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배달시대 영웅 치우천황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배달의 14대 자오지 환웅천황, 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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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30pixel, 세로 363pixel 

 

‘환국(환인)-배달(환웅)-조선(단군)…’으로 내려오는 한민족사의 국통을 보면,

3301년간 일곱 분의 환인천제가 다스린 환국을 이어 배달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다.

 

그 배달국 당시, 서기전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린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이

곧 치우천황이다. 치우(蚩尤)란 세속의 말로 ‘우뢰와 비를 크게 지어 산천을 바꾼다’는 뜻이다,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8대 마지막 임금인 유망이 쇠퇴의 길을 걷자

치우천황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킨다.

 

이 때 유망의 제후로 있던 헌원이 치우천황의 입성소식을 듣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해 온다.

그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 대전투(동방 최초의 국제전쟁)가 벌어져,

10여 년 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다.

 

치우천황은 도술로 큰 안개를 지으며

최초로 제작한 금속병기를 동원하여 마침내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는다.3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른 것도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 때부터이다.

이후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원이 되어

수천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한나라 진나라의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된다.     

  

치우에 대한 역사왜곡, 사마천의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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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록의 대결전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헌원군에게 성급히 공격을 시도하다 몰살당한 사실이 있다.

 

이것을 두고 훗날 고조선과의 대전쟁에서 크게 패한 한무제와

그의 사관 사마천은 『사기』에서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또 당시의 상황을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후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해온 것이니, “황제작란”(黃帝作亂)이라 함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역사왜곡과 날조의 현장 : 탁록의 삼조당

 

중국은 기존의 황제 정통론에서 한걸음 나아가 염제와 황제의 자손이라는 의미에서

‘염황지손’으로 역사를 고치더니 1995년 동방족의 조상인 치우천황까지

중국 역사와 문화의 시조로 날조아혀 중화삼조로 만들고 그 성역화를 위해‘ 중화삼조당’을 세웠다.

 

뚝섬의 유래 : 치우천황에게 제를 지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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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뚝섬에 ‘유래비’ 설치 서울시 한강사업본부는

시민들에게 뚝섬의 유래를 알려주기 위해 19일 뚝섬 한강공원에 뚝섬 유래비를 설치했다고 21일 밝혔다.

뚝섬은 한강과 중랑천으로 둘러싸인 살곶이벌(箭串坪) 일대로

무신(武神)을 상징하는 `치우천왕'의 모습을 본떠 큰 창에 소의 깃털을 꽂아 만든 깃발인 독

또는 둑(纛)과 관련된 지명이다.

 

뚝섬은 조선시대 국왕이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곳에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냈던 곳이라 뚝섬으로 불리게 됐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뚝섬 유래비는 지하철 7호선 뚝섬유원지역 2번 출구에서 내려 뚝섬 한강공원 광장으로 가면

바로 볼 수 있다 2007년 09.21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중 3번 치우천황께 둑제를 올렸다. (난중일기)

① 癸巳(1593)年 2月 初4日 : 경칩날이라 둑제를 지냈다.

② 甲午(1594)年 9月 初8日 : 장흥부사로 獻官을 삼고,

홍양현감으로 典祀를 삼아 초아흐레 둑제를 지내기 위해 入齋시켰다.

③ 乙未(1595)年 9月 20日 : 새벽 2시에 둑제를 지냈다.

중국의 사학자 추군맹은 중국민족 곧 화하족은

이른 시대에 이미 東方의 蚩尤(치우)와 少昊(소호)가 지배하던 이인집단이 융합되었다고 역설하였다.

蚩尤에 대해서도 추씨(鄒氏)는

역대 학자들의 고증을 들어 구려(九黎)의 군장으로서 동이집단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

蚩尤에 대하여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별로 연구된 바 없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少昊에 대해서도 中國의 五帝의 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반하여,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그 무덤까지 확인하고 분명히 東夷集團의 君長이었음을 역설하고

있음은 우리의 역사지식을 반성하게 한다.

치우천황은 묘족일뿐?

 

묘족은 <머리채를 삼끈으로 묵은 상투쟁이로서 마치 싹이 돋은 듯하여 苗라 했다.

-회남자淮南子 권11 제속훈> 라는 구절과 <산해경> 권 17 대황북경에

 <서북해 밖 흑수 북쪽에 날개달린 사람(鳥夷系)이 있으니 이름하여 苗民이다>란 기록에 비추면

이夷족이면서 머리에 상투를 튼 민족이다.

 

그리고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

-왕동령王桐齡 중국민족사>라는 구절이 있다.

 

즉, 묘족은 우리와 공통의 조상을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오히려 묘족이 있던 영역까지 배달국의 영역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고,

환단고기에 의하면 이러한 모든 추정들이 사실임이 밝혀진다.

(이재석,『인류원한의 뿌리단주』,상생출판,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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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단국대 생물과학과 김욱 교수는 동아시아인 집단에서

추출한 표본을 대상으로 부계를 통해 유전되는 Y염색체의 유전적 변이를 분석했다.

 

이 결과 한국인은 주로 몽골과 동․남부 시베리아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전자 형,

그리고 동남아시아 및 중국 남․북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전자형이 모두 발견되었다.

 

한국인은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 가운데서 동남아시아인인 중국 동북부 만주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유사했고,

중국 묘족이나 베트남 등 일부 동남아시아인과도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