선이 분립하게 되었습니다. 삼조선이 대단군을 받들어

한 분이 다스리는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화전和戰의 권한이 세 단군에게 나뉘어져

나라의 힘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구물 단군은 또 나라 이름을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꾸었습니다.

후대에 부여라는 이름을 단 국가들이 여럿 나오는데이 때 부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앞서 잠깐 말했듯이 『삼국유사』 「고조선기」에는

주周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단군이 아사달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하면서

당시 단군의 나이가 1,908세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1,908세라고 하는 것은 『단군세기』에 의하면

한 분 단군의 나이가 아니라 초대 단군왕검부터 43세 물리 단군까지 고조선이란 나라가

죽 이어진 전체햇수를 말한 것입니다. 바로 그 후 고조선에서 대부여로 나라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고조선과 그 뒤 이름을 바꾼 대부여는 기원전239년에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로 이어집니다.

해모수의 북부여는 6세 고무서 단군 때까지 181년을 존속하다가 고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계승되었습니다.

 

이는 『환단고기』에 실린 『북부여기』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북부여기』는 부여에 대한 단편적 기록들만 나오는 중국사서들과는 달리 부여사의 전모를 완전하게

드러내주는 귀중한 사서입니다. 이처럼 『환단고기』에 실린 여러 사서들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환국에서 나온 배달국이 단군조선으로 이어지고, 다시해모수의 북부여로 이어집니다.

바로 이 북부여에서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온 것이니 북부여는 고조선에서 열국시대로 가는

길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환국시대로부터 단군조선까지 우리 역사는 무려 7천 년입니다.

(환국 3,301년,배달시대 1,565년, 단군조선 2,096년 도합 6,960년) 동북아의 한민족과 인류의 찬란했던

황금시절의 뿌리역사가 7천 년이나 지속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고조선만 슬쩍 남고 환국과 배달시대 5천 년이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이 땅의 강단사학자들에의해 너무도 허망하게 싹둑 잘려나가 버렸습니다.”

한국사 왜곡 문제는, 종도사님께서도 앞에 말씀하신 것처럼 해도 해도 끝이 없겠다 싶습니다.

이제 어떻게 그 잘못된 것을 잡아야 할지, 앞을 바라보는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정리해 주십시오.

“앞서 말한 것처럼 한·중·일 역사전쟁이 날로 그정도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격심한 역사전쟁에서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일방적 공격 혹은 도발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원형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역사가 곧 힘이고 무기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국사교육이 흔들림 없이 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최근 국사를 오는 2015년부터수능 필수과목으로 한다는 방침이 발표됐습니다.

거기까지 오는데도 논란이 컸습니다. 국사교육은어떤 논란의 대상이 아닙니다.

세계 어떤 선진국이든 국사는 교육과정의 필수과목 중 필수과목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국사는 국가와 민족의 문화를 가르치고 혼을 불어넣는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국사를 교육과정의 필수과목으로 정한다해도 엉터리 역사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차라리 안가르치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특히 우리의 상고사와 근대사를 제대로,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단군조선이 신화에서 역사로 편입된 것도 얼마 전의 일입니다.

 

그 이전에는 곰과 호랑이와 마늘이야기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상고사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근대사의 기록도 좀 더 민족사관 혹은 주체사관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산업혁명이니 이성주의니 하는 서구중심의 근대관과 우리가 근대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근대사가시작된 진정한 출발점은 상제신앙과 개벽사상을내세운 동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대한 학문적, 문명론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셋째, 범국민적인 역사광복 운동이 일어나야 할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역사전쟁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자행돼온 역사왜곡 문제,

그리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역사전쟁 문제를 국민들에게 상세하게 알리고 모든 국민들이 동참하는

역사회복, 역사광복운동을 벌여나가야 합니다.

넷째, 우리 고유 사서를 찾고 그 사서를 분석 연구하여 참 역사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환단고기』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보고입니다.

 

지금 강단사학계에는 식민사관의 틀을 전혀 못 벗고 『환단고기』를 부정하고 비판합니다.

어떤 책이든 우리 역사의 맥을 전하고 있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담고 있다면 먼저 그 기록을 철저히연구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점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다섯째, 대한사관, 민족사관에 입각한 정통 역사교과서를 집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교과서를 가지고 역사교육을 해야 합니다. 역사학계의 풍토도 바꿔야 합니다.

 

지금도 강단사학계에는 일본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중화사관에 의해 왜곡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를 기술하는 풍토가 존재합니다. 그들이 만든 교과서들 역시 그 시각에서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계속반복될 뿐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역사광복은 참으로 필요한 일,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군에서라도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정신을강조하는 분위기가 필요하겠는데요’ 라고, 기자가끼어들었다.

안 종도사는 “물론입니다. 군은 나라를 지키는일이 주 임무입니다.

그런데 그 임무는 반드시 올바른 역사관과 국가관을 가지고 임할 때 그 가치가 빛나는 법입니다.

군을 이끌어가는 분들부터 우리 시원 역사에, 그리고 우리 민족의 뿌리 종교와정신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면

역사광복의 그날이 훨씬 앞당겨질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최근벌어지는 영토전쟁과 역사전쟁의 관계로

이야기를이어갔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독도를 넘겨보고

중국은 이미 우리의 백두산 절반을 뚝 잘라가 버렸습니다.

저 만주의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나오는 유물이나 유적은 모두 우리 한민족의 것입니다.

 

그런데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그것이 자국땅에 있으니 홍산문화도 자기들 역사라는 억지를부립니다.

발해와 고구려도 중국사의 일부분이라는 주장에는 정말 할 말을 잃습니다.

역사 도둑질이 심해도 너무 심합니다.

2620E63A52D843F2222CEE


사정이 이러한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나태한 정신, 무기력한 역사의식으로 강 건너 불 보듯 하지는 않습니까?

실제로 지금 우리 고유의 사상과 문화는 다 어디로 갔는지 외래 종교와 사상이판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종교와 역사를모두 미신으로 호도합니다.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한 우리 민족의 지도자인데도 신화로 여기고 보이지도 않는 어느 구석엔가

처박아 버렸습니다.

 

단군을 받들어 모시거나 단군 조선을 가르치면 모두 미신이라고 적대시합니다.

심지어 단군상의 목을 베어 버립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입니까?

이제 우리 역사를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종교와 사상을 떠나서 우리 역사를 사랑하고 보존하고 전수해야 합니다.

서구 중심의 가치관이나 물질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종교와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 출발점이 상고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고,

우리 문화의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영토를 잃어버릴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나라도, 조상도, 문화도, 정신도 모두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역사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역사를 잊어버린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는 말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