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본기
神市本紀 第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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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복희伏羲가 서쪽 변방의 봉토를 받아 정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칼과 창 등의 병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한 지역을 교화하여 복종시켰다.

이렇게 되어 수인燧人을 대신하여 경계 밖까지 호령하였다.

 

그 뒤 갈고환웅(葛古桓雄 ; 배달나라 제10세 환웅 임금 BC 3070~2971)이
신농神農의 나라와의 경계를 바로잡아 공상空桑 동쪽은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환웅
(慈烏支桓雄 ; 배달나라 제14세 환웅 임금 BC 2706~2598. 치우천황蚩尤天皇을 말한다)에
이르렀다. 그는 신령스럽고 용맹이 뛰어나서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였고 큰 안개를 일으켰다.

 

구야九冶를 만들어 광석을 캐내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들며
돌을 날려 적을 치는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었다.
이렇게 되어 천하가 온통 두려워하여 함께 떠받들어 하느님의 아들 치우蚩尤라 하였다.


치우蚩尤란 속된말로 크게 우레와 비를 일으켜 산과 물을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다.

치우천황은 신농神農이 쇠하여가는 것을 보고 큰 뜻을 품고
서쪽으로 여러 차례 군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垈 사이를 점령하였다.

 

그러다가 헌원이 일어나자 탁록 들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吳장군을 보내어 서쪽에 있는 고신高辛을 쳐서 공을 세우게 하였다.

 

《대변경代辯經》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신시씨(神市氏 ; 배달나라 제1세 환웅천황桓雄天皇)는
전佺으로 계戒를 닦아 사람을 가르치고 하늘에 제사지냈다.

 

전佺이란 사람이 스스로 온전함을 쫒아 성性을 통하여 참眞에 이른다는 뜻이다.
또 청구씨(靑丘氏 ; 치우천황蚩尤天皇. 곧 배달나라 제14세 환웅 임금.
청구로 천도하였기 때문에 청구씨라 한다)는 선仙으로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렸다.
선仙이란 사람人이 태어나 목숨命을 알고 선善을 넓히는 것이다.

 

또 조선씨(朝鮮氏 ; 고조선 제1세 단군檀君 왕검王儉)는 종倧으로 임금이 되어

사람을 가르치고 잘못을 꾸짖었다.

종倧이란 사람人이 근본宗을 따라 정精을 보존하여 아름다움을 이룬다는 뜻이다.
때문에 전佺이란 비어있어 하늘에 근본을 두고, 종倧이란 건강하여 사람에 근본을 둔다는 뜻이다.

 

주注에 이런 글이 있다.

환인桓仁을 하느님이라고도 한다. 하늘天은 큰大 것이며 하나一이다.
환웅桓雄은 천왕天王이라 하는데 왕王이란 곧 황皇이며 제帝이다.

 

단군은 천군天君이라 하며 제사를 주관하는 어른이다.

왕검王儉은 무리를 감독하고 영토를 관활 하는 어른이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비치는 광명을 환桓이라 하고 땅에서 비치는 광명을 단檀이라 하는 것이다.
환桓은 곧 구황九皇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은 곧 대大이며 삼한三韓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라 한다.

가加는 곧 가家이며 오가五加란,
우가牛加는 곡식을 주관하고, 마가馬加는 명령을 주관하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고,
저가豬加는 질병을 주관하고, 양가羊加는 선악을 주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백성은 64종족이고 무리는 3천이다.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늘에서 내려 보낸 것은 개천開天이라 한다.
개천開天은 모든 사물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허虛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인간세상을 건지는 일을 개인開人이라 한다. 개인開人은 사람의 일을 순환시키기 때문에
혼魂이 함께 불어나는 것이다. 산을 잘 다스려 길을 내는 것을 개지開地라 한다.
개지開地는 세상일을 개화開化하기 때문에 지혜와 함께 닦는 것이다.

 

《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백두白頭 큰 산이 대황大荒 속에 버티고 앉아 있어
가로가 천리에 뻗어 있고 높이는 200리 나 우뚝 솟아있다.

 

그 위용이 웅장하고 험준하여 꿈틀거리는 것 같아
배달천국倍達天國의 진산(鎭山 ; 도읍의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산을 뜻하나
여기에서는 나라에서 으뜸가는 신령한 산을 말한다)이 되었다.

 

신인神人이 묘향산妙香山은 다만 낭림狼林 서쪽으로 뻗은 맥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 이 같은 성스러운 일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는 묘향산을 태백太白이라고들 하나
다만 압록강 동쪽 이남의 한 모퉁이에 있는 땅일 뿐이다.
그 산의 뿌리를 곤륜산崑崙山이라 떠들어대며 우리를 기꺼이 소중화小中華라며 흐뭇해한다.

 

또 사신을 북쪽으로 보내어 공물을 바치는 것은 마땅한 일로 여겨
여러 백 년을 그렇게 하면서도 치욕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 책을 덮고 긴 탄식을 할 일이다.

 

그런데 지금도 동방의 여러 산을 태백太白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많다.
세상에는 영변의 묘향산을 이것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실상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저들의 눈알은 마치 콩이나 팥 같아서 어찌 그들과 더불어 의논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백두산은 꼭대기에 큰 못이 있어
둘레가 80리 나 되고 압록강 송화강 두만강이 모두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것을 천지天池라 하는데 곧 환웅씨桓雄氏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묘향산에는 예부터 하나의 조그마한 웅덩이도 없고
환웅천황이 처음 내려온 곳도 아니므로 태백太白이 아니다. 그러므로 론 할 가치조차 없다“.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에, 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다고 하였는데
위魏에서는 태황太皇이라고 한다. 범.표범.곰.이리가 있어도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도 산에 올라가서 오줌을 눌 수 없고 길을 가는 자는 모두 그것을 잔뜩 담아가지고 돌아왔다.

 

환웅천황이 처음 내려와 이 산에 있었고
또 이 산은 천황이 일으킨 신령스런 산이기 때문에
소도蘇塗에서 제천하는 옛 풍속이 틀림없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예부터 환족桓族이 조상을 숭배하는 것도
또한 이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결코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 새나 짐승까지도 신의 감화를 입어 편안히 이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을 상하지 않았으며
사람도 또한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어 감히 신을 모독하지 않았다.

이를 길이 받들고 보존되어야 할 모범으로 삼았다.

우리 환족桓族은 모두 신시神市가 거느린 3천의 무리에서 나왔다.
후세에 비록 여러 씨족으로 갈라졌으나 실은 한 뿌리인 환단桓檀의 자손인 것이다.
그러니 신시神市에서 처음 내려준 공덕은 반드시 외워서 잊어지지 않았다.

 

또 옛 임금과 조상들이 삼신에게 제사지내던 거룩한 성지를
삼신산三神山이라 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신시神市 이후 신령스러운 다스림과 성스러운 가르침은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깊어졌다.
그러다보니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경영하는 근본이 남의 나라와는 전혀 달랐다.

 

그 신성한 풍속이 널리 퍼져 만방 사람들이 임금의 다스림과 가르침을 사모하여
삼신을 높이 받들기에 이르러 동북쪽 신명의 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폐단이 생겨 갈수록 괴상하여져서
허탄하고 근거 없는 낭설이 소위 연燕 제濟 바다 위의 괴이한 방사方士들의
입에서 터무니없이 나돌았다.

 

그 땅은 구환의 신시神市와 서로 접해 있어 사람과 물건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풍문으로 듣고 놀라 신기하게 여기고

거기에 말을 보태어 삼신산三神山은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이며
발해 바다 가운데 있다는 등 세상 사람을 미혹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동쪽으로 나아가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득하기만 할뿐,
발해 가운데는 온통 바다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심코 하는 말이,
삼신산三神山이 발해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은 삼신산三神山이 각각 세 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봉래는 쑥대가 무성하게 자란 곳으로 천황이 거기에 내려왔고 방장에는
사방 한 길丈되는 전각이 있어 소도蘇塗가 있던 곳이며 영주는 큰물이 섬들을 에워싼 모양,
곧 천지天池가 샘솟는 곳이다.

 

이것을 몰아서 삼신산三神山이라 하며 삼신三神은 곧 하나뿐인 하느님이다.
그런데 삼신의 근본도 알지 못하고 금강산을 봉래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이라 하고
한라산을 영주라 하는 자들이 있으니 말도 안 된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삼신산三神山이 발해 가운데 있다고 전해지고 일찍이 가 본 자가 있었는데
여러 선인仙人과 불사약이 모두 있었고 물건과 짐승은 모두 희고 황금과 흰 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하였다.

 

또 《선가서仙家書》에, 삼신산三神山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불노초가 있어
일명 진단眞丹이라 한다 하였다.지금 백두산白頭山에는 옛날부터 흰 사슴과 흰 꿩, 흰 매 등 짐승들이 있다.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한 새와 짐승과 초목이 모두 희다는 것이 이것이다.

 

 

백두산 일대에 산삼山蔘이 많이 난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불노초라 믿고 있으며
산에 사는 사람들이 이것을 캐려고 하면 반드시 깨끗이 목욕재계하고 산신에게 제사지낸 뒤에야 입산하였다.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나고 늙지 않는다는 이름이 붙음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세기世紀》에는

단군 오사구(檀君烏斯丘 ; 고조선 제4세 단군 BC 2131~2100)원년에
북쪽으로 순행하다가 신령스런 풀靈草을 얻었다고 하였다. 이는 곧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10월에 제사지내는 법은 마침내 온 천하에 길이 이어지는 풍습이 되었다.
이는 하느님을 섬기는 나라 특유의 성대한 제전으로 다른 나라에는 이에 버금가는 행사가 없다.

 

태백산太白山은 홀로 곤륜崑崙이란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다.
옛날 삼신산三神山은 곧 태백산太白山이며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이다.

옛날 신시神市의 문명된 가르침이 근세에 이르러 행해지지 않고 있으나
천경天經과 신고神誥는 오히려 후세에까지 전해져 온 나라 남녀들이 모두 말없이 조용한 가운데 받들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하여
열 살 안의 어린 아이의 몸과 목숨의 안위, 지혜롭고 어리석음, 준수하고 용열함을 모두 삼신께 맡겼다.
삼신이란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든 유일한 신인 것이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 ; 중국 진한시대의 문인. 경제景帝 때 무기상시武騎常侍의 벼슬에 올랐다)가
한漢 나라 왕 유철(劉徹 ; 한나라 한무제漢武帝. 경제의 아들)에게, 폐하께서 난을 일으키지 않으시면

삼신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위소(韋昭 ; 중국 오吳나라 운양雲陽 사람)의
주注에는 삼신三神은 상제上帝라고 한 것을 보면 삼신三神이라는 말이
일찍부터 저들의 땅에까지 전파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제濟나라 풍속에 여덟신八神의 제사가 있었다.
여덟 신이란, 천주天主.지주地主.병주兵主.양주陽主.음주陰主.월주月主.일주日主.사시주四時主이다.

하늘天은 음陰을 좋아하기 때문에 반드시 높은 산 밑의 작은 산 위에서 제사지냈다.
이것이 곧 태백산太白山 기슭에서 제사지내던 유법이다.

 

또 땅地은 양陽을 취하기 때문에 반드시 못 가운데 모난 언덕에 제사지냈다.
이것이 곧 참성단塹城壇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풍속인 것이다.

 

천주天主는 하늘에 제사하고 병주兵主는 치우蚩尤를 제사하였다.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 되고 치우는 예부터 강하고 용맹스러운 무사들의 으뜸 신이 되어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부렸다.

 

또 도술道術의 근본이 되어 바람과 비를 일으키고
수많은 신을 부른 까닭에 아득한 옛날부터 큰 전쟁을 주관하는 주인이 되었다.

 

해대(海岱 : 순임금 때 주州의 하나. 바다에서 태산泰山 사이. 지금의 중국 산동성 일대. 대岱는 태산이다)

땅에서는 엄奄.남藍.양陽.개介.우嵎.래萊.서徐.회淮 여덟 족속이 살았다.
그러므로 여덟 신이라는 말은 이 여덟 족속에서 비롯되어 당시에 성행하였다.

 

유방(劉邦 : 한나라 고조漢高祖. 진秦나라 2세 때 군사를 일으켜
항우項羽를 이기고 한漢나리를 세웠다)은 동이東夷계통의 인물은 아니지만
풍패(豊沛 ; 중국의 강소성 동산현銅山縣 서북쪽에 있다)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풍패豊沛는 치우蚩尤를 제사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때문에 유방도 그곳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사지내고 거기에서
죽인 희생의 피를 그릇에 바르고 북을 치며 깃발을 날려 기세를 올렸다.

 

유방은 드디어 10월에 패(覇 ; 중국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동쪽. 패수浿水가에 있는
백록원白鹿原을 말한다)강 상류에서 제후들과
함양(咸陽 ; 중국 섬서성 장안현 동쪽 위수渭水 북쪽에 있는 도시)을 평정하고 한漢나라 왕위에 올랐다.

이 때문에 새해의 시작을 10월로 하였다.

 

이것은 비록 진秦나라 정삭(正朔 ; 정월 초하루)을 본받은 것이기는 하나,
이것 역시 동황태일東皇太一을 받들고 치우를 제사지냈기 때문이다.

 

4년 후 진나라 땅이 평정 되자 축관祝官을 시켜 치우의 사당을 장안長安에 세우게 하였다.
그는 치우를 공경하는 마음이 이같이 독실하였다.

 

진晉나라 《천문지天文志》에, 치우蚩尤의 깃발은 혜성彗星과 비슷하여
뒤가 구부러졌으며 기가 보이는 곳에는 그 아래에 군사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치우천황이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었기 때문이다.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에는,

치씨蚩氏는 치우의 후손이라 하였고 혹 말하기를, 창힐蒼頡은 고신高辛과 함께 모두 치우씨의 후손이며

대극성(大棘城 ; 요령성 의현義顯의 서북쪽에 있다)에서 나서 산동山東 회북淮北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치우천황의 영걸스러운 위대한 업적이
먼 곳에까지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연燕.제霽의 선비들은 신비하고 거짓된 말에 깊이 빠져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숭상하여 제나라 위왕威王과 연나라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보내어 삼신산을 찾았다.

 

진秦.한漢 때 송무기宋毋忌.정백교正伯僑.극상克尙.선문자고羨門子高는
연나라 사람들로 이를 숭상한 최후의 무리이며 문성文成.공손경公孫卿.
신공申公 등은 모두 제나라 사람이다.

 

옛날 여상呂尙도 치우蚩尤의 자손인 까닭에 성이 강姜이다.
치우가 강수姜水에 살면서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모두 강씨姜氏가 되었다.
강태공姜太公이 제나라를 다스리기에 앞서 도술을 닦고 천제지天齊池에서 하늘에 제사지냈다.

 

때문에 제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여덟 팔八神의 풍속이 그 땅에서 더욱 성하게 되었다.
후세에 그 땅에서 도술을 좋아하는 자가 많이 나와 신선사상神仙思想과
황로사상黃老思想을 섞어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여 더욱 좋게 꾸몄다.
이것 역시 강태공의 도움으로 된 풍속이다.

 

일찍이 《음부경陰符經》의 주를 만들어
자부(紫府 ; 자부선생. 혹은 자부선인이라고도 하는데, 배달나라 제14세 임금 때 사람이다.

복희씨와 함께 공부한 발귀리發貴理 선인의 후손이다.

이릴 때부터 우리 고유한 도와 학문을 깊이 닦아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만들어 치우천황에게 바쳤다.
임금은 이를 칭찬하고 청구의 대풍산大風山 양지바른 곳에 삼청궁三淸宮을 지어
거기에서 더 깊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선생은 드디어 해와 달의 운행을 측정하고
오행수리를 살펴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또 황제 헌원에게 삼황내문경을 가르치는 것을 계기로 우리 신교문화神敎文化가 중국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렇듯 자부선생은 동양사에 으뜸가는 옛 석학이며 득도한 신선이다.

유위자有爲子의 학문도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왔다)의 삼황내문(三皇內文 ;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이라고도 한다.

 

배달나라 제14세 자오지환웅蚩尤天皇 임금 때
천부경,삼일신고,환역 등을 기초로 하여 자부선생이 집대성한 책이다.
세 편으로 나누어졌으며 녹도문鹿圖文으로 씌었다.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주를 달고 구분하여 신선음부설神仙陰符說이라 하였으며
황제의 음부경陰符經도 이 책의 뜻을 풀어 쓴 것이다.

 

도교와 동양의학은 이 책이 기초가 되었으며
동양철학의 바탕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의 뜻을 거기에 풀어 썼다.
연나라와 제나라 선비들이 그것을 보고 어찌 괴상하고 신비스러운 말을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또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 ; 어떤 치수방법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단군왕검의 맏아들 부루 태자가 오행치수법은 요긴한 비결이라고 하여 하우夏禹에게 전한 삼보와

금간옥첩에 관한 기록이 이 책의 번한세가 상과 역대신선통감에 있기는 하나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평평한 땅에 곡식을 심을 줄만 알았던 한 옛날에 밭에 이랑을 만들고
거기에서 흐르는 물이 도랑을 거쳐 개울로 들어가게 하여 물의 피해를 피하게 하였던
정전법井田法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이 책의 삼성기 상‘주’의 정전井田에 있다)인
황제중경皇帝中經이라는 글이 태자 부루에서 우虞나라 사공司空 하우夏禹에게 전하였다.

 

그 후 기자箕子가 주왕(紂王 ; 은殷나라 마지막 왕. 포악하고 무도하여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하였다)에게 전한
홍범구주(洪範九疇 ;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적혀있는 심오한 글로 65자. 9개 항목으로 되어있다.

 

은殷나라 임금의 숙부인 기자箕子가 주나라 무왕에게 전하였다고 하나
홍범구주는 오행치수법과 함께 단군왕검의 태자인 부루가 하우에게 전한 것이다.

 

중국은 이것을 자기들 문화라고 하여 서전.사기.죽서기년 등에 기록하였으나
실은 그 뿌리가 삼황내문경에까지 연결된다. 홍범구주는 고조선 아전부터 있었으며

이글들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밝은 정치를 펴서 사람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도

또한 황제중경의 오행치수설五行治水說이다.

 

때문에 이 학문의 근본은 신시의 구정邱井.균전均田(邱井.均田 ; 정전제井田制를 말한다.
삼성기 상 주註의 井田에 자세히 기록 되어있다)에서 전해진 법이다.

 

《밀기密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마을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고 이를 한 곳에 합장하여 지석支石으로 표시하였다.

뒤에 이것이 변하여 단壇을 만들고 지석단支石壇 또는 제석단祭石壇이라 하였다.

꼭대기에 산을 파서 성을 쌓고 단을 만든 것을 천단天壇이라 하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심어 흙으로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라 한다.
지금 승려들이 혼돈하여 제석帝釋을 단壇이라 하는 것은 옛 풍습이 아니다.

 

삼신三神을 지키고 사람의 목숨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 하였으며 본래는 삼신시종랑三神侍從郞이다.
이를 줄여서 삼랑三郞이라 한다. 삼랑은 배달신倍達神이며 삼신을 지키는 일을 세습하였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는 또 삼랑三郞은 배달신倍達神이다.
씨를 뿌리고 재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가르치고 복을 비는 자를 랑郞이라 하며 무리를 모아 공功을 비는 자를 백伯이라 하였다.

 

이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신도神道이며 신령을 받아 예언하는 말이 하늘의 이치에 맞는 일이 많았다.

지금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이 있다.

이 성은 곳 삼랑三郞이 머물며 지키던 곳이다. 삼랑三郞이란 삼신을 지키는 관원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와서 절을 세우고 대웅(大雄 ; 옛날에는 환웅을 大雄이라 쓰기도 하였다.
환웅은 원래 한웅이며 한은 크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대大를 썼다)이라 하였다.

 

이것은 승려들의 무리들이 옛 것을 빌려다가 그대로 쓰는 것이지 본래 불교의 말은 아니다.
때문에 승려들이나 유생들이 다 낭가郞家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혹 말하기를, 옛날에 백성들이 계곡에 흩어져 장사지내다 보니 정해진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위로 임금으로부터 모두 큰 무덤을 파서 옮기고 하느님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지냈다.

 

그러다가 뒤에 가서는 혹 평지에 장사지내기도 하고
그 둘레에 박달나무.버드나무.소나무.잣나무를 심어 표식을 삼기도 하였다.

 

신시시대에는 능묘陵墓의 제도가 없었으나
뒤에 중고시대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부유해지고 종족이 강성해지자
사람이 사는 것도 넉넉해지고 죽은 사람을 보내는 것도 사치스러워졌다.

 

이리하여 제사지내는데도 예법이 생기고 묘를 꾸미는데도 자못 사치스러워졌다.
혹 둥글게 혹 모나게도 하여 몹시 사치스럽게 꾸밀 뿐만 아니라

 

높이.크기.넓이.폭.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칙이 있었으며
내벽과 밖의 봉분까지 고르게 정돈하고 정교하게 꾸몄다.
그러다가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의 제도가 천하에서 으뜸이었다.

 

[출처] 신시본기 제3(하) (난 마을) |작성자 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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