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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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학계에 식민사관이 건재하게 뿌리내린 이유는 무엇인가?

" 일제는 조선의 얼인 조선어와 조선사를 치밀하게 통제하고 조작했다.

 

일제는 조선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고,

조선은 예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논리를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창조했다.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가 국사학계 태두로 서울대에 있으면서 식민사관을 정설로 굳혔다.

그가 주장하는 실증사학의 미명을 거둬내면 황국사관이다.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서울대학교가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민족사관이 단절되면서

식민사관은 견고하게 한국사를 틀어쥐었다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저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주한(47))

김용섭 교수 회고록(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을 보면 '6·25전쟁 이래로

남에서 제기되는 통사의 편찬 문제는, 아직은 깊은 연구에 기초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청산 없이,

우선은 기성의 일제하 세대 역사학자들에게 일임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성학자들은 일제하 일본인 학자들에게서 역사학을 배우고,

그들과 더불어 학문 활동을 같이해 온, 이른바 실증주의 역사학 계열의 학자들이 중심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김원룡이라고 우리나라 한국고고학을 이끌었다고 불리는 분이 있다.

전 서울대 교수신데 시에마쓰(정확히 모름)라고 불리는 도쿄 극우파 국사학과 교수를 공항까지

마중가서 서울대로 모시고 다녔다고 한다.

 

이 분이 한 짓이 원삼국론이다.

중국이 지금 북한을 유사시 먹기 위해 내는 이야기로 우리나라 나오는 철기문화를 부정하면서

철저하게 우리나라를 남한에 가두게 하는 이론이다.

역사학의 거두로 불리는 이병도 교수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분은 더 심합니다. 일본에 천리교라는 종교가 있다.

몽유도원도 및 우리나라 유물을 훔쳐간 교단인데 이병도 교수님이 예배를 들이고 계셨다고 하네요.

 

이분은 일본 정부에 돈 받아서 우리나라 역사왜곡에 힘쓰셨다.

그 덕에 지금 우리가 그 왜곡된 내용을 배우고 있다.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우리나라 역사교육을 장악하고 있고

그들과 조금 다른 교수가 학자들에게 교단에 이단아, 원색 비난으로 대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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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섭(80) 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의.회고록에 따르면

학과 동료 교수이기도 한 고 한우근과 김철준 교수에게 각각 두 번씩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김철준 교수가) 한 번은 나를 보고 웃으시며,

 '김 선생,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

 

그 다음은 노발대발하시며, '이○○ 선생에 대해서 무슨 글을 그렇게 써!' 하시며 질책하셨다.

마치 부하 직원이나 제자를 대하듯 나무라셨다.

전자는 경고성 발언이고 후자는 절교성 발언이라 생각되었다."(770쪽)

한우근은 여러 사람이 동석한 가운데

김 교수에게 "김 선생, 우리 이제 민족사학 그만하자"고 했다고 회고했다.

"(한 번은) 너덧 명의 중년ㆍ노년 교수가 내방하였다. 노크를 하기에 문을 열었더니,

김원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제 때 경성제대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쓰(末松保和) 선생님인데,

김 선생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768쪽)

 

스에마쓰는 조선총독부 관리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하는 등

식민주의 역사학을 제창하고 수립한 중심인물로 꼽히며,

 

당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인 김원룡은 경성제국대학 시절 그의 제자였다.

이런 식으로 학교 안팎에서 압력이 거세지자 "그리하여 나의 문화 학술운동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서울대학교의 관악산 이전을 계기로 나도 이 학교를 떠났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윤내현 교수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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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 만주지역을 언급한 분은 신채호, 정인보, 장도빈 등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들인데,

해방 후 우리 사학계는 그분들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냥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애국심, 애족심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쯤으로 취급했죠.

물론 그분들의 연구에는 각주가 없기 때문에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알 턱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에는 ‘고조선의 국경은 고려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문헌에는 도대체 ‘고려하’란 지명이 나오질 않아요.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도 ‘고조선의 서쪽 끝이 헌우락’이라고 하는데

헌우락이 어딘지 알 길이 없으니 아예 무시한 겁니다.

 

 

그런데 중국 문헌을 찾다 보니 ‘요사(遼史)’에 헌우락이 나오더군요.

또 옌칭에서 중국 고지도를 뒤지다가 ‘고려하’라는 강명을 발견했습니다.

 

 

대능하에서 북경으로 조금 가면 ‘고려하’가 있고 상류에 고려성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만주에 살던 분들께 물어보니 고려성터가 있고 일본이 세운 팻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채호, 정인보 선생은 현지답사도 하고 문헌도 보았던 겁니다.

 

 

<홀로서기, 그러나 외롭지 않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 저서후기 전문:http://dok.do/WSSD00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날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뒤 어느 정보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 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