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기>는 왜 없어져야 할 책이 되었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특집 '한국 고대사의 속속들이', 열여섯 번째 이야기
11.03.14 15:26 ㅣ최종 업데이트 11.03.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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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 군사박물관에 걸린 진시황제 병마용 사진. 북경 지하철 1호선에 군사박물관역(쥔스보우관잔)이 있다.
ⓒ 김종성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정보통제를 위해 책들을 불태우고 지식인들을 매장했다. 이것을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한다. 법가주의 통치이념을 택한 그는, 제국 경영을 저해하는 것들을 이런 방식으로 탄압했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책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중국의 이미지는 실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참모습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책들이 온전히 복원된다면, 중국사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써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인간이 기록을 없애버린다 하여, 역사 복원의 가능성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우리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제시했다.

 

그는 "지구상에서 발생한 과거의 물리적 현상은 빛으로 변해 우주공간에 진입했으며, 그 빛은 지금도 우주공간 어디선가 이동 중일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면 인간사의 사실관계를 담고 있는 과거의 영상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축구장에 가면, 선수들이 공과 더불어 뛰는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그것은 선수들의 활동이 빛으로 변해 우리의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과거 인간의 역사를 담은 빛이 지금도 우주공간을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이동해서, 빛이 도달할 곳에 미리 가 있을 수 있다면, 그런 영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스티븐 호킹의 이야기다.

 

그들은 왜 고조선과 신선교를 지워버렸나

 

인간이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아니면 저 머나먼 행성에 사는 외계인들과 공조할 수 있다면, 진시황제 류의 통치자들이 은폐하고자 했던 역사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꿈같은 이야기. 그래서 현재로서는 그냥 진시황제 류의 출현을 방지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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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서 수거 명령을 내린 세조의 무덤인 광릉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소재.
ⓒ 문화재지리정보서비스
 

 

그런데 진시황제 류는 아무리 억제해도 끊임없이 지표를 뚫고 나온다. 이들과의 싸움은, 망치를 들고 정신없이 내려쳐도 끊임없이 두더지가 튀어나오는 두더지 게임 같은 것이다.

 

그런 '두더지' 같은 통치자들이 우리 역사에도 많이 있었다. 일례로, 조선왕조 제7대 주상 세조(수양대군)와 제8대 주상 예종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저지른 조선시대판 분서갱유의 실상이 실록 안에 남아 있다. 다음은 세조 3년 5월 26일(1457.6.17)에 주상이 팔도 관찰사(도지사)에게 내린 왕명으로서 <세조실록>에 실린 것이다.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 <삼성밀기>, 안함로·원동중의 <삼성기> <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3인이 지은 <수찬기소> 1백여 권, <동천록> <마슬록> <통천록> <호중록> <지화록> <도선한도참기> 등의 서적은 개인적으로 소장할 수 없는 것들이니, 만약 갖고 있는 자가 있으면 진상하도록 하라. 대신, 원하는 책을 내려줄 것이다."

 

세조의 수거 명령에 담긴 금서 목록 속에서, 고조선 및 신선교(神仙敎)와 관련된 <고조선비사> <삼성밀기> <삼성기> 등이 눈에 띈다. <고조선비사>는 말 그대로 고조선에 관한 책이고, <삼성밀기> 및 <삼성기> 역시 고조선과 신선교에 관한 책이다. 이 중에서 <삼성기>는 신라 때 도승(道僧)인 안함로(579~640년)가 지은 것이다.

 

우리는 세조가 이런 책들을 금지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가 불교국가이고 조선이 유교국가였듯이, 고조선은 신선교(도교) 국가였다. 유교의 확산을 위해서는 신선교 서적을 없애야 했고 그러자면 고조선 관계 서적도 함께 없애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고조선 역사가 왜곡·축소된 데에 조선의 유교진흥정책도 한몫을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책 소지 신고한 이는 '승진', 숨긴 이는 '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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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근정전의 조선왕 보좌. 조선왕조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한국 고대사의 진실을 감추었다.
ⓒ 김종성
 

그런데 세조의 방식은 제대로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세조의 아들인 예종 때도 금서 수거는 계속되었다. 예종 1년 9월 18일(1469.10.22)에 주상이 예조(의례·외교 관장)에게 내린 전교에서는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 <수찬기소> 1백여 권, <곤중록> <지화록> <명경수>, 천문·지리·음양 관련 서적들을 금서로 지정했다.

 

세조 때 금서목록에는 있었지만 예종 때 목록에는 없는 책들이 있다. 이런 책들은 세조 때 충분히 수거되었다고 판단했기에 예종 때 목록에 넣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새로 추가된 책들도 많다. 도서를 수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금서 후보들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조 때 목록에 있던 <고조선비사>와 <삼성기> 등이 예종 때 목록에 없는 것을 보면, 이런 책들이 세조 때 상당수 수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삼성밀기>는 제대로 수거되지 않았기에 예종 때 목록에 재차 올랐을 것이다. 밀기(密記)라는 제목에 걸맞게, 어딘가 꽁꽁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세조 때의 금서 수거는 그나마 점잖은 편이었다. "자진해서 금서를 바치라"면서 "그렇게 하면, 보고 싶은 책을 대신 내려주겠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종 때는 상당히 과격해졌다. '수거'가 아니라 '압수' 그 이상이었다. 거의 분서갱유 수준에 근접하는 것이었다.

 

예종이 내린 전교에서는 한성부 주민은 10월 그믐까지, 한성에서 가까운 도(道)의 주민은 11월 그믐까지, 먼 도의 주민은 12월 그믐까지 관청에 금서를 바치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당근과 채찍을 제시했다. 예종 1년 9월 18일자 <예종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책을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주고, 상을 받기를 원하는 자나 공노비·사노비에게는 면포 50필을 주기로 한다. 만약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이 고발할 수 있도록 하고, 고발한 자에게는 위와 같이 상을 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스스로 책을 바친 자나 책 소지자를 신고한 자에게는 2품계 승진이나 면포 50필 하사의 상을 내리고, 책을 숨긴 자에게는 참형을 가하도록 했다. 진시황제처럼 땅속에 묻을 것 없이 그냥 목을 베어버리도록 한 것이다. 고조선·신선교 관련 서적을 포함해서 각종 금서에 대한 조선정부의 신경과민이 극도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 고대사는 어떻게 왜곡·축소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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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인들의 제천의식. 출처는 <한국생활사박물관> 제2권.
ⓒ 사계절
 

이렇게 15세기에 유교 지상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강도 높은 탄압정책을 실시했기에, 16세기부터는 유교적 가치가 민간의 일상으로까지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조선과 신선교는 대중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금서 일부가 여전히 민간에 남아 있었겠지만, 유교 특히 성리학(주자학) 이외의 것은 무조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매도하는 사회풍토 속에서 고조선이니 신선교니 하는 것들이 자리를 잡을 여지는 없었다. 한국 고대사는 이런 방법으로도 왜곡·축소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김부식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없는 수많은 책들을 참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 편찬을 계기로 수많은 서적들이 정부에 의해 수집된 뒤에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줄어들었을 민간의 고조선·신선교 서적 보유량은 조선 초기의 '분서갱유'에 의해 다시 한 번 크게 감소했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일본제국주의가 1910년~1912년에 군경까지 동원하여 20만여 권의 서적들을 수거한 뒤에 그 대부분을 불살라 버렸으니, 조선시대 때 간신히 살아남은 고조선·신선교 서적들이 그나마 더 사라졌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애써 숨기고 불태워야 했는지, 이 땅에서는 '두더지'들이 끊임없이 출현해서 매번 고대사 사료들을 대거 수거해 가곤 했다.

 

이런 과정들을 살펴보면, 진시황제의 분서갱유에 의해 왜곡된 고대 중국사 못지않게 한국 고대사의 참모습도 숱하게 왜곡되고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몇 권 안 되는 '공인된 사료'를 통해 습득한 한국 고대사 지식은 전체 지식의 1%도 안 될지 모른다. 이런 경우를 명쾌하게 표현하기 위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란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한국 고대사의 참모습을 복원하려면, '공인된 사료'를 의심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고려시대·조선시대·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각 시기 정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기에 이제까지 공인(公認)을 누릴 수 있었던 사료들만 갖고는, '두더지'들이 감추고자 했던 '과학적 진실'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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