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
 
무협의 나라 중국, 역사왜곡도 무협적?
허우범
역사 기행 전문가 (인하대 홍보팀장)
E-mail : appolo21@hanmail.net
입력 : 2013.12.29 13:43 | 수정 : 2013.12.29 16:14  
   
고조선 용산문화의 상징과 만나다<은천2>
변방의 강남, ‘銀川’

서하왕국의 수도인 은천 지역은 ‘새상(塞上)’이라고 부른다.
이는 ‘새하(塞下)’와 대비되어 부르는 말로 각기 변방의 위쪽과 아래쪽 지역을 의미한다.
‘새(塞)’는 변방을 의미하는 글자로 주로 한당(漢唐)시기에 쓰였다. 한당 시기는 중국이 통일제국을 건설하고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를 개척하기 위하여 흉노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때다.

이처럼 ‘새(塞)’는 실크로드 주도권 싸움에서 생긴 단어이지만 실질적인 지리는 황하와 관련이 깊다.
청해성에서 발원한 황하가 난주를 지나면서 동북으로 향하는 감숙성의 동쪽을 ‘새하’라 하고,
이를 지나 곧장 북쪽으로 향하는 은천지역을 ‘새상’이라고 한다. 황하가 인접한 은천은 풍요로운 혜택을 입어
‘새상(塞上)의 강남(江南)’이라고 부른다.

은천은 자연의 풍요로운 혜택만큼이나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다.
진시황은 이곳을 차지하고 동서로 이어지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나라의 왕성인 함양(咸陽)이 멀다고 하여도
이곳을 든든히 방비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치 제갈량이 기산과 가정을 차지하지
못하면 촉한(蜀漢)이 움직일 수 없다고 본 것과 같은 것이다.

자연적인 방어수단인 황하(黃河)와 인공적인 방어수단인 장성(長城)은 중국 역사의 상징물이다.
이는 한족과 오랑캐로 대별되는 투쟁에서 한족의 단결과 공동체적 삶을 지속시키는 정신적인 힘이자,
오랑캐를 무찌르는 지리적인 힘의 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11세기 초, 이 땅은 흥주성(興州城)을 쌓고
서하왕국을 건설한 원호(元昊)의 차지가 된다. 아무리 견고한 방어수단도 인간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진시황의 장성이 무쇠처럼 튼튼하여秦築長城比鐵牢
오랑캐가 감히 임조를 넘보지 못하였다는데蕃戎不敢過臨洮
비록 만 리 구름처럼 연이어 끝이 없을지라도雖然萬里連雲際
요임금 삼 척 궁전의 견실함에 미칠 수 있으랴爭及堯階三尺高

물리적인 힘은 더 강한 물리력에 의하여 무너지기 마련이다.
상호 존중과 배려를 통한 화합과 단결이야말로 그 어떤 물리적인 힘보다 강하고 견고한 것이며,
이러한 믿음 속에서 탄생한 대동사회(大同社會)는 황하와 장성 없이도 영원한 낙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북두칠성과 ‘7’, 우리 민족의 七星신앙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하왕릉의 유적 중 가장 웅장한 것은 3호릉이다.
나라 이름을 ‘대하(大夏)’라고 공표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한 원호의 릉이다.
1000여 년 전에 흙으로 쌓아 만든 릉이 지금도 이와 같은 모습이라면
당시 원호 황제릉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비가 드믄 지역이라 하더라도 바람 거센 사막지대인 점을
고려한다면 현재 모습의 두 배는 되었으리라.
 
무너진 왕릉을 돌아보며 상념에 잠기던 나는 층층이 쌓인 기와 파편을 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한줄기 생각이 번개처럼 온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7층으로 된 장군총
7층으로 된 장군총

왕릉이 7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유적인 장군총도 7층이다.
무슨 상관이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은천과 집안의 중간에 홍산문화의 발원지인 우하량 유적이 있다.
이곳의 구릉에서는 한 변의 길이가 60미터인 거대한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7층이다.

이 우하량의 적석총 유적은 기원전 3500여 년 전의 것으로 추정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제작시기가 기원전 2500년경이라고 하니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인 것이다.
 
3500년 전, 이처럼 거대한 적석총을 만들려면 엄청난 인원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는 곧 권력의 발생을 의미하며 고고학계에서는 초기국가단계라고 주장한다.
7층 흔적이 보이는 서하왕릉
7층 흔적이 보이는 서하왕릉

7이라는 숫자는 북두칠성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에게 북두칠성은 시간과 생명을 주관하는 별자리로 인식되었다.
그런 까닭에 생명을 거두는 것은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7이라는 숫자를 중시해왔다.
오늘날 장의(葬儀)에서 칠성판을 까는 것도 바로 이러한 풍습이 전해져 온 것이다.

홍산문화 묘지의 특징 ‘피라미드 적석총’

피라미드식 적석총은 중국문명의 줄기인 중원지역에서는 볼 수 없다.
고구려와 발해가 있었던 동북3성 지역과 몽골, 한반도에서만 볼 수 있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나온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의 특징이다. 이 또한 중원지역에서는 발굴되지 않는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7층의 적석총 또한 고조선과 관련된 유적인 셈이다.
환도산성 아래 적석총 무덤군.
환도산성 아래 적석총 무덤군.

이러한 고조선의 유적은 고구려로 이어진다. 집안의 장군총뿐만 아니라
환도산성 아래에 있는 수천의 무덤군도 모두 피라미드식의 적석총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단군릉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동북아지역과 다른 내몽고지역의 은천에서 흙으로 빚은 7층의 피라미드를
만난 것이다. 이는 어쩌다 만난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이동과 함께 확산된다. 이는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교류의 결과다.
홍산문화를 만든 민족은 자신들의 문화를 여러 곳으로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중심 무리는 요동과 만주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고, 한 무리는 초원길을 따라 은천까지 간 것이다.
은천지역의 피라미드는 황토고원인 까닭에 돌 대신 흙으로 쌓은 것뿐이다.
감숙성의 만리장성 모습.
감숙성의 만리장성 모습.

중국 역사공정의 피해자, ‘서하’와 ‘고구려’

서하는 11세기부터 2세기 동안 수많은 전쟁과 교역 속에서 중원의 국가들과 대등한 위상을 펼치며
정족세(鼎足勢)를 유지한 제국이었다. 그런데도 송요금 시대의 일개 지방정권으로 분류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중국정부의 지원 아래 무차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주변국의 역사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역사의 판을 다시 짜겠다는 것으로 ‘역사전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사례가 ‘동북공정’이다.
서하왕국 건설한원호의 상.
서하왕국 건설한원호의 상.

중국은 이 작업을 통하여 고구려를 수당시대의 지방정권이라며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켰다.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멸망하였는데, 중앙정권이 지방정권을 제압하기 위하여
수차례에 걸쳐 엄청난 인력을 동원하며 ‘전쟁’이란 단어를 ‘선포’할 수 있는가.
 
또한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유언까지 하였는데,
고구려가 중앙정권에 대항하는 지방정권이라면 중원의 통일을 위해서 끝까지 싸워야 할 일이지
중단하라는 유언이 될 법이나 한 말인가.

중국의 동북공정 작업이 한창이던 2003년 겨울, 나는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게 되었다.
그야말로 철통같은 보안 속에 이루어지는 역사왜곡의 현장이었다. 그중에서도 집안박물관을 들어섰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한자로 쓰인 고구려에 대한 설명문을 읽으려고 하자,
안내인이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한 듯 조용하게 말한다.
운남성 곡정에 있는 제강량과 맹획의 부조상.
운남성 곡정에 있는 제강량과 맹획의 부조상.

“고구려에 대한 설명은 그냥 참고만 하세요. 일개 지방정권 일리가 있나요. 아는 사람은 아무도 안 믿어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설명의 첫 부분을 읽자,
중국의 생각을 확실하고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고구려는 동북아지역의 고대문명발전과 생산과정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의 하나다.’
그야말로 제국주의적 역사관이 바탕이 된 노골적인 역사왜곡이다.
 
문제는 이를 알리려는 대상이 누구냐에 있다.
박물관의 설명문은 한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를 통해 금방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자국의 고대 지방정권으로
이해하고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할 것이라는 비열한 술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내용 중에는 제갈량의 ‘남만정벌’이 있다.
특히, 남만의 수령인 맹획을 7번을 놓아주고 7번 다시 잡았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마음을 얻으려는 통치술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은 역사적으로 사실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운남성 기행을 한 적이 있다.

역사적으로 남만정벌은 제갈량이 유비 사후, 북벌을 준비하기 위하여 단행한 것으로
6개월의 짧은 기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맹획을 칠종칠금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현지의 한족들은 누구나 이를 역사적 사실로 굳게 믿고 있다. 탁월한 전략가인 제갈량이면
충분하고도 남는 일로 알고 있다.
 
역사책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소설책의 내용만 알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중국인들이다.
이러함에 박물관에 붙은 설명서를 읽는 중국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음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철석같이 굳게 믿을 것이니,
이 얼마나 섬뜩하고 무서운 일인가.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과거에 있었던 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과거의 일이기에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은 어째서 과거의 일에 국가적인 사활을 걸고 맹진(猛進)하는가. 그것은 역사가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항상 진행형이다. 과거의 역사도 현재에 의해서 바뀌고 고착화된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나침판이 된다.
역사를 중시하고 역사에서 쉼 없이 배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도 중국의 역사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 고대사는 물론 정신사까지 파먹을 기세다.
 
중국은 청나라의 역사인 ‘청사(靑史)’작업을 끝내고 지금 내부적으로 검토단계에 있다.
청사의 발표내용에 따라 고구려와 발해에 이어 조선시대의 역사까지도 그들의 역사 속에 옭아매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태연자약하다. 언제든 대응할 준비가 끝난 것인가.
아니면 비루먹은 닭이 되어 이도저도 생각 없이 졸고만 있는가. 정치와 경제가 무너지는 것은
국가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중대한 문제이지만,
역사가 무너지는 것은 민족과 그 정신이 소멸되는 실로 어마어마한 폭발임을 우리는 정녕 모르는 것일까.

중국 무협영화의 고향, ‘진북보 서부촬영장’

서하왕릉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기분도 전환할 겸 영화촬영장을 찾았다.
서부지역 최대의 영화촬영장소라고 하는데 입구에는 동물가죽으로 만든 ‘진북보 서부촬영장(鎭北堡西部影城)’이라는 안내가 이채롭다. 명나라 때의 성터가 남아있던 것을 장현량이란 작가가 아이디어를 내서
1993년에 영화촬영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촬영장이었음을 알리는 안내판.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촬영장이었음을 알리는 안내판.

입구를 들어서자 ‘중국 영화는 여기서부터 세계로 진출한다.’는 거창한 문구가 들어온다.
이곳의 위상을 말해주는 듯하다. 규모 역시 엄청나다. 칸칸이 나뉜 구획에 따라 오밀조밀하게 만든 촬영장은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
수많은 영화를 이곳에서 찍었다고 하기에 궁금한 것이 생겼다.

“이곳에서 찍은 영화 중 유명한 것은 무엇이지?”
“유명한 영화요? 너무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어요. 무협영화는 모두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렇게나 많아?”
“그럼요, 한국의 사극도 이곳에서 많이 찍은걸요.”

대돈황, 신용문객잔, 서유기, 붉은 수수밭 등등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의 사진만으로도 회랑을 만들어 놓을 정도다.
놈놈놈, 왕건, 선덕여왕 등의 한국영화나 드라마도 이곳에서 촬영하였으니 실로 무협영화의 출발지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

무협의 나라 중국, 역사왜곡도 ‘무협적’

무협영화는 인간이 현실적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상을 여러 가지 촬영기법을 활용하여
대리만족을 시켜줌으로써 심리적인 위안을 주거나 스트레스를 풀게 한다. 그래서 무협지나 무협영화에 빠지면
마치 컴퓨터게임에 빠진 것처럼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진북보 서부 영화촬영장 모습.
진북보 서부 영화촬영장 모습.

중국은 왜 무협영화가 성행할까.
그것은 중국의 역사가 곧 무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산하를 적셨다. 천하권력을 차지한 자는 이들을 다독이는 정치가 필요했다.
중국의 역사에서 시대가 바뀔 때마다 강조되는 문무쌍전(文武雙全)의 통치술은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다보니 무협이야기는 전설을 만들고 전설은 역사로 굳어진다.
그리고 무협지처럼, 무협영화처럼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 ‘전설적인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한다.
중국정부의 역사왜곡도 무협영화적인 사고방식이 저변에 깔린 것인지도 모른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필요한 부분을 필요한 만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가진 무협영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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