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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제국을 건설한 백제

 

고구려를 능가하는 제국을 건설한 백제

 

우리 역사에서 ‘해상 왕국’을 건설한 사람으로 흔히 신라의 장보고(?~846)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그보다 수백 년 앞서 백제가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사해四海를 평정한 사실이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역사적 사실로도 인정되고 있다.

 

“백가제해百家濟海<百濟>”라는 기록이 보여주듯이,

백제는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해양 제국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토 확장은 고구려만의 특징이고

백제는 호남, 충청 지역에 국한된 소국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편견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경제적 가치를 고려하면 백제의 강역은 고구려를 능가했다.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사

 

백제가 요서 지역은 물론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 진출해

그 지역을 지배한 사실이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남사南史>, <북제서北齊書>,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고이왕 13년(246년) 조에는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백제) 왕은 (낙랑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파견하여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고 그곳 주민을 빼앗았다”고 하였고,

 

분서왕 7년(304년) 조에도 “몰래 군사를 보내어 낙랑(군)의 서부 현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백제는 이미 고이왕 이전부터 요서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그 서부 현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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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기사는

<자치통감> 영화永和 2년(346년) 조에 있는

“처음에 부여는 鹿山에 거처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져서 서쪽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다.

 

요서, 진평을 점거한 백제는 이에 머물지 않고 중국 해안선을

따라 구석구석 식민지를 만들고 제해권을 장악하여 동성왕東

城王(479~501) 때에 이르면 북경 지역과 산동성,

상해上海 양자강 이남까지,

중국 동부 지역과 황해 바다 전체를 평정한 대제국이 되었다.

 

      <이만열 숙명여대 사학과 교수 글에서 지도 퍼옴>

 

 

좌현왕은 일본 열도를, 우현왕은 대륙 백제를 통치

 

경제 대국이 된 백제는 동으로 일본을 위성국으로 삼아 지배했다.

일본 나라현 텐리(天里)시 이소노가미 신궁에는 백제왕(18세 전지왕)이 왜국의 신공 왕후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봉안되어 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왕이 칠자경七子鏡 등과 함께

신공 왕후에게 바친 것으로 왜곡되어 있다.

 

칠지도와 칠자경은 각각 세계수世界樹와 태양을 뜻하는 왕권의 상징물이다.

당시 백제는 중국이나 고구려와 별도로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5세기 중반 백제는 대왕을 축으로 하여,

그 좌우에 고조선 시대와 북방 유목 국가처럼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이 있었는데,

이는 삼신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송서宋書]<이만열전夷蠻列傳> 백제국 전에는 여기餘紀를 우현왕,

여곤餘昆을 좌현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좌현왕은 본국 바깥의 동방인 일본 열도를, 우현왕은 그 서방인 중국 대륙의 일정 지역을 관장하였다.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에는 백제라는 지명이 무수히 남아 있다.

백제는 위성국인 왜를 신라, 고구려와의 전쟁에 여러 차례 등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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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해외 경략과 통치 지역을 나타낸 지도이다...>

 

 

대륙 백제는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백제의 영토 확장에 따라 식민지 접경 지역 국가들과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당시 백제가 얼마나 막강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북제서北齊書> 후주기後主記에는 571년 "백제의 왕 여창餘昌(27세 위덕왕)을

사지절使持節(황제의 신임을 표시하는 부절을 가졌다는 뜻),

도독都督(군사책임자), 동청주 자사東靑州刺史(행정책임자)로 삼았다.

<以百濟王餘昌爲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라고 하여 산동반도山東半島가 백제 소유였음을 드러내었다.

 

단명한 왕조들이 흥망을 거듭하던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220~589)에

한족漢族 정권은 중국 남부에서 남조를 형성하였으나 그 세력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들은 백제의 힘을 빌어 북방을 수복해 보려는 생각뿐이었다. 따라서 백제와 화친하면서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관장하는 백제의 관리와 장수들에게 중국 관직을 제수한 것이다.

백제 또한 그러한 관직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중국 관직은 현지 한족과 토착인을 지배할 수 있는 명분을 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남제서南齊書],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백제와 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다.

제 東城王 때인 488년과 490년에, 後魏의 기병 수십만 명이 백제가 통치하는 대륙의 영토를 침략했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갔고(十年, 魏遣兵來伐爲我所敗,([삼국사기]<백제본기>),

수훈을 세운 백제 장군들이 광양태수, 대방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 조선태수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南齊書]<百濟傳>)

 

백제는, 단군조선과 북부여 이후 무려 34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런데 백제와 고구려가 대 중국 투쟁을 벌이며 대륙 해안선을 따라 경쟁적으로 획득한 영토는,

안타깝게도 신라가 반민족적 망국 통일을 추진하면서 당나라에 고스란히 바쳐지고 말았다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 참고).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34~5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