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졌던 환인·환웅 역사, '환단고기'로 환생"
<특별연재>'환단고기 재조명'학술대회<4>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환단고기 탄생의 역사'(하)
 
박성수

4) 환인과 환국

이처럼 이 지상의 모든 인류는 나반과 아만의 후손이고,

우리 민족은 그 중에서도 삼신의 후예이며 환국을 건국한 환인의 후예이다.

환국이란 천제가 계시는 나라(天帝所居之邦)란 뜻이니 그 본래 뜻은 “영구생명의 근본”이며

그래서 삼신을 “한 뿌리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다.

삼신의 후예를 일러 환국이라 하니 환국은 천제께서 계시는 곳의 나라라 전한다.

또한 가로대 “삼신은 환국의 선대에 있었고 나반이 죽어 삼신이 되셨으니 그 삼신이라 함은

영구 생명의 근본이라.” 그래서 또 말하기를 사람과 물건은 같이 함께 삼신에게서 나왔으니 삼신으로써

한 근원의 조상으로 삼느니라.

다시 말하면 나반이 제일 위의 천제 (대선천)이시며 환인이 그 다음(중중천)이시며

환웅이 셋째 천제(대웅천)가 되신다. 치우환웅을 일면 지위천이라고도 한다.

또한 환인․환웅․치우 세분을 삼황이라고도 이른다.

환인도 역시 삼신을 대신하여 환국의 천제가 되었다.

후에 나반을 대선의 천(大先天)이라 하고 환인을 대중의 천(大中天)이라 하였고

환인, 환웅, 치우를 삼황(三皇)이라 하였다. 또한 환웅을 대웅의 천(大雄天)이라 하고

치우를 지위의 천(智偉天)이라 하였다. 곧 황제중경(黃帝中經)이 만들어진 연유이다.

이같이 환인 환웅의 시대가 지난 뒤 단군이 다스리는 단국(檀國)시대가 온다.

단국은 웅족(雄族)이 세운 나라이며 단군 역시 하늘에서 백두산에 내려오신 분이다.

단군은 또 신시의 법대로 백성을 다스리니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천신 같은 존재로 추앙하였다.

단군을 영세토록 잊지 않는 것은 그가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웅족 가운데 단국(檀國)이 있어 가장 강성하였다.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不咸山)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서

구환(九桓)의 삼한관경(三韓管境)을 원만히 통합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회복하니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 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이때부터 숭보(崇報)의 예의가 영세토록 바뀌지 않았다.

(5) 국중대회

단국을 계승한 나라가 부여(夫餘)인데

부여에서는 단국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가뭄이 들고 전쟁이 일어나고 질병이 만연하게 되면

모두 그것이 국왕의 탓으로 알았다. 즉 임금의 부덕한 탓으로 알았던 것이다.

부여는 풍속에 가뭄과 병란 및 질병은 국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면

모두 최고집권자인 대통령이 부덕한 탓으로 돌린다. 즉 그가 정치를 잘못하기 때문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오랜 동안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때문이며,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정치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자연 재해(天災)가 아니라

하늘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임금이 하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일어난 인재(人災)라 생각해 왔던 것이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축제를 부여에서는 국중대회(國中大會)라 하였다.

삼한의 옛 풍속에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원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냈다.

땅에 제사 지내는 것을 방구方丘(네모난 언덕)라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제사 지냄은 각목(角木)이라 하니

산에 웅상(雄常)의 상(像)을 만드는 것은 모두 그 유습이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행사는 환(임금)이 직접 제를 지내니 그 예가 매우 성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날 원근에서 사람들이 각기 생산한 것을 제단에 바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온갖 놀이를 다 하였다.

또 여러 소국들의 사신들이 찾아와 그 나라 특산물을 바이니 진귀한 것들이 언덕과 산처럼 둥그렇게 쌓였다.

환(桓)은 오로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그 때문에 제천행사는 관경을 번식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일명 소도제천(蘇塗祭天)이라 한다.

소도체천은 백성을 교화하는 통치의 근본이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소도제천은 곧 구려(九黎)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소도제천은 첫째 화를 당하면 이웃을 위하여 함께 힘쓰고(책화선린責禍善隣),

둘째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돕는다(有無相資).

셋째 문명으로 나라를 이루고(文明成治) 개화 평등(開化平等)을 이룬다.

이리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6) 가림토

『환단고기』에는 가림토 38자가 적혀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신숙주의 후손 신경준은 『훈민정음운해』에서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민간에서 쓰던 글자가 있었다고 했다.

또한 고려시대와 탐라(제주도)에서도 고유의 글씨가 있었다고 한다.

실학자 이덕무는 『청비록』에서 11세기 초 호부상서 장유가 중국의 강남에 갔을 때

‘고려에서 떠내려 온 슬(瑟)이라는 악기가 있었는데 그 밑바닥에 도무지 알 수 없는 고려의 글자가 있어

이를 해독해주었다’고 했다. 박지원의 『연암집』과 한치윤의 『해동역사』,

그리고 중국의 고서심관의 『몽계필담』 등에 탐라에서 쓰였던 민족 고유문 이 있었다고 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당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거기에서 “언문(한글)은 다 옛 글이지 새 글이 아니라.”하였다.

그리고 언문은 전 왕조(고려)때부터 있었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다.

조선왕조 초부터 국가적인 금지도서가 되었던 『삼성기』에는

 단군 때 신전(神篆, 신지비사 신지글자)이 있었다고 했다.

 

16세기 초의 학자 이백의 『태백일사』(太白逸史, 태백유사라고도 함)에 단군 때

신지전서(神誌篆書, 신지전자)가 있었는데 그것을 태백산과 흑룡강, 청구, 구려 등지에서 널리 쓰였다고 했다.

16세기 말에 편찬된 『평양지』에서는 평양 법수교 다리에 옛 비석이 있었는데

그 글자가 훈민정음도 아니요 인도의 범자도 아닌 단군 때 신지가 쓰던 글씨였다고 했다.

또한 이맥의 『태백일사』 「대변설」에는 남해현 양하리 계곡에 있는 바위에 신시 글자의 고비가 있다고 했고,

대야발의 『단기고사』에서는 고려 말의 이암이 쓴 「단군세기」에 가림토 글자를 기록하였다.
 
가림토는 38자로서 훈민정음과 너무도 흡사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신지 글자. 가림토 글자와 훈민정음의 계승관계를 볼 수 있다. 또 일본에서 나온 아비루(阿比留) 문자가 있는데

일명 신대문자(神代文字)라 한다. 일본에서는 이 글자를 비인서(肥人書)라고 하는데 조선인의 글자란 뜻이다.

고조선 초에는 신지비사 즉 신지의 글자였다가 고조선 말엽과 삼한 초에 가서는 비인서라 불리고

이것이 조선왕조 초 세종의 훈민정음의 모태가 된 것이다.

춘원 이광수도 소설 『원효대사』에서

일본문자 히라가나 가타가나는 우리나라의 가나다라를 배운 것이라 하였다.

또 일본 말의 존칭 사마(樣)는 신라 화랑들이 스승을 보고 삼마(彡魔)라 한 것을 배워 간 것이라 하였다.

단재는 우리의 강보에서 자란 일본 문화와 역사까지도 우리 역사라 하였다.
 
맺는말

"미지근하고 하품 나고 졸음까지 오는 기록의 연속. 이것이 조선역사의 외형이다.

거기다 오늘의 우리들은 역사를 모르는 불구자요 미성년자이다."
육당 최남선이 한 말이다.

 

춘원이나 육당이 모두 친일파로 몰려있으나 그들의 학문까지도 모조리 일선동조론이라 욕할 것이 없다.

어느 일본인이 일본인의 일선동조론과 육당의 동조론을 비교하여 보니 주객이 다르더라고 한 일이 있다.

한 때 일본에 건너 간 단군문화가 있다고 한 필자에게 당신은 일선동조론자라고 모욕한 사람이 있었다.

 

일선동조론이 무엇인지 모르고 단군교와 대종교 그리고 『환단고기』를 쓴

이유립까지도 친일파로 모는 세상이고 보니 기가 찰 이야기다.

일본인들이 우리문화를 많이 가져갔다고 해서 단재 신채호를 친일파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각설하고 1910년의 망국을 전후하여 단군신앙이 유행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500년 전에 이미 단군신앙이 나라의 국시로 성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군의 조선건국을 위주로 한 상고사였고,

그 이전에는 환인ㆍ환웅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ㆍ신앙이 있었다.

그 많은 부분이 구전으로 전해졌던 것이며 고기로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 고기가 조선왕조 세조 때 분서령으로 인해 모두 사라졌던 것인데 그 일부가 『환단고기』로 환생하였다.

모든 사서와 경전에는 가필이 있게 마련이다.

아만과 나반의 만남이 7월 7석 날이었다는 분명한 가필은 가필로 치부하여야 할 것이다.

『환단고기』라고 해서 가필이 없으란 법이 없다.

 

가필되거나 개서된 부분이 있다고 해서

문서 전체를 위서라 하는 단정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이제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 바다에 버리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거듭거듭 검토해서 후손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은가.

아마도 후자가 우리의 과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