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탄생의 역사는? <특별연재>환단고기 재조명학술대회<2>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newsdaybox_top.gif 2009년 12월 17일 (목) 13:23:08

 

 

이기석 기자 btn_sendmail.gifgreen@f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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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 선생의『환단고기』는 이름 그대로 환인 환웅의 시대와 단군시대를 기록한 사서의 모듬이다.

흔히 상고사라고 하면 단군 이후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알았고 거의 모두가 대종교에서 나온 사서로 알았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묘사한 역사세계는 대종교의 그것과 달랐다.

 

김교헌의 『신단실기』와 『신단민사』 그리고 윤세복의『단조고사』 등이 그린 상고사와 『환단고기』의

그것은 확실히 달랐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종교의 상고사관은 단군중심주의인데 반하여 단학회의 상고사관은

환인과 환웅 중심의 역사관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환단고기』 안에는 단군 47대의 문제, 가림토와 천부경의 문제 그리고

고조선의 강역 문제 등 많은 의문이 도사리고 있다. 그 중에서 단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미리 양해를 구하여야 할 것은 필자가 대종교와 단학회, 단군교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거나 편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먼저 적어두어야 할 일은 해학 이기와 홍암 나철의 관계이다.

단학회의 발족과 취지문

한말의 애국지사로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 1909)가 있어 단학회를 창설하였으나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弘巖 羅喆, 1863- 1916)처럼 유명하지 않다. 대종교의 창시(중광)자 나철의

전기를 쓰는 과정에서 필자는 나철과 이기가 왕석보(川社 王錫輔, 1816- ? )라는

스승에게 배웠다는 사실을 알았고 유명한 매천 황현도 왕석보 선생에게 배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왕석보 선생은 전남 구례에 호양학교를 세워 구학문과 신학문을 아울러 가르친 특이한 교육자였다.

이기와 나철의 나이 차는 15세나 되어 거의 사제지간에 가까운 선후배관계였지만 함께

민족의 얼을 단군사상에서 찾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자결 순국하였다.

이기와 나철은 동향의 선후배로서 같이 일본에 건너가서 일왕에게 항의각서를 내는 등

독립운동을 함께 했고 돌아와서는 을사오적 참간(斬奸)을 시도하다가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군신앙으로 구국하려 하였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인물은 왕석보의 제자 셋 가운데

해학 이기이다. 이유립에 의하면 이기는 단학회를 창설하여 『환단고기』를 남겼다.

자세한 사실은 필자의 여러 논문으로 미루기로 한다.

1)『동몽선습』과 단군

1979년에 이유립 선생이 공개한 『환단고기』는 일제식민사관을 비판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왕조의 국시에도 어긋나는 역사관이었다. 또한 대종교와도 다른 역사관을 제시하였으니

그 중심에는 ‘환웅이 개천한 사실을 단군이 개천한 것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문제가 놓여 있었다.

이유립의 단학회에서는 신시개천을 고집하고 단군개천을 반대하였다.

일제의 역사왜곡에 맞서서 투쟁한 종교단체는 물론 대종교였으나 단학회도 있었다.

그 외 대종교에서 갈라선 정훈모의 단군교가 있었으나 역사해석에 있어서는 대종교와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이기의 단학회와 나철의 대종교는 그 해석이 달랐다.

 

이기의 단학회는 신시 개천을 주장하였으나

대종교는 단군 개천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현 대한민국은 단군 개천을 취택하고

있고 단군릉을 발굴한 북한정권도 대한민국과 같은 의미의 개천절을 지내고 있다.

그런데 단군 개천은 조선왕조의 국시이자 국정사관이었다. 중종 때 박세무가 지었다는 『동몽선습』은

천자문 다음으로 가르치던 서당의 교과서이며 그 첫머리에 단군 개천설을 취택하고 있다.

동방에는 처음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태백산 단목 아래에 내려오시더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이가 바로 단군이시다.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그러나 고려시대에 나온 일연의

『삼국유사』나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기사와는 다른 역사관을 들어내고 있다.

『유사』와 『운기』는 『고기』를 인용하면서 둘 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태초에 환웅(일명 大雄)이 하느님이신

환인의 명을 받아 태백산 단목 아래에 내려 와서 개천하였다’고 명기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동몽선습』에는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인이라 하였다.

 

왕조 교체와 동시에 단군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조선을 건국한 단군을 동시에 하늘을 연 신인으로 확대 해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양촌 권근(양촌 권근)은 그의 『응제시주應制詩註』에서

〈시초에 개벽한 동이의 군주>(始古開闢東夷主)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잘못 해설하였다.

옛날 신인이 단목 아래에 내려오시어 백성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그를 가리켜 단군이라 하였다.

때는 당요 원년 무진이었다(昔神人降檀木下 國人立以爲主 因號檀君 時唐堯元年戊辰也).

「고기」에 의하면 단목 아래에 내려오신 분은 환웅이었다. 단군이 아니었다.

그래서 권근은 그 다음에 증주(增註)라 하여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인 환인에게 아들이 있었으니

환웅”이라 하였고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오셔서 웅녀와의 사이에 단군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환웅의 아들이 단군이었다.

 

그런데 끝부분에 가서 다시 잘못쓰기를

 “들리는 설에는 태고에 단군이 나무 아래에 내려와서 동방에서 임금이 된 것은 요순시대라 한다.

(聞說鴻荒曰 檀君降樹邊 位臨東國土 時在帝堯天).”고 하였다.

권근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을 단군이라 하다가 환웅이라 하다가 다시 단군이라 하였는데

그 뒤에 나온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만찬가지였다.

지리지에도 단웅(환웅)이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고기를 인용하고 있다.

환웅을 단웅이라 한 것이 환단 두 분을 동일시한 데서 유래한 것인지 모르지만….

고기를 무시하고 단군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왔다고 오기한 책 중에는

또 서거정의 『동국통감』(성종 15년 1484)이 있다.

동방에 처음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단목 아래로 내려오시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였으니 이가 단군이다.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 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8年乙未 入阿斯達爲神).

『동몽선습』의 구절과 똑같다. 『동국통감』 이외에도

조선왕조 초기의 거의 모든 사서에 『동국통감』과 같이 기록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노사신의『동국여지승람』(1430), 권도의『역대세년가』(1436), 『용비어천가』(1455),

『삼국사절요』(1476), 박상의 『동국사략』(1474-1530) 등이 모두 그러하다.

 

이것을 단군중심주의라 부르고 싶은데 조선후기에 가서도 그대로 계승된다.

오운의『동사찬요』와 조연의『동사보유』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시개천의 기록을 지우고

환웅 대신 단군을 그 자리에 메운 것은 단군을 우리 역사의 우두머리에 세우려는

조선왕조 건국이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단군 이전의 나라인 환인의 환국은 물론 환웅이 신시까지

모두 역사가 아닌 신화로 치부되는 것이며, 단군의 조선 건국이 민족사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단학회의 1대 회장 계연수가 1911년 조선의 망국과 동시에

발간한『환단고기』는 이러한 사서로서 주목할 만한 역사서였으나 일제강점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1979년에 와서야 공개된 것이다.

2) 일제강점 하의 단학회

1960년대 후반에 이유립의 단학회가 발행했던 『커발한』지 14호 (1968년 8월 1일)에 보면

「단학회약사(檀學會略史)」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단학회의 창시자는 구한말의 애국지사이자 민족사학자인 해학 이기였다.

해학 이기는 1909년 순국한 후에 『해학유서(海鶴遺書)』를 남겨 생전의 그의 주장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선생은 단순한 개화사상가가 아니었다. 1894년 나이 45세 때 동학난이 일어났다.

 

그 때 선생이 급히 전봉준을 찾아가서 “군중을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가

간사한 간신배들을 제거하여 국헌을 바로잡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김개남 등 동학의 일부 과격파가 듣지 않고

파괴행위를 자행하자 이기 선생 스스로가 의병을 모아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도와 맞서 싸웠다.

이듬해 서울로 상경한 선생은 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토지개혁이 시급하다고 정부에 건의하였고,

1898년에는 직접 정부의 전제개혁사업에 관여하였다.

 

그 뒤에도 『일부벽파(一斧劈破)』(단칼에 격파한다)라는 유명한 자강론(自强論)을 상소하여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애를 썼으나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을사조약을 늑약하자

동지 나철, 오기호(吳基鎬) 등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일왕과 이등박문 등에게 항의각서를 전달하였다.

 

물론 일제가 선생의 호소를 들어줄 리 만무하였고 선생은 뜻을 이루지 못한 체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암살 계획을 세워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특사로 석방되어 재삼 상경하여 『호남학보(湖南學報)』를

간행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해학 이기와 홍암 나철은 생사를 함께 한 동지였으며 민족사관 정립에 크게 공헌한 분이었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태백일사」는 바로 이기 선생 자택에 소장했던 비서(秘書)이었다.

이기 선생은 말년에 홍암 나철 선생과 함께 고려시대 행촌 이암 선생의 유저 『태백진훈』과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 『삼성기』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을 교열하고 주석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두 사람은 격의 없이 서로 역사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였으나 이견을 좁히는 데 실패하였다.

가장 큰 쟁점은 삼신설(三神說)의 정의와 신시개천(神市開天), 그리고 단군건원(檀君建元) 등의 문제였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1909년 홍암 나철이 따로 단군교(1년 뒤 대종교로 개칭)를 창설하였고,

이기와 그 제자들은 따로 단학회를 조직하였다. 하나는 종교단체 다른 하나는 학회라 하였다.

대종교는 일제하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유명한 민족종교였다.

대종교라면 누구나 다 아는 민족종교였지만, 단학회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유립 선생이 광복 후에

처음 이 사실을 공개함으로서 세상에 알려졌으니 사람들은 모두 반신반의하였다.

그러나 이기 선생의 제자들이 소장했던 사서들이 합본되어 『환단고기』로 나왔으니

단학회가 100년 가까이나 뒤늦게 이름이 난 것이다.

3) 단학회의 독립운동

이기 선생을 따르던 제자 가운데는 운초 계연수(雲樵 桂延壽, ? - 1920)가 있었고,

그 밖에도 이정보, 백하 김효운 등 여러 자강회원(自彊會員)들이 있었다.

그들은 1909년 3월 16일 단학회를 창단하고 동년 5월 5일에는 강화도 참성단에 가서 삼신에게 고유(告諭)하였다.

 

그런 지 두 달 후인 7월 13일 해학 이기가 서울의 한 객사에서 자진하여 순국하였다.

이듬해 나라가 망하자 제자 계연수는 1911년 묘향산 단군굴에 들어가서 『환단고기』를 펴냈다.

그러니 『환단고기』는 해학 이기 선생이 소장하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고서를 물려받아 이를 편집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기 선생의 혼이 담긴 유서요 망국의 한이 서린 사서였다.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지도자를 잃은 단학회원들은

오직 삼신일체의 원리와 신시 개천의 원리를 믿고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두악산,

태백산 등지의 단군 고적을 순심(巡審)하고, 천경신고(天經神誥)의 교리를 연구하고.

환단 이래의 사료를 수집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융희 8년 갑인(1914년) 3월 16일 평안북도 천마산(天摩山) 성인당(聖人堂)에 모여

극비리에 단학회 확대회의를 가졌다. 성인당에서는 삼신(三神)을 주벽(主壁)하여

삼조(三祖)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이 모임에는 계연수를 비롯한 12명의 인사가 참가하였다.

천마산의 성인당은 인조 2년(갑자 1624)에 반호 이지가 신시 환웅의 위패를 모신 이후 매년

3월 16일과 10월 3일 원근의 주민들이 치성을 올린 곳이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화재를 만나 불타버렸다.

그 뒤 1918년 7월에는 백암 홍범도 장군과 석주 이상룡이 단학회에 가입하였고,

동년 10월 3일 개천절에는 본부를 중국 간도 관전현 (紅石拉子)로 옮겨 단학회보를 8호까지 발간하였다.

이리하여 단학회는 그 해 중흥의 해를 맞았는데 회원 5만 명을 자랑하는 종교단체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때 발표한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독립은 오로지 자강(自彊)에 있고 자강의 방법은 역시 나를 찾는데 있으니

내 뜻이 서지 않으면 가는 곳이 몽롱하고 내 머리가 미개한 즉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또한 내 힘이 없으면 주권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실성하고 나라가 실권(失權)하고

사회가 실고유신앙(失固有信仰) 즉 고유신앙을 잃어버렸으니 6천년 유구한 역사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정신이 하나로 돌아 갈 것이며 국권을 회복하리오. 바라건데

고구려의 다물정신(多勿精神)으로 국정을 개혁하고 국부(國富)를 증진하고 국토를 통일할 지어다.


강령 3장

1, 祭天報本하여 眞實을 구할 것이오.

2. 敬祖興邦하여 平和를 구할 것이오.

3. 弘道益衆하여 統一을 구할 것이오.


짧은 문장이지만

첫째 자강의 유일한 방법은 나를 아는데 있고,

둘째 우리의 고유신앙을 찾아서 지켜야 하며,

셋째 6천년 역사를 회복하여야 하며,

넷째 정신을 하나로 통일하여야 한다.

즉 진실 평화 통일의 민족정신을 광복하여야 한다고 주창한 것이다.

이 같이 강령을 결정한 단학회의 제2대 회장은 운초 계연수였다.

계연수는 또 1919년 3월 16일 이후 기관지 『단학회보』(1호에서 8호까지)를 간행하였으나

현존하지 않고 다만 이유립이 발간 취지문과 주요 기사를 기억하여 전하고 있을 뿐이다.

유구한 신시개천의 홍익인간주의사상과 운동은 6천년 이래의 역사적 윤리와 전통교육을 확립하고

3천만 민족은 항상 이 숭고한 환국의 오훈(五訓), 부여의 구서(九誓)를 그 하늘 부인(天符印)으로 하는

대원일(커발한)의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3만 리 조국강토를 수호하면서 인격적으로

세계 인류의 공동생활을 추구하고 역사적으로 인류문화와의 조화운동을 힘쓰고자 하는 것이다. <이하 생략>

단학회보를 내는 데는 서로군정서 총판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도움을 받았고,

광복군 제1영 사령장 오동진 장군이 교당과 전토를 사서 기증하여 주었다.

이유립이 기억한 단학회보의 주요 기사는 아래와 같다.

1) 개천절의 정의. 단군의 건국이 개천이 아니며 환웅의 신시 개천이 개천이다.

2) 대종교가 주장하는 단군 개천은 환웅천왕의 태백산 천강을 단군개천으로 변조한 것으로

신앙 일변도의 비과학적인 개천역사관이다. 『환단고기』에 실린「삼성기」와 『규원사화』에

나오는 신시역년(神市曆年) 1564年 전(傳)18세를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3) 대종교에서는 단군을 삼신일체 상제로 믿고 있으나 단학회에서는

삼신일체 상제를 우주유일의 주재신(主宰神)이요 세계 인류의 원조로 보고 있다.

환인천제는 환국의 시조요, 환웅은 신시(神市)의 시조, 단군은 조선(朝鮮)의 시조일 따름이라 하였다.

4) 단학회에서는 교주라는 직제를 두지 않고,

다만 당각(堂閣)을 단위로 하는 통일기구를 확대하는 것으로 멈추었다.

그리고 특히 단학회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업적으로는 사료의 수집이었다.

행촌 이암의 『삼성기(三聖記)』『단군세기』『태백진훈(太白眞訓)』과 을파소의 『참정계(參佺戒)』,

이맥의 『태백유사(太白遺史)』, 권현 의 『규원사화』, 이단해의 『신단실기』 등을

단학회보에 연재하였다는 것이며, 「천부경」「삼일신고」를 주해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단학회는 8.15 광복을 맞게 되는데 그동안 계연수에 이어

단학회 회장은 제3대 회장 석천 최시흥, 4대 회장 벽수 이덕수, 제5대 회장 이용담이 맡았다고 하며

이용담은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투옥되었다고 한다. 해방과 동시에 그 동안 옥에 갇혀 있던

5대 회장 이용담이 출옥하였고, 다시 평양에서 단학회를 재건하였다.

 

북한 공산치하에서도 일시 기관지 『태극사』를 발간하였으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폐간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단학회는 일제하에서 대종교 못지않게 독립운동을 벌였다고 하며,

해방 후에 평양에서 단학회를 재건하였다는 것인데, 6.25동란으로 월남한 이유립 자신이

1960년 대전에서 제6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유립은 그 뒤 본부와 거처를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으로 옮겼으며 이름을 단단학회로 고쳤다.


※ 단학회와 역대 회장


1) 이 기(순국) 2) 계연수 3) 최시흥 4) 이덕수 5) 이용담(투옥) 6) 이유립


4) 환단고기의 재발간

이유립이 1979년 『환단고기』를 공개하기 12년 전에 『커발한』지에 『환단고기』 일부를 공개하였으니

1967년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커발한』지에 『환단고기』가 계속 연재되다가

『환단고기』전체가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역시 『커발한』지에 연재된 것인데,

그 사이에 『환단고기』에 대한 정리 작업이 진행되다가 이 해에 끝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세인의 이목을 끌지 못하였고 1979년 단행본으로 공개되었을 때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면 1967년 제1단계로『환단휘기(桓檀彙記)』라는 이름으로

『커발한』지(제8호)에 「태백유사」(뒤에 「태백일사」로 개칭)「진역고기」,

그리고 「규원사화」「단군세기」「진단유기」, 그리고 「북부여기」등이 공개되었고,

제2단계로 1975년 9월 1일자 『커발한』19호에 선천 계연수 편 『환단고기』라 하여

책 전체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이 연재가 언제 끝나는 것인지 잘 몰라도 아마 1979년에 단행본 간행으로 이어지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갑자기 주목받게 되는 것은 1982년 일본에서 일역판이 발간된 뒤였다.

 그 뒤 번역본이 나오고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중>으로 계속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