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본기(神市本紀) 11장.


치우천황릉의 위치와
천황에 대한 서방 한족의 전설적 추앙

 

치우기의 전설과 유래

지금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치우천황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궐향성에 있으며,

높이는 7장이라 한다. 진한시대에 주민들이 항상 10월에 제사를 지냈는데,
반드시 붉은 기운이 진홍색 비단처럼 뻗치므로 이를 치우기라 불렀다.

 

아마도 그분의 영웅적인 기백은 보통사람과 아주 달라
수천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으리라.헌원은 이 뒤로 쇠미해졌고,
유망도 따라서 영구히 몰락하였다.

 
치우천황의 웅렬하심은 대대로 온 천하를 진동시켰다.
특히 유쥬, 청주 지방에서 그 명성과 위엄이 지속되니,

헌원 이래 대대로 스스로 불안하여 그 치세가 끝날 때까지
베개 배고 편안히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사기>에 이른 바, “산을 헤쳐 길을 내어도 편안히 안주하지 못하고,
탁록의 강가에 도읍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일정한 곳에 살지 못하며,
항상 군사로 보호하여야 했다” 하였으니, 헌원이 얼마나 전전긍긍하였는지 역력히 엿볼 수 있다.

 

<상서-여형>에 또한 이르기를,

“옛 가르침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켰다”라고 했으니,
저들이 치우천황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기운을 잃고,
대대로 교훈을 전하여 후인을 크게 경계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300년 동안은 전쟁이 없었고, 다만 전욱과 한 번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다.

 
초대 환웅천황께서 신시를 개척하여
새 시대를 여시고 18세를 전하니, 역년이 1565년이다.

바야흐로 단군왕검께서 웅씨 비왕으로
신시 배달을 대신하여 구환족이 사는 모든 지역을 통일하시고
강역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리시니 이를 일러 단군조선이라한다.

 

<삼한비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복희께서 서쪽 변방에 봉함을 받아 직책에 정성을 다하시니,
무기를 쓰지 않고도 그 지역 백성이 감화되어 따랐다.

수인씨를 대신하여 영토 밖까지 호령하셨다.

후에 갈고환웅(10세)께서 신농의 나라와 국경을 정하시니
공상의 동쪽이 우리 땅으로 귀속되었다.

 

세속에 전해오는 ‘치우’의 뜻
또 몇 세를 지나 자오지환웅(14세)에 이르렀다.

 

이분은 신령한 용맹이 더 없이 뛰어나시고,
머리와 이마를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보호하셨다.

 

능히 짙은 안개를 일으키고,구치(채광기계)를 만들어 채광하시고,
철을 녹여 무기를 만드시고 또 비석박격기를 만드셨다.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이분을 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라 하였다.
대저 치우라는 말은 속언으로 ‘뇌우가 크게 일어 산하가 뒤바뀐다’는 뜻이다.

 
치우천황께서 신농의 나라가 쇠약해짐을 보시고 드디어 웅도를 품고,
서방에서 자주 천병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수와 태산사이를 점령하셨다.

 

헌원이 등극하자 곧바로 탁록의 광야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후에 오장군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땅을 쳐서 전공을 세우게 하셨다.

 

 

<상생출판 환단고기 역주본-태백일사-신시본기11장(p376~381)>
신시본기(神市本紀) 11장.
치우천황릉의 위치와 천황에 대한 서방 한족의 전설적 추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