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황의 원형, 3천500년 전 '홍산옥기'에서 찾았다?

2002한일월드컵 때 붉은악마의 상징 치우천황은 동아시아에서 승리의 신이었다.

<환단고기>에는 제14대 신시 배달국을 통치한 임금으로 나온다.

 

그런데 치우의 원형이 홍산옥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동안 도깨비상, 귀면(鬼面), 신수(神獸) 등에서 치우의 모습을 해석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홍산옥기는 처음이다.

 

이찬구 박사(가톨릭대학교 외래교수, 철학박사)는 지난 5일 프레스센타(서울 중구) 20층 프레스클럽에서 열린

<제1회 홍산문화 학술발표>에서 ‘홍산옥기에 나타난 치우형상 고찰’을 주제로 발표했다.

한국홍산문화학술원(원장 박문원)이 주최한 이번 행사는

박문원 원장이 그동안 수집한 2,178점의 홍산문화유물에 대해 학술적인 조명을 받는 자리였다.

 

성통공완을 나타내는 ‘치우 정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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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우형상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홍산옥기(제공=이찬구 박사)

이 박사는 홍산옥기의 인물상을 치우형상이라고 주장했다.

치우형상은 적봉의 오한기(敖漢旗)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는 옥기를 직접 들고 청중들에게 설명했다.

 

“윗 이빨과 송곳니, 아래턱, 왕눈, 두 귀, 구레나룻가 강조되고 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이빨을 드러냈다하여 장구노치(長口露齒)라 하나 다른 것들과 달리 반달 모양이 고매한 느낌을 준다.

 

윗니는 모두 4치(齒)를 그리고 있다. 두 개의 송곳니는 곰의 이빨이며, 두 귀는 곰의 귀처럼 아담하게 그려 정수리를 넘지 않는다. 귀와 송곳니는 곰을 상징한다. 웅녀족의 후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송곳니는 권력과 권위, 타원형의 아래턱은 무욕(無慾)과 원만성을 상징한다. 구레나룻은 호랑이를 연상시키며 두 귀는 머리보다 작아 공격적이지 않(는)다. 정수리의 둥근 봉우리는 선도(仙道) 수행가의 성통공완(性通功完)을 상징한다.”

치우형상은 높이가 17.5cm, 두께가 3cm정도 되며 머리 뒤에 매달 수 있는 구멍이 패여 있다.

 

이 박사는 “인물상이 지금까지 알려진 치우형상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형(原型)”이라며 “천하제일 치우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고구려 안악3호분(357년)의 치우형상에 타원형의 입모양이 전승됐다는 점, 민간에서 전승된 둑신사의 치우부적과도 머리와 눈, 코가 일치한다는 점을 들었다.

 

<로사>에는 치우가 ‘천부의 신(天符之神)’인 것은

“머리는 둥근 하늘같고 해의 모양이라면 아래턱은 반달 모양”인 것은 일월합상(日月合像)에서 알 수 있다.

이 박사는 “하늘같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반달 같은 미소가 넘쳐 나온다.

 

그러나 이 치우형상이 시대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치우의 이빨이다. 이빨이 빠지면 사람이 죽는 것처럼 이빨은 불로장생과

권위와 위엄을 상징한다. 윗니만 그리고 아랫니를 그리지 않은 것은 타원형의 아래턱은 무욕(無慾)을 상징한다.

훗날 이 치우형상에 연원하여 문고리 형태로 변형되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300년∼800년 시간차를 어떻게 극복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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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우옥기를 들고 있는 이찬구 박사

이 홍산옥기 인물상을 최초의 치우형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찬구 박사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시대적인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과제다. 선도사서(仙道史書)에 나타난 치우 연대와 홍산유물 연대가 최소 300년에서 최대 800년까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중국학계는 홍산문화 유적 연대가 기원전 4,500년 - 기원전 3,000년 사이에 해당한다. 이 중에 서요하(西遼河) 일대인 동산취(東山嘴)와 우하량(牛河梁) 유적들은 홍산문화 만기(晩期)인 기원전 3,500년 – 3,000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이미 초급문명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본다.

 

<환단고기>를 보면 단군은 무진년에 건국했다. 그것에 근거해 신시 배달국 18세(1,565년)을 역산하면 치우는 갑인년에 등극한 것이 된다.

 

이 박사는 “이 단군 무진년이 언제냐는 것은 조선시대 와서야 확정된다. 즉 단군의 무진년은 기원전 2,333년으로 본 것은 <동국통감(성종 15년 1484)에 나오는 ‘당요무진세(唐堯戊辰歲)라는 말에 근거하여 산출된 연대이다. 이에 따르면 치우는 단군의 건국연대인 기원전 2,333년 보다 374년 앞서므로 기원전 2,707년에 즉위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치우의 기원전 2,707년 즉위설은 홍산옥기 연대(기원전 3,500년-3,000년)에 비교하면

최소 300년에서 최대 800년 차이가 난다.

이에 대해 이 박사는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치우의 즉위연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치우의 연대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단군의 무진건국연대가 어느 무진년인가를 찾아내

수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상고사 역사를 회복해야

한편 이찬구 박사는 치우상을 되찾는 것은 상고사의 회복이라고 강조했다.

“사마천은 동이족을 부정하기 위해 <사기>를 집필하여 역사 왜곡을 감행했다.

 

오늘날까지 치우는 <사기>의 잔인한 ‘감옥’에 갇혀 진실이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다.

더불어 한민족 9천년 사는 국통맥(國統脈)이 단절되어 머리 없는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치우 역사의 복원은 너무도 절실하다.”

치우천황은 상고 이래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했다.

 

“임금께서 9환족이 모든 왕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지낼 때, 환

인, 환웅, 치우와 단군왕검을 배향하였다.” - 단군세기“조선의 세종은 치우신위를 모시고 마제(禡祭)를 지냈다.”

- 세종실록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3차례 둑제(치우제)를 지냈다.” - 난중일기

“치우장군의 활동으로 우리 민족은 무강한 민족으로 널리 알려졌다.”- 육군본부 <군신 치우>

그러나 치우는 중국 사대주의로 잃고 만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문제가 ‘황제가 치우를 사로잡은 것을 칭송하는

시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춘향전에도 ‘헌원이 치우를 사로잡았다’고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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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홍산문화학술원(원장 박문원)은 지난 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 프레스클럽에서 제1회 홍산문화 학술발표회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박문원 원장이 그동안 수집한 2,178점 홍산문화유물에 대해 학술적인 조명을 받는 자리였다.

이 박사는 “중국 역사왜곡으로 잃어버린 치우상,

즉 천자(天子)의 치우, 천왕(天王)의 치우, 군신(軍神)의 치우, 병신(兵神)의 치우, 병주(兵主)의 치우를

다시 찾아 원상을 회복해야 한다”라며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상고 역사의 원형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게을리 한다면 규원사화의 지적처럼 후대의 학자들이 치우에 대해

소홀히 했다는 질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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