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 비문 왜곡 사건은 환단고기에 의해 풀린다.


광개토대왕비에 얽혀 있는 문제의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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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1884년 일본군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광개토대왕비의 가장 오래된 탁본,

쌍구가묵본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라는 글에 나와있습니다.

 

일본은 중국, 한국을 정복하기 위해, 미리 군인등을 보내서,

지형 등을 탐사하게 하는데,그들은 당시는 한국의 영토가 아닌, 만주 지방에 커다란 석비를 발견합니다.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만주족은 자신들의 기원인 중국 동북지방에 대해 신성시해서,

아무나 못들어가게, 이 지방은 오래 동안 황무지같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해금이 되고, 만주지방을 탐사하던 일본에 의해 이 커다란 석비가 발견됩니다.

한국은 이당시는 영토가 아니고 해서 이 비석의 존재에 대해 거의 잊고 있었지요.

 

이 지금은 광개토왕비라 불리는 비석에 글자가 새겨진 것을 알게 된 일본은 비문 해석을 시도하고,

이 비문의 내용에 일본에게 상당히 불리한 내용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19세기 후반은 일본이 제국주의로 무장하고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꿈꾸며 팽창하던 시기로,

자신들이 동아시아에 완전히 진출해 정복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한국과 중국 의 침략에 대해,

역사적인 정당성을 찾으려고 애쓰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고대남조선경영론' 등을 내세우며 예전에 다스리던 곳을

우리가 다시 접수한다는 식의 이론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역사를 보다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애쓰던 때였기 때문에,

광개토 비문을 발견한 일본은, 이 비문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참모부는 일본군대위 사코 가게노부를 보내 탁본을 하는 과정에서

고의로 비석의 글자들을 훼손하게 됩니다.

 

이 광개토왕비를 발견했을 때, 좀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는데,

석비에 이끼 등이 심하게 끼어서, 이것들을 없애야 읽을 수 있었던 탓에 이 과정에서 석비가 훼손됩니다.

위의 글에서 석회도부란 말이 있는데,

이 비석을 깨끗하게 하고 보수한다는 명목으로 비석에 함부로 석회를 바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본군인을 통해 아마도, 석비 글자의 일부를 일부러 훼손하여, 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일본이 옛날에 한국을 지배하였다는 문구로 해석되게 만듭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기념물에 적힌 문구 마저 바꾸어서

자신들에게 이롭게 만드는 히스테리칼한 행동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일본이 팽창하여

군사력으로 동아시아를 제패하려던 욕망이 지나쳐서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일부러 글자를 고쳤다는 주장이 많아 나중에 와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는

말은 일본인인 사에키가, 광개토 대왕비 발견 당시 일본군과 일본 참모본부에 의해 저질러진,

비문 훼손의 사건과 이를 통해 광개토대왕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야망을 뒷받침하려는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는 역사적인 사료가 부족하여, 당시에 쓰여진 역사서는 거의 없고 ,

한국의 경우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은 일본서기 등밖에 없습니다.

 

이 책들은 고대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고대의 역사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에 충분한 자료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신 고대에 세워진 비석의 비문을 이용해서 역사를 공부하는 금석학이 발달한 것입니다.

 

 

광개토왕비는 이렇게 자료가 부족한 고대의 역사에 대해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자료로 일본이 발견 당시,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기로 하고 고의로 훼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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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되었다.

사꼬오 중위는 1884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공식화하였다.

 

이에 대해 정인보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일제가 사꼬오가 위조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문을 파괴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가 위조된 것임을 밝혀냈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 來渡海破 '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은 그 근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아울러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열제(烈帝)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지 왜의 그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왜는 고구려를 위협하던 세력들의 부수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비문에 나오는 많은 간지(干支)에는 '신묘년'과 같이 년(年)자가 붙어 있는 예가 없을 뿐 아니라,

신묘년 기사와 앞뒤 문장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모순되고 있어 변조가 가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왜를 격퇴한 광개토태왕의 기록을 통해서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셧는데 당시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

백제가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의 경계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께서는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임천.와산.괴구.복사매.우술산.진을례.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곧 백제.신라.가락의 모든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이지않고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 지역)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국, 왜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의 융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룬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

 


고구려의 식민지 왜

 

영락 10년(단기 2733,400)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 하엿으므로 열제의 명령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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