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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治水 성공 비밀 배경에 단군신화가 있었다?

禹王治水는 檀君의 도움으로 가능하였다<난주(蘭州)1>

“우육면을 먹지 않으면 난주에 온 것이 아니다”

은천을 출발한 기차는 밤새도록 달려 아침 무렵 난주에 도착한다.
난주는 해발 2000m의 황토고원에 세워진 도시여서인지 쌀쌀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으니
아침식사도 하고 몸도 녹일 겸 식당을 찾는다. 가까운 곳에 우육면(牛肉麵)을 파는 식당이 보인다.

“저 식당에 가서 우육면 먹을까?”
“그럼요, 난주에 와서 우육면을 먹지 않으면 난주에 온 것이 아니랍니다.”
난주 특산물은 뭐니 뭐니 해도 우육면이다. 소고기 국물에 말아주는 국수인데,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속이 시원하고 든든하다.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回族)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에서 많이 키우는 양과 소로 육수를 우려내고 소고기를 얇게 썬 편과 야채,
고추기름을 면과 함께 먹는다.

소고기는 고산지대에서 사육하는 야크(Yak)를 쓴다. 야크는 검고 긴 털을 가진 소다.
우육면은 특히 아침에 인기가 좋다. 그래서 아침이면 우육면을 먹는 중국인이 식당에 가득하다.
중국인은 우육면을 먹을 때면 삶은 계란과 야크 수육을 함께 먹는다. 삶은 계란은 면에 넣어서 국물과
같이 먹는데 이 또한 색다른 맛이다.

수육까지 같이 먹으면 그야말로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여기에 생마늘을 반찬으로 함께 먹으면 그 맛이 천하일품인데, 마늘의 똑 쏘는 맛과 향이 쫄깃한 면과
담백한 육수와 어울려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게 된다.
난주 우육면은 중국의 대도시라면 어느 곳에서나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니 난주에 와서 우육면을 먹지 않고 가는 것은 난주를 다녀간 것이 아니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소증(素症)을 풀듯 우육면을 곱빼기로 시켜서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배부르게 먹고 나오는데도 뒷맛이 혀를 감싼다.

황하가 흐르는 감숙의 요충지 ‘난주’

황하가 흐르는 도시 난주는 감숙성의 성도(省都)로 정치와 경제, 행정의 중심지다.
예로부터 도읍이 될 만한 도시는 강을 끼고 있었다. 위수가 흐르는 장안, 낙수(洛水)가 흐르는 낙양,
장강이 흐르는 무한이나 남경 등이 다 그렇다. 하지만 황하가 흐르는 대도시는 난주가 유일하다.
 
황하가 북방민족과 경계지역에 있었던 까닭이다. 한나라 무제 때에 와서야 금성(金城)이라 불리며
도시로 발전하였고, 수나라 때 지금의 난주가 되었다. 난주는 기원전 1세기부터 실크로드로 가는 주요
길목이어서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든든한 아침을 먹고 난주 시내를 걷는다. 황하를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다. 황하가 흐르는 난주에 오면 꼭 보아야 할 석상(石像)이 있다. 황하 강변에 조성된
‘황하모친상(黃河母親像)’이다.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의 어머니가 천진난만한 갓난아이를
배 위에서 어르며 흐뭇해하는 모습이 화강석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동안 황하는 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갔지만,
중화문명을 일군 황하는 중국인들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하지만 황하모친상 뒤쪽으로 거칠게 흐르는
황하를 보면 자애로운 어머니가 떠오르기보다는 무섭기만 하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인을 키워온 젖줄과도 같은 강, 황하. 그것을 알리는 황하모친상이지만
왠지 그 뜻과 실제 강의 모습이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 황하모친상은 강의 흐름이 느리고
잔잔한 곳에 있어야 보다 잘 어울릴 듯하다.

황하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그 길이가 5464㎞이고 유역면적은 75만 2400여㎢에 이른다.
규모로 따지면 한강의 28배가 넘는다. 황하는 그 크기만큼 무서운 강이다. 황토평원을 이리저리 깎아 물길을
바꾸기 때문이다. 긴 강이 물길을 바꾸면 인간사회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중국인들은 용(龍)을 숭배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황하를 곧잘 용이라 여겼다. 황하가 물길을 바꾸면 용이 화가 났다고
생각한 그들은, 황하를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용은 물론 자신들의 삶도 평안하게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중국의 고대사는 황하를 다스리는 것과 잇닿아 있었고, 황하를 잘 다스린 자들이
중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와 전설도
황하를 다스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의 숙명적인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하를 다스리는 자가 세상을 다스린다, ‘곤우치수 신화의 탄생’

황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당나라 때 시인 유우석은 “1만 리 사막 길을 아홉 번 굽이돌아 출렁이는
바람타고 하늘 끝에서 온다.”고 하였다. 천산의 만년설이 녹은 청정한 물이 사막과 황토고원을 적시며 대지를
깎고 산봉우리를 돌아, 그 흘러온 시간만큼 진한 황토빛깔의 황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 이전부터 흘러온 황하 주변에 인간들이 정착하게 되었으니
중국의 역사는 바로 황하의 역사이며, 황하문명도 그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빙하기 말기에 대홍수가 일어났다.
이 대홍수는 원시 인간사회에 커다란 재앙이었다, 그래서 아득한 기억이지만
동서 대륙의 민족마다 대홍수에 대한 다양한 신화와 전설을 창조해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이룬 수메르 인들의 ‘대홍수 신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
그리고 중국신화에 나타난 ‘대우(大禹)의 치수’ 이야기는 모두 상고시대 대홍수를 다스린 이야기들이다.

중국은 황제의 신화시대 이후 요(堯)임금의 전설시대로 접어들면서,
황하 유역에 빈번히 발생하는 대홍수를 다스려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 시대의 홍수는 어느 정도였을까?
 
‘상서’ ‘요전(堯典’에서는 “산과 언덕을 덮고, 넘실넘실 하늘까지 닿았다.”고 했고,
맹자도 ‘백성들이 살 곳이 없게 되어 낮은 곳에서는 나무 위에서 살고, 높은 곳에서는
동굴을 파고 살았다.’고 하였다.

‘서경’의 기록에 따르면, 상나라는 모두 5번 천도하였는데,
그 이유가 모두 황하의 대홍수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홍수를 다스리고자 하는 염원과 갈망은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는 우선적인 일이었고, 이는 치수신화(治水神話)로 농축되어 나타난다.

중국의 대표적인 신화집인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에는 곤우치수(鯀禹治水)신화가 있다.
곤이 홍수를 막기 위하여 상제(上帝)만이 가지고 있는 식양(息壤․저절로 불어나는 흙)을 훔쳐
1,000리에 달하는 제방을 쌓았지만, 이것이 탄로가 나고 제방도 무너져 죽음을 당한다. 그의 아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13년간의 노력 끝에 치수에 성공한다는 내용이다.

곤은 굳세고 정직하였다. 홍수를 막기 위해 9년간 전심전력으로 제방을 쌓고 물을 막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엄청난 홍수를 다스릴 수 없었다. 곤의 아들 우는 부친의 경험을 토대로 보다
발전된 방법을 연구한다. 홍수를 막을 수 없다면 길을 내어 잘 흐르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래서 제방으로 막는 한편 필요한 곳에는 물길을 내어 바다로 흘러가게 하였다.
우는 이 공적으로 대우(大禹)로 칭송받게 된다.

치수신화의 주인공 禹, ‘夏나라’의 始祖가 되다

사마천은 곤우치수 신화의 주인공인 우를 역사적 인물로 변모시킨다.
‘사기’ ‘하본기(夏本紀)’에서 우는 하나라를 건국한 시조로 거듭난다. 그가 주장한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여 비합리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가장 그럴 듯한 것만을 골라서 본기를
저술’함으로서 신화의 역사화를 시도한 것이다.

중국인은 기록을 좋아한다. 문헌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신화가 곤우치수 신화인데,
그 시점은 주 왕조 초기다.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반고, 인류를 창조한 여왜, 문명을 창조한 복희 신화는
후대에 기록된 것이다. 어째서 중국신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발전하고 있을까? 이는 중국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고대의 신화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더 오래된’ 신화를 만들고 이를 끌어내 역사화 함으로써,
그동안 용인되어 왔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통성을 다시 만들어낸 것이다.
곤우신화도 이처럼 새로운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홍수를 다스려 천하를 안정시킨 우는 순(舜)으로부터 왕권을 선양받아 하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우는 아들인 계(啓)에게 왕권을 넘겨준다. 요, 순, 우로 이어진 선양제를 세습제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제정일치 씨족사회를 벗어나 왕권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을 보여 주며,
왕조 형태의 부족국가가 탄생한 것을 암시한다. 치수에 성공한 우는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를 세운다.
일명 ‘우왕비’다. 호남(湖南)성 형산(衡山)의 최고봉인 구루봉에서 발견되어 일명 ‘구루비’라고도 하는데,
비문의 글자 수는 모두 77자로 많지 않다.

우왕의 치수는 단군의 도움으로 가능하였다

치수에는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우의 부친인 곤은 치수에 관한 한 자타가 인정한 사람이었지만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우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그는 아버지 곤의 치수 방법 외에 어떤 지식을 더 갖추었을까? 그 정답은 우리가 망각한 채 뒷전에
밀어둔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번한세가(상)’에서 알 수 있다.

‘갑술 67년(기원전 2267년),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가 우사공에게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해 주었다.’

부루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우사공에게 고하되,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다.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길, 물과 땅을 다스려 백성들을 구하려 한다고 했는데 삼신상제(三神上帝)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이 옳다고 하시므로 내가 온 것이다.”라며 치수에 필요한 3가지 보물을 준다.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하지 않는 천부왕인(天符王印), 물의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한 신침(神針), 험요의 물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황거종(皇鉅宗)이 그것이다.’

또한, ‘환단고기’ ‘고구려국 본기’에는 우왕비의 탄생과정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공 우가 재계하기 사흘 만에야 겨우 치수의 비결을 얻어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이에 우는 돌을 채석하여 산의 높은 곳에 세우고 그곳에 부루 태자의 공을 새겼다.’

‘환단고기’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고 잃어버린 우리 고대사를 복원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자료다. 위서(僞書)라는 주장도 있지만 중국의 사서 기록과 비교해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일치한다.
 
이를 면면히 살펴보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배워온 우리 역사가 일 순간에 광활한 중국 대륙으로 확장된다.
그런데도 선뜻 믿기 어려운 것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의 영향 때문이다.
역사는 새로운 사실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과정이다.
기록이 상대적으로 적은 고대사는 더욱 그렇다. 어제의 단정이나 속단은 오늘의 새로운 사실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감추거나 속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환단고기’의 내용을 종합하면 사실관계를 좀 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즉, 곤의 아들인 우가 치수를 맡아 13년간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단군조선의 단군왕검이 사자로 파견한 태자 부루에게서 오행치수법과 세 가지 보물을 전수받아
치수를 성공한 것이다. 이에 우가 치수를 기념하고 신과 같은 기술을 전수해 준 태자 부루의 공덕을 함께
칭송하기 위해 비를 세운 것이니, 그것이 곧 ‘우왕비’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사 어디에도 우의 치수 성공이 단군조선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내용은 없다.
우리조차도 우의 치수 성공은 우가 스스로 노력해서 이룬 것으로 알고 있다. 자국의 상고사를 모르고 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순시대의 선양은 ‘만들어진’ 평화

우리는 요순시대의 평화적 선양에 대해 누누이 들어 왔다.
공자와 제자백가, 그리고 사마천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수없이 찬양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위정자들은 이를 통치이데올로기로 활용해 왔다. 그리하여 인간사회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낙원으로 ‘요순시대’를 선전한 것이다. 하지만 요순시대의 인간은 권력욕이 없었을까?

아니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권력을 이양한 사건에도 권력을 향한 순임금의 의지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기록을 보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순은 요로부터 왕위를 선양받는다.
하지만 선양과정에서 요의 신하인 곤이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자 순이 황하치수의 실패를 빌미로
곤을 처형함으로서 정적을 제거한 것이다. 이러한 순임금의 행위는 곧 권력을 향한 욕심인 것이다.

황하치수는 요순은 물론 당시 백성들 모두의 소망이다. 우가 황하치수에 성공하자,
그들의 생활터전은 황하 중상류에서 중원 전체로 넓혀진다.
황하치수 성공이 영토 확장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우는 치수에 성공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그것은 요순시절의 좁은 생활터전에서 얻는 명성과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의 명성은 곧 권력이 되었고 부친을 살해한 순을 향해 칼을 겨눌 즈음,
생명의 위급함을 느낀 순이 우에게 자리를 내준 것이다. 요순시대도 그렇거니와 순이 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도
평화적인 선양이 아니다. 권력의 이동에 따른 피의 숙청을 두려워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이것을 마치 ‘고복격양(鼓腹擊壤)’의 평화로운 정권교체로 각색하고
인류가 도달해야할 낙원이라고 설파하니 이쯤 되면 역사를 제삼제사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 이래로 신고(信古:옛것을 그대로 믿음)의 필치를 더욱 단단하게 엮은 사마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적 기록물을 ‘의고(擬古:옛것을 의심함)의 역사관’으로 다시금 살펴보는 것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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