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본기(神市本紀) 2.


태고 문자의 창시

 

 
환웅천황께서
또 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서계(書契)]를 만들게 하셨다.

 

신지씨(神誌氏)는
대대로 주명(主命) 직책을 관장하여 왕명을 출납하고
천황을 보좌하는 일을 전담하였으나, 다만 말에만 의지할 뿐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무리를 떠나 홀로 사냥할 때,
별안간 놀라서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맞추려다가 그만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곧 사방을 수색하며 여기저기 산야를 다니다가 평평하게 모래가 펼쳐져 있는 곳에 이르러
발자국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간 곳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에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하며 온갖 사물의 형상을 널리 관찰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문자를 창제하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다만 그 후로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태고 문자가 사라져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그 구조가 쓰기에 불편한 점이 있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일찍이 남해도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선춘령(先春嶺)과 저 오소리(烏蘇里)등과
그 외 지역의 암석에 문자가 조각된 것이 간혹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문자는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도 아니고 전서(篆書)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성하지 못한 것이 더욱 한스럽다.

 

신지(神誌):
왕명을 주관하는 관명으로서 대대로 사관(史官)의 직책을 맡았다.

신지 혁덕이 문자(녹도문)를 처음 만들었는데,
초대 환웅천황의 명에 따라 이 문자로 <천부경>과 <삼일신고> 두 경전을 기록하였다.

 
낭하리(郎河里): 지금의 행정구역명은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良阿里)이다.
경박호(鏡珀湖): 지금의 흑롱강성 영안현(寧安縣) 서남쪽에 있다.
오소리: 만주 우수리강을 말한다.

 

전서(篆書):
한자 서체[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하나로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이 있다.

 

대전은 주나라 선왕(宣王)때에,
태사(太史)이던 주(籒)가 창작한 한자의 자체(字體)로,
주의 이름을 따 주문(籒文)이라고도 하며 소전(小篆)의 전신이다.

 

소전은 진시황 때 이사기 대전을 간략하게 변형하여 만든 것으로,
조선 시대에는 시험과목에 넣기도 하였다.

 

서계(書契)

사물을 표시하는 부호로 곧 문자를 말한다.
환웅 천황의 명을 받아 신지 혁덕이 만든 녹도문(鹿圖文)이 문자의 기원이다.

이것을 복희씨, 창힐 등이 서토(西土)에 보급시켜 훗날 상(商)나라 갑골문의 뿌리가 되었다.
녹도문의 원형은 고조선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평양지>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16년에 평양 법수교 밑에서
발굴된 세 조각의 석비(石碑) 속에서 문자가 나왔다고 하며,

 

백두용(白斗鏞)이 펴낸
<海東歷代名家筆譜>에 고조선 신지(神誌) 전자(篆字)로 소개된 바 있다.

또한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와 요령성 여대시 윤가혼에서
출토된 고조선 토기에도 녹도문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녹도문은
현재 중국 섬서성 백수현(白水縣)에 남아 있는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에
새겨진 창힐 문자와 일치한다.

 

이것은 우리 나라가 문자를 창안한 종주임을 입증하는 실례(實例)이다.

 

 

환단고기2.jpg

<환단고기-태백일사-
신시본기2장(p352~353, p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