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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현재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본다.68) 그러나 고조선은 나라가 막 세워진

BCE 24세기에 벌써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나라이다.

 

주류 사학계의 논리에 의하면 청동기 시대 이전인 BCE 2333년에는 국가가 있을 수 없다.

청동기 단계에 이르러야 고대 국가가 출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등장하기 이전 석기만 사용하면서도 고대국가를 건설하였고,

4천5백 년 전에 이루어진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었다.

후기 베다시대(BCE 1000∼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소개한 하가점하층문화(BCE 2400~BCE 1500)의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납 성분이 많아 단단하지 못한 중국의 검들과 다르다.

비등점이 서로 다른 청동과 아연을 합금하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청동기 수준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문명 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물이 있다.

BCE 4세기경에 만들어진 직경 21cm 안에 0.3mm 간격으로 13,000개에 이르는

가는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여러꼭지 잔줄무늬 거울)이다.

선의 굵기가 머리카락 한 올에 불과한 이 청동 거울은 전 세계를 통틀어 오직 고조선 문화권에서만 발굴되었다.

고조선은 당시 동북아 문명의 주역으로서 고도의 청동 문명을 꽃피운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거석‘, 고인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동북아시아와

서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세워졌다.

한반도의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고인돌이 많은데 대략 4만 기 정도로 추정된다. 전북 고창69)

처럼 100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떼를 지어 나타나는 곳도 있다.

 

고인돌에 들어가는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에서 많게는 300톤에 이른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내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인돌을 세운 고대 문명은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를 상징하여 2개로 이루어졌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도 나타내고 있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무덤뿐 아니라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구실도 하였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다.

 

그런데 고조선의 주무대였던 만주와 요서의 고인돌도 그 형성 연대가 오래되었겠지만,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그 연대가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하지만 국내 학자들은 방사능탄소 연대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있다.

이런 태도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관점과 직결되어 있다.

 

 

고조선의 생활문화

 

 - 고조선의 언어

고대문명을 이루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문자의 사용이다.

고조선 이전에 배달을 건국했을 때 우리 민족은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환웅천황께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하게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배달 시대에 녹도라는 문자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세 가륵단군이 새 글자를 만들기 전, 고조선 시대에 있었다고 하는

진서眞書라는 상형문자가 바로 녹도문으로 여겨진다.

 

BCE 2181년에 가륵단군은 그 진서가“ 해독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라고 하며,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였다『( 단군세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이로써 고조선의 새로운 문자, 가림토加臨土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가림토 또는 가림다加臨多라고 불리는 이 글자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만든 한글과 그 형태가 같거나 흡사하다. 특히 모음 11자는 똑같이 생겼다.

 

최근 중국 곳곳에서 은나라 갑골문 이전의 문자로 추정되는 상고금문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을 연구한 중국 학자 뤄빈지駱賓基는 자신의 저서『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상고금문은 한민족의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자’라고 밝히면서,

그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주체를 동방 조선족이라고 단언하였다(김대성,『 금문의 비밀』).

 

상고금문이 은나라의 갑골문, 주나라의 대전大篆, 진나라의 소전小篆을 거쳐

지금의 한자로 완성된 것을 볼 때, 한민족의 문자가 바로 중국 문자의 원형인 것이다.

 

 

 - 고조선의 의식주

 

초대 단군왕검이 하백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 잠업(누에치기)을 관장하게

한 기록『( 단군세기』)으로 볼 때, 고조선 이전 배달 시대 때부터 한민족은 옷감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고고학적으로 북한과 만주의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양잠의 증거물로 보아도,

고조선은 상당한 직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조선 후기 유적인 중국 길림성 후석산?石山 유적에서 출토된 방직기를 사용하여

짠 마포는 당시의 높은 직조 수준을 보여준다. 이 유적에서 또한 옷을 장식하던 청동 단추를 비롯한

여러 치장용품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조선 사람들이 옷을 만들어 단추도 달고 다양하게 치장하였음을 보여준다. 고조선에서는 삼베, 모직, 명주 등의 옷감이 생산되었다.

 

『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부여 사람들은 흰색 옷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가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부여의 의복 문화를 말한 것이지만,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하였으므로

고조선의 복식도 이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복식 문화에서도 백색의 광명 사상을 중시한

한민족의 신교 문화를 느낄 수 있다.

 

고조선인들의 식생활과 주거 문화는 어떠하였을까?

 

평양시 남경유적에서 5천 년 전의 탄화미가 한 구덩이 안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이 벼의 종자는 현재 우리가 먹는 쌀과 같은 단립종短粒種이며 야생 벼가 아닌 재배종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은 고조선 이전부터 한반도 땅에 벼농사가 정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고조선 사람들은 벼 외에도 조, 기장, 콩, 팥, 피, 수수 등의 잡곡도 재배하였다.

또한 돼지·소·말·양·닭 등 집짐승도 기르고 사냥으로 산짐승을 잡아, 고기와 가죽을 이용하였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에서는 나무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였다.

고조선 시대 유적지에서 나무 외에 바리, 접시, 굽접시, 시루, 단지, 항아리 등 여러 가지 그릇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음을 말해준다.

 

고조선의 주거 문화에서 특히 눈여겨 볼 것은

한민족 고유의 난방시설인 온돌이 고조선 후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함북 웅기와 평북 강계, 자성, 영변 등의 당시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 형태가 확인되었다.

 

 

 - 고조선의 예악

 

고조선은 제정일치 국가였기 때문에 일찍이 예악이 발달했다.

만주 요령성에서 BCE 2000년경 것으로 추정되는, 궁중 음악이나 제사 의례에 사용된 악기인

석경石磬과 편종이 출토되었다. 또한 두만강 유역에서 BCE 2000년 전반기의 뼈피리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BCE 3000년경 배달 시대의 유적인 홍산문화에서 고조선 것보다

더 오래된 석경이 출토되었다. 홍산문화에서는 오공금五孔琴73)이라는 옥으로 만든 악기도 발견되었다.

홍산문화와 고조선 유적에서 출토된 뼈피리, 석경, 오공금 등의 악기로 볼 때,

동방 한민족은 동북아에서 가장 먼저 예악禮樂 문화를 누린 민족이다.

 

현대인이 유행가를 즐겨 부른다면, 고조선 사람은 제천가를 즐겨 불렀다.

매년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릴 때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모두가 한마음으로 상제님의 덕을 찬양하며

<어아가於阿歌>라는 제천가를 불렀다.

 

감탄사 어아於阿로 시작되는, 2세 부루단군이 지은 이 노래는 한마디로 삼신을 맞이하는 노래이다.

<어아가>는 후일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참전계경參佺戒經』 속에 수렴되었다.

『 참전계경』은 고구려 9세 고국천열제 때 재상인 을파소가 백성들의 인성 교육을 위해 지은

경전으로, 신교 문화의 3대 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고조선 시대에는 사람들이 악기도 즐겨 다루었다.

공후??(서양 하프 모양의 현악기)라는 악기를 연주하며 부른 노래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가

널리 퍼져나간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고조선에서 흔한 악기였던 공후는 BCE 106년쯤 중국 한나라에 전해졌다.

고조선은 한마디로 동방 예악 문화의 고향인 것이다.

 

(원문: 상생출판 환단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