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초간본(1911년)은 분명히 있었다.

환단고기 초간본(1911년)은 분명히 있었다.

 

단단학회 양종현 회장의 초간본(1911) 증언

 

1966년 고등학교 1학년때 만나 환단고기를 배우기 시작한
현 단단학회 회장 양종현(1948~)은 “좁은 방에서 스승님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환단고기 초간본]을 글자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하며
[환단고기]는 결코 위작이 아니다“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71

양종현은 종이의 질과 색깔, 책 표지 상태까지 말하였는데
책을 묶은 끈이 떨어져서 여러번 고쳐 매고 풀로 붙였던 사실도 기억하였다.
이 같은 양종현의 증언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원본이 분명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91


환단고기 모든 판본을 부정해야 하는 모순

 

만일 환단고기 편찬과정에 의문을 품는 다면
계연수 편집본, 오형기 필사본, 오형기 필사본에 대한 영인본,
1976년 이유립의 원본 분실, 오형기 필사본의 오탈자를 바로잡은 배달의숙본 등의 과정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더구나 환단고기 초간본으로 역사를 공부하였다는 양종현의 진술 또한 거짓이라 해야 하는데
이는 위서론을 주장하기 위해 한 인격체의 경험적 사실을 매도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92

 


굳이 조작할 필요가 없는 환단고기

 

계연수는 이상룡이나 박은식, 김교헌이 그랬던 것처럼 <<환단고기>>를 의도적으로 조작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이상룡, 김교헌 등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사관에 따라 고서류를 참고하여 고대사를 서술한 것처럼 하면 되지,
굳이 전해진 책을 조작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교헌 등이 지은 고대사는 <<환단고기>>와 그 기본 논지가 일치하고 있음에도
위서란 비난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간 <<환단고기>>에 가해진 비난이 과도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비난하는 데 쓸 역량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환단고기>>의 신봉, 비판 여부가 마치 전문역구가와 재야사학자를 가르는 기준으로
적용되는 듯한 현재의 폐쇄적ㆍ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학계의 연구풍토를
개방적인 것으로 바꾸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ㅡ 이덕일ㆍ이희근 공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p.45∼55 발췌 ㅡ

 


위서라면 동일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행촌,단군세기)를 이맥은“가림다”
(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土)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따,땅)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말년에 환단고기 내용을 검토해보려고 했던 이유립 선생

 

치우학회장 박정학씨가 기억하는 이유립 선생의 말년 삶은
그가 환단고기에 있는 내용을 검토해보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그가 미리 세조실록 등을 접하고 조작했을 가능성을 희박하게 한다.

“한번은 선생이 “10여세 때 들었던 내용을 확인하고 싶으니 이러저러한 책들을 구해달라”고 하였다.
왜 필요한가를 되물었더니 “옛날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은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40여종의 도서중 80여 곳에 대한 복사를 요청받고 국립도서관을 방문했으나
상당수 책이 귀중본, 희귀본이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것임을 알게 되고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더니 도서를 찾던 담당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도대체 이런 책을 누가 보느냐?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지하실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이런 책이 수북히 쌓여있다” 며 요청한 자료를 준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원하는 책의 복사부분을 상자에 담아 전해드렸다
그런데 이 상자를 뜯어보지도 못하고 선생님은 세상을 뜨셨다

“한번은 조선왕조실록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듣고 구하여 드렸더니 순식간에

순한문본을 읽으시면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 하셨다고 한다.

모두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 박정학씨 증언

 


환단고기는 목판본이다.

 

안창범은 환단고기 범례의 말미 기록을 풀이하면서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목판본이라고 주장한다.


桓檀古記는悉經海鶴李先生之監修오 
而且余精勤
繕寫하고 又因洪範圖吳東振兩友之出金하야 付諸剞劂하니  
환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선생의 감수를 거쳤으며, 또 내가 정성을 들여 부지런히

편집하고 옮겨 적었다. 그리고 홍범도·오동진 두벗이 자금을 대어 인쇄에 부치게 되었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이 문장을 오역하고 그것이 환단고기 위서론의 직접적인 근거라고 오도하고 있다.
선사(繕寫)를 ‘고쳐쓰다’로 오역하고 ‘기궐剞劂’을 활판인쇄로 오역하는 것이다.

자전에 의하면 ‘선사’는 원고지 같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 하나하나를 베낀다는 뜻이고
‘기궐’은 새김칼로 나무판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원본은 활판 인쇄본이 아니라 목판본임을 알 수 있다.

.... 30부를 발간했다함은 그것 전체를 필사할 수도 없는 것이며, 사소한 것을 인쇄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필사한 종이를 목판에 부치고, 그 위에 조각칼과 조각끌로 글자를 새겨서 목판을 만들고.
그것으로 책을 찍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목판본이라 하는 것이다.


 

繕寫 [선사]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고쳐 베낌
剞劂 [기궐] 인쇄할 목적으로 나무 판에 글자를 새김.


....우리 나라는 고려 때 주자인쇄가 싹터 조선시대에서 크게 발달하였지만,
그러면서도 목판본의 생산이 조선조 말기까지 성행하였다.

그 이유는 활자판은 조판이 튼튼하지 못하여 동시에 찍어내는 부수에 제한이 있고,
또 한번 사용하면 해판되어 동일한 판에서의 후쇄(後刷)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목판본은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단점이지만,
한번 새겨놓으면 많이 소요되는 책을 언제라도 찍어낼 수 있고,
또 책판을 잘 보존하면 오래도록 책을 찍어 널리 유통시킬 수 있는 큰 장점이 있어서,
그처럼 성행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